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대조영’ 등 TV사극 역사 오류·왜곡 심하다

한부울 2007. 8. 10. 00:25
 

대조영’ 등 TV사극 역사 오류·왜곡 심하다

[세계일보] 2007년 07월 22일(일) 오후 06:0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전11권 완간한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

 

소설이든 드라마든 역사를 다루려면 먼저 그 내용이 국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멋대로 해석하면 절대 안 됩니다.”
최근 ‘우리나라 삼국지’(마야) 전 11권을 완간한 임동주(53·서울대 초빙교수)씨는 ‘주몽’, ‘연개소문’에 이어 ‘대조영’이 TV 사극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안방을 파고드는 데 대해 기대와 함께 우려감을 표명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수동적으로 반응해 사극을 양산하는 것도 문제이고, 드라마 작가들이 원작 없이 대본을 쓰면서 내친김에 원작도 만들어 책장사를 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엉터리 고증은 물론이고 제작도 졸속으로 되기 십상이죠.”
임씨는 드라마 ‘대조영’의 경우, 매국노 집단들이 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연시되고 있는 점과 중국에 대한 과장된 사대 경향, 인물 연대기의 오류 등을 지적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국민이 우리 역사를 비하하고,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를테면 초인적인 영웅으로 등장하는 당나라 설인귀는 사실 졸장이었습니다. 645년 고구려·당나라 전투를 비롯해 675년 신라·당나라 전투, 670년 대비천 전투 등 고구려 신라와 8번 싸워 6번이나 대패했습니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폄하한 장면에 대해서 임씨는 크게 분노한다.

“사료에 보면 보장왕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다 681년 쓰촨성 공주로 유배돼 죽는 날까지 당당했습니다. 그런 보장왕을 설인귀 부하로 설정한 것은 조상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임씨는 또한 드라마는 대조영의 의형제 흑수돌을 부각하느라 대조영의 친동생 ‘대야발’에 대해서 지나치게 홀대한 것도 지적했다.

임씨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스며있는 역사 사대주의다. 이미 막을 내린 ‘주몽’에서 비류와 온조를 우태의 자식으로 설정한 것과 중천왕 때 관나부인을 강물에 빠진 것으로 묘사한 장면은 왜곡의 극치라는 것.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주몽이 부여와의 둘째딸과 결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엔 또한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부대에 넣어 서해에 빠트렸다’(王以貫那夫人置革囊,投之西海)는 기록이 분명히 나옵니다. 굳이 ‘바다’를 ‘강’으로 왜곡해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한나라 군대를 철기군으로 등장시킨 장면에 대해서도 임씨는 어이없어 한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두루마기 걸친 농민병들이 대부분으로 철기군은 없었다는 게 정설이기 때문. 임씨는 또한 고구려는 유리왕 손자인 모본왕 때부터 국경을 넓혀왔고, 수나라는 고구려와 네 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해 결국 멸망에 이르는 등 고구려 800년 동안 중국엔 35개국이 명멸한 사실을 거론하며 고구려의 대중 조공설을 부인했다.

임씨는 이밖에도 ‘고대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라는 ‘왜백제’(倭百濟) 기사와, 신라 혜초보다 200년이나 앞선 512∼526년 천축국(인도)을 다녀온 백제인 학승 겸익을 발굴 소개하며 당시 백제의 국제화 정도와 국력을 입증했다.

11년 만에 ‘우리나라 삼국지’를 완간한 임씨는 “어린 시절 중국 ‘삼국지’를 읽으며 왜 우리에겐 우리의 ‘삼국지’가 없을까 늘 안타까웠다”면서 “청소년을 비롯한 국민에게 우리나라에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우리나라 삼국지’ 저자 임동주씨와의 일문일답.

-고조선이 새로 역사에 편입이 되었다던데?
▲우리나라를 최초에 연 나라는 단군의 조선(朝鮮)입니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에 보면 고조선·왕검조선, 위만조선 등이 상세히 나옵니다. 예로부터 고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이병도 등을 내세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깎아내리기 위해 신화로만 치부해 버렸지요. 그러나 이병도도 임종 직전에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했습니다. 늦었지만 정신을 차렸으니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여러 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800년 역사를 다룬 ‘우리나라 삼국지’의 저자로서 한 말씀 하신다면?
▲역사소설을 쓰려면 먼저 역사소설이 국민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TV 드라마도 같습니다. 멋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MBC ‘주몽’의 경우 철기군이 한군(漢軍)으로 나오는데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철기군은 고구려의 트레이드 마크였지요. 철기군은 서력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동천왕이 철기군을 이끌고 맞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권 동천왕 편에 처음 등장합니다.

철기군은 우리나라의 전매(轉賣)특허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북선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과 싸웠다는 것과도 같지요. 이렇게 작가의 무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소설이고 드라마고 간에 철저한 고증에 입각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공부한 후에 글을 써야 되겠지요.

