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서(史書)로 본 종교(宗敎)의 변천(變遷)

한부울 2011. 3. 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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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佛像)을 천주(天主)라 했다.

[대한신보 2010.12.11]


경사문불법입중국(經史門佛法入中國) 성호사설 제18권


천하에 머리를 깎는 습속이 없지만 불교와 호인(胡人)만이 그렇게 한다. 귀신을 섬김은 불교만한 것이 없는데 호인(胡人)도 아마 축건(竺乾 부처를 이름)의 불교에서 유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호인은 중국과 교통한 것이 오래되었으나, 불교가 들어온 그 사정도 한 나라 명제(明帝) 때 라고 한다.


《왕무총담(王楙叢談)》에 “한무제(漢武帝: BC140– BC87년) 때 휴도왕(休屠王)이 그의 대중을 데리고 항복해 올때, 금으로 만든 사람의 신(神)을 얻었는데 그 길이가 한길 남짓이었으며, 그 금인상(金人像)에 제사 할때는 소와 양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분향과 배례만 한다.” 고 하였다.


또 “곤명지(昆明池)를 파다가 흑회(黑灰)를 얻었는데, 황제가 서역(西域)의 호승(胡僧) 축법란(竺法蘭)에게 물어 겁화동(劫火洞)을 태웠다.”는 말이 있고, 또 한 나라 명제가 금인(金人)을 꿈꾸고 부의(傅毅)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서역에서 그 귀신 이름을 부처라 하옵는데, 폐하께옵서 꿈꾸신 것은 아마 이것인가 합니다.” 하였으니, 대저 부의는 공상과 억측으로 말하는 이가 아닌즉, 만약 앞서 들은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서방에 부처가 있었음을 알았겠는가?


《통전(通典)》에, “천축은 후한 때에 교통했다.” 하였으니, 바로 한 나라 때의 연독국(身毒國 신(身)은 음이 연. 연독국의 구명이 천축임)이다. 그렇다면 동경으로 옮기기 전에도 연독국과 교통했다는 것을 알 만하다. 생각하건대 불법이 통한 것은 자고로 있었으나, 중국에서 일찍이 전적으로 숭상하지는 않았을 뿐이고, 명제 때에 이르러 그 불교가 크게 행해진 까닭에 고금에 전하는 것이 이같을 뿐이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문답(天學問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천주(天主)라는 칭호가 중국 글에도 더러 보이는 일이 있습니까?”대답하기를, “경전(經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를 보면, 팔신(八神)에 제사지낸 기사가 나오는데, ‘첫째는 천주(天主)로서 천제(天齊)에서 제사했다.’


《한서(漢書)》곽거병전(霍去病傳)에는 ‘원수(元狩) 1년에 휴도왕(休屠王)이 하늘[하느님]에게 제사하는 금인(金人:불상(佛像)을 얻었다.’ 하였고, 김일제전(金日磾傳:기원전 134~86년)에는 ‘휴도왕이 금인을 만들어 천주(天主)에게 제사하였다.’ 하였으니, 천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보인다. 이에 대해 여순(如淳)은 주를 달기를, ‘하늘에 제사할 때 금인(金人:불상(佛像)을 신주로 삼은 것이다.’라고 했다. 


안사고(顔師古)는 주를 달기를, ‘금인을 만들어 천신상(天神像)으로 삼아서 제사한 것인데, 지금의 불상(佛像)이 그 유법(遺法)이다.’ 《한무고사(漢武故事)》에 말하기를, ‘곤야왕(昆耶王)이 휴도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에게서 금인의 신상(神像)을 얻었는데, 상(上)이 이를 감천궁(甘泉宮)에 두었다. 금인상은 모두 길이가 1장(丈)이 넘는다. 그들은 제사 때 소나 양 등을 쓰지 않고 단지 향을 피우고 예배만 하였는데, 그 나라의 풍속은 금인상에 제사지낸다고 했다’ 


이런 여러 설들을 근거해 보건대, 안사고의 주에서는 비록 지금의 부처를 이른다고 했지만, ‘천신(天神)’이란 두 글자로 미루어 보면 부처와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금으로 천주(天主)를 만들어서 제사하기를 오늘날 이 학문을 하는 자들이 천주의 화상을 그려 놓고 예배드리듯이 한 듯하니, 이것이 고금의 종교 변화이다.


