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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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道]
8.광주부(廣州府)는 연산(連山)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廣州府(名羊城。十四縣)南海(胥江附府)番禺(熙安。附府)順德(龍潭)東莞(南頭)從化(橫潭)龍門(東澗)新寧(上川)增城(綏寧)香山(陽江)新會(盈允)三水(高安)清遠(中宿)新安(寶安)花縣(花山)-地輿名目(一十九省)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
○連州(名熙平。領二縣)陽山(陰山)連山(廣潭)-地輿名目(一十九省)
廣州,是中國古代的一個行政區劃,其範圍曾覆蓋今天的廣東、廣西兩省。
東吳政權分東漢的交州為交、廣兩州,北部為廣州,郡治在番禺(今廣州市中心),廣州的範圍橫跨今日廣西、廣東兩省,只有南部今天湛江市(廣州灣)、北海市、玉林市、欽州市範圍屬於交州,北部桂林市、賀州市、韶關市範圍屬於荊州。兩晉基本沿用了三國建置,但到了南朝後期增設了大量州置,廣州的範圍也大大縮小。
隋朝廢州置時,廣州成為南海郡。之後唐朝恢復廣州之名,但是範圍已經縮小到了今天廣州、佛山、東莞、清遠,以及惠州的部分。此後廣州之名一直沿用至今,但是其範圍已經與三國、兩晉時期的廣州有很大的區別。至民國才正式成立廣州市政府,將當時的廣府(現時的廣州老四區)定名為「廣州市」。1949年10月14日,中華人民共和國成立廣州市人民政府。
連山:连山壮族瑶族自治县
连山历史悠久,至今已有1500年历史。古为禹贡荆州之城,自南朝梁武帝天监五年(506年)置广德县,隋开皇十年(590年)改称广泽县,仁寿元年(601年)因避太子杨广之讳改称连山县,唐天宝元年(742年)改为连山郡。绍兴十八年(1148年)改称程山县,元初复称连山县,清嘉庆二十一年(1816年)为连山绥瑶直隶厅,民国元年(1912年)复连山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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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공주목◎ 연산현(連山縣)
본래 백제의 황등야군(黃等也郡)인데, 신라에서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산(珍山)에 이르기 21리, 서쪽으로 은진(恩津)에 이르기 18리, 남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진잠(鎭岑)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3백 78호요, 인구가 1천 4백 8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9명이요, 진군(鎭軍)이 2명이요, 선군(船軍)이 1백 62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송(宋)·서(徐)·손(孫)·고(高)요, 망성(亡姓)이 2이니, 임(任)·황(黃)이다. 없어진 광소 부곡(廣炤部曲)의 성이 1이니, 임(任)이요, 평천역(平川驛)의 성이 1이니, 황(黃)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고(高)이다.【아전에 입역(入役)한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3천 8백 36결이요,【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오곡·닥나무·왕골이다. 토공은 밀[黃蠟]·칠·호도·지초·대추·모과·잣[松子]·잉어·족제비털[黃毛]·종이·닥[楮]·잡깃[雜羽]이요, 약재(藥材)는 측백나무열매[栢子仁]·산골[自然銅]·인삼이요, 토산은 신감초(辛甘草)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다.【현의 동쪽 벌곡리(伐谷里)에 있는데, 하품이다. 】
성황산 석성(城隍山石城)【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4백 93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샘이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또〉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1이니, 평천(平川)이다. 개태사(開泰寺)【현의 북쪽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백제를 평정하고 큰 절을 황산(黃山) 골짜기에 세우고, 산(山)을 고쳐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며, 불소(佛疏)를 짓고 돌에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연산현(連山縣)
동쪽으로는 진잠현(鎭岑縣) 경계까지 22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35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도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19리,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8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형승]산천이 웅장 수려하다 정이오(鄭以吾)의 향교 기문이다. 땅이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 이첨(李詹)의 의창(義倉) 기문이다.
[산천]계룡산(鷄龍山) 현 북쪽 27리에 있다. 우리 태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吉地)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 하여 이를 그만두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하였던 개울과 주춧돌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황산(黃山) 일명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神劍)을 토벌하니, 신검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이 번민하고 근심하다가 등창이 발생하여 수일 만에 황산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도솔산(兜率山) 현 동쪽 15리에 있다. 옛 성터가 남아있다. 마고평(馬皐坪)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이산(尼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은진(恩津)에 이른다. 포천(布川) 현 서쪽 26리에 있다. 은진현 동쪽에서 발원하여 다시 은진현 사진(私津)으로 들어간다. 초포(草浦) 현 서쪽 20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거사리천(居士里川) 현 남쪽 10리에 있다.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용계천(龍溪川)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잠연(潛淵) 현 북쪽 15리에 있다. 공주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토산]모시[苧]ㆍ은어[銀口魚]ㆍ자연동(自然銅)ㆍ꿀[蜂蜜]ㆍ게[蟹]ㆍ지황(地黃). 『신증』 녹반(綠礬) 현 동쪽 20리 대야동(大也洞)에서 난다.
[불우]개태사(開泰寺) 천호산(天護山)에 있는데, 고려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이 있다. ○ 고려 태조 19년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어, 하내(河內)의 30여 군(郡)과 발해국(渤海國) 사람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손수 이를 썼는데 그 대략에, “생민(生民)들이 백 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 군사는 경내(境內)에 얽히어서 재난이 진한(辰韓)을 시끄럽게 하니, 사람들은 의탁해 살 길이 없고, 가옥들은 온전한 담이 없었습니다. 운운.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生民)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위로 부처님의 힘에 의탁하고, 다음에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하여, 20여 년간의 수전(水戰)과 화공(火攻)으로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천리 길 남(南)으로 치고 동으로 쳐서 친히 간과(干戈)를 베개로 삼았더니, 병신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 가에서 백제의 군사와 대진(對陣)할 제, 한 번 부르짖으니 흉광(兇狂)의 무리가 와해(瓦解)하였고, 두 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逆黨)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운운.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저희들의 죄과를 뉘우쳐 새사람이 되겠다고 곧 귀순해 왔습니다. 모(某 왕건(王建))는 그 뜻이, 간사한 자를 누르고 악한 자를 제거하며,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울어진 것을 붙들어 일으키는 데 있으므로,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고 풀 한 잎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운운.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 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官司)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나이다. 운운.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위엄으로 덮어 주고 보호하시며, 하느님의 힘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하였다. 불암사(佛菴寺)ㆍ상암사(上菴寺)ㆍ만운사(萬雲寺) 모두 계룡산에 있다. 고운사(孤雲寺) 천호산에 있다.
[사묘]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광조부곡(廣炤部曲) 현 북쪽 13리에 있다. 지금은 두마촌(豆磨村)이라 부른다. 고의창(古義倉) 현 서쪽 성내리(城內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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