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신 매맞은 조선학교 아이들
[오마이뉴스] 2007년 06월 21일(목) 오후 04:06
일본정부에 의해 쓰레기매립지로 강제이주 당한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난 2003년 도쿄도 정부는 "수십 년간 무상으로 사용해온 학교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시대, 강제 이주시킨 일본의 원죄는 배제시킨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재판부는 '도쿄도 정부는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합의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문제는 남았다. 학교 부지를 계속 사용하려면 시가의 1/10 가격인 14억원을 도쿄도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김용택 시인 등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을 결성했다. 오마이뉴스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의 뜻에 공감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에 참여한다. 앞으로 해당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와 학생들의 글이 차례로 실릴 예정이다. 첫번째 글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실무를 맡은 이지상 집행위원장이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아이들.
작년 8월 에다가와 조선학교 운동장에 큼지막한 보름달이 떴다. 8·15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행사를 마치고 난 뒤의 잔치마당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며칠을 두고 만들었을 자그만 무대를 중심으로 통일기가 빼곡히 흩날리고 그 밑에 이 행사를 후원한 동포들의 이름들이 걸려있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몇몇의 동포1세들은 달빛에 속내를 보일만큼 충분히 어두워진 운동장 한켠에서 그리움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는 도쿄 강가에 피어난 물안개 보다 더 짙은 회한이 있다.
꼭 두 세대 전. 어린 젖먹이었던 그들은 그렇게 쫓겨났다. 일본말에 서투른 아이들은 "무섭다"는 한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뱃속에 들은 아이를 움켜쥔 어머니들은 "아프다"는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도쿄정부의 경찰, 철거반원들이 휘두르는 곤봉과 욕설을 가녀린 어깨로 받으며 군용트럭에 올라 이곳에 왔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도쿄 강 하구를 쓰레기로 매립하는 일에 동원되었던 몇몇의 아버지들은 그 곳이 자신들이 평생을 살아야 할 불모의 터전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거세되지 않은 반역의 역사는 반드시 그대의 목덜미에서 복수의 칼날을 겨눌 것이다."
71년 개발독재의 아우성이 온 나라를 덮었던 때. 청계천의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도 같은 방식으로 쫓겨났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환상이 온 국민들의 가슴을 들뜨게 한 그날의 상계동 주민들도 그러했으며 2000년대 끈질긴 생명력으로 굴곡진 세상을 버텨오던 난곡의 주민들이 단아하고 고고한 개발자본의 자태에 눌려 어디론가 사라진 방식도 똑같았다.
에다가와 학교 운동장의 고요한 달빛이 1941년 열리지도 않은 도쿄 올림픽을 이유로 쫓겨나야 했던 동포1세들의 슬픈 노래를 경청하는 그 시간, 나는 "배고파 못 살겠다"고 절규하는 14만5천명의 광주 대단지 주민들의 눈물이, 부천 고강동 도로변의 토굴 속에서 겨울을 살아야 했던 상계동 주민들의 한숨이, 30여만원의 영구임대주택 임대료 지불도 어려워 보금자리를 포기해야 했던 난곡사람들의 넋두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몹시 괴로웠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탐욕에 쫓겨 종착지 없는 '가난의 기행'을 떠날 것인가.
망언 내뱉던 도쿄 도지사, 조선학교도 압박...
에다가와 조선학교는 현재 도쿄도와의 힘겨운 3년 싸움을 마치고 잠정 휴식 중이다. 14억원. 도곡동 타워팰리스 한 채 값에도 못 미치지만 그들에겐 결코 작지 않은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버거운 화해조건과 함께.
"늘 내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
-복효근의 시 중에서.
재일조선인 학교의 행사는 항상 대규모로 진행된다. 교원과 학부모, 학생들이 준비하는 운동회·학예회·야회 등은 모두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지역 주민들은 기꺼이 학교를 위해 주머니를 비운다.
'각종학교'로 분리되어 일본 사립학교의 1/3, 공립학교의 1/9밖에 지원이 되지 않는 교육비로는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연간 열리는 각종 행사의 모금은 조선학교를 지탱하기 위한 긴요한 수단이다. 그렇게 학교를 꾸려 왔다.
교원들의 월급은 고사하고 변변치 못한 교사(校舍)에 놀이기구 하나 없는 운동장. 녹슬어 손에 쥐기도 어려운 철봉은 손볼 틈도 없이 일제하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한을 오직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열정으로 대신했다.
"재일 외국인의 흉악범죄가 지속되어 지진 시에는 큰 소요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한일합방·신사참배·창씨개명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원했던 것이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2003년 12월 그런 에다가와 학교에 토지반환과 40억원의 임대료 지불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의 극우인사에게 민족은 타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죽임의 언어이지만 일본땅 재일조선인들에게 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이다.
다시 지난 8월 에다가와 조선학교 운동장에 울린 동포1세들의 슬픈 노래를 기억하면 저 노래는 나의 고백일 수 있겠다 싶었다.
저 노래를 부르는 노인은 일제 강점하 자신의 조국이 내쳐버린 한맺힌 회한을 쏟아내는 내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 '가갸거겨 우리 함께'를 합창하는 저 아이들은 나 대신 끌려와 낯선 이국땅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던 또 다른 나의 자식들이 아닌가.
▲ 지난 5월 25일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가게 안국점에서 열린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첫걸음식.
우리말과 글을 위해 싸워온 그들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고향이 남쪽이지요?"
아이들에게 국적을 묻는다. 누구는 조선, 누구는 한국, 또 누구는 공화국.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은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질문의 의도가 아주 불순했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나는 갈라진 땅 분단의 이분법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청맹과니였다. 남의 나라 언어를 배우기 위해 혀를 찢거나 영어 조기교육을 위해 몸 바치는 기러기 아빠들의 애환엔 고개를 끄떡였으나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 글과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60여년을 나 대신 싸워왔던 재일조선인들의 고통엔 눈 감아왔다.
아이들에게 고향을 묻는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대신해 교장선생님이 웃으며 대답한다.
"재일동포의 97%는 고향이 남쪽이지요."
덧붙이는 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계좌: 신한은행 330-03-004075(예금주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사무국: 02)336-5642(www.edagawa.net)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유명인사들의 기증품 경매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옥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일부터는 종로구 원서동 비원 옆 '살롱 마고'에서 기증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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