호(胡)나라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서쪽으로 서역과 교통하면서 그 종교를 받아들여 제사한 듯하다. 또 그들의 책《진도자증(眞道自證)》에, ‘예수가 태어나자 성모(聖母) 마리아가 안고 성전(聖殿)으로 가서 천주대(天主臺) 앞에 바쳤다.’ 하였으니, 천주란 명칭은 한(漢) 나라 애제(哀帝)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천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하였다.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 Medina=메디나)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슬람)이다.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이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 "서인도(西印度)에서 포사(包社 페르샤)와 아단(阿丹 아라비아) 및 서쪽으로 이미아주(利未亞洲 아프리카)와 동으로 총령(蔥嶺)의 좌우(左右)와 합살극(哈薩克) 포로특(布魯特)의 여러 유목(游牧) 지대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여러 성곽(城郭)은 모두 천방교(天方敎)를 신봉하는 데 아라비아를 천방이라 하며, 이것은 이슬람교를 말한다.


불교가 변하여 서양 종교가 되었다


(기측체의 추측록 제5권 추기측인(推己測人) 서교(西敎)의 연혁(沿革))


"서방의 교술(敎術)은 불교(佛敎)가 변하여 회회교(回回敎)가 되고, 회회교가 변하여 서양 종교(西洋敎)가 되었는데, 주재설(主宰說)로서 불교를 물리친 것은 잘 변한 것이나, 영괴(靈怪)의 설로 대중을 미혹하는 것은 잘못 변한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 잘못 변한 것을 잘 변화시키면 상도(常道)에 이를 수 있다."(기측체의 상동)


"사조제(謝肇淛(셰자오)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藏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석전류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당나라 정관(貞觀 태종(太宗)의 연호) 3년(629)에 삼장(三藏) 현장이 서역(西域) 여러 나라에 들어갔으니, 곧 서번(西番)의 천방(天方)국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석전류2 석전잡설(釋典雜說) 서유진전(西遊眞詮)에 말한 오지석후(五指石?)에 대한 변증설)


불교(佛敎)가 이슬람교로 변천했다


상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과 메디나, 페르시아[이란]가 지금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며,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그 이전에는 불교를 신앙한 불교국가이었다. 즉 기측체의는 "서방(西方)의 교술(敎術)은 불교(佛敎)가 변하여 회회교(回回敎)가 되고,"라고 기록돼 있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를 "살펴보건대, 회흘은 당(唐)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역의 나라들은 별도로 천신(天神)을 높여서 섬겼는데, 지금의 이른바 회부(回部)가 이것으로서, 한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지봉(芝峯)도 말하기를, ‘회흘은 당나라 때의 회흘이 아니고 곧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슬람교가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회교(回敎)나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되었으며 곧 대식국(아라비아)의 후예가 위구르(uighur)민족이다. 중동지역이 이슬람교의 회교국가로 변하면서 이슬람교를 호칭할 때 회부(回部)혹은 회자(回子)혹은 회회교(回回敎) 혹은 회회인(回回人)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회국자(回國子:회교를 신봉하는 나라)는 무릇 12부(部)이니, 합밀(哈密)ㆍ벽전토로번(闢展土魯藩)ㆍ합랍사랍(哈拉沙拉)ㆍ고지기[庫直]ㆍ사아이(沙雅爾)ㆍ새리목(賽里木)ㆍ배(拜)ㆍ아극소(阿克蘇)ㆍ오십(五什)ㆍ객승랍이(喀升臘爾)ㆍ대이강(蔕爾羗)ㆍ화전(和闐)인데, 또한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한다. 바다 안에 있고 동북으로 육지와 통했다. 공로(貢路:시주(공양)하러 가는 길)가 멀어서, 육지로 무릇 5개월을 지나야 북경에 도착된다.


