백제가 한반도 속에 존재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박병역(朴炳譯) 위원 프로필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한국정신문화선양회(韓國精神文化宣揚會) 대표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단독보도 제24편] [플러스코리아]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 우리나라 고대사서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구당서(舊唐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의 어떠한 사서(史書)에도 한반도 속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대제국 백제를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일본인과 우리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가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광주(廣州) 고읍(古邑)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함으로서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풍납토성,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피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온조왕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지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천험지리(天險地利)로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또 다른 곳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이병도는 지금의 인천이라고 주장)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였기에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하남 위례(慰禮)성의 도읍에 돌아와 보니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다 위례에 돌아와 귀부(歸附)하였는데 처음 따라올 때처럼 백성(百姓)들이 즐거워하였다. 그 후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백제의 왕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부여(扶餘) 계통의 씨족(氏族)들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 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을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을 자기 친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돌아오자 태자로 삼고 왕위까지 계승시키자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의 재산으로 나라를 세워 많은 도움을 주시고 온 정성을 다해 노력했으나 대왕은 세상을 싫어하시자 [하느님이 용을 내려 보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 붙어 있어도 혹처럼 될 것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 보다 못할 것입니다. 드디어 [비류]는 동생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던 것이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왕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구태(仇台)는 처음 옛 대방(帶方)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마침내 동이(東夷) 백제는 강국(强國)이 되었다.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라고 조작해서 믿지 못하게 했다.]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국경의 북쪽에 말갈(靺鞨)이 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말갈을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들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뿐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을 하였는데 신비한 사슴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성책(城柵)을 세웠다.
[신라]의 사자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친선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을 만들어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 영토를 쳐들어올 계략이 있지 않는가? 만약에 옛 우호를 저버리고 성을 허물지 않거나 목책을 깨뜨려 버리지 않고, 시기하고 혹 의심한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고하였다.
온조왕이 회답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것은 아닌 것 같소.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오.” 이로 말미암아 낙랑(신라)과 백제는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한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강가에서 막아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구]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백제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자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백제는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요하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서기전 2) 봄에 [신라]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 소서노에게 제사지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이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에 원구단을 쌓았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온조왕이 [하북성 북경]에 큰 제단(祭壇:천단,원구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 왔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빼앗은 가구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기준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우리나라 [기준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나 우리나라 왕이 어찌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마땅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라고 말하자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인 것 같습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기준왕이 건국한]“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아랫 윗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다. 그때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 탕정성(湯井城)과 대두성(大豆城)을 쌓아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쌓았는데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와 공작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호수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의 제천단에서 제시지냈다
38년(서기 20) 봄 2월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온조왕이 큰 제단(祭壇:북경 원구단,天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식견[神識]이 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漢水)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합니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귀순해 오자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온조왕이 죽었다. [본문 끝]
[2].백제의 수도 위례성은 이병도가 독단적으로 지정했다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은 지금 廣州(광주)의 春宮里(춘궁리)와 南漢山城(남한산성)을 포함한 일대이다. 그러나 처음의 都城(도성)이 하남위례성에 있었음은 뒤에 河南(하남)으로 移都(이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옴으로서 알 수가 있다. [온조왕 13년 및 14년조] 그러면 상기 기록은 河南遷都時(하남천도시)의 사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見後).
河北慰禮城(하북위례성) (이 위례)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인 漢城(한성)에 대칭하여 후에 北漢城(북한성)으로 개칭한 듯 한데)은 그 위치가 漢水(한수) 이북인 것은 틀림없다.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은 慰禮(위례)를 지금 서울의 동북방(지금 정능동. 삼양동. 부근)에 해당한 양으로 말했으나 (彊域考券三 慰禮考(강역권3 위례고) 그 방면에는 백제시대의 유물 유적은 물론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고구려 및 신라)의 그 것 조차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산 계곡에 있어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의 유적(특히 신라시대)이 집중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은 彰義門(창의문) 밖인 洗劍洞(세검동) 일대를 내 놓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碑峰上(비봉상)의 眞興王碑(현재보관상 박물관내로 移置)를 비릇하여 文殊庵(문수암)의 석굴 僧伽寺(승가사) 및 新營洞(신영동)의 藏義寺址(장의사지)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상기와 같이 백제의 수도 위치를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본문에서 지금 경기도의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없다.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서울 洗劍洞(세검동) 계곡 일대로 추정한 지명일 뿐이다.
