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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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道]
9.중경부(重慶府)는 충주(忠州)이고,
四川省(領十一府。九直隸州。十一州。百十一縣)。
○重慶府(名渝州。領二州。十一縣)巴縣(江州附府)江津(僰溪)長壽(樂溫)永州(英井)榮昌(昌元)綦江(南平)南州(隆化)合州(赤水)湆州(漢平)銅梁(巴川)大足(昌州)壁山(油溪)定遠(不照)。
○忠州(名臨江。領三縣)酆都(南賓)墊江(桂溪)梁山(南浦)-地輿名目(一十九省)
重慶府,南宋淳熙十六年(1189年)8月升恭州置,治巴縣(今重慶市)。屬夔州路。轄境相當今重慶市江北、巴南、江津等區市。元至元十六年(1279年)改為重慶路。轄境擴大。明代洪武初復改為府。民國二年(1913年)廢。
宋代的重慶府
領縣三,羈縻州一(領縣二),故共領縣五
1.巴縣,兼府治,今重慶市渝中區
2.江津縣,治今江津縣
3.璧山縣,治今璧山縣
溱州。領縣二
1.榮懿縣,治今萬盛區東鄉壩
2.扶歡縣,治今綦江縣扶歡壩
忠县
历史悠久。早在新石器时代,人类就在这块土地 上生活、劳作、繁衍,创造了早期的忠州文化,成为华夏文明之一
长江摇篮的重要组成部分。
忠县西周属巴国地;秦属巴郡;汉置临江县,王莽时改称临江,仍属巴郡。
汉献帝时改属永宁郡;梁大同六年(540年)于县设置临江郡,属楚州;西魏废帝二年(553年)于县设置临州,辖二郡三县,临江县隶临州临江郡;唐贞观八年(634年)置忠州,以意怀忠信为名。
唐天宝初年(742年)改为南宾郡.唐乾元初年(758年)复为忠州,属山南道,州郡治地临江县;宋初名忠州南宾郡,属夔州路。
南宋咸淳元年(1265年)升为咸淳府,设府治于皇华州(今顺溪乡皇华村)管五县。
元至元二十一年(1284年)复名忠州,州治还于临江县城。
明洪武初年(1368年)以州治,临江县省入州,属重庆府。
清雍正十二年(1734年)升忠州为直隶州,1913年改忠州为忠县。
1914年归属四川省东川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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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충주목(忠州牧)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에서 빼앗아,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었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에 충주(忠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 2년 계미에는 처음에는 12목(牧)을 두었는데, 바로 그 하나가 되었다. 14년 을미에는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충주 창화군(忠州昌化軍)이라 이름하였고,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9년 무오에 충주목(忠州牧)으로 정하니, 8목(牧)의 하나이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대원(大原),【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또는 예성(蘂城)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익안(翼安)이요,【본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高宗) 42년, 갑인에 본 고을 사람이 몽고(蒙古) 군사를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현(縣)으로 승격하였다. 】부곡(部曲)이 3이니, 소잉림(所仍林)·광반석(廣反石)·감내며(甘內旀)이며, 향(鄕)이 1이니, 덕산(德山)이다.
대림산(大林山)【주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대천(大川)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청풍(淸風)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주〉 서남쪽으로 흘러 여강(驪江)이 된다.【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로 한다. 】양진연소(楊津衍所)【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덕천진(德川津)【주(州)에서 5리에 있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풍(淸風)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죽산(竹山)에 이르기 90리, 남쪽으로 음성(陰城)에 이르기 50리, 북쪽으로 원주(原州)에 이르기 40리이다.