그래서 공사(貢使:공양을 바치기 위한 사절단)가 해마다 한 번 오는데 대임자가 이른 뒤에야 귀국한다.(계산기정)  심전고(心田稿)에는 사찰에 공양(供養)을 바치기 위해 신도들의 행렬은 한 해에 한 번 오는 것과 해를 걸러 한 번 오는 것, 3년, 5년, 10년에 한 번 오는 사람이 있고, 또한 1세(世)에 한 번 오는 사람도 있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잡저(雜著)/천학고(天學考) 을사년  


서양(西洋)의 글이 조선선조(宣祖:1552~1608)말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경 석유(名卿碩儒)들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제자(諸子), 도가(道家) 또는 불가(佛家)의 글 정도로 여겨서 서실(書室)의 구색으로 갖추어 놓았을 뿐 거기서 취택하는 것은 단지 상위(象緯)와 구고(句股)의 기술에 관한 것뿐이었다.


연래에 어떤 사인(士人)이 연나라 사신들의 행열에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그에 관한 책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계묘년(1783, 정조 7)과 갑진년 여름에 재기(才氣)있는 젊은이들이 천주학(天學:성경)에 관한 설을 마치 상제(上帝)가 친히 내려와서 일러주고 시키는 듯이 제창하였다.


아아, 평생을 두고 중국 성인(聖人)의 글을 읽어놓고 하루아침에 무리를 지어 이교(異敎)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니, 이 어찌 ‘3년을 배우고 돌아와서 그 어머니 이름을 부른다.’는 말과 다르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전기(傳記)를 취하여 천학고(天學考)를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이 학문이 중국에 이른 것이 이미 오래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오래이며 지금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알레니[艾儒略]의 《직방외기(職方外記)》에 보면,


“여덕아국(如德亞國)은 옛날의 대진국(大秦國:로마제국)인데 불림(拂菻)이라고도 하니, 곧 천주(天主)가 하강(下降)한 나라이다.”마테오리치[利瑪竇이마두]의《천주실의(天主實義)》에는,“한(漢)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2년 경신년(B.C.1)의 동지 후 3일째 되는 날 동정녀(童貞女)를 택하여 태반을 빌어서 탄생하여 이름을 예수[耶蘇야소]라 하였는데, 예수는 구세주(救世主)란 뜻이다. 서토(西土)에서, 33년간 널리 교화를 펴다가 다시 돌아와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이 천주실의에 대한 기록이다…….”


살펴보건대, 대진이란 이름은 후한(後漢)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바로 전한(前漢) 때의 이간국(犂靬國)이다.《한서(漢書)》에, 무제(武帝) 때에 안식국(安息國)의 이간(犂靬) 현인(眩人)이 공물을 바쳤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오익산리국(烏弋山離國)은 서쪽으로 이간·조지(條支)와 접하였다.”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현인(眩人)은 곧 오늘날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며 오이를 세우고 나무를 심으며, 사람을 끊고 말을 자르는 등의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라.”하였다.


○《열자(列子)》에 말하기를,“주(周) 나라 목왕(穆王) 때 서쪽 끝에 있는 나라에서 화인(化人)이 왔는데, 물과 불 속으로 들어가고 쇠와 돌을 뚫고 산천(山川)을 뒤집어 놓고 성읍(城邑)을 옮기는 등 천변만화하는 재주가 무궁무진하였으며, 물건의 모양을 바꾸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었다.”


