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천자 황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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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금이고 천자국이다.
금이 천자국이라면 그것은 고려가 천자국이란 말이 된다.
왜냐하면 금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 대방(大邦)이라고 하였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에서 금과 고려를 분리하고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반도사관이다.
이것이 바로 조작사의 표본이고 근원이다.
고려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를 이은 중원 황제국이고 천자국이다.
그런 고려가 무엇이 아쉬워 금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겠는가?
분명한 것은 고려가 금이다.
금이 사용한 연호는 바로 부모의 나라 고려의 연호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항상 중원을 차지하고 모든 나라를 통합한 나라는 고려이고 이은 조선이다.
반도사가 말하는 신라, 고려, 조선은 근본적으로 작은 나라라 당, 요, 금, 송, 원, 명, 청의 속국일 수밖에 없고 봉국(封國)이며 변방속국이라 임금이 사대하는 허약한 나라였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일제에 의한 장난의 결과이다.
이것은 비록 일제가 동양사재편과정에서 불손한 의도에서 만든 것이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사실처럼 알고 가르치고 있는 무능하고 친일적인 사학계가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중대한 역사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시정잡배들 눈에도 대낮처럼 훤이 들여다 보이는데 왜 그들만 안 보일까?
신라가 당이요.
고려가 요, 금. 송, 원이며 (단 고구려계와 신라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이 명, 청이다.
언놈이 지랄해도 이것이 바른 역사의 틀이다.
사대한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민족을 큰 저항 없이 원만하게 통치하기 위하여 대외적인 여론조성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며 열등의식을 주입시켜 식민통치가 정당한 것처럼 꾸미고자 한 불손한 개념에서 출발한 엄청난 음모의 늪이고 함정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멀쩡하게 대륙에서 존재한 고려와 조선을 반도로 몰아내자 한반도에 고려가 졸지에 금과 따로 분리 되었던 것이며 그것을 사실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연호를 같이 쓴 것처럼 그래서 고려가 금에게 사대한 것처럼 모든 사서를 꾸며 반도역사서를 만든 것일 뿐 사실 일 수 없는 조작인 것이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모든 사서가 다 이렇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조작 사실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보다도 역사관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천하에 진리는 천리이다.
이러한 천리가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가짐이다.
천지개벽 한다 해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천리의 믿음과 원칙만을 지켜가며 우리 스스로가 어떠한 일 저항이 있더라도 굽히지 않는 강단이 있어 어리석어 지지 않으려고 할 때 바른 역사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될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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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太師)가 세운나라
고려 중기 인종(仁宗) 4년에 해당하는 1126년, 중원의 판도를 바꾸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정강(靖康: 宋欽宗年號)의 변(變)’이라고 불리는 금(金)나라의 침공으로 송(宋)나라는 수도 개봉(開封)을 잃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참화를 겪은 채 강남 지방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거란족의 요(遼)나라를 멸망시킨데 이어서 송나라까지 무너뜨린 여진족(女眞族) 완안씨(完顔氏)의 금(金)나라가 중원의 새 주인으로서 당당히 등장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여진족을 오랑캐로 얕잡아보던 고려 조정도 논란 끝에 권신(權臣) 이자겸(李資謙)의 주도로 금나라에 대해 사대(事大)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 후 금나라는 1234년, 고려고종 21년에 신흥 몽고제국에 의해서 멸망할 때까지 약 1세기정도 중원의 천자국(天子國)으로서 군림하였다. 고려는 이 기간 중에 금의 연호를 사용했고
금이 고려임에도 고려왕은 즉위 후에 금 황제의 책봉이라는 사후승인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고려 내부적으로도 서경(西京)으로 천도(遷都)하여 과거의 신복(臣僕)이었던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나 묘청(妙淸)의 난과 같은 진통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고려에서 마지못해 군신관계를 맺었으면서도 내심으로는 멸시하던 금나라가 실은 순수하게 여진족이 세운왕조가아니라 고려에서 넘어온 이주민이 세운 왕조라는 설이 확고한 문헌 사료적 근거를 갖춘 가운데 제시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설의 핵심은 금의 태조(太祖)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의 선대가 본래 고려인이었다는 것인데, 이미 관심 있는 학자와 일반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지난 2000년 4월 15일에 KBS에서 방영한‘역사스페셜’에서도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는 설을 관련 문헌 제시와 학계의 자문을 곁들여 소개한 바 있다.
