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수호

독도는 조선땅-지속적으로 우기는 왜구들의 위기감은?

한부울 2010. 4. 14. 14:50

차제에 왜구 일본지도자들이 아무리 무도하고 근원과 개념이 없는 허접한 집단의 날강도 같은 구성원이라고 하지만 왜 이처럼 뻔한 것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우기며 진실자체를 스스로 속이려하는지 생각해본다.

무엇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못된 근성에서 나온 노략질근성이다.

즉 탐나는 것은 무조건 다 빼앗으려 드는 근성말이다.

지금도 일본 왕실 보물창고에는 약탈하고 도둑질한 수많은 역사유물들이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사라진 조선국보, 일본 왕실에 있다-서릉부(書陵部)와 정창원(正倉院)

http://blog.daum.net/han0114/17049828 

역사적으로 따져서도 그들은 이러한 못된 근성으로 삼한(三韓)을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고 반성도 뉘우침도 없이 하찮은 명줄만을 유지한 무도하고 짐승같은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뿌리깊은 문화적 열등감에서 나오는 위기감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전부 도둑질한 문화, 탈취한 문화, 배껴 모사한 문화일 뿐이지 스스로 개척하고 창조하고 만든 문화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그들 스스로는 모른다 할 수 없다.

세번째는 바로 대륙조선이란 실체를 감추고 숨김으로서 발생될 수 있는 심각한 오류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대륙조선 실체를 지금이라도 인정하면 그들 종족은 갈곳이 없어진다.

대륙조선의 영역이 대마도 뿐만 아니라 열도 전체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도는 애초부터 대륙조선영역이라고 하여도 대륙조선 실체가 없는 현실이니까 대륙조선 영역에서의 독도 위치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대륙조선의 실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열도와 대마도가 그들의 땅처럼 굳어지는 것이고 세계인들이 그렇게 인식 되고 있는 현실에서 열도 근방에 근거하는 모든 것을 병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심리 상태가 아닌가 한다.

그러한 오류을 바탕으로 턱도 없이 동해(한국해가 여러 가지 면에서 타당함에도)를 일본해라고 고집하는 것이고 일본해란 근거속에서 독도역시 일본해 내에 있다고 그들의 것이라고 일단 주장해놓고 그들만이 의도하는 정치사안으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우겨되고 사실처럼 만들려 하는 고도의 수단에서 나온 노략질 심보가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어느날 갑자기 대륙조선이란 실체가 들어 날 경우 그들이 가진 영역에서 주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니 굳이 그들의 영역을 따진다면 열도를 취하기 위해 서세와 입을 맞추고 버리다시피한 동남아시아 아열대 어느 곳을 다시 자기 영역이라고 다시 우겨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소말리아 집단처럼 여기저기 해적 해구무리가 되어 흩어져 살았던 스리랑카, 네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일부, 베트남일부, 필리핀일부, 그리고 자바일부에서 그들의 영역적인 근거를 찾으려하고 아마 그렇게 주장하고 나설 수도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들이 동남아를 점령한 것도 다 그런 이유 연장선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신 지금 열도 영역에서는 그들 땅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비켜나야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열도에서 그들 종족이 역사성을 빌어 온전하게 발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결국 근세기에 왜구란 종족이 교활한 수단으로 세계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서세에 알려지기 전까지 뚜렷한 근거지도 없이 떠돌이, 난민, 집시 신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절박함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저변에 심리적으로 깔려 존재한다고 보인다.

그러한 절박함이나 위기감이 고급정보를 취하지 못하는 일본 대중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느낌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알고 인지하고 있는 일부 상층계층과 지도계층은 이러한 결과를 절감하며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독도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꼴 같지 않는 왜구들의 고약한 심리에 벌거벗은 모습이다.

 

한편 우리도 그들처럼 한다면 열도와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당장 주장하고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듯한 사리분별력과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과연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배율적인 면을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하여서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것을 무엇이든 찾을 수만 있다면 찾아 그들에게 우리의 아픈 과거를 되 씹어 볼 수 있도록 기회도 주어야 한다.

