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훈(Hun)족은 정말 한민족(COREAN)인가?

한부울 2007. 7. 19. 15:20
 

훈(Hun)족은 정말 한민족(COREAN)인가?

2007/07/18 12:15 (우리역사의비밀:이문규)


유럽인들은 전 세계를 주름잡는다. 그들은 일찍이 16세기  미개척지를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19세기 지구를 지배하였다. 오늘날 유럽하면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개척 식민지배 했다는 오만함에 빠져 아시아인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오만한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크게 깨졌다면 믿겠는가?

오만한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 한 아시아인의 정체는?

그 아시아인들의 정체는 바로 미지의 종족 훈(Hun)족이다. 서기 375년 훈족의 서진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게르만족의대이동으로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당하고 중세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가히 훈족은 유럽의 중세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부색은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난 얼굴은 형태 없는 덩어리였다.” -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그들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네들 갓난아이의 얼굴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두 콧구멍은 투구의 면 갑에 맞추기 위해 끈 하나로 휘감겨 있었다. 엄마는 전쟁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아들을 기형으로 만들었다.……” -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포리나리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 사마천(흉노에 대한 묘사 중)

“그들의 가슴에는 야생동물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들은 인류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중국의 한 궁정 관리의 기록 중

 

이는 훈족(흉노족)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기록이다. 훈족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훈족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훈족의 침략을 받은 쪽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공평하고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잔뜩 겁먹은 사람의 움츠린 시각으로 훈족에 대해 기술했다. 표현은 절제 없이 과장되어 있고 적 훈족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남기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기록으로 인한 훈족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1998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제작된 ‘뮬란’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거기에는 주인공이자 선의 세력인 중국의 적으로 훈족이 등장하는데, 훈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상영시간 내내 훈족은 마치 저주에 찬 악마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일삼는다. 또한 그들의 외모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며 색깔조차도 어둡게 묘사를 했다. 동양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훈족은 혐오스러운 외모를 가진 존재로, 사악한 외모를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훈족에 대한 그러한 서양인들의 편견이야말로 정착문명의역사가 지난 천년동안 저질러온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의견: 그런 이유에서 서세동점시대인 19세기경 서세가  대륙조선을 훈족의 전신으로 보았고 타켓으로 삼아 정복코자 할 때 서세는 대륙조정(조선)으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던 왜구정권을 적극 이용하여 결국 대륙조선을 배반하게 하면서 서세는 대륙을 점령하였고 대륙조선의 위대한 역사자체를 상실케 하였으며 그 댓가로 대륙조선이 관할하던 열도 독립권을 왜구정권에 주었다고 보는 것이며 왕따 당할 정도로 대륙정권으로 부터 소외 되어 평소 대륙조정(조선)에 앙심을 품고 있던 왜구정권은 서세가 만든 역학적인 틈을 파고들어 대륙조선을 희생물로 만들고 한풀이 하면서 궁지에 처해 있던 대륙조선 조정을  마침내 반도로 내쫓아  소국역사, 반도역사로 뒤 바꾸어 놓고 (대한제국 창건시기) 결국  식민지화 하고 말았던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유럽을 진동시킨 훈족의 실체에 대해 서양의 역사가들은 많이 알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데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동부유럽 트라키아 지역에서 제작된 황금보검과 같은 것이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트라키아 지역은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훈족의 아틸라의 근거지이다. 우연 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은 훈족과 한민족이 친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뜻 하는게 아닐까?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유물을 제시하였다.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 지방에 출토되었다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되었다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특정 지역에 주로 출토되던 물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에 있었다고 말하는 건 속단이다. 하지만 이 유물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유물들을 만든 이들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정화 의식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던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 용기로,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동복이 한반도 동남부 김해, 경주 지역에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북방계 유목문화가 상당히 흡수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브론즈 냄비는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브론즈냄비는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참고로 훈족은 동복을 말 엉덩이에 매달고 다녔는데,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인물 형토기 같은 신라 시대 점토상을 보면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엉덩이에 싣고 있다. 그런데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이들 솥이 말이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의 복장이고, 안장과 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우주개념을 이해하는데 순록과 우주수목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라 금관의 장식이 바로 이 순록과 우주수목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신라가 북방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관되는 특성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1. 훈족의 후예들에게는 몽골리안 반점이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훈족은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이 특이한 활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훈족이 이 특이한 활을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3. 훈족은 편두를 갖고 있다

편두라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반듯이 눕혀 놓은 상태에서 이마를 돌 같은 것으로 눌러 이마와 뒷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대신 정수리를 봉긋 솟아오르게 만든 머리 형태이다. 일종의 성형수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뼈를 보면 이마와 뒷머리는 눌려있고 정수리는 툭 튀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서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과는 구별되는, 꽤 오랫동안 한민족 사이에서 내려온 풍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 한 가지는, 훈족에게는 편두 풍습이 있었지만 흉노에게는 그 풍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민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훈족과 가야, 신라의 친연 관계를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훈족이 한민족과 연관된다는 증거가 여럿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장례의 절차는 우리의 장례 절차와 비슷하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그가 사망한 지 3일, 7일, 49일째 되는 날 고인의 말을 도살하여 일가친척과 지인들이 함께 나눠먹고, 문상객들을 잘 대접하며 남은 음식은 말의 재갈이나 안자, 무기와 함께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웠다. 이 때 남은 재와 문상객을 대접할 때 사용한 청동솥(동복)을 깨뜨려 부장품으로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런데 우리의 장례절차는 사망한지 3일째 되는 날(3일장) 시신을 무덤에 매장한다. 사망한 후 5일되는 날에는 삼오제를 치르며 사망한 후 49일째 되는 날에는 49제를 치른다. 그리고 3년 상이라 하여 3주년 되는 기일에 탈상한다.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다. 그런데 훈족의 장례의식과 우리의 장례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

이는 훈족과 우리민족이 연관성이 있다고 해석되어도 좋지 않을까?

 

유럽을 호령하고 중세시대의 서막을 연 훈족...

훈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훈족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이며, 더욱이 우리민족과 연관된 풍습이 많다는 것이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 및 사료들을 한민족의 그것과 연결시켜볼 때 훈족의 지배집단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는 한민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훈족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런데 그런 훈족이 우리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훈족의 지도자이자 세계 3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중세시대 서막을 연 아틸라는 우리가 광개토태왕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