원(元)나라 때에 편찬된 금 왕조의 정사(正史)인‘금사(金史)’에는 금나라 황실의 시조의 출자(出自)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금의시조(始祖)는휘(諱)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金史’本紀第1, 世紀)
금나라의 시조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이 밖에도 여럿이 존재한다. 1129년에 포로가 된 송나라 황제 흠종(欽宗)의 귀환을 위한 교섭을 위해 금나라에 파견된 홍호(洪皓)가 지은 견문록(見聞錄)인 송막기문(松漠記聞)에는 다음과 같이 아골타의 시조가‘고려인’이 아닌‘신라인(新羅人)’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新羅人)이고 완안씨(完顔氏)라고 불렀는데, 완안은 한언(漢言:중국어)의왕(王)과같다.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也(洪皓纂‘, 松漠記聞’上)
원나라의 우문무소(宇文懋昭)가 금나라의 풍속과 제도 등을 기록한‘금지(金志)’에서도 금나라의 추장이 신라인이라는 ‘송막기문’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처음 추장은 본래 신라인이고 완안씨라고 불렀는데, 완안은 한언(漢言)의 왕과 같다.
其初酋長本新羅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也(宇文懋昭撰,‘金志’, 初興本末)
이상의 자료는 모두 원나라이전의 중국측 기록이다. 특히 ‘송막기문’은 금 왕조가 존속했을 당시에 기술되고 간행된 것이므로 그 신빙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다만‘금사’에는 금나라 시조를‘고려인’으로, ‘송막기문’과‘금지’에는‘신라인’으로 기록하여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같은 여진족 왕조인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의 청(淸)나라 건륭(乾隆) 43년, 1778년에 황명(皇命)으로 펴낸‘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또는 函普)가 고려에서 왔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세주(細註: [ ]안에 기재)에서‘고려인’과‘신라인’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고려와 신라의 영토가 비슷하기 때문에 두 나라의 호칭이 분별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금(金)의시조는 휘(諱)가 합부(哈富)[옛적에는 函普라고 함]이고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통고(通考)’와‘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遼)와 금의 역사 중에서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이 분별 되지 않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高麗來[按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往二國呼稱不爲分別]‘ ( 欽定滿洲源流考’권7, 部族7 完顔)
그러나 이들 문헌은 우리나라에서‘고려(高麗)’를 국호로 사용하던 시기에 쓰인 것이므로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반드시 고려 왕조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지역 출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신라인’이라는 호칭은 이와는 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신라는 금나라가 흥기할 당시로서는 200년 전에 망해서 없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지역명칭으로 서‘신라’를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라인’이라는 호칭은 신라 왕조 출신이라는 것을 특정해서 말한 것이고‘, 고려인’은 이와 달리 금나라가 존재할 당시의 고려 땅에서 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진족 땅으로 이주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된 신라인은 누구일까.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강원도인제군 일대에서 신라부흥운동을 벌이던 마의태자 일행이 고려 땅을 벗어나 여진족 부락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사’에는 금의 시조 함보가 아골타의 7대조로 되어 있는데 한 세대를 30년 정도로 잡는다면 함보의 생존 시기는 금나라 건국 200년 전이 된다. 역사스페셜의 설명에 의하면 금나라가 건국된 것이 1100년대 초반이니까, 함보는 900년대 초반의 인물이 되는데, 이 무렵은 바로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의 혼란기를 수습하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함보가 신라인이라는 가설은 연대상 무리가 없다. 이에 관해 명지대학교 사학과 김위현(金渭顯) 교수는 역사스페셜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함보가‘고려인으로도 불리고 신라인으로도 불렸다면 그는 고려에서 간 신라인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인제군과 한계산성이 마의태자의 항전지라는 설을 주장한 바 있는 박성수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으로 떠나 금나라를 세웠다는 설을 소개하면서, 조선조의 순암(順菴)안정복(安鼎福)과 근대의 학자박은식(朴殷植)·김교헌(金敎獻)·손진태(孫晋泰)등도 금 태조 아골타가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고증하여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바 있음을 강조하며, 금나라는 우리역사로 편입되어야한다고 주장한바있다.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금나라 시조함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금 왕조의 선계에 대해 언급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송막기문’에는 함보를‘감복(龕福)’이라는 이칭(異稱)으로 표기하였는데, 여진 추장이 본래 신라인이고 완안이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언급한 데 이어서 다음과 같이 그행적을 기록하였다.