백제의 수도는 삼국사기에 河南省(하남성)의 慰禮城(위례성)이라고 뚜렷이 기록하고 역사적 진실이 이미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왕의 칙명을 받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 대륙에 소재했던 백제의 수도 河南省(하남성)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고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어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조선사: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증서(考證書)도 없이 이병도 독단적 추정으로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어찌 경기도 하남이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있는가?
[이병도를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학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한 몽촌토성으로 비정한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 지배층의 일반적 거주지인 구릉지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의 석촌동에는 왕릉급 고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사와도 부합된다. 특히 한성 말기 백제 왕성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만들어 장려함이 극에 달했다"라고 했는데, 토성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부합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몽촌토성이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추정해서 오늘날까지 백제의 수도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작태인가?]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後漢書(후한서)에서 이르기를 三韓(삼한)은 무릇 78국으로서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 이다. 北史(북사)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며 서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漢江(한강)이며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하고 그 외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通典(통전)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남쪽은 신라와 접해 있고 북쪽은 고구려이며 서쪽은 큰 바다가 경계였다.
居拔(거발)과 固麻(고마)는 고마의 借音(차음)으로 熊津(웅진:고마나루), 즉 지금의 公州(공주)를 지칭한 것이니 이것이 백제의 熊津都邑(웅진도읍)시대에 관한 기사임은 再言(재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그 중의 北際漢江(북제한강)은 원문에는 없는 말로 史記撰者(사기찬자)의 潤筆(윤필)에 불과한 것이어니와 사실 그때 백제의 北界(북계)가 漢江(한강)에 다달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강유역은 그 당시 엄연한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北史(북사) 원문에는 處小海南(처소해남)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이른바 小海(소해)는 西海岸(서해안)의 沈入灣(심입만)인 牙山灣(아산만)을 가르켜 말한 듯 하므로 그것이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하겠다. 라고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말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舊唐書(구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은 越州(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倭(왜)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고 백제왕은 동서 양쪽 城(성)에서 거처 하셨다. 新唐書(신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西界(서계)는 越州(월주)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倭(왜)에 이르고 다 깨우쳐 주었다. 하고 북쪽은 고구려라 하였다.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원문에는『西界(서계) 越州(월주) 南倭(남왜) 北高麗(高句麗:북고구려) 皆踰海(개유해),乃至(내지)』라고 하였는데 고구려와는 실제 陸接(육접)하고 있으므로 史記撰者(사기찬자)가 조금 潤筆(윤필)을 가한 것 같다. 라고 이병도는 부정 했다.
초기 백제 강역의 핵심요소
(1). 백제의 수도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어 위례성은 그 어떤 나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천험지리(天險地利)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2). 비류(沸流)는 동생 온조와 함께 패수(浿水:요하)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마침내 온조왕은 백제의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었다. 곧 낙랑(樂浪)은 하북성 북평(北平)과 북경(北京) 지역에 있었다.