살펴보건대, 화인은 곧 현인이다. 대개 이간국이 중국으로부터 4만여 리의 거리에 있으니, 서쪽의 끝 땅이다. 그 나라 사람들이 환술(幻術)을 잘하고 재주가 많았으므로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이를 사모하여 본받았으니, 그것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통전(通典)》“《후한서(後漢書)》에 나온 대진국은 전한 때의 이간국으로서 후한 때에 비로소 교통한 것이다. 환제(桓帝) 연가(延嘉) 초에 국왕 안토니우스[安敦]가 사신을 보내어 일남(日南)의 국경 밖에서 조공을 바쳤다. 그 나라의 영토는 조지(條支)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 4만 리라 했는데 곧 장안까지 4만 리가 된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육로(陸路)를 말한 것이다. 땅이 평탄하여 사람들이 널리 분포해서 사는데, 동서남북이 각각 수천리이다. 그 나라 임금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현명한 자를 뽑아서 왕으로 세운다. 사람들의 키가 장대(長大)하고 평정(平正)한 것이 중국과 비슷한 점이 있으므로 대진(大秦)국이라 했다.


혹자는 본래 중국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갖가지 향과 금·은 등 신기한 보물, 진귀한 금수와 환인(幻人)이 있으며, 안식(安息) 및 여러 호인(胡人)들과 교역한다. 불림국(拂菻國)은 고국(苦國) 서쪽에 있는데, 대진국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의 얼굴색이 붉고 희다. 왕성(王城)은 사방이 80리이며, 사면의 영역이 각각 수천 리이고 강력한 군대가 백만이다. 이들 나라는 대식국(大食國:이슬람제국)의 서쪽경계에 있었기에 항상 대식국과 겨루다가 나중에 대식국에 병합되었다.


그 나라의 법은 돼지·개·나귀·말 등의 고기를 먹지 않으며, 임금이나 부모 등 높은 자에게 절하지 않고, 귀신을 믿지 않고, 하늘[하느님]에만 제사지낼 뿐이다. 그들의 풍속은 7일마다 하루씩 쉬는데, 그날은 물건을 사고팔지 않고 출납하지도 않으며, 오직 하루 종일 술이나 마시고 떠들며 노닥거린다.”하였다. 또 말하기를,“대식국은 파사(波斯:페르시아) 서쪽에 있는데, 사람들이 헌칠하고 장대하며 의복이 깨끗하며 태도가 조용하고 우아하다.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하루에 다섯 차례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린다. 또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禮堂)이 있다.


매 7일마다 왕이 나와서 예배를 올리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기를, 사람이 살기란 매우 어렵고 천당 길은 쉽지 않다. 간사하고 잘못된 일이나 겁박(劫迫)하고 훔치는 일, 잗단 행동이나 쓸데없는 말, 자신의 안녕을 위해 남을 위태롭게 하는 일, 가난한 자를 속이고 천한 자를 학대하는 일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그 죄가 더할 수 없이 크다.’ 한다. 무릇 전쟁이 있을 때에 싸우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면 반드시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그 적을 죽이고 무한한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온 천하가 이에 교화되어 마치 물 흐르듯이 따른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대식과 파사 여러 나라의 풍속은, 하늘[하느님]에 예배하며 저절로 죽은 고기와 묵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국(苦國)은 대식국 서쪽 경계에 있는데, 역시 대국이다. 사람들이 대개 헌칠하며, 의상이 헐렁하고 커서 유복(儒服)과 비슷하다.” 또 말하기를,“고창국(高昌國)은 그 풍속이 천신(天神:하느님)을 섬기며 불법(佛法)도 아울러 믿었다. 언기국(焉耆國)의 풍속도는 천신[하느님]을 섬긴다. 조국(漕國)은 곧 한(漢)나라 때의 계빈국(罽賓國)이다. 총령산(葱嶺山)에 천신을 받드는 자가 있어서 사당을 세웠는데, 그 의제(儀制)가 매우 화려하여 금은으로 집을 짓고 은으로 바닥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특히 옛날 파사(波斯:페르시아)국은 한(漢)나라 때는 조지(條支), 당(唐)나라는 파사(波斯) 그외 포사(包社), 소라국(蘇喇國)등으로, 불경에서는 사위(舍衛)국이며, 오늘날의 이란(페르시아)이다. 이란의 불교 관련기록을 보면, 삼봉집 제5권 불씨잡변(佛氏雜辨)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어느 때 세존(世尊)이 식사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鉢]를 가지고는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 그 성(城) 가운데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는 "우전국왕(優塡國王:于塡國)은 공교한 장인(匠人)들을 선출 회합시켜 소머리만한 향나무로 불상을 만들도록 하여 공양을 올리고 새벽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 파사국왕(波斯國王:페르시아:이란)도 공교한 장인들을 소집하여 석가여래의 형체를 일러주면서 진금(眞金)으로 불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고, 즉시 자마(紫磨 황금의 최상품을 말한다)로 석가여래의 불상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역시 5척 남짓 되었다."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북적(北狄)


