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왜구의 反亂(反役)

한부울 2007. 4. 15. 15:46
 

왜구의 反亂(反役)


일본인들 다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현재 극한적으로 누차에 걸쳐 잘못된 발언과 망발을 반복하고 있는 정신나간 일본지도자들은 지금이라도 먼저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종족이며 역사적으로 왜구란 이름아래 도적무리가 되어 이웃인 조선민족인 한민족에게 어떠한 못된 짓을 하여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으며 또한 도의적으로 얼마나 어긋난 짓을 하였고 어떠한 파렴치한 행위를 자행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내뱉는 망언이나 망동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무지스러운 것인가를 제대로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엄중함이 있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현재에 자신들의 위치에만 만족하면서 자만에 빠져있고 과거 그들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추악하고 저주스러운 과거역사의 베일이 조금만이라도 벗겨지면 금방 더럽고 추악한 치부가 세상에 들어 날 것이 두려워 사실과 진실을 꼭꼭 눌러 숨기고 감추고 속이려고만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어리석은 짓은 일본 지도자란 작자들이 저지르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 작자들이니 우리가 하는 바른 소리와 충고는 그들의 귀에 바르게 들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있는 사실도 무조건 부정하는 버릇에 고질적인 왜구의 습성은 이미 골속까지 베어들어 지울 수도 벗어 날 수도 없는 처치에 있으며 그러한 습성을 가진 지도자들에게 진정한 자질을 기대할 수 가 없는 노릇이다.
어제나 또는 내일이나 그 이후 언제라도 우리민족 구성원 누구하나 솔직히 그들에게 바른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대소를 구분하지 않고 일본 지도자라면 모두가 사라진 군국주의 환영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는 중병에 걸려 있다.
과거 더러운 배신과 배은으로 순박하던 한민족을 눈앞에서는 속이면서 동시에 등 뒤로는 시퍼런 칼을 꼿아 무력케 하더니 곧장 그들은 자랑스런 우리민족을 뻔뻔스럽게도 대신하였고 마치 주인인냥 하극상을 하였으며 세상에 다시 없는 거짓으로 그들의 보잘 것 없는 종족 정체성을 조작하는가 싶더니 엉터리같은 신분상승으로 이어져 살인집단, 광폭집단의 거지같은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조차 거부한 제국집단은 그나마 50년도 채우지 못하고 결국 깡그리체 사라졌고 그러한 꿈이 못내 아쉬운 그들은 거지같은 제국의 꿈을 다시 한번 더 실현해 보고자 절치부심하며 깨어진 환상에서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일말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직 못다한 제국의 꿈에 메달려 궁극에는 자기 자신들까지 속이고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또 다시 우리민족의 등 뒤를 노리며 침탈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으니 그들을 짐승같은 종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사이 그들은 과거 자행하던 광폭함과 어울리지 않는 신분상승으로 너무 자만에 빠져 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번드르레한 경제력만을 믿고 잘난척하거나 또는 실제 잘 나가는 듯한 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민족이라면 남녀노소 어느 누구나 그들을 과거 우리 영향권이나 지배권영역 안에서 공생하던 조잡스럽던 왜구종족이상 보지 않으며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모든 허튼 수작을 그저 가소롭게 보고 있다.

그들이 결국 너무나도 뛰어나고 훌륭한 우리민족에게 받은 문화적 열등의식이 심리적 압박감으로 남아 깊은 상처가 되었고 그러한 피해심리를 치유하려고 철치부심 400년을 넘게 정한론을 외치며 무릿수를 사용하였지만 이젠 끝이다.

과거에는 우리민족 전체가 너무 방심하였으며 도덕적으로도 너무 큰 자만심에 이웃 하층종족인 왜구가 어떻게 도둑과 살인마 짓을 저지르며 감히 우리를 넘볼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미리 방책을 못한 사실과 솔직히 너무 방관하여 왜구종족의 습성을 깊이 감파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왜구는 어쩔 수 없는 종족이란 실체를 보고 있으며 실감나게 산 경험하고 있는 처지에 경계하고 방심하지 않고 방책만 철저하게 한다고 할 때 다시는 그러한 치욕적인 망신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짐승같은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개과천선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우리민족의 지배권에서 열등의식만 키우는 하층 종족으로서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고 또한 올바른 대우나 사람다운 취급 또한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말해두겠지만 과거 짐승같이 하찮게 취급받으며 조롱받았던 왜구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왜구 종족처럼 하던 과거 도둑습성과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행동을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 못된 버릇이 변하지 않고 있다.

진실을 왜곡하며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사실조차 부정하며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자기 국민들 특히 자라고 있는 자식, 청소년들에게는 극비에 붙이며 또는 과장하고 미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그들 자신들까지도 속이고 있는 일본인 지도자들을 볼 때 과거 조선시대 중앙조정인 조선에서 왜구들에게 선린관계를 지속시키고자한 인내와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으며 어려움도 이해가 되며 그러한 선조들의 지대한 노력에 후손입장에서 크게 칭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치를 바르게 따지지 못하는 무리에게 무엇을 더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더 바랄 수가 있겠는가?

지금도 왜구종족의 전신인 일본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물려 받은 유산처럼 그러한 몰상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한 나쁜 습성을 숨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에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에게 당당하게 내보이는 그들을 어떻게 사람으로서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존하는 모든 역사서가 과거 그들이 조작하고 왜곡하고 가필하여 남긴 침탈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한반도라면 구석구석 여기저기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려있기 때문에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도적 근성과 습성이 있었다는 왜구들의 일상적인 침탈의 역사가 다행히도 다 지워지지 않았다.

