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위구르 지역 이슬람 전파과정과 역사

한부울 2009. 6. 27. 18:24
中 위구르 유혈시위로 140명 사망 http://blog.daum.net/han0114/17048914

美, 위구르 사태에 우려. 유감 표시 http://blog.daum.net/han0114/17048926

 

위구르 지역 이슬람 전파과정과 역사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아랍 이슬람교도들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지역)를 이슬람화시킨 후1), 중앙아시아 스텝의 서쪽과 경계를 같이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 아랍 이슬람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해서는 전쟁을 통해 지배권을 확립하려 들지도 않았고, 포교를 목적으로 직접 포교자를 파송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계 무역 상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는 그 전까지 이슬람의 포교 방법-한 지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8세기 말쯤에는, 서투르키스탄(서부스텝,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파미르 고원의 서쪽지역)의 지배권이 아랍 압바스 왕조(아랍인)에서 페르시아(이란인)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슬람 왕조였던 이란계(페르시아계) 사만 왕조는 상인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카를룩2)(당시 서투르키스탄에 살고 있던 투르크족 일파. 이 때 위구르족은 지금의 외몽골 지역에서 오르혼위구르제국을 이루고 있었음. 그러므로 위구르족은 아직 이슬람교를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카라한(Kara Han)조는 “중앙아시아”에 건설된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국가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는 볼가 불가르국이다) 그러나 카라한 왕조는 위구르인만으로 이루어졌던 거 같지는 않다. 현재 외몽골 지역에 위치했던 위구르 제국(742-840)이 붕괴된 후 서진한 위구르인들이, 이미 그 곳에 살고 있던 다른 투르크족들-카를룩, 야으마, 치길 등-과 섞이면서 함께 건설한 왕국이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고 동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지역, 파미르 고원의 동쪽지역) 지역에는 두 개의 새로운 정권이 거의 동시에 출현하게 된다. 하나는 투르판 지역에 중심을 둔 고창회홀칸국(860-1284)(또는 카라호자 왕조)이고, 다른 하나는 카쉬가르에 중심을 둔 카라한 왕조(840-1230)이다. 투르판 지역의 고창회홀칸국(카라호자 왕조)은 위구르인들의 왕조였음이 틀림없으나, 카쉬가르 지역의 카라한 왕조는 상술한 바와 같이, 위구르 민족 뿐 아니라 여러 다른 투르크 민족이 섞여서 이루어진 왕조였다.  


카라한 왕조는 세 번째 칸(왕)인 쑤툭 부그라한이 무슬림이 된 이래, 960년 그의 아들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중앙아시아 최초의 무슬림 국가가 되었으며, 이 왕조의 중심지였던 카쉬가르는 이후 동투르키스탄(현재 신강지역, 파미르고원의 동쪽)을 이슬람화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1042년 트란속시아나와 페르가나 지역은 서카라한조, 동투르키스탄 지역은 동카라한조로 동서 두 개의 나라로 나뉜 후, 서카라한조(사마르칸드 중심)는 페르시아계 타직 이슬람 문화권의 영향하에 들어갔고, 동카라한조(카쉬가르 중심)는 위구르-중국 문화권의 영향하에 있게 되었다.