중고시대에는 북적(北狄)에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국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있었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또 말하기를,“나라 안에 득실신(得悉神)이 있는데, 서해(西海) 동쪽의 나라들은 전부 이를 공경하여 섬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강거국(康居國)의 풍속은 천신[하느님]을 섬겨 떠받들어 공경하기를 매우 극진히 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골국(滑國)은 거사(車師)의 별종이다. 풍속이 천신[야훼하느님]과 화신(火神:염제신농)을 섬기는데, 매일 문밖에 나가서 화신[태양신, 농업의 신, 의약의신:염제신농]에게 제사한 뒤에 식사를 하되, 꿇어앉아서 한 번 절하고 그친다.”


상기 글을 살펴보건대, 하늘[하느님]을 섬기는 천주학[성경]은 대진[로마] 한 나라뿐만이 아니며, 예로부터 여러 나라들이 대개 다들 그러하였다. 또 말하기를,“한(漢) 나라의 반초(班超)가 연속(掾屬)인 감영(甘英)을 대진국(로마제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감영이 조지(條支:이란)에 이르니 큰 바다가 나왔다. 이를 건너서 안식(安息) 서쪽으로 가려고 하니 뱃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넓기 때문에 선풍(善風)을 만나야 석 달에 건널 수 있고, 만일 악풍(惡風)을 만난다면 3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였으므로 감영이 이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천축국(天竺國)의 신인(神人) 사율(沙律)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원년(B.C. 2)에 박사 제자(博士弟子) 경닉(景匿)이 대월지(大月氏) 사자에게서 불경(佛經)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노자경(老子經)과 더불어 공통되는 점이 있었다. 대개 옛날에 노자가 서쪽으로 관문(關門)을 나가서 서역의 천축국을 지나다가 가르쳤던 것이다.”하였다.


○《북사(北史)》에 보면, “대진국(로마제국)은 일명 이간이라고도 하는데, 조지(條支)로부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1만 리이며, 대국(代國)으로부터 3만 9400리이다. 지방이 6천리이며 두 바다 사이에 있다. 왕성(王城)은 5개성으로 나뉘어 있는데 왕은 중성(中城)에 산다. 성에는 팔신(八臣)을 두어서 사방을 주관하게 하며, 왕성에도 역시 팔신을 두어서 사성(四城)을 나누어 맡아 주관하게 하되, 일을 계획할 때는 네 성이 모여서 의논한다.


소송에서 억울함을 당한 자가 있으면, 소소한 경우에는 그 지방을 맡은 신하를 꾸짖고 중대한 경우에는 내쫓은 다음에 현명한 자를 뽑아서 대신한다. 사람들이 단정하고 장대하며, 의복과 거기(車旗)가 중국의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대진이라고 부른다.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그 나라 사람 살합팔(撒哈八)·살아적(撒阿的)·간갈사(幹葛思)가 중국에 들어왔다. 그 종교는 하늘(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데, 처음으로 그 종교를 전하였다.”고 하였다.


하느님과 부처를 함께 섬기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면,“당(唐) 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 5년에 승니(僧尼)와 대진국 목호 현신(穆護祆神)을 모두 강제로 귀속(歸俗)시켰다.”하였는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목호(穆護)는 석씨(釋氏:불교)의 외교(外敎)이다.”