왜구들의 침탈로 인하여 발생한 조선주민들의 피해기록은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납치, 살인, 강간, 파괴, 방화 등 비인간적인 광란을 습관적으로 자행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음에 제시하는 15세기초(1400년경)에서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기 전 까지 약 200년 사이에 있었던 중앙조정인 조선과 조선의 영향권에서 피지배영역에서 존재하던 왜구들의 일상적인 관계와 중요한 사건을 되 집어 볼 때 예나 지금이나 우리민족은 끊임없이 왜구에게 아량과 배품으로 일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중앙조정으로부터 충분하게 도움을 받았던 그들 왜구들은 습성대로 자기 만족이 없으면 순식간에 무리를 만들어 칼을 빼 들었으며 배은과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면서 광란을 부렸던 짐승이었음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행동이 습관적으로 횡행하고 난무하였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그들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늘 불안하였을 것이고 평화롭지 못하였을 것이며 억지로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면서 도와 덕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바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실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러한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의 순수성을 일거에 차버리고 수차에 걸쳐 큰 반란을 일으키며 보은을 입은 조선인에게 횡포와 난동을 시도때도 없이 부리며 피지배계층이 가지고 있는 못된 악습에 의한 습성을 들어내며 참을성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막무가내식으로 행동하였으니 중앙조정인 조선으로서도 골머리가 아팠을 것이고 조정대신들은 도저히 개과천선(改過遷善)이 불가능한 특이한 종족이라고 취급하여 안타깝게도 짐승같은 대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스스로 만드는 합리적인 해결책과 절제와 인내란 생각이 전혀 없는 왜구 입장에서 욕심만 있어 오직 자기 입에 들어가는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왜구들은 칼은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근친이란 개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된 칼은 남을 쳐 빼앗는 도구가 되었으며 감정적으로 절제와 인내가 없어 살인을 밥먹듯이 하고 의와 리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가까운 이웃이 희생물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까운 지역, 그리고 가까운 나라를 손쉽게 침탈하고 강탈하는 것에 익숙하여 졌으며 해적으로 강도로 도둑신분으로 분리가 되었을 뿐  중앙조정인 조선에서 제공하는 가르침은 일반 왜구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치와 논리가 그들 머릿 속에 들어 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야만인 같은 본성만이 필요하였으며 약육강식의 논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들 일본인에게 쉽게 볼 수 있는 습성이지만 그들 판단에 득이 되지 않으면 사리도 논리도 없는 것이고 사리와 논리 대신 폭력이 있었으며 무리가 있었으며 진리와 진실은 거부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러한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지금 일본 지도자들에게 유산처럼 물려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아량 따위가 전혀 없다.

 

중앙조정인 조선은 15세기초(1400년경) 조선땅에서 물자를 얻으려는 욕구를 왜구들에게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무역의 길을 열어 주었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도주(島主)에게 조선에 대한 무역통제의 특권을 주면서 경상도 동래의 부산포 등에 정박지로 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게 하여 그들에게 무역도 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탈과 강간 살인을 자행하는 왜구들이 좀처럼 끊이지를 않자 1419년(세종1)에는 대규모 원정군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정벌하고 개항장인 3포(浦)를 폐쇄하여 버렸다. 그러자 식량 결핍을 느낀 도주 소사다모리(宗貞盛)는 조선에 다시 머리 조아리며 제발 한 번 만 용서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며 사죄하면서 통상의 길을 열어줄 것을 간청하여 하는 수 없이 1443년(세종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을 시켜 대마도에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사다모리(宗貞盛)와 계해(癸亥)조약을 맺도록 하면서 삼포(三浦)를 열어 무역을 다시 허가하고 거기에 왜관(倭館)을 두어 왜구들을 머물게까지 하였다.

삼포개항 이래 일본인들의 무역·거류가 허가되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다.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약 2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차 교만해지면서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에게도 공공연하게 압박하면서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제정(諸政)개혁의 일환으로, 반역과 반란을 다반사하고 있는 왜구 즉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1510년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사다모리(宗貞盛)에게 통고하여 삼포에서 거주하던 그들에게 철거를 요구하였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자 그들의 습관적인 불평이 늘어갔다.

그러자 3포의 왜구(일본이)들은 대마도 왜구에게 몰래 통보하여 무리를 만들어 4∼5천 명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이 때 부산 첨사 이우중과 제포첨사 김세균이가 살해되었고 한때 내이포·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웅천(熊川) 방비까지 격파 당하였으나, 조정에서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반격하여 대파하였고 3포의 (왜구)일본인거류민들을 전부 추방하였으며 반란에 참가하여 포획된 왜구들은 전부 참수하였다.

그리고 왜구들에게 뒷날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참수된 왜구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조선에 들어오는 왜구(일본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다.

이로 인하여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는 다시 수교해 줄 것을 간청해 왔다. 이에 따라 계해조약을 수정 개정하여 새로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다시 체결, 내이포(제포)만을 개항(開港)하게 하였다.

그 당시 3포라는 무역창구를 열어줌으로써 왜구의 약탈행위를 막아보려던 조선 조정의 노력은 눈물겨웠으나 왜구들의 특이한 습성 상 얻으면 더 큰 것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조선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44)· 을묘왜변(乙卯倭變, 50) 등은 조선의 선린정책에도 불구하고 왜인은 '구(寇)'라는 해적과 도둑근성을 버리지 못하였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끝내 개과천선하지 못하고 다시 반란을 꾀하였으며 이제는 대규모 무리를 만들어 본격화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1592~1598)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도발을 우리민족 지배권 내에 있는 습성 상 어쩔 수 없는 하층종족인  왜구의 난이라고 하면서 반란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일으킨 반란을 스스로 분로쿠 게이초의 역(役)이라고 하면서 수 천 년 지속되었던 종속관계를 부인하고 그들은 당연히 일어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라고 하면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