쑤툭 부그라한(재위 926-955)은 9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초까지(840-1230) 천산산맥 남부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던 카라한왕조의 3번째 칸이었다. 그는 칸위에 오르기 전인 910년 경에 아투스에서 이슬람교 교의를 받아들여 무슬림이 되었으며(그래서 그의 무덤이 아투스에 있다), 그의 아들은 칸위를 이어받아 960년에 이슬람교를 카라한조의 국교로 선포했다. 이로써 카라한조는 “중앙아시아”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되었다. 카쉬가르는 카라한조의 2대 중심지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카쉬가르는 11세기부터 새로운 문화, 즉 투르크족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부터 만들어낸 투르크-이슬람 문화(또는 위구르-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고증이 가능한 카라한조의 첫 카간은 빌게 퀼 카디르 한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건국 초기였던 당시 카라한 왕조에는 두 개의 정치적 중심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중앙아시아의 발라사군(현재 토크막)에서는 그의 큰 아들 바지르 아리실란한이 다스렸고, 다른 하나인 카쉬카르에서는 둘째 아들 오굴착이 다스리고 있었다.(카라한 왕조의 왕들은 여름에는 발라사군에서, 겨울에는 카쉬카르에서 머물며 왕조를 다스렸다. 왜? 카쉬가르가 더 남쪽이라 따뜻하니깐~) 쑤툭 부그라한은 이와 같이 퀼빌게 카디르한의 손자이며, 바지르 아리실란한의 아들이고, 오굴착의 조카였다. 


바지르 아리실란한이 죽은 후, 쑤툭이 한(왕)의 직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려 숙부인 오굴착이 쑤툭이 성년이 되면 왕위를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대신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쑤툭이 16세가 된 후에도 숙부가 왕위를 내놓지 않자, 쑤툭은 힘을 키워 왕위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이 때 카쉬가르에서 카라한조를 다스리고 있었던 오굴챡은 중앙아시아의 사만 왕조(현재 이란 지역)와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영토싸움이기도 했지만 종교싸움이기도...사만 왕조는 이슬람교 왕조였고, 오굴챡은 신실한 불교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왕조로서 내부의 파벌투쟁이 격렬한 상태였다. 이 때 사만 왕조의 한 왕자(앱부 내씨르 사마니)가 카쉬카르에 사업가 신분으로 망명했는데, 오굴착은 그를 사만 왕조와의 전쟁에서 유리하게 써먹을 작정으로 그를 비호하여 카쉬카르의 북부지역인 아투스에 주재시켰다.


910년, 쑤툭은 앱부 내시르 사마니의 영향 하에 아투스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무슬림이 되었고, 같은 앱부 내시르 사마니의 도움으로, 쑤툭은 자신의 최초의 무슬림 군대를 지휘하여, 숙부의 왕궁을 공격, 카쉬가르를 점령하였다. 그는 926년 25세의 나이에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하여 쑤툭 부그라한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수툭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것은 칸위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야망이 크게 작용했을 듯. 개종하자마자 바로 그 해에 오굴착을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음)


제가 읽은 책에 의하면 “앱부 내시르 사마니"가 장사꾼으로 카쉬에 왔고, 사마니 왕조의 왕자 였다고만 언급이 되어 있는데, 망명을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어쨌든 왜 망명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사마니 왕조에 내분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내분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마니 왕조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책에 의하면 쑤툭 아버지(바지르 아리시란한)의 한 측근이 “앱부 내시르 사마니”를 먼저 알고 있다가, 그를 쑤툭에게 소개시켜주었습니다. 그 측근은 쑤툭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쑤툭을 보호하고, 그에게 무술을 가르치기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측근은 “앱부 내시르 사마니"가 무술에 뛰어 나고, 군사가라는 것을 알고, 그를 쑤툭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이 측근은 쑤툭에게 항상 왕위를 다시 찾아야 된다고 일러주던 자였습니다.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오굴착"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이었습니다. 왕자 쑤툭은 불교에서 말하는 정신과 숙부인 “오굴착"의 다스림이 불일치 하는 것에 항상 불만과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쑤툭이 “앱부 내시르 사마니”를 처음 만났을 때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번을 접촉하면서 “앱부 내시르 사마니”가 전해주는 이슬람의 정신에 마음을 뺏기고 맙니다. 위에서 말한 불교와 “오굴착”에 대한 불만족을 이슬람과 “앱부 내시르 사마니”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앱부 내시르 사마니”에게 가서 계속 이슬람을 배우게 됩니다. 한달 후 쯤에는 쑤툭을 따르던 약 100여명의 젊은이들이 함께 이슬람을 배우고, 이슬람의 종교 의식을 드리게 됩니다.(젊은 다윗을 연상시키는군요....) 그리고 이때부터 쑤툭을 따르던 젊은이들은 “앱부내시르 사마니”로부터 무술 훈련과 군사 훈련을 함께 배우게 됩니다.


