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고려 교주도(交州道)는 화하남방지역의 일개주였다.

한부울 2010. 8. 15. 17:39

교주(交州)는 한어자료에

交州華夏南方一個州,建於大漢末期。管地時大時細,嶺南地方

대륙화하남방에 하나의 주라고 했으며 한(漢)代 말엽에 세워져 管地로 크게 나누어졌으며 보통 영남지방을 말하였다고 한다.

고려 교주도가 대륙화하남방이라고 한 사실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조선(朝鮮)편에 이르기를 경기의 동쪽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강원도는 고려 때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고,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였다.

 

한반도 대관령(大關嶺)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높이 832m로, 영동고속도로가 대관령 터널로 가로질러 지나간다.

고려 때 경기가 어디였을까?

현 반도 지형상황으로 보아서는 교주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가 맞물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경기 동편이 강원도라 했으니...강원(江原)은 크고 작은 수많은 강(江)이 시작되는 水源池帶를 말한 것이다.

대륙수원지는 티벳 청장(青藏高原)고원이다.

黄河源、长江(金沙江)源、란창(澜沧)江源、노(怒)江源、아로장포(雅鲁藏布)江源(合称五江源) 즉 모든 물이 생성되는 발해(渤, 發)라 추측되는 곳 

그곳에서 거대 5대강이 발원한다.

그렇다면 경기는 티벳 왼쪽에 있어야 한다.

물론 조선중기와 후기 들어 영역변천에 따라 지명도 이동 (以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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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州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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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京畿) 교주도(交州道)의 철원(鐵原)ㆍ영평(永平)ㆍ이천(伊川)ㆍ안협(安峽)ㆍ연주(漣州)ㆍ삭녕(朔寧)을 좌도에 예속시키고

충청도(忠淸道) 공민왕(恭愍王) 5년(1351)에 충청도(忠淸道)로 일컫고, 신우(辛禑) 말년에 본도의 평창군(平昌郡)을 떼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4년(1395)에 양주(楊州)ㆍ광주(廣州)의 관할인 군ㆍ현은 경기(京畿)에 붙이고,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의 관할인 군ㆍ현은 그대로 충청도(忠淸道)로 일컬어 각각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

강원도(江原道) 원종(元宗) 4년에 명주도는 강릉도(江陵道)로, 동주도는 교주도(交州道)라 고쳐 불렀고, 충숙왕 원년(忠肅王元年)에는 교주도를 회양도(淮陽道)라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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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林下筆記) 제11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팔도(八道)의 연혁(沿革)

강원도(江原道) 영동(嶺東)

주나라 때는 예(濊)의 땅으로서 강릉(江陵)을 수도로 하였고, 한(漢)나라는 창해군(滄海郡)을 두었으며, 뒤에 신라로 편입되어 명주소경(溟州小京)을 두었다. 고려에 들어와 강릉도(江陵道)가 되었는데, 혹은 삭방도(朔方道)라고도 한다. 고려 말에는 교주도(交州道)에 합하였고, 본조에서는 영동과 영서를 합하여 강원도로 하였다.

강원도 영서(嶺西)

주나라 때는 맥(貊)의 땅으로서 춘천(春川)에 도읍하였고, 한(漢)나라 때는 창해군(滄海郡)에 예속되었다. 진(晉)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가 삭주(朔州)를 두었는데, 뒤에 궁예의 근거지가 되어 철원(鐵原)을 수도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가 교주도(交州道)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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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0권  

지리고(地理考) 10

고려(高麗) 1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종 초기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4도호부, 8목을 설치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5도, 양계로 정하였는데, 5도는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이고, 양계는 동계(東界), 북계(北界)이다. 총 4경(京), 8목, 15부, 129군, 335현, 29진(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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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1권  

지리고(地理考) 11

고려(高麗) 2

○ 교주(交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은 동계교주도권과사(東界交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교주는 지금의 회양부(淮陽府)이다.

