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부

중국의 설명에 광개토대왕이 통곡 한다

한부울 2006. 8. 31. 14:37
 

중국의 설명에 광개토대왕이 통곡 한다


현재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앞에는 "장수왕이 그 부친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진(東晋) 의희(義熙) 10년, 즉 서기 414년에 광개토태왕비를 만들었다"라는 설명비가 세워져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내용 가운데는 영락(永樂)이라는 서기 391년부터 412년까지 쓰인 고구려 독자의 연호가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한족(漢族) 왕조인 동진(東晋)의 연호로 비의 건립연대를 표기했다. 이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당시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선비족 등 소수민족이 북방을 차지하고 한족(漢族)을 남방으로 쫓아낸 시절이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도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은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선비족에게 밀려 남방으로 도망간 동진의 연호로 표기해놓았다. 동진은 광개토대왕비가 건립 된지 불과 6년만인 서기 420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였고 이후 240년을 더 존속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동진의 연호로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표기한 이유는? 간단하다. 동진이 바로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으로 이뤄졌다"는 중국의 주장은 얼핏 보면 한족 중심주의를 폐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한족 왕조의 연호로만 광개토왕비의 연대를 표기한 것은 결국 '한족 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한편으로는 한족 중심 주의을 감추는 위장막에 불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민족 지역의 땅까지 중국의 영토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근거 만들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