정확히 얼마의 기간이 지났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쑤툭은 “앱부 내시르 사마니” 밑에서 훈련 받은 자기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굴착”을 치게 됩니다.


“앱부 내시르 사마니”의 영향으로 다시 왕권을 차지 한 쑤툭이 국교를 이슬람으로 정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을 것입니다.(사실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한 것은 쑤툭의 아들이었음) 뿐만 아니라, 국교가 불교였던 “오굴착” 시대의 부조리(불교에 의한 부조리도 많았음)를 제거하고 자신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새로운 세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교를 이슬람으로 정하는게 어쩌면 쑤툭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위구르인들은 이슬람의 우수성 때문에 쑤툭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당시의 정치적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앱부 내시르 사마니”의 군사적인 탁월성을 얻기 위하여서 쑤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얻기 위해 “앱부 내시르 사마니”의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쑤툭 부그라한은 카라한 왕조의 최초의 무슬림 왕이 되었다. 카라한조의 동남부에 위치한 우전(한어 위티엔, 위구르어 키리얘)은 당시 비교적 강대한 불교왕국으로, 타림분지 남쪽의 불교중심이었다. 쑤툭의 “성전”의 칼날은 제일 먼저 이 불교왕국 우전을 향했다. 그리하여 카라한조와 우전불교왕국 사이의 몇 십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쑤툭은 본인이 원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후손들은 신강지역을 폭력과 전쟁을 통해 강제로 이슬람화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와 동시에 카라한조의 동북방향인 투르판 지역에는 불교를 신봉하는 고창회홀칸국(또는 카라호자 왕조)이 있었다.(고창회홀칸국의 세력범위는 쿠차까지였다.) 불교를 신봉하는 고창회홀칸국 또한 쑤툭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당시 타림분지 남쪽의 불교중심은 우전, 타림분지 북쪽의 불교중심은 고창회홀칸국. 당시 이슬람 카라한 왕조의 세력범위는 악수까지. 그러므로 악수(카라한)와 쿠차(고창회홀) 사이가 이슬람교와 불교의 경계선이었음. 이런 의미에서 쿠차는 재미있는 곳. 지금도 쿠차에 가면 왠지 모르게 불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지금도 쿠차와 투르판에 천불동과 같은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고, 이들 지역은 카쉬가르만큼 이슬람이 강하지 않다. 이들 지역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10세기 신강에는 두 개의 종교가 충돌하고 있었다. 카쉬가르를 중심으로 이제 막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이슬람교와, 전통적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투르판 중심의 불교) 쑤툭 부그라한이 왕위로 있었던 29여 년 동안에 그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세력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그는 955년 사망한 후, 그가 처음 이슬람 교의를 받아들인 아투스에 장사되었다.


그의 계승자들도 모두 신실한 이슬람교도로서 이슬람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장자 무사 아르스란은 칸위를 계승하여 카쉬가르에 거하고, 그 동생 술레이만은 발라사군에 거했다. 960년 무사 아르스란칸은 이슬람교를 카라한조의 국교로 선포하고(이슬람교가 국교로 선포된 장소가 바로 카쉬가르.....흠....), 그 통치구역 내에 이슬람교를 보급,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타림분지의 남북 가장자리는 모두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시종 불교세력과의 마찰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성전” 정신으로 불교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카라한조는 이슬람교라는 깃발 아래 각 부락, 각 오아시스를 통일하는 장대한 역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라한조의 서부지역은 사만조와의 충돌을 계속하다가 999년 사만조의 내분을 틈타 수도 부하라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만조는 카라한조에 의해 멸망되었다.