마니(摩尼)의 기록은《당회요(唐會要)》에,“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에 회흘(回紇)의 중 마니가 왔으므로 절을 짓고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 종교는 천축(天竺)과는 다르다.”하였으니, 곧 이른바 명교(明敎)의 승려였던 것이다. 현(祆)은 음이 호(胡)와 연(烟)의 반절(反切)로, 호신(胡神:돌궐)을 일컫는 말이다.


살펴보건대, 대진의 풍속은 머리를 깎고 아내를 두지 않는 것은 중과 다름이 없다. 다만 하느님과 부처를 함께 섬기었으나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개황(開皇) 이후로 그 천주교가 중국에 유행하였는데, 관사(館舍)를 지어서 사는 것이 도관(道觀)이나 불찰(佛刹)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 교만 주관하게 했을 뿐이었고, 회창(會昌) 이후로는 마침내 그 종교가 끊어졌다.


○ 홍서 원시비서(鴻書原始祕書)에 말하기를, “회흘인(回紇人)들이 신봉하는 것은 오직 한분의 하느님만 알 뿐이며 기타의 신이나 부처는 모두 받들지 않았다. 비록 신이니 부처가 [동체라] 하더라도 말하자면 모두 하느님이 그들을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 예배하고 기도하며 구원하면, 구하는 도를 얻을 것인데, 신을 위하고 부처를 위하니 하늘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지 않았거늘 그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러고 보면 나를 낳고 나를 길러주는 것은 모두 하늘이다.


만물이 모두 하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받들어 모시는 것이 하늘이다. 그런데도 만약에 따로 신이나 부처를 예배한다면 이것은 마음이 두 갈래로서 사람들이 불충(不忠)이거나 불효(不孝)와 일반인 것이다. 그 교문(敎門)은 오직 하느님을 받드는 것만 알기 때문에, 매년 정조(正朝)부터 매일 일어나서 새벽과 저녁으로 복을 비는데[叫福], 벽에서 얼굴을 돌리면서 ‘눈으로는 사특한 것을 보지 않는다.’ 하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면서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는다.’ 고 했다.


바야흐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에 부르짖으면서 복을 빈다고 하고, 두 손으로 받들면서 복을 받는다 하고, 손으로 마치 물건을 받은 형상을 하여 품 안에 집어넣으면서 하늘이 복을 내려 주신다고 한다. 그런 뒤에 감사 예배를 올리는데, 이것이 규복(叫福)이라는 것이다. 세속에서 규불(叫佛)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규복루(叫福樓)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살펴보건대, 회흘은 당(唐) 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사우디아라비아)라고 불리우던 것이다. 서역의 나라들은 별도로 천신(天神)을 높여서 섬겼는데, 지금의 이른바 회부(回部)가 이것으로서, 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지봉(芝峯)도 말하기를, ‘회흘은 당 나라 때의 회흘이 아니고, 곧 옛날의 대식국(大食國;버마)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슬람교)이다.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은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풍경이 융화(融和)하고 사계절이 봄과 같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이 풍성해서 사는 사람들이 생업을 즐거워한다. 음양·성력(星曆)·의약·음악 같은 기예를 가지고 있고, 풍속이 살생을 중히 여겨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기구가 매우 정교하다. 선덕(宣德) 연간에 천방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다.


○《명사(明史)》에 보면,“신종(神宗) 만력(萬曆) 29년인 신축년 2월에 천진(天津)의 세감(稅監)인 마당(馬堂)이 대서양(大西洋)의 이태리출신 예수회선교인 마테오리치

[利瑪竇Matteo Ricci, 1552~1610]의 방물(方物)을 올렸다. 예부(禮部)가 아뢰기를, ‘대서양은 《회전(會典)》에 올라있지 않으니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없다. 또 조공[공양]으로 바친 천주녀도(天主女圖)라는 것이 이미 온당한 물건이 아니며, 주머니에 신선골(神仙骨) 등 속세의 물건들이 들어있었는데, 대저 신선이라면 하늘로 날아 올라가 버렸을텐데 어찌 뼈가 남아있었겠는가? 관대(冠帶)를 주어서 그들 나라로 돌려보내야 옳을 것입니다.’하였는데, 회답하지 않았다.”하였다.


