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부

지금의 일본을 만들어낸 한국전쟁

한부울 2007. 7. 31. 21:16
 

지금의 일본을 만들어낸 한국전쟁

2007-07-25 02:18:00-popofofopo

 

서 론


흔히들 일본을 지칭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여기서 가까움은 지리적인 가까움뿐만 아니라 우리와 일본이 아주 오래 전부터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멀다는 것은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근 반세기 동안 고통 받아온 우리 민족의 한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와 지리적으로는 그 어느 나라보다 가깝지만, 역설적으로 선뜻 손 내밀고 다가서기는 힘든 나라 일본.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아픔을 주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바로 알고 그들의 잘못을 반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강의시간에 정말 충격적인 내용을 배웠다. 한국전쟁 당시에 일본이 참전했다는 사실과 그러한 참전으로 인해 일본이 받은 경제적, 정치적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농담하시는 줄 알았다. 한국전쟁 발발 5년 전 만해도 일본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으로서 한반도에서 쫓겨났는데 어떻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상식적일 때 보다는 비상식적일 때가 더 많고 또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반세기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억압, 착취, 괴롭혔던 일본이 무슨 염치로 한국전쟁에 참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단순히 ‘그러한 사실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고, 또한 우리 조상의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이자 권리이기에, 우리는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사실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기간 동안 일본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활동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일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본 론


Ⅰ. 패전 후 일본의 상황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미군정의 초기 대일점령정책은 일본을 경제적으로는 강화하되 군국주의의 부활을 제한하기 위해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골자로 하는 ‘아시아의 스위스’ 혹은 ‘농경국가’ 정책을 진전 시켰다.

 

즉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는 일본점령 정책의 초점을 일본의 비군사화에 두었다. 민간경찰은 허락되었으나 모든 군사조직은 해산되었으며 육군, 공군, 해군이나 비밀경찰 조직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민간인은 개인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으며, 일본도의 착용조차 금지되었다. 모든 개인 소유의 무기는 압수대상이었다. 또한 일본군 최고사령부에 소속되었던 참모들과 장교들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은 숙청되었다. 정치계나 정부조직 내 혹은 경찰에서 축출 된 군국주의자들까지도 모두 합치면 숙청된 전체 숫자는 약 25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의 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점령군 정보부처에 전직 일보군 장교들이 다시 고용되었으며, 또한 군대 해산 업무를 담당하는 형식으로 전직 군인들이 비정규군 조직으로 남아 있었다. 해군의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열도 해안에 부설해 놓은 기뢰를 제거하는 일을 함으로서 해군의 싹이 잔존할 수 있었다. 일본 육군 지도부는 일부 장교들을 항복 직후 민간 경찰로 이직시켜 놓기도 했다. 실제로 이렇게 보존 된 싹은 한국전쟁이 발발 한 후 창설된 일본 예비 경찰대에 흡수됨으로서 일본 재무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1948년 이후 미국의 대소 냉전인식 강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전개 등에 따라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1948년 1월 6일 로열 미 육군 장관은 “미국은 일본을 충분히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고 안정시킴과 동시에 극동에서 전체주의전쟁의 위협에 대처할 방법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족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지원할 단호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천명한다. 즉 ‘극동의 스위스’가 ‘아시아의 공장’으로, ‘농경국가’가 ‘반공의 방벽’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대일배상정책의 완화, 재벌해체를 목적으로 제정되었던 경제력집중 배제법의 포기, 대일원조의 강화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


Ⅱ. 한국전쟁과 일본의 재무장


한국전쟁이 발발 했을 때 일본에는 미 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으로 구성된 제 8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7월 초 가장 먼저 제24사단이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이윽고 나머지 사단과 여단들도 한국으로 건너갔거나 준비 중이었다. 이렇게 되자 맥아더와 군 수뇌부는 일본의 방어와 치안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 빠져나갈 경우 공백상태가 된 일본 전역과, 특히 소련과 인접한 훗카이도의 방어와 치안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북한의 배후인 소련이 미군의 후방을 통해 공격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맥아더의 지시에 의해 1950년 8월 10일 경찰예비대령이 공포되고, 8월 13일 지원자 모집을 전국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예비대 창설이 본격화 되었다. 경찰예비대는 기존의 경찰조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 조직을 갖도록 법제화 되었고, 일본 수상으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는 조직체로 탄생되었다. 경찰예비대 지원자 중 많은 사람들이 전직 장교들이었다. 8월 23일 1차 모집으로 선발된 약 7천명의 사람들이 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1950년 10월 말까지 7만5천명이 모두 채워졌다. 이와 더불어 8천명의 해안보안청 증원도 단행되었다.


Ⅲ.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


일본군의 가장 대규모 참전은 1950년 10월에서 12월 사시에 해안보안청 소속 1천2백 명의 소해작전 대원이 한국에 파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미 극동 해군은 소해정이 10척에 불과한 반면 일본 해안보안청은 100여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소해부대가 있었다. 미군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근해에 투하한 기뢰를 제거하면서 일본의 소해정 운용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 파병은 미 극동 해군 참모부장 버크 소장과 일본 해상보안청장관 오오구보 다케오 상에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요시다 수상에 의해 ‘절대적 비밀을 유지하라’는 조건하에 승인되었다.