카라한조의 동부지역에서는 불교왕국인 우전왕국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1024년에 우전의 불교군이 카쉬가르까지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서부의 유숩 카디르한(998-1032)이 발리사군으로부터 신속히 카쉬가르로 지원군대를 보내 쌍방의 맹렬한 전투 끝에 카쉬가르를 되찾고 우전군을 추격, 우전을 완전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이슬람세력과 불교세력의 몇 십년에 걸친 전쟁은 이슬람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이슬람교는 남강의 대부분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획득했다.(11세기 초에)


카라한조는 999년 사만조를 무너뜨리고 동서투르키스탄에 걸쳐 대국을 이루었지만, 1042년, 동서로 분열된 후 동서 양국 모두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카쉬가르의 동카라한은 1132년에 서요(카라키타이)에게, 사마르칸드의 서카라한은 1212년에 콰리즘에게 멸망되었다.


카쉬가르 중심의 동카라한조 좀 더 자세히


동카라한조는 마흐무드(1060-1075)가 카간이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동카라한조는 카쉬가르를 중심으로 문화적인 번영을 누렸다.(11세기는 카쉬가르의 번영의 세기)


마흐무드칸을 이은 부그라 하산칸(1074-1102)은 매우 현명한 군주였다. 그의 통치시기에 카라한조는 내부가 안정되고 경제,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다. 그는 카라한 왕조 내부와 그 주변의 비이슬람교 지역에 군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그의 통치시기에 카쉬가르 지역은 기본적으로 모두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었다.(11세기 말에 카쉬가르의 이슬람화 완료. 쑤툭이 개종한 910년부터 치면, 이슬람교가 신강지역에서 불교를 몰아내고 카쉬가르에 최초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또아리를 트는데 약 150년이 걸렸구만.) 그는 4만의 무슬림 군대로 70만의 이교도 군대를 정벌하고 이어 북쪽의 고창회홀국에 진공해 들어가 그들의 도시와 불상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이 때까지도 고창회홀국은 불교를 믿었던 것. 투르판과 하미의 이슬람화는 16세기에 가서야 이루어짐. 우전은 이미 11세기에 정복됐고) 바로 이 시기에 타림 남부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새로운 문화, 즉 투르크(위구르)-이슬람 문화가 흥기하기 시작하여 전대미문의 문화번영이 이루어졌다.(11세기는 카쉬가르를 중심으로 투르크-이슬람 문화가 활발하게 형성되면서 신강 전체 이슬람화를 위한 (문화적) 결정적 발판이 마련된 시기)


일종의 종교 신앙이자 생활방식, 문화형식으로서의 이슬람교가 신장의 남부에 전입된 후 본래 이곳을 지배하던 불교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1세기부터 신장남부지역에서는 아랍문자가 점차 위구르 전통문자인 회골문을 대체해갔다. 11세기 후기에 저술된 <쿠탇구 빌릭>(복락지혜), <투뤀틸 디와니>(돌궐어대사전)의 양대 거작은 카라한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 문화와 투르크문화의 결합이 이미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쿠탇구 빌릭>은 발리사군에서 태어나 카쉬카르에서 살았던 위구르인 유쑵 하스 아집이 1069년에 운문형식으로 회골문(위구르 전통문자)을 사용하여 저술한 것인데, 내용은 이슬람교의 도덕표준과 가치 관념을 선양한 작품이다. “쿠탇구”는 “축복”, “빌맄”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축복을 가져다 주는 지식” 또는 “지식을 알면 복이 온다”라는 뜻이다.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이슬람교의 도덕표준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고 생활해야 하는지를 위구르 전통문자를 사용하여 시로 표현했다. 유숩은 1019년에 발리사군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총명이 빛을 발하였다. 1042년 카라한조가 동․서로 양분된 뒤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백성들에게 서로서로 자비롭게 대하기를 촉구하는 수단으로 시를 써서 민간에 유포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기득권층은 유숩의 이러한 촉구를 싫어하여 그를 핍박하였다. 결국 유숩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제일 위의 왕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환하여, 군주의 도를 포함하여 사회 각 계층이 지켜야 할 도리를 시로 적어 부그라 하산칸에게 헌납하였다. 하산칸은 이를 보고 매우 만족히 여겨 그를 불러 재상으로 삼아 그에게 “하스 하집”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유숩은 그의 이름이고 하스는 재상이라는 직위, 하집 또한 조언자라는 직위를 나타나낸다.