○ 전목재(錢牧齋)의 《경교고(景敎考)》에 말하기를,“대진(大秦:로마)은 지금의 서양 오랑캐이다. 승려 중에 영리하여 문자에 통달한 자가 입술과 혓바닥에 침을 발라서 망녕되이 말을 만들었으니, 비록 명수(名數)에 대해서 잘 해석하여 취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들 행교(行敎)는 서역 오랑캐들의 것에 불과하다. 천지·일월·수화(水火)에 관한 여러 신(神)들은 분명 축교(竺敎:불교)의 한 지파로서, 그 중에도 가장 용렬한 하승(下乘)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교)란 서사(西士) 경정(景淨)이 지은 비문이 있다. 그의 책 《진도자정(眞道自訂)》에 기록하기를, 명나라 천계(天啓) 3년(1623년)에 관중(關中)에서 땅을 파다가 허물어진 담장 밑에서 비석 하나를 얻었는데, 비에 성교(聖敎;성경)의 교리를 간략하게 기록돼 있고, 성교의 인사(人士) 72인이 새겨서 전하였다.


당(唐) 정관(貞觀) 9년[635년]에 중국에 들어왔으며, 비석을 세운 때는 당 건중(建中) 2년[781년] 1월에 해당된다.’ 그러니 전목재가 찬술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전목재는 당시의 사람으로서 서사(西士)와 종유(從遊)하여 이에 대해서 잘 알았을테니, 그의 말은 더욱 믿을 만하다 하겠다.


○ 청(淸)나라의 선비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말하기를,“대진국은《후한서》 서역전(西域傳)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바다 서쪽에 있고 그 나라 영토는 사방 수천리이며 4백여개 성이 있고 복속된 작은 나라가 수십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천축국은 서쪽으로 대진국과 통했다.’ 지금 불경에 모두 제(題)하기를, ‘대진의 불경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요흥(姚興)이 세운나라 이름이니 잘못된 것이라.”하였다. 또 말하기를,“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719년]에 토화라(吐火羅) 국왕이 천문(天文)을 해독한 것을 바쳤는데 대모사(大慕闍)라는 사람은 물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법당(法堂)을 하나 설치하고 본교(本敎)의 교리에 따라서 공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의 마테오리치의 천주당(天主堂)과 비슷한 것인데 현종 시대에는 시행될 수 없었으니, 어찌 당시 조정에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말은 역시 천주설(天主說)이 그르다는 말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말하기를,“대서국(大西國:이테리)에 마테오리치란 자가 있었는데, 바닷길을 나선지 8년만에 8만리의 파도를 건너서 동월(東粤)에 와서 10여년을 살았다. 그가 지은《천주실의(天主實義)》의 첫머리에서 천주가 처음으로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했다.


안양(安養)도리에 대하여 논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금수와는 크게 다른 것을 논하고, 그 다음으로 불교에서 사람이 육도(六道)에서 윤회한다는 말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천당과 지옥이 선악의 과보(果報)임을 변파(辯破)하고, 끝으로 사람의 품성이 본래 선하여 천주를 공경하여 받드는 뜻을 논하였다.


그들 나라의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고 부르는데, 장가를 들지 않기 때문에 세습하여 잇는 일이 없고 현명한 자를 택하여 세운다. 또한 그들의 풍속이 우의(友誼)를 중히 여겨 사사로이 저축하지 않으며,《중우론(重友論)》을 지었다. 초굉(焦竤)이 말하기를, ‘서역의 리치군[利君]이「벗이란 제2의 나다.」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하였다. 이마두의 자세한 것은《속이담(續耳譚)》에 나타나 있다.”


