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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건설된 신비의 ‘시베리아 요새 섬’ 인터넷 화제

한부울 2007. 8. 13. 00:36
 

1500년 전 건설된 신비의 ‘시베리아 요새 섬’ 인터넷 화제 

[팝뉴스   2007-08-09 12:19:05]


약 1,5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 섬’이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다.


최근 러시아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곳은, 러시아 남시베리아에 위치한 투바 공화국의 호수에 자리잡은 섬 중 하나로, 섬 전체가 ‘요새’라는 것이 언론의 설명.


고대 위구르족이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요새 섬’은 현재 개발 계획이 진행 중에 있어 지역 주민 및 과학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유적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섬에 관광 및 휴양 시설이 건설되면 안된다는 것이 개발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라고 러시아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바얀쿠르 칸(Bayanchur Khan)의 지시로 세워진 ‘요새 섬’ 안에는 왕궁, 사원 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약 1,000년 전 전쟁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러시아 과학자들의 견해다.


네티즌들 또한 고대 유적지를 관광단지로 개발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진 :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남쪽으로 1,060km 떨어진 Tere-Khol 호수 안에 위치한 ‘요새 섬’의 모습, 복원 상상도 및 현재 모습)


김 정 기자(저작권자 팝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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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va자치공화국내 Tere-khol호수섬 성채

우리역사의 비밀-글쓴이 솟대


어떠한 유물이 나왔는지.. 또, 성채의 정확한 수축시기를 알 수 없어 대략 1500여년 전에 수축되었다는 기사에 의존한 추정을 할 수 밖에 없어 무리일지 모르지만 일단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연계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단군조선후기와 말기의 단군조선 해체 시에 분리되어 나간 부족들과 나라들을 복속한 경우 대체적으로 직접적인 지배보다는 부족장 또는 왕의 지위를 보존해주고 이들을 복속시키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선호하였습니다.  부여나 말갈등을 포함한 제부족들을 상당한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배하였고 그리고 강성할 때 타브가치 제국인 북위와 유연제국, 백제, 신라등에 대해서도 간접지배방식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단군조선 후기에 분리되어 나간 부족이나 나라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방식을 선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1) 광개토태왕 재위시 성채가 건설될 가능성


기사에서 언급되어진  Tere-khol호수섬 성채의 수축시기가 유연제국(A.D 402년~552년)이 성립되는 A.D. 402년인 5세기 초반 이후에 수축된 것이라면 유연제국이 성채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수태왕(A.D. 413∼491) 통치 시기인 413년 이후라면 장수태왕재위 12년인 424년에 타브가치왕조인 북위는 탁발사를 이은 탁발도가 등장하여 화북일대를 통합한 절정기로 유연제국과 북위왕조가 고구려에 대해 일시 호각지세를 이룬 때이고 북위가 강성해져 유연에 대한 원정을 3차례 시도해 성공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타브가치왕조도 한화정책을 펴면서 효문제(A.D 471~499)때부터는 고구려에 복속되는 과정을 밟지만요.

탁발도가 등장하기 전인 424년까지는 강성한 유연제국의 공격을 주로 방어하는 입장이었고 탁발도가 등장한 이후에는 유연제국과 입장이 역전됩니다.

유연제국이 타브가치의 공격으로 일시 약화되었지만 고구려가 북위와 유연과의 전쟁에 직접 개입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개인견해로는 장수태왕때에 굳이 현 투바공화국내인 Tere-khol호수 섬에 성채를 수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군사적 개입관련 내용이 있으면 소개부탁 드립니다.)


여러면으로 볼 때, 만약에 성의 수축시기가 유연제국(A.D 402년~552년)이 성립된 402년 이전인 4세기후반(광개토태왕치세)이라고 한다면 선비계의 남하이후 비어진 초원에서 서로 경쟁관계였던 고차와 유연부족에 대한 간접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광개토태왕이 몽골초원 북단의 요충지인 이 일대에 성채를 구축했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추정해봅니다.

물론, 성의 수축시기에 대한 가정이 맞더라도 바이칼 이동지역이 고구려영역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유연제국은 A.D 308년부터 사서에 등장한 유연부족의 수령 중 하나였던 사륜이 A.D. 420년경 경쟁부족인 고차를 정복하고 초원을 장악 하므로써 이루어집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까지 서쪽으로는 이르티쉬강 상류와 카라샤르부근까지라고 합니다.

유연제국은 장수태왕집권 후반기에는 타브가치 왕조와의 잦은 전쟁으로 약해져 479년 지두우(地豆于)분할을 고구려에 요청할 정도로 의지하게 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채가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성에 존재하다는 사실로 인해 이 성채의 용도여부를 떠나서 성채를 활용하려면 호수의 크기(장축 8km,단축 3.5km)나 보급물자의 수송등을 고려할때 성채를 건설한 주체는 최소한 배를 원활히 운용할 줄 아는 세력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2) 장수태왕 집권후기 또는 문자명왕초기에 요새가 건설될 가능성


장수태왕(A.D. 413∼491)  집권 후반기에는 북위가 완전히 고구려에 머리를 숙이고 효무제 탁발굉(471~499)때부터 고구려에 복속하여서 속국이 됨으로써 장수왕 재위초엽인 타브가치의 탁발도(424~452)등장이전처럼 다시 동북아의 패자가 됩니다.

물론, 유연도 약해져 479년에는 지두우 공략을 고구려에 요청할 정도로 의지하여 초원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도 강력해집니다.

그럼으로, 장수태왕 집권말기도 고구려의 전초기지 등의 성격으로 성이 수축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