<투룩틸 디와니>아랍어로 된 투르크어 사전으로서, 1074년 카쉬가르 사람인 매흐뭍 카쉬카르에 의해 씌여졌다. 내용이 매우 풍부해서 학자들로부터 백과전서로 불리고 있다.


아브라힘칸(1128-1158) 시대에 동카라한조의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왕조 내의 각 부족들이 도처에서 반란과 폭동을 일으켜 몰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12세기부터 쇠퇴 시작) 또한 이 시기에는 서요(카라 키타이)의 세력이 강성하여 발라사군이 그들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고 동카라한조는 서요의 속국이 되었다. 아브라힘칸은 서요의 권세 아래 카쉬가르, 우전 일대의 통치를 간신히 유지했다. 그의 아들 무함마드칸(1158-1203) 시기에 서요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일시 동카라한조의 권위를 회복했으나, 무함마드의 어린 아들 유숩(1204-1211)이 칸위를 계승하자, 각지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 할거하여 칸국은 실질적으로 해체되게 되었다.


1211년 서요정권이 나이만 왕자 쿠출루크의 손에 떨어졌다. 쿠출루크는 서요 정권을 획득한 후, 카쉬가르와 우전에 대군을 파병하여 카라한조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카쉬가르를 제압하였다. 같은 해 동카라한조 최후의 칸인 유숩칸이 한 귀족에게 살해됨으로써 동카라칸조 200여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위구르 민족 역사상 유명한 카라한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카라한조의 거민은 이교도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칭기스칸, 차카타이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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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아랍의 확장, 특히 페르시아를 장악한 것이 아랍군의 군사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랍 이슬람제국의 페르시아 정복은 아랍군의 전력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7세기 중반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제국 사이에 전면전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비잔틴제국도 약화되지만 페르시아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붕괴 직전에 있던 페르시아에 아랍군이 진격하자 페르시아는 힘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즉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장기적인 적대관계 속에서 이슬람은 제국의 별다른 간섭 없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으며, 또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제 3자인 아랍 이슬람제국이 어부지리하게 된 것이다. 한편 기독교제국 비잔틴과의 계속적인 전쟁과 대립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반기독교적 감정을 악화시켜 쉽게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된 후, 페르시아내의 기독교정교도(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크게 핍박을 받고 위축되었다. 이 후에 페르시아 무슬림들은 중앙아시아 이슬람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카라한 왕조의 쑤툭 부그라한에게 이슬람교를 전파한 사람도 이슬람화된 이란계 사만조의 한 왕자였다)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몽골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할 때까지 어려움 없이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2) 투르크 민족의 일종인 카를룩족은 발하쉬湖의 동쪽 지방에 근거를 두고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르혼 강 유역에서 위구르 부족과 함께 돌궐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위구르제국이 창건된 후 아마도 위구르 부족과의 알력으로 인한 정권다툼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751년에는 아랍인, 티베트인과 함꼐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위구르군과 싸우기도 했다. 투르크족으로서 흉노족의 정통 후예로 여겨지는 카를룩은 중국에 대한 적대 감정이 강했고 강인한 독립심을 가지고 있어, 친중국계 투르크 민족인 위구르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위구르제국이 스텝의 중앙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는 카를룩의 활동범위가 비교적 제한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위구르제국이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자 카를룩은 서부스텝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카를룩은 키르기즈와 마찬가지로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키르기즈 지역, 고대 페르가나 지방에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투르크 민족(카를룩)은 당시 이미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세계와 접하게 되었다.


한국위구르 중보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