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천주교와 제사

한부울 2007. 7. 28. 13:46
 

천주교와 제사

[조선일보] 2007년 07월 15일(일) 오후 10:39


 

조선 중기 이수광(李?光·1563~1628)은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며 교황에 대해 “혼인하지 않으며, 세습하지 않고 현자(賢者)를 택해 세운다”라고 설명했다. 조선은 선교사가 전교하기 전 남인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자생적인 천주교 교회를 만들어 이벽(李檗·1754∼1786)이 신부가 되었는데, 이때를 가성직(假聖職) 시대라고 한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의 그라몽 신부를 찾아가 영세 받기를 자처한 것도 이벽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자생적 조선 천주교회가 교황청 소속의 북경 교구와 접촉함으로써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제사 문제였다. 당초 동양선교를 담당했던 예수회는 동양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려는 전향적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이를 영합주의(迎合主義)라고 비판하는 프란체스코파(Francescan) 등이 동양 전교에 나서고 교황 클레멘스 11세와 베네딕토 14세 등이 이들을 지지하면서 조상 제사가 엄금된 것이다. 정조 14년(1790) 이승훈이 역관 윤유일(尹有一)을 보내 제사 문제에 관한 교황청의 해석을 물었을 때 북경 주교 구베아는 ‘우상 숭배’라며 엄금시켰고, 이 경직된 해석에 실망한 많은 신자들은 천주교를 떠났다. 이듬해(1791) 전라도 진산의 양반 권상연(權尙然)과 윤지충(尹持忠)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몰렸는데, 순조 1년(1801·신유년) 섭정하던 대왕대비 김씨가 정조 때 성장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역률로 다스리는 사학엄금 교서를 내렸을 때의 주요 명분도 무부무군사교라는 것이었다. 이 신유박해 때 이승훈·이가환·정약종 등 수많은 남인들이 순교한다. 조선 전통과 괴리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교황 비오 11세(1922~ 1939)의 제사 금지 완화 조치였으나 이미 수많은 신도들이 순교한 후였다.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교서가 한국 사회의 ‘종교 간 공존의 전통’을 훼손하는 쪽으로 기능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사문제의 역사는 말해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