동시에 뜨거운 회한(悔恨)과 반성의 피눈물이 바다를 이루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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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조선땅..日지도 첫 공개

[연합뉴스]2010-04-01 14:51

 


1903년 일본 국가기관인 제국육해측량부에서 독도를 조선영토로 표시한 '일로청한명세신도' 지도가 공개됐다. 청일전쟁으로 취득한 대만은 파란선 내 일본영토에 포함됐으나 독도는 노란선 내 조선영토로 표시됐다. <영남대 독도연구소> 2010.4.1


영남대 독도연구소 "日정부가 한국땅 인정한 것"


일본이 초. 중. 고교의 모든 사회과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가운데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일본 국가기관 편찬지도가 최초로 공개됐다.


영남대 독도연구소(소장 김화경)는 1903년 일본 제국육해측량부에서 편찬한 '일로청한명세신도(日露淸韓明細新圖)'를 1일 공개했다. 이 지도는 10여년째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유성철(51.대구시 동구)씨가 작년 연말 입수해 최근 독도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것이다.


지도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정확한 척도로 세밀하게 그렸고 일본 측에서 일컫는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를 조선계(朝鮮界.조선의 영토)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했다. 특히 독도와 오키(隱岐)섬을 중심으로 같은 거리에 한. 일 양국의 국경선을 그어 당시 일본 정부가 독도를 대한제국의 동쪽 끝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냈다.


반면 지도에서 대만은 일본계에 포함됐다.


김화경 독도연구소장은 "메이지 26년 제작된 이 지도는 일본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취득한 대만을 자국영토로 공식화하는데 목적을 둔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 측은 스스로 국경선을 그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증거가 있는 마당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 국가기관 지도에 '독도는 한국령' (경산=연합뉴스) 홍창진 기자 = 1903년 일본 국가기관인 제국육해측량부에서 한. 일 양국간 바다영토를 국경선으로 나타내면서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일로청한명세신도' 지도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영남대 독도연구소> 2010.4.1


한편 교육과학기술부 지정 정책중점연구소인 영남대 독도연구소는 2008년부터 9년간 국비 지원 하에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학술연구와 정책개발을 수행하고 있으며 독도연구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다.


(경산=연합뉴스) 홍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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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미국의 모순된 조치가 독도 갈등에 불을 지르다

[중앙일보] 2010년 04월 12일(월) 오전 00:19


1904년 9월 일본은 곧 다가올 러시아 발틱 함대와의 결전에 대비해 울릉도에 두 개의 망루를 세웠다. 이듬해 1월 일본은 2년 남짓 자행된 어부 한 사람의 무단거주와 조업이 국제법상 점령에 해당한다며 독도를 우리의 품에서 앗아갔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그 종언을 고할 무렵 전후 일본 영토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 방침이 천명된 카이로 선언(1943년 12월)을 통해 미국·영국·중국은 일본의 영토를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선언의 정신이 지켜졌다면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영토 분쟁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점령 직후 독도를 한국령에 포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일 점령정책을 펼치며 일본의 영토로 인정하는 모순된 조치를 취해 두 나라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 구역을 설정하여 일본 선박 및 승무원은 금후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있는 독도의 12해리 이내 수역에 접근하지 못하며 또한 그 섬에 어떠한 접근도 하지 못한다.” 46년 6월 22일 훈령 1033호에 의해 독도수역에서 일본의 어로 활동을 금지하는 ‘맥아더라인’이 그어진 후 미국이 대일 강화조약을 위해 47년 3월부터 49년 11월까지 만든 5차례의 초안 모두에 독도는 한국 땅으로 명시되었다. “리앙쿠르트암(Liancourt Rocks,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며,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더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49년 11월 맥아더의 정치고문인 시볼드의 보고가 있은 후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누락시켰다. “미국의 정보에 의하면 리앙쿠르 섬은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 번도 없고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관할 하에 있었다.” 51년 8월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의 독도 주권 요구를 일축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한 달 뒤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되는 점령지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후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독도 귀속 문제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라인’을 대체하는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지켰지만, 그때 우리가 대미외교에서 일본에 완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으로 빛난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지지해줄 국제사회의 여론 조성이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