○ 춘주(春州)ㆍ동주(東州)ㆍ화산(禾山)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3년(1253) 12월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화산(禾山), 동주(東州), 춘주(春州)를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춘주는 지금의 춘천부이고, 동주는 지금의 철원부(鐵原府)이다. 화산(禾山)은 바로 화산(花山)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홍천(洪川)과 김화(金化)의 고려 때 별호가 화산(花山)이다.

○ 이주(伊州)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 3년에 그의 동생인 야굴왕(也窟王)으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의 동계(東界)로 들어가게 하고,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북계(北界)로 나아가게 하였다. 몽고의 군사가 대이주(大伊州)에 주둔하고서 옛 화주(和州)를 향해 나아가자, 고려 사람들이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버티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주(伊州)는 바로 이천(伊川)의 잘못된 표기이며, 이천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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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교주도(交州道) 도호부 2ㆍ군 3ㆍ현 23을 거느리게 하였다. ○ 명종 8년 무술에 삭방도에 소속된 춘주(春州) 등의 주와 현으로 춘주도(春州道)를 만들었다.○ 뒤에 동주도(東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元宗)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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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계미 10년(1223), 송 가정 16년ㆍ금 원광 2년ㆍ몽고 태조 18년

○有旨,兩界五道鎭兵,法席供費,皆出於民,是欺佛欺天,何福之有,遣中使,出內庫銀甁三百口,行之

○ 왕지(王旨)에, "양계(兩界) 5도(五道)의 병화를 진압하는 법석(法席)에 쓰이는 공비(供費)를 모두 백성에게서 갹출하는 것은, 부처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내고(內庫)에 있는 은병 3백 개를 내어 행하게 하였다.

양계(兩界) 5도(五道) : 양계(兩界) 는 동계(東界) 와 서계(西界) 이니, 동계는 지금의 함경도 방면이고, 서계는 지금의 평안도 방면이며, 5도(五道) 는 양광도(楊廣道) ·교주도(交州道) ·충청도·천라도·경상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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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7상  

기사년 현종 20년(송 인종 천성 7, 거란 성종 태평 9, 1029)

○ 이해에 여러 도(道)의 전운사(轉運使)를 없앴다.

국초(國初)에 여러 도에 전운사(轉運使)를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없앤 것이다. 이로부터는 오도(五道)와 양계(兩界)를 정하였는데 관내(關內)와 중원(中原)ㆍ하남(河南)을 합하여 양광도(楊廣道)로 하고, 영동(嶺東)ㆍ영남(嶺南)ㆍ산남(山南)을 합하여 경상도(慶尙道)로 하고, 강남(江南)ㆍ해양(海陽)을 합하여 전라도(全羅道)로 하고, 삭방(朔方)을 교주도(交州道)로 하고, 관내(關內) 소관인 황해(黃海) 등지를 분할하여 서해도(西海道)로 하고, 대령(大嶺) 동쪽으로부터 남으로 평해(平海), 북으로 등주(登州)에 이르기까지를 동계(東界)라 하고, 패수(浿水) 서쪽은 북계(北界)라 하였다. 적현(赤縣) 6, 기현(畿縣) 7은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하게 하였으며, 모든 도(道)에는 안찰사(按察使)를 두어서 통솔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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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2권  

지리고(地理考) 12

조선(朝鮮)

○ 경기의 동쪽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원도의 치소는 강릉부(江陵府)로, 국성의 동쪽에 있다. 본디는 예(濊), 맥(貊) 지역이며, 한(漢)나라 때에는 임둔군(臨屯郡)의 경내였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오성군(忤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간성(杆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평해군(平海郡), 통천군(通川郡), 영월군(寧越郡), 송악군(松岳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기 개성부의 옛 호칭이다-, 정선군(旌善郡), 고성군(高城郡)이고, 부가 5개로 강릉부(江陵府), 회양부(淮陽府), 산척부(山陟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삼척(三陟)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삼보(三步)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양양부(襄陽府), 철원부(鐵原府)이고, 주가 4개로 원주(原州), 강주(江州)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괴주(槐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괴산현(槐山縣)으로, 충청도에 속한다-, 명주(冥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명주(溟州)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강릉의 옛 호칭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이고, 현이 10개로 평강현(平康縣), 안창현(安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고성군(高城郡)에 병합되었다-, 기린현(麒麟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기린현(基麟縣)으로, 뒤에 춘천부에 병합되었다-, 주천현(酒泉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원주에 병합되었다-, 단성현(丹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에 속한다-, 인제현(麟蹄縣), 울진현(蔚珍縣), 서화현(瑞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춘천에 병합되었다-, 흡곡현(歙谷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강원도는 고려 때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고,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였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원주에 있다. 대도호부 1개, 목 1개, 도호부 7개, 군 5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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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23권  

