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낙랑, 누락된 한국사”

한부울 2007. 1. 9. 12:47
 

“낙랑, 누락된 한국사”

[조선일보] 2007년 01월 09일(화) 오전 12:01

식민, 혹은 강점기에 대한 역사 연구는 ‘학문외적’ 요인 때문에 항상 골칫거리다. 일례로 1910~1945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도 결국은 그 연구 대상이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사에도 이 같은 고민스런 시기가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漢) 제국이 설치한 ‘낙랑군시기’(서기전 108년~서기 313년)다. 일제 강점기처럼 낙랑에 대한 해석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일제는 “한반도는 고대에도 선진 문화(=낙랑군 등 한사군)가 이입돼서야 원시시대를 끝냈다”고 주장했다. 낙랑이라는 존재는 ‘타율적 역사발전론’의 원조격인 셈. 낙랑은 당연히 ‘중국 그 자체’였다. 주체사상으로 중무장한 북한은 “고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에는 중국세력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사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낙랑군에 대해 ‘부(副)수도’론을 들고 나온다. 중국 랴오닝성 가이저우(蓋州)에 고조선의 부수도였던 왕검성이 있었는데, 한나라는 이곳을 함락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부수도만 함락됐는데, 왜 고조선이 멸망 당했는지에 대해 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주장도 비(非) 학술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개 ‘낙랑=한나라(중국)’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낙랑실이 ‘3층 아시아관’에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영찬(39)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관이 이 같은 통설에 반기를 들어 학문적 파장이 예상된다. 그는 최근 출간한 ‘낙랑군 연구’(사계절간)에서 “한나라 사람(혹은 문화)과 고조선 사람들은 낙랑군 설치 100여 년쯤 지나 융화됐다. 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 그들이다”라고 주장한다.

반론의 근거는 발굴 결과에 대한 꼼꼼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1909년 평양 석암동고분을 시작으로 모두 88기의 낙랑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이나 유리건판 사진은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연구에 유리했다.

“낙랑이 설치된 뒤에도 고조선의 대표적 무덤형식인 목곽묘(木槨墓·나무로 곽을 만든 뒤 그 안에 관을 넣은 무덤)가 100여 년 동안 지배적인 무덤 양식이었다. 낙랑의 무덤이 모두 한나라 사람의 무덤이라면 왜 이들이 고조선 무덤에 묻혔겠는가?”

중국식 묘 양식인 귀틀무덤(목곽 바깥을 다시 곽으로 둘러싼 대형무덤)과 벽돌무덤인 전실(塼室)무덤이 서기 1세기 이후 주류가 됐어도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무덤에는 중국계 청동기나 칠기 등이 엄청나게 묻혀 중국의 영향을 실감나게 하지만, 고조선계 토기인 화분형토기와 목이 짧은 항아리도 꼭 ‘세트’처럼 함께 묻힌다. 1916년 발굴한 평양 석암리9호분은 이 지역 지배자의 무덤인데, 크고 작은 용 7마리에 허리띠바늘(교침)이 장식된 순금제 허리띠 버클이 출토됐다. 이런 스타일의 유물은 중원(中原)에서는 발굴된 적이 없다.”

오 연구관은 “고조선계 사람들이 한화(漢化)되고, 한인(漢人)들도 고조선에 토착화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몇몇 역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라는 표현도 결국은 낙랑지역의 특수성, 즉 서기 1세기 후반에 형성된 ‘낙랑문화를 이룬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

“낙랑군 설치 130여 년이 지난 서기 24~30년, 낙랑태수를 살해하고 독립세력을 형성한 왕조(王調)는 역사서에 ‘토인(土人)’으로 적혔다. 그만큼 고조선계의 힘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낙랑시기가 우리 역사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던졌든 낙랑은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신형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