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학교와 발해 유적에서 '우리'를 떠올리다
[오마이뉴스] 2007년 09월 11일(화) 오후 05:19
[서부원 기자]
▲ 조선족 소학교의 수업 모습 방학 중인데도 보충수업이 한창이다.
방학인데다 이른 아침인데도 하이린(海林) 시내의 조선족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따라 읽는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소학교든, 중학교든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보충수업이 한창입니다.
귀에 익은 우리말에다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모습은 흡사 우리나라의 여느 학교에 온 듯하지만, 교문에 자랑삼아 상급학교 진학자 명단을 대문짝만 하게 걸어둔 모습에서 우리네 교육현실을 꼭 빼닮은 공통의 '코드'를 읽습니다.
하이린시 조선족 중학교에 들어섭니다. 국내 굴지의 한 대기업으로부터 '민족문화교실'을 기증받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많이 줄어 학교 운영 자체가 힘들다고 합니다. 더구나 재학생 셋 중 둘은 한 부모 가정이거나 홀로 지내는 경우다 보니 학교가 가정의 몫까지 맡고 있어 상황이 더욱 힘겨워 보입니다.
요즘 들어 다소 줄고는 있다지만, 그들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일자리를 찾아 샹하이(上海)나 가까운 셴양(瀋陽) 등 중국의 대도시로 떠나 사는 추세입니다. 심지어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이렇다 보니 조선족 학교의 학생 수도 점점 줄어 조선족이 떠난 조선족 학교의 빈자리는 한족(漢族)이 메우고 있습니다.
▲ 하이린시 조선족 소학교의 모습 여기서 '실험'이란 우리말로 치면 '연구학교'쯤으로 이해된다. 어들고 있습니다.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덤'으로 조선어를 배울 수 있다는 이유로 조선족과는 달리 비싼 입학금을 내야함에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중국 정부는 지금껏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학교 지원 사업을 해왔지만, 학생 수가 줄면서 조선족 학교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가운데 한족 학교와도 별반 차이가 없게 됐습니다.
기실, 조선족 학교가 줄고 있는 현실에서 우려해야 할 점은 약화되는 소수민족의 '동류의식'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그들 고유의 '문화'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족 학교를 비롯해 하이린시와 그 주변을 둘러보는 여정은 그곳에 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고민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 여행객에게는 조선족 학교마다 펄럭이고 있는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퍽 낯설고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들이 일상적으로 말하고 느끼는 '민족'은 국가와는 별개로 이해하는, 그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우리는 역사,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같은 민족이지만, 한국은 이곳의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경제적 동반자일 뿐,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정서적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하이린시 조선족 중학 본관 건물 중국에서는 중학교가 6년제로, 우리로 치면 중고등학교가 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족만 다니는 학교에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언뜻 보면 낯설다.
말투에서 알 수 있듯, 조선족들에게는 한국보다 북한이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테지만, 그들이 자연재해에다 경제적 난관이 겹쳐 힘겹게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에게 가슴 아파하며 동정을 보낼지언정 '우리나라'라고 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조선족들만 다니는 학교지만 교실 정면에 오성홍기가 선명하고, 교무실에는 마르크스(Marx), 레닌(Lenin)과 마오쩌둥(毛澤東), 쑨원(孫文)의 사진이 벽에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와, 또 십시일반 학교의 운영을 돕는 몇몇 후원자들의 이름은 남과 북을 아우른 우리 것입니다.
하이린시는 우리에게 '김좌진 기념관'이 세워진 곳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기념관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독립운동가 김좌진이 1930년, 이곳 하이린시 인근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한 청년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을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한중우의공원(韓中友誼公園)'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김좌진의 업적은 물론, 포수 출신 홍범도와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그리고 중국 출신의 몇몇 항일운동가 등의 생애와 반제(反帝) 투쟁 관련 자료들이 두루 전시되고 있습니다.
▲ 김좌진 기념관에 심은 자매결연 기념식수 김좌진이 태어난 충남 홍성군과 이곳 하이린시 사이의 자매결연을 상징하는 나무가 장승과 함께 기념관 입구에 심어져 있다.
김좌진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는 쉬이 접할 수 없는 것들로, 이곳의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관련 전시물을 통해 남과 북, 그리고 중국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습니다. 김좌진이 태어난 충청남도 홍성군과 하이린시의 자매결연을 상징하는 나무와 함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 남과 북, 그리고 중국을 한데 묶어내는 공통분모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중국과의 그런 '유대감'은 옛 발해 왕국의 유적을 사이에 두고는 이내 '적대감'으로 바뀌고 맙니다. 고대로 갈수록 이질감이 커지는 역사 인식의 간극은 동북아의 평화와 연대를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만, 역사가 현실 정치에 휘둘리면서 여간 만만치 않은 '초(超)역사적' 과제가 돼가고 있습니다.