(3). 비류왕(沸流王)과 온조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1. 백제의 수도 위례성 북쪽에 대방(帶方)이 있었다
북대방(北帶方) : 삼국유사]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 남대방(南帶方) : 남대방군(南帶方郡)은 조위(曹魏)때 남원부(南原府)를 지금의 대방에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했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2.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었다
낙랑국(樂浪國:삼국유사)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전한(前漢) 때 처음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옛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즉 고조선 삼한 중 진한의 제34대 오루문(奧婁門)왕(서기전 795년)이 처음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했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했다. 삼국사기에는 혁거세(赫居世)왕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에게 신라의 낙랑(樂浪)이 멸망되자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사람들이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청하)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을 곧 평양성(平壤城)이라 해야 마땅하다. 혹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라 했다. [일제와 이병도의 조작 부분]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했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고려 태조(太祖)가 그의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3. 소서노의 아버지는 연타발이다
[한단고기 三韓秘記(삼한비기)]에서 말하기를 상장군 延陀勃(연타발)은 졸본사람이다. 葛思國(갈사국) 남북을 왕래하며 소금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아 동명성왕이 나라를 개국할 때 큰 도움을 주고 그의 딸 “召西奴(소서노)”를 동명왕은 후처로 삼았다. 후에 무리를 이끌고 九黎河(구려하)로 옮겨와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모은 이익을 고주몽 성제께서 북 옥저를 토벌 할 적에 양곡 5천 석을 헌납하였고 도읍을 訥見(눌현)으로 옮길 때도 먼저 자원하여 헌납하고 나라가 망한 유랑민들에게 일을 시켜 동명왕은 그 공으로 座原(좌원)에 王事(왕사)로 책봉하였다. 다물 병인 3월에 80세로 죽었다.
4. 소서노는 대방(帶方)에 2천리의 땅을 소유하였다
고주몽은 재위 시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맡아들 琉璃(유리)가 돌아온다면 당연히 태자로 봉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에 소서노는 두 아들의 장래가 이롭지 않고 염려가 되어 기묘년(BC 42년) 3월에 인편에 듣기로 浿水(패수)와 帶水(대수) 지역이 비옥하여 농산물이 잘되어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서노는 드디어 남행을 결심하고 무리를 이끌고 辰番(진번) 근처인 해변의 僻地(벽지)에서 10년을 安居(안거)하면서 田畓(전답)을 매수하여 별장까지 두는 億萬長者(억만장자)가 되어 큰 富豪(부호)에 이르게 되니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오는 백성들도 많았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가 소유한 땅의 넓이는 북쪽은 帶水(대수)까지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이고 소서노가 소유한 토지의 半徑(반경:반지름)이 무려 천리가 되었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사방 2,000리의 땅을 소유한 큰 富者(부자)가 되었다는 편지를 써서 사람을 파견하여 고주몽성제에게 전달하니 아내로부터 전달된 편지를 읽어본 고주몽 성제는 매우 기뻐하시며 직접 매우 칭찬하는 격려문을 써서 소서노의 號(호)를 於瑕羅(어하라)란 이름을 지어서 소서노에게 전달하셨다.
13년 임인(BC 19년)에 소서노가 돌아가고 태자 비류가 왕위에 옹립되자 넷 신하는 붙어 있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馬黎(마려)등의 신하들이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들은 馬韓(마한)이 쇠퇴하여 패망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곳으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좋은 시기라 사료됩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락하고 곧 배를 띄워 바다 건너 馬韓(마한)의 彌鄒忽(미추홀)에 이르니 사방이 평야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거주한 흔적이 없기에 漢山(한산)에 登頂(등정)하여 負兒岳(부아악)을 바라보니 거주 할만한 지역이었다.
馬黎(마려)와 烏干(오간)등 열 신하가 말하기를 오직 河南(하남:중국 하남성)의 땅은 북쪽은 帶水(대수)와 漢水(한수)가 있고 동쪽은 높은 산악지대이고 남쪽은 훤히 열려 있고, 연못이 있어 농사 짖기에 옥답이 되겠으며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참으로 얻기 어려운 天險地利(천험지리)로서 도읍지로는 얻기 어려운 地勢(지세)의 땅입니다. 다시는 다른 지역을 구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온조는 열 신하의 의견을 따르고 드디어 河南省(하남성)의 慰支城(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 칭하였다. 백제는 沸流(비류)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지역을 취득하고 난 후에 국호가 되었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은 비류가 통치한 지역을 온조에게 歸附(귀부)하였던 것이다.