1950년 10월 4일 한국전쟁에 참전할 특별소해부대가 편성을 마쳤다. 출동선박은 소해정 20척을 비롯해 순시선 4척, 시항선 1척 등 모두 25척이었고 참가인원은 총 1,204명 이었다. 이 가운데 제1소해대는 1950년 9월 상순에 출항하여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고 제2,3소해대는 10월 중순에 원산해역에 도착하여 3천여 개의 기뢰를 제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10월 25일 원산상륙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제4소해대는 서해안의 군산해역 소해작전에 참전했다.(사진 참조)


그나마 수업시간에 배우고 잘 알려진 소해작전 이외에도 일본군은 한국전쟁 당시 곳곳에 파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시히 세균부대이다. 미군의 초토화 작전에 주요 무기로 투하 된 네이팜탄에는 ‘Made in Japan’이라는 상표가 찍혀 있었고, 양측 간에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세균전에도 일본군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50년 7월 27일 로이터 통신은 “일본군 약 2만5천명이 한국전선에 참전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10월 16일 평양방송도 일본인 부대의 참전에 항의한 바 있다. 또 1951년 12월 8일 북경방송은 “이시히 전 중장 등 일본의 세균전 전문가들이 미군과 협력하여 한국에서 세균전을 수행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시히 세균부대의 한 구성원이었던 기타노는 1961년 8월 19일부터 『일본의사 신보』에 연재되었던 「방역비화」에서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로 한국전선에 파견되어 약 4개월 간 체재하면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확보에 종사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군의 첩보부대가 고스란히 맥아더사령부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정보총책임자(G2) 윌러비 장군이 운영했던 민간정보국 산하 ‘전사편찬실’이 구 일본군 비밀첩보부대의 실체였다. ‘전사편찬실’이란 조직에서 전범인 구 일본군 정보 장교들은 아시아 사정에 낯선 미국에 2차 세계대전 때 광범위하게 쌓아놓은 군사기밀을 제공하는 대가로 명예회복의 기회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내 첩보국(G2) 소속의 첩보기관이었던 캐논기관은 전사편찬실의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를 수집, 분류하는 실행부대였는데, 여기에 나카노 학교에서 정보, 첩보 훈련을 받은 2,000여 명의 일본정보 요원들이 북한, 만주, 중국 지역에 침투되었다.


한국전에 참가한 일본인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앞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일본의 고베와 시세보항, 그리고 부산항에서 상륙작전에 투입될 미군을 수송한 수송양륙정(LST) 47척 가운데 37척을 일본인 승무원이 조종했으며, 2차 대전 전범자였던 고타마가 1950년 7월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고 일본인 의용병을 한국전선에 보내는 계획의 승인을 요구했던 사실도 일본 외교문서 공개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Ⅳ. 한국전쟁 참전 결과


전쟁은 일본에게 있어서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병기창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일본경제는 1952년에 태평양전쟁

(1934~1936년)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국제수지는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되었다. 1950년 경제 성장률은 10.9%, 1951년에는 13%를 기록했다. 1951년 외환보유고는 9억4천만 달러에 이르러 미국이 대일 원조를 종료할 정도였다. 휴전 후에도 일본은 미군의 계속적인 군수품 일본발주 등을 통해 1960년에 이르기까지 연간 5~6억 달러 수준의 수입을 거두게 된다.


이와 더불어 정치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일본에게는 일종의 축복과도 같았다. 일본의 참전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 된 대일 강화 조약 및 태평양 안보조약은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 조차도 “그 관용에 있어서 사상 유례가 없다”고 고백 할 정도였다. 구체적으로는 공식적인 주권 독립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유엔에도 가입하였으며,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재일교포 문제 등에 대한 보상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성과와 더불어 영토 문제에도 독도의 반환을 조약에서 삭제함으로써 현재까지 독도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또한 일본사회의 우경화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반공 전쟁을 틈타 전범들이 대거 사회에 복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결국 1955년 자유민주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 보수 우익 정당은 향후 끝없는 장기 집권을 하게 된다.

즉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 사회는 좌우익의 양 날개에서 좌익 세력이 몰락하고 우익세력이 전범에서 주류로 부활하였으며, 한국전쟁 시 미국에 대한 협력과 참전으로 인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 론

앞의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에서의 일본 참전은 모두 사실이었고,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소해부대를 비롯해서 직・간접적인 전쟁지원, 게다가 그 악명 높은 세균전부대의 투입까지.

여태까지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이러한 사실을 아직까지 배워본 적이 없었을까?

정확히 한 가지의 이유로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 작용하여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이승만 정권이 계획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은폐했을 가능성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이후 한반도에 단 한 명의 일본인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공식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 한 명의 일본인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자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론에서도 밝혔듯이 한국전쟁 무렵 수천 명의 일본인, 그것도 민간인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군인들이 한반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전쟁당시 군 통수권자였던 이승만이 일본군의 개입을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에 그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정치생명과 연결시켜 일부러 은폐하려 했을 것이다.

 

둘째, 미국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죽음에 내 몰리는데 대해 사회적으로 비판이 있었다. 이러한 미국 내 상황은 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을 했을 것이고, 여기에다가 일본의 참전을 통한 이권취득 의지가 맞물리면서 일본이 참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범국인 일본의 참전은 국제법상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비판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역시 자신들의 참전을 은폐하려 했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당시 소해부대원으로 참전하였다가 기뢰가 폭발하여 죽은 일본군인의 가족에게 이러한 사실을 함구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또한 일본 총리는 일본의 참전에 대한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려 한 점 역시 일본이 계획적으로 참전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참전한 사실이 이슈화 된다면 앞으로의 이권 취득에 상당한 장애물로 다가 올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에서의 일본 참전 사실은 전쟁 당사국인 한국,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 그리고 참전 당사자인 일본 이 세 나라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은폐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순환한다.’고 했다. 한 번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겪어 온 역사에 대해서 철저한 고증과 반성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서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를 통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고통을 당했고, 연달아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전쟁을 통해 민족의 비극을 겪었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한국전쟁에서 전범국인 일본이 참전했던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철저히 파헤치고 분석하여, 앞으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상황에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