○ 성호선생의《천주실의》발문(跋文)에 대략 말하기를, “‘천학실의’를 지은 이마두(利瑪竇)는 구라파(歐邏巴:이태리) 사람인데, 만력(萬曆)연간에 예수회[耶蘇會]의 친구인 양마락(陽瑪諾)·애유략(艾儒略)·필방제(畢方濟)·웅삼발(熊三拔)·방적아(龐迪我)등 몇몇 사람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3년을 나그네로 지내면서 비로소 그 학문에 통달하였다.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높이고 있으나 천주는 곧 유가에서 말하는 상제(上帝)이고 경건히 섬기고 두려워하며 신봉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을 들어서 권면하고 징계하며 널리 돌아다니면서 인도하여 교화하신 것은 예수[耶蘇]님이다.

예수란 서국(西國)의 구세주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란 이름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중고(中古)시대부터였는데, 순박하던 인심이 차츰 각박해지고 성현(聖賢)이 떠나가버려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은 날로 늘어나고 이치(天理)를 따르는 자들은 점점 드물어 갔으므로 이때 천주[야훼하느님]가 큰 자비심을 발하여 친히 내려와서 세상을 구제하게 된 것이다.


동정녀(童貞女)를 택해서 남녀간의 교감(交感)도 없이 태반(胎盤)을 빌려 여덕아국(如德亞國:로마제국, 이스라엘)에 강생(降生)하고는 이름을 예수[耶蘇]라 하였고, 33년간 세상을 널리 교화한 뒤 죽어서 다시 부활한 후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예수교가 마침내 구라파 여러나라에 전파되었는데, 예수가 살았던 때는 1603년전이 된다.


이씨(利氏:이마두)가 중국에 와서 수십종의 책을 지었는데,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펴서 운행을 계산하여 역법(曆法)을 만든 우수함은 일찍이 중국에 없던 바이다. 그렇지만 그가 축건(竺乾)의 불교를 배척한 것이 대단한 일이기는 하나 필경에는 자신의 교도 환망(幻妄)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다.


중국사람들이 한(漢)나라 명제(明帝) 이전까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모두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어찌 유독 윤회설만 잘못된 것이고 천당과 지옥에 관한주장은 옳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 천주가 지상의 백성들을 사랑하여 인간 세상에 환생(幻生)해서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말해주기를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나라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어찌 한정 돼 있겠는가.


그런데 한 사람의 천주가 두루 다니면서 깨우쳐 주려면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 또 구라파의 교를 전해 듣지 못한 구라파 동쪽의 사람들에게는 어찌하여 구라파처럼 온갖 영이(靈異)스러운 천주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온갖 영이한 자취들이 또한 마귀에 덮어 씌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서국(西國)의 풍속 또한 급속히 변하여 길흉의 응보를 점점 믿지 않게 되자 부득이 천주경(天主經)의 가르침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의《시서(詩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설을 보태어서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며 그 이후의 허다한 영이의 자취는, 저들이 이른바 마귀나 광인(誑人)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다.


대개 중국에서는 사실의 자취에 대하여 말하므로 자취가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이 믿지 않고, 서국(西國)은 허환(虛幻)의 자취에 대하여 말하므로 그 자취가 어지러울수록 어리석은 자들이 더 미혹에 빠져드니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마귀에 대한 미혹이 이와 같은 것은 또한 천주교가 이미 사람의 마음에 고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에야 중국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천당이나 지옥, 그리고 전세(前世)의 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 서사(西士)들이 탐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고 통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없으면서도 그 고착된 고정 관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살펴보건대 선생의 말이 이와 같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공부하는 자들이 간혹 ‘선생도 일찍이 이것을 배웠다.’ 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며,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스승을 무함(誣陷)하는 죄에 빠져들어 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그 학술의 차이점을 문답(問答)으로 정리한다.[대한신보-박병역기자 201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