호수는 1천 8백 71호요, 인구는 7천 4백 5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4백 40명이요, 선군(船軍)이 4백 65명이다.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9이니, 서(徐)·석(石)·최(崔)·유(劉)·강(康)·양(梁)·진(秦)·안(安)·박(朴)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견(堅)·정(鄭)이다. 외촌성(外村姓)이 3이니, 혜(嵇)·어(魚)·지(池)요, 소잉림 부곡(所仍林部曲)의 성(姓)이 1이니, 석(石)이요, 감내며 부곡(甘內旀部曲)의 성이 1이니, 노(盧)요, 익안현(翼安縣)의 속성(續姓)이 2이니, 지(池)·어(魚)요, 광반석 부곡(廣反石部曲)의 속성이 2이니, 최(崔)·안(安)이요, 덕산향(德山鄕)의 성이 2이니, 석(石)·연(延)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민간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간전(墾田)이 1만 9천 8백 93결이요,【논이 10분의 3에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팥·대추·여(黎)·뽕나무·참깨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석이[石茸]·칠(漆)·지초·느타리·주토(朱土)·돼지털·족제비털[黃毛]·종이요, 약재(藥材)는 활석(滑石)·모란뿌리껍질[牧丹皮]·인삼이요, 토산(土産)은 모과[木爪]·신감초(辛甘草)·송이[松茸]이다. 철장(鐵場)이 1이니, 주의 남쪽 말흘금(末訖金)에 있고,【중품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주의 서쪽 보련동(寶蓮洞)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주의 북쪽 월호현(月乎峴)에 있다.【모두 하품(下品)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6백 80보(步)요, 안에 우물 3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늘 마르지 않는다. 】사고(史庫)가 객사(客舍) 서쪽에 있다.【수호관(守護官) 5인, 별색(別色)·호장(戶長)·기관(記官)·고지기[庫直] 각 1인씩 있다. 사고는 본래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있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도 잃지 아니하였는데, 본조(本朝) 초기에 그 땅이 바다에 가까우므로 이곳에 옮겨 두었다. 】경원창(慶原倉)【주의 서쪽 10리 연천(淵遷)에 있는데 경상도의 공부(貢賦)를 거두어 받는 곳이다. 】덕흥창(德興倉)【경원창 북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연원(連原)과 가흥(嘉興)이요, 봉화가 4곳이니, 오성(梧城)【동쪽으로 청풍(淸風) 오현(吾峴)에, 서쪽으로 익안(翼安) 마산(馬山)에 응한다. 】·대림성(大林城)【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馬山)【서쪽 음성(陰城) 가섭산(伽葉山)에 응한다. 】·망이산(望伊山)【동쪽으로 음성 가섭산에, 서쪽으로 죽산(竹山) 검단산(儉丹山)에 응한다. 】이다. 큰 방죽[大堤]이 1이요, 작은 방죽[小堤]이 1이다.【길이 4백 80척(尺)인데, 66결(結)의 논에 물을 댄다. 】보련사(寶蓮寺)【교종(敎宗)에 붙이고, 전지 1백 50결을 주었다. 】
관할은 군(郡)이 3이니,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이요, 현(縣)이 4이니, 영춘(永春)·제천(堤川)·음성(陰城)·연풍(延豐)이다.
【영인본】 5책 625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단양군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청풍군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괴산군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음성현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연풍현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제천현
○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영춘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충주목(忠州牧)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풍속]백성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지지(地志)》
[형승]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잡고 있는 땅이다.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산천]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 길에 서성이니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데, 게으른 종 입 벌리며 헐떡여 김 연기를 토한다. 올라 가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삼산(三山)이 오색 구름 가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 기쁘기도 하네.” 하였다. 연주현(連珠峴) 주 남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연주의 선녀가 풍류산(風流山)에 놀고 혹은 이 고개에서 놀았다.” 한다. 그 골목의 이름을 지금까지 비선동(飛仙洞)이라고 일컫는다. 북진(北津)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진포(辰浦)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澶洄江)이라고도 한다.