[시(詩)]

[十月上田于江原道] 시월에 상이 강원도에서 사냥을 하다


舊日交州道 그 옛날 교주도라 부르던 곳

如今草木蕃 지금은 초목이 하도 번성하여

兟兟麋鹿藪 우물거리는 미록들의 숲이요

蕩蕩漆沮原 광대한 칠수 저수의 언덕이로다

豈獨荒爲戒 어찌 지나침만 경계할 뿐이리오

其如駭不存 놀란 백성 안존하지 못함을 어찌하랴

行間書未獻 항오 사이에서 글을 올리지 못하니

慚愧病文園 병든 효문원령에게 부끄럽구나


十月雷兼雨 시월달에 천둥과 비를 겸했으니

徂東羽獵時 동쪽에 가서 사냥을 하던 때로다

翠華霑欲盡 임금의 깃발은 모조리 젖어 들고

畫角澁難吹 뿔피리는 막히어 불어지지 않아라

巵酒三軍喜 잔술을 마실 땐 삼군이 기뻐했으나

霜風萬馬癡 서리 바람에 만마가 완둔해졌네

俄傳良將蹶 이윽고 양장의 비보를 전해 오니

天意亦堪知 하늘의 뜻을 또한 알 만하구려


이 때 이상(二相) 어유소(魚有沼)가 행재소(行在所)에서 갑자기 죽었다.


병든 효문원령에게 부끄럽구나 : 병든 효문원령(孝文園令)이란 곧 한(漢)나라 때 효문원령이 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소갈증(消渴症)을 앓았으므로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천자(天子)를 따라 장양궁(長楊宮)에 이르러 사냥을 하였던바, 이 때 천자가 한창 스스로 웅시(熊豕) 등의 야수(野獸)를 쫓아 잡기 좋아하였으므로, 사마상여가 상소(上疏)하여 천자를 간(諫)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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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州


交州華夏南方一個州,建於大漢末期。管地時大時細,嶺南地方


史[編輯]大漢 [編輯]永和六年(141年),交阯太守周敞要求立州,不過朝延傾過唔畀,周敞做咗交阯刺史。


建安八年(202年)立,交阯刺史張津同交阯太守士燮向皇帝劉協要求立州,皇帝准,叫交州,張津做咗州牧。交州個名就係由交阯來。交州管七郡五十六縣,即係南海郡、蒼悟郡、鬱林郡、合浦郡、交趾郡、九真郡同埋日南郡。


未立交州之前交阯刺史治喺羸������縣,元封五年(公元前106年)搬到蒼梧廣信縣。建安八年立州都喺廣信縣,建安十五年(210年),孫權派兵入主交州,移州治到番禺縣。


吳國 吳國黃武五年(226年),拆咗南海、蒼梧、鬱林三郡出來,另立廣州。交州淨返交阯、日南、九真、合浦四郡。之不過,無耐又併返入交州。赤烏五年,置返珠崖郡。到咗永安七年,三郡又劃返做廣州。孫皓做皇帝時,交州立多三郡,即係新昌、武平同九德。

蜀國 蜀國任李恢做建寧太守,領埋交州刺史。

大晉  大晉平蜀,用蜀國建寧太守霍弋領交州。平吳後,將珠崖郡撥入合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