즉 백제 초기의 영토는 소서노가 소유한 대방(帶方)지역의 2000리와 연나라의 도적 위만에게 패한 후 해성에 들어가 기준이 건국한 후 마한의 땅을 소유한 대국이었다. 경기도 하남 땅이 어찌 백제의 첫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독단적으로 조작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으로 백제의 수도로 지정했을 뿐이다.
5. 비류왕의 도읍지는 섬서성이었다
백제 비류의 첫 수도는 중국 중서부에 있는 陝西省(섬서성)이다. 섬서성의 성도(省都)는 시안(西安)이며, 황하(黃河) 중류 유역에 있다. 주변의 위하평원(渭河平原)에는 북경원인(北京原人)과 함께 염전원인(藍田原人:비류왕이 처음 도읍한 미추홀)의 유적과 서안반파유적(西安半坡遺蹟) 등 원시고대의 유적이 많으며, 현재 중국 서북지구의 현관에 해당한다.
태령산맥(秦嶺山脈)이 섬서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남쪽 양자강(揚子江) 수계를 옛날 한수[漢水] 유역이라 했다. 그 북쪽은 황하강 유역에 속한다. 태령에서 섬서성 남단의 대파산지(大巴山地)까지는 태파산지(秦巴山地)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漢水)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漢中), 안강(安康)의 양 분지가 있다. [중국 여행 지리지 참조]
백제의 위례성은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백제의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했다. 수도 고마성(위례성=관미성(關彌城)을 중심으로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관미성을 중심으로 동익성(東翼城),서익성(西翼城),남익성(南翼城),북익성(北翼城)이 있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하북성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만라장성의 기점이다. 또한 수서(隋書)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 창려현(昌黎縣)이 있다. 라고 전하고 있다.
三韓秘記(삼한비기)의 舊志(구지)에서 이르기를 당시대에 요서(遼西)를 昌遼縣(창요현)으로 개명하여 遼州(요주)라 하였고 남쪽의 碣石山(갈석산)밑의 白岩城(백암성) 역시 당시대에 소위 岩州(암주)라 하였다. [사기권 115 조선열전 제55]: 집해서광(集解徐廣)이 말하기를, [하북성]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하북성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삼한의 변한왕(弁韓王) 기준(箕準)]의 도읍지가 왕험성(王險城)이다.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고 패수(浿水)는 동쪽이라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75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漢江:조작:패수(浿水:요하)을 건너서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잡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곧 낙랑군(樂浪郡)에 요녕성(遼寧城)도 소재하고, 하북성(河北省)에 창려(昌黎), 험독현(險瀆縣)=왕험성(王險城)=관미성(關彌城)=산해관(山海關)은 각 지명 이름은 다르지만 다 같은 지역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다.
중국은 천하제일의 산해관(山海關)을 줄여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고쳐서 부르고 있다. 이곳이 바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로서 처음 수도(首都) ‘하남성(하북성 남쪽) 위례성(慰禮城)이다.
초기의 백제는 요서(遼西)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백제의 수도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며,"위례성은 직산(稷山)"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직산"이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에 있다. 처음 백제의 영토는 遼西(요서), 晋平(진평), 江南(강남), 越州(월주)는 백제의 縣(현)에 속해 있었다. 첫째 山陰(산음) 둘째 山越(산월) 셋째 左越(좌월)까지 백제의 영토였던 것이다.
[양서]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통전]에 의하면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 2군을 영토를 점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사이이다.
고구려 제21대 文咨帝(무자제)께서 明治(명치) 11년(502년) 11월 백제의 越州(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署(서), 郡(군), 縣(현)으로 개명)하면서 松江(송강), 會稽(회계) 吳(오), 越(월)을 左越(좌월), 山越(산월)을 泉州(천주)라 하였다. 12년(503년) 신라의 백성들이 泉州(천주)에 옮겨와 살았다. 이해에 백제에서 조공을 받히지 않으니 장병을 파견하여 遼西(요서)와 晋平(진평)등을 공격하여 쟁취하고 백제의 郡(군)을 없에 버렸다.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 개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양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였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겨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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