[토산]철(鐵) 주연리(周連里)에서 산출된다. 잣[海松子]ㆍ송이[松蕈]ㆍ활석(活石)ㆍ수달(水獺)ㆍ꿀[蜂蜜]ㆍ지치[紫草]ㆍ대추[棗]ㆍ인삼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쏘가리[錦鱗魚]ㆍ석이버섯[石蕈]. 『신증』 석류황(石硫黃) 노오(老烏)ㆍ시물(柴勿) 두 골짜기에서 산출된다.
[불우]보련사(寶蓮寺)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러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영곡사(靈鵠寺) 대림산(大林山)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기대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며 공중에 걸쳐서 누각을 지었다. 밑에서 바라보면 달아맨 것 같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천 길 바위 머리에 천년 묵은 절, 앞은 강물에 임하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위로는 별(星)에 닿았으니 집이 세 뿔이 났고, 반쯤 허공에 솟았으니 다락 한 칸이로다.” 하였다.
○ 고려 진화(陳澕)의 시에, “이미 낭떠러지 구렁에 임하여 긴 소나무를 굽어보고, 다시 층층 사다리를 밟으며 여윈 지팡이를 짚는다. 도리어 우습구나, 노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조급하여, 한 번 와서 최고봉에 오르려 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옛 절이 비고 서늘하여 땅에 먼지조차 없는데, 어느 해에 애써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무릅쓰고 집을 지었는고. 그림 누각은 그림자가 남호(南湖) 물에 떨어지고, 경쇠[磬] 소리 여운은 북령(北嶺) 구름에 묻힌다. 날이 따뜻하니 갈대 시내에는 고기가 떼를 짓고, 사람이 돌아가니 버들 물가에는 학이 줄을 지었다. 중을 향하여 세상일을 말하려 하니, 단정히 앉아 말없이 냉정히 듣지 않네.” 하였다. 김생사(金生寺) 북진(北津) 언덕에 있다. 김생(金生)은 신라 사람인데,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지 못한다. 경운(景雲) 2년(711)에 났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평생토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었어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아서,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지금도 가끔 진적(眞蹟)이 있는데, 배우는 자들이 전하며 보물로 여긴다. 숭녕(崇寧) 연간에 고려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변경(汴京)에 머물 때에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들고 관사에 이르러 그림 족자를 썼다.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친필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자, 홍관이 말하기를,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으랴.” 하였다. 홍관이 여러 번 말하였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고 이 절에 있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삼았다. 덕주사(德周寺) 월악산(月岳山)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난초사(蘭草寺)ㆍ동가섭사(東迦葉寺)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고적]익안 폐현(翼安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포모대(泡母臺) 풍류산(風流山)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장(丈)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적에 장미(薔薇)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스스로 포모(泡母)라 이름하고 항상 그 위에서 놀아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 당 명황(唐明皇)이 그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보내 맞아서 궁에 들이고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상고하건대, 신라 성덕왕(聖德王) 22년(723)에 왕이 사신을 당(唐) 나라에 보내어 미녀 포정(抱貞)과 정원(貞菀) 두 사람을 바치니, 현종(玄宗)이 말하기를, “여자가 모두 왕의 고모와 자매인데, 친속(親屬)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였으니, 짐이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후하게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하였으니, 정완(貞完)은 아마 정원(貞菀)이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는 말은 심히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단월부곡(丹月部曲) 바로 단월역(丹月驛)의 옛터이다.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주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 탄촌부곡(炭村部曲) 주 남쪽 20리에 있다. 이차탄부곡(伊次呑部曲)ㆍ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주 남쪽 45리에 있다. 소잉림부곡(所仍林部曲) 주 동쪽 65리에 있다. 청풍군(淸風郡)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덕산향(德山鄕) 주 동쪽 55리에 있다. 청풍군 남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하맥곡처(下麥谷處) 주 서북쪽 45리에 있다. 상맥곡처(上麥谷處)ㆍ연탄처(淵呑處)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대조곡처(大鳥谷處) 주 서쪽 90리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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