-‘우리나라 삼국지’를 보고 그 방대한 분량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동기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몇 년이나 걸리셨는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5권짜리 ‘삼국지’를 사다 주셨지요.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경제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영웅호걸들이 많았구나 하며 밤 새워 책을 읽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실망감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 서울을 뒤지다시피 우리나라의 삼국지를 찾아보았는데 하나같이 분량이 적고 내용이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쓴 글이 태반이었습니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껴 우리나라의 삼국지를 집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1995년부터 시작해 11년 세월이 걸려 비로소 완성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쓰셨는지요?
▲우리나라 국민에게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훌륭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이므로 애국심이나 자국의 역사는 무시해도 좋다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글로벌시대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더 잘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너무 편협하게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국적 없는 교육은 우리의 근간을 흩트려 놓습니다. 비근한 예로 필리핀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필리핀은 1950년대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지만 애국심이 없는 교육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처녀들이 외국에 가정부로 팔려가는 빈한한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에 반해 일본의 경우 애국애족에 바탕을 두었기에 지금 전 세계적인 막강한 경제대국을 이루었습니다.

-역사소설을 쓰면서 자료는 어떻게 구했는지요?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재구성하시나요?
▲자료는 우선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현존하는 역사서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이외에 ‘수서’, ‘신당서’, ‘구당서’, ‘위지동이전’, ‘통감’, ‘일본서기’ 등을 참조하고 그 시대에 맞는 수백종의 논문을 섭렵했습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짠 후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미있게 글을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란 HISTORY(HUMAN, STORY), 즉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중국 삼국지’에는 허구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삼국지’는 얼마가 진짜이고 얼마가 허구인지요?
▲‘중국 삼국지’는 90%가 새빨간 거짓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지’는 90%가 진짜이고, 10% 정도만 허구이지요. 그만큼 철저한 고증에 입각한 책입니다. 부풀리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있는 것을 그대로 쓴 책입니다.
 


-‘중국 삼국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우리 역사도 모른 채 중국 것들을 읽으면 우리가 우리나라를 스스로 비하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삼국지’뿐만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중원을 다룬 무협지 도한 우리나라를 변방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옛날 조선의 유명한 유학자 기대승이 선조에 아뢰기를 ‘삼국지연의’(중국 삼국지)는 무뢰(신뢰할 수 없는)한 자가 쓴 무망(나쁜)한 책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발굴했거나 특히 강조한 내용이 있으시면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논란이 되는 ‘대륙백제’와 ‘왜백제’를 확실히 서술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확한 사료까지 첨가해 고증했습니다. 대륙백제는 중국 역사책인 ‘남제서’에 자세히 나오고, 왜백제는 인물화상경에도 뚜렷하게 나오는 것인데 굳이 이를 부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혜초’가 천축국(인도)을 처음 방문한 스님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사실 그보다 백제의 스님인 ‘겸익’이 200년이나 먼저 천축국을 다녀왔습니다. 또한 고사를 동원해 낙랑군이나 서안평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도 일축했습니다. 이외에도 새로운 사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즘 애국심과 애사심이 너무 희미해졌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이익을 보자고 회사 기밀을 빼내 외국에 팔아먹는 한심한 일까지 나오는데,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애국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실제 사료에 나오는 신라의 장인 ‘구진찬’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구진찬은 신라 문무왕 시절 기계식 활인 ‘쇠뇌’의 기술자였습니다. 당시 신라의 쇠뇌는 100보 정도밖에 안 나가는 당나라 쇠뇌에 비해 유효 사거리가 1000보나 될 정도로 성능이 훨씬 좋았습니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구진찬을 당으로 불러 돈과 여자를 내리면서 회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구진찬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겠습니까?

 

-어느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시는지?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때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인해 스스로 비하하는 역사를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지’를 읽고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훌륭한 역사가 있었구나! 라고 느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중국인들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들은 고구려나 고조선을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면서 우리 역사의 머리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간도를 비롯한 만주의 영주권에 대한 분쟁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동북공정은 이에 대한 준비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우선 우리 국민이 먼저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저들도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저네들이 계속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떠드니까, 심지어 한국에서도 정말 고구려가 중국사인가? 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이들도 생기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합니다.