하이린시에서 무딴쟝(牧丹江)을 따라 세 시간쯤 내려가면 닝안시(寧安市) 뚱징청진(東京城鎭)에 닿습니다. 옛 발해 왕국의 도읍지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흔히 보하이진(渤海鎭)으로 불리며, 시내 곳곳에서 '발해'라는 이름의 상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 '발해'라는 이름의 상점 간판 뚱징청촌 시내에는 '발해'라는 이름의 상점 간판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숲처럼 우거진 외성터와 싱룽쓰(興隆寺)터, 지금도 발굴 중인 내성터와 출토된 유물을 수습해 전시하고 있는 간이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영화로웠던 옛 도읍지의 규모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발해인들의 위용이 세찬 비바람이 되어 성벽 위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역사의 무대로 여기는 발해 왕국의 중심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발해가 당 나라의 지방 정권이라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며 느끼는 분노보다도 성터 이곳저곳의 연꽃 문양을 새긴 기와 조각이 주는 동질감에 더 뭉클해하고, 관왕묘 안 관우의 낯선 인상보다도 거뭇한 발해 석등이 주는 친근함이 더 끌립니다.
허물어진 발해의 옛 절터에 청나라 때 다시 세운 흥륭사를 찾았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비석들을 통해 절의 과거와 현재를 읽어낼 수 있지만, 고작 100년 남짓한 절의 '최근' 자취만을 담고 있어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습니다.
경내로 들어서면 '一' 자 형태로 법당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토속 신앙이 습합된 흔적인 관왕묘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입구마다 향불이 피워져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수도 도량이라기보다는 그저 문화재 전시장 내지는 관광지에 가깝습니다.
이 주변이 화산암 지대인 탓에 법당 건물 벽과 바닥, 석불과 석등 등 경내의 모든 석물이 거무튀튀한 현무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구름 덮인 하늘에 보슬비까지 내리고 있어 절의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고 스산합니다.
▲ 상경용천부 외성터 아름드리 나무가 밀림처럼 빼곡하게 심어져 있어, 마치 나무로 된 성벽 같다.
절의 막다른 곳에 거대한 불상과 석등이 1200여 년의 세월도 잊은 채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의 해코지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지 이곳저곳에 흠집이 나 있지만 지금껏 보아온 다른 것들에 비하면 보존 상태가 훌륭합니다. 특히 높이가 6미터에 달하는 석등은 우선 그 크기에 압도당하지만, 그보다 구멍 송송 뚫린 현무암 재질을 비웃기라도 하듯 돌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들은 단연 압권입니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졌습니다. 성벽 위로 빗물이 부딪는 소리가 매섭습니다. 최근 복원한 후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지만, 내성터는 주변의 농경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옥수수와 콩이 밀림처럼 빼곡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돋워진 건물터에 새로 만들어 놓은 매끈한 돌계단과 주춧돌 등을 빼면 이곳이 왕궁이었을까 싶습니다.
▲ 싱룽쓰 내에 선 발해 석등 높이 6미터의 규모도 그렇지만, 현무암에 새긴 조각 문양이 단연 압권이다.
튼실한 석축을 올린 남문 터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건물터가 자리합니다. 건물터에 남은 주춧돌 수로 보자면 작은 것은 정면 9칸, 왕의 집무 공간으로 보이는 중앙의 큰 건물의 경우는 정면 11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거대한 지붕과 기둥을 지탱한 주춧돌의 크기를 살펴보고 건물들을 서로 연결한 회랑 터를 돌다 보면 내성의 규모를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당대 장안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는 사료(史料) 기록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빈터일 뿐이지만, 찬찬히 살피듯 걸어 돌아보자면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릴 듯합니다.
▲ 상경용천부 내성터에 남은 주춧돌 당시 발해의 왕궁 규모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복원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다른 나라 학자들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학자적 양심을 믿는다면서도, 중국 정부가 자국의 '입맛'에 맞게 발해의 유적 복원을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높다란 남문 터 위에 올라 전체 조망해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인지 몰라도, 이곳을 둘러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건물만 없다 뿐이지 베이징(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을 빼닮은 '축소판'이라 말합니다.
건물터에 오르는 계단과 석축에서부터 멀쩡한 옛것 위에 덧씌워 놓은 방형 주춧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고증한 후 복원한 것치고는 너무나 '중국식'입니다. 현재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일단 자국 역사의 범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앞서다 보니 정작 중요한 옛 발해의 모습은 사라지거나 훼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은 아닐지.
본래의 모습도 알 수 없고 현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성터에서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역사라는 증거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천 년도 더 지난 옛 발해의 역사를 현재의 시각과 필요에 의해 재단하다 보니 생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 상경용천부 내성터 전경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지만 성터 곳곳에 옥수수와 콩이 심어져 있다. 새로이 쌓은 건물의 석축과 계단 등을 통해 자금성을 본뜬 '중국식'으로 개조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곳이 현재 우리의 영토이고, 또 복원이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결론만 다를 뿐 비슷한 목적과 과정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를 반면교사 삼아 발해를 현재의 우리나라도 중국도 아닌, 당대인의 역사로 우선 이해하고, 또 지금껏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조차 가설이자 편견일 수 있다는 자세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00년 가까이 발해의 도읍지였던 상경용천부 땅을 나와 거울처럼 투명하다는 화산호인 경박호(鏡泊湖)의 언저리를 따라갑니다. 일설에 경박호 주변의 대규모 화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하니, 천여 년 전 이 광대한 대제국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음을 시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는 길마다 슬쩍 보여줄 뿐인 발해의 '자투리'를 눈에 담아 가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발해의 심장부를 관통해 동북 3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긴 여정의 끝에 푸른 두만강이 자리합니다. 두만강을 따라 북녘 땅을 보며 간다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오늘 밤늦게 옌지(延吉)에 닿습니다.
서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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