-일각에서는 김유신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임 선생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해주시지요.
▲‘삼국통일’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한국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25년 6월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만들고서 부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삼국통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통일’이라 함은 나뉘어져 있는 나라들의 영토와 국민을 하나로 병합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겠다는 분할 약속마저 지키지 않아 신라는 겨우 임진강 이남의 땅을 확보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흥안령산맥 아래의 드넓은 만주 땅과 하바로프스크를 포함한 연해주 일대도 포함됩니다. ‘삼국통일’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한국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25년 6월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만들고서 부터였습니다. 이병도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조선사에서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는 조그만 반도의 역사라고 강조하여 바다와 대륙의 공간을 한국사에서 잘라냈습니다. 일본의 식민사관은 발해사마저 한국사에서 잘라내 우리의 옛 땅인 만주를 외부 압력이 투하되는 강압의 공간으로 한국인들이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식민사관에 빠져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한강 이북까지 중국 땅이었다라고 우기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사관은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식민사관을 강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니 훌륭한 대일본의 지배를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우리에겐 식민사관을 강요하면서 자국민에겐 황국사관(皇國史觀)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은 천신(天神)인 아마데라스 오오까미의 후손인 신무천황이 나라를 세운 이후로 만세일통(萬歲一統)의 천황가가 다스리는 신의 나라라고 강조하며 신의 선택을 받고 일본에 태어난 일본인들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과는 다르며, 서양인들과 대항하여 아시아를 구할 사명이 있는 자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시키느냐에 따라 일본인은 자부심 넘치는 주인 되는 인간으로, 조선인은 열등감에 젖어 노예로서의 삶을 수긍하며 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 교육의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지 벌써 60년이 흘렀습니다. 제발 지금부터라도 극악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주체성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역사는 현재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알아야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아들과 딸을 위해서, 나아가 우리의 손자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소홀히 하면 향후 우리의 자손들은 우리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무엇을 했냐고…….’

 

◆‘우리나라 삼국지’ 연도표
549년: 미실 출생
576년: 신라 진평왕 등극
595년: 김유신 출생
597년: 수문제의 국서 사건
598년: 제1차 고수전쟁-강이식 장군
599년: 김흠순 출생
600년: 10월 수나라 태자 폐위
602년: 수문제의 처, 독고왕후 사망
604년: 수문제 죽고 수양제 등극
604년: 김춘추 출생
606년: 미실 사망
608년: 문희·보희 출생 추정
609년: 김유신 화랑이 됨
612년: 살수대첩-을지문덕
617∼610년: 연개소문 탄생 추정
626년: 법민(문무왕) 출생
663년 10월: 연개소문 사망과 대조영 탄생으로 추정
666년: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이 배신하여 당에 투항함
668년 9월: 고구려 멸망. 대조영 6세
670년: 검모잠이 안승을 추대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킴
671년: 고구려 안시성 함락
673년: 고구려 부흥군, 호로하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함
676년: 대신라(통일신라) 성립(이 시기의 대조영은 거란, 돌궐, 고구려 등지를 여행함. 대조영 14세)
677년(문무태왕 17): 당이 보장태왕에게 요동주도독 조선왕(朝鮮王)의 벼슬을 제공하여 요동에 보냄. 보장태왕은 그 지역의 유민과 손잡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함. 대조영 15세
681년(신문태왕 1): 보장태왕이 고구려 부흥에 실패하고 공주(쓰촨성)에 유배됨. 대조영 19세
685년: 거란의 손만영이 귀성주자사의 벼슬을 제공받음. 이진충은 송막도독의 벼슬을 제공 받음. 대조영 23세
686년: 보장태왕의 손자 고보원이 조선군왕이 됨.(부임은 하지 않은 듯.) 대조영 24세
690년: 측천무후가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바꿈. 대조영 28세
693년: 실위의 막하돌(큰 추장)들이 당에 반대하여 봉기하자 말갈출신 장군 이다조가 실위를 탄압함. 대조영 31세(대조영이 독립전쟁 이전 사전학습을 한 것으로 설정)
694년 12월: 돌궐의 묵철 가한이 산서성 영주(靈州)를 공격하여 당의 장수 이다조를 크게 물리침. 대조영 32세
696년 5월: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의 탐관오리 조홰의 횡포에 반발하여 봉기함. 해족도 처음에는 거란의 편에 서서 봉기함. 이진충이 무상가한으로 즉위하여 당과 전쟁을 벌임. 대조영 34세
같은 해: 거란과 해의 반당군사봉기를 틈타 대중상과 걸사비우, 대조영 동쪽으로 이동함
8월: 이진충과 손만영이 당의 대군을 크게 무찌르고 장수 장현우, 마인절을 생포함
9월: 토번이 당의 양주도독 허흠명을 쳐서 사로잡음. 이진충이 사망하고 손만영이 가한 직을 계승함
10월: 손만영이 당의 기주를 쳐서 빼앗고 (기주)자사 육보적이 죽음을 당함
697년: 손만영이 영주(營州)를 완전히 점령함
2월: 손만영이 왕효걸, 소굉휘의 18만 대군을 물리침
6월: 손만영이 하인에게 죽임을 당함. 거란의 반당군사봉기가 실패함
9월: 당이 손만영의 패망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임
698년: 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을 크게 격파하고 나라를 세움
나라이름을 高麗라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천하에 밝힘, 연호사용, 황제 호칭
713년: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쓰기 시작함
719년: 대조영 서거. 고황제로 추존함. 무예왕자가 무황제로 등극하며 연호를 연안으로 함


조정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