여진은 그가 일에 능숙하기 때문에 뒤에 따라서 수령(首領)자리를 넘겨주었다. 형제 3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숙여진(熟女眞) 추장이 되어 만호(萬戶)라 호칭하였고 하나는 다른나라로 갔다. 완안(完顔:함보)은 나이가60여살 이었고 여진은 딸로써 처를 삼게 했는데 2남을 낳았으며 장자는 곧호래(胡來)이다.
女眞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兄弟三人一爲熟女眞酋長號萬戶其一適他國完顔年六十餘女眞妻之以女亦六十餘生二子其長卽胡來也‘( 松漠記聞’上)
‘금지’에도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했다.
여진은 딸로써 처를 삼게 했는데 2남을 낳았으며 장자는 곧호래(胡來)이다.
女眞妻之以女生二子其長卽胡來也( ‘金志’初興本末)
이들 기록을 통해 시조 함보는 3형제 중 한 사람인데 다른 형제는 다른 부족으로 가서 서로 헤어지고 홀로 60세가 넘는 고령으로 여진 부족 내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환갑이 넘은 노년기에 고국을 떠나 북방의 낯선 땅으로 이주한 사실은 정치적 망명 같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방인으로서 여진 부족의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신망을 얻어 수령(首領)이 되고 여진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2남을 낳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금나라황실이신라에서유래했다는것을기록한최고(最古)의 기록인 송막기문(松漠記聞)
남송조(南宋朝)의 저자 홍호(洪皓)가 금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직접 견문한 사실이 수록되어있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배인(排印:근대 활자로 재조판하여 인쇄)한 판본이다.
함보(函普)
함보(函普)는 금나라 황실 완안씨의 시조이다. 그는 신라에서 태어나서 여진의 땅으로 가서, 완안씨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장남 완안오로(完顏烏魯)는 금 덕제(金德帝)로 추숭되었다.
함보가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정사(正史) 금사(金史) 세기(世紀) 1권 초반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 金之始祖讳函普,初从高丽来,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丽不肯从,曰:“后世子孙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独与弟保活里俱。始祖居完颜部仆干水之涯,保活里居耶懒。其后胡十门以曷苏馆归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别而去,盖自谓阿古乃之后。石土门、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败辽兵于境上,获耶律谢十,乃使梁福、斡答刺招谕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盖其初皆勿吉之七部也。始祖至完颜部,居久之,其部人尝杀它族之人,由是两族交恶,哄斗不能解。完颜部人谓始祖曰:“若能为部人解此怨,使两族不相杀,部有贤女,年六十而未嫁,当以相配,仍为同部。”始祖曰:“诺。”乃自往谕之曰:“杀一人而斗不解,损伤益多。曷若止诛首乱者一人,部内以物纳偿汝,可以无斗,而且获利焉。”怨家从之。乃为约曰:“凡有杀伤人者,征其家人口一、马十偶、牸牛十、黄金六两,与所杀伤之家,即两解,不得私斗。”曰:“谨如约。”女直之俗,杀人偿马牛三十,自此始。既备偿如约,部众信服之,谢以青牛一,并许归六十之妇。始祖乃以青牛为聘礼而纳之,并得其赀产。后生二男,长曰乌鲁,次曰斡鲁,一女曰注思板,遂为完颜部人。天会十四年,追谥景元皇帝,庙号始祖。皇统四年,号其藏曰光陵。五年,增谥始祖懿宪景元皇帝。---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나이 이미 60여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 뒤를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려에 잔류하면서 말하기를,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서로 모여 만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하여 함보는 보활리와 함께 갔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 강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이 갈소관부를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하여 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 형제 3인이 이별하였고 대체로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 하였다.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 후손이라 하였다. 태조가 국경에서 요병을 패배시키고 야율사십을 사로잡자 양복, 알답자로 하여금 발해인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여직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입니다"라 하였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두 물길 7부였다. 시조는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살았는데 그 부 사람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 사람들이 시조에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완안부 사람의 복수심을 서로 풀어주어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에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완안부 사람이 되게 할 것이요"라 하였다. 시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사람 1명을 살인한 후 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손상은 점 점 더 커집니다. 살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입니다."라 하니, 피해자 가족들은 이에 따랐다. 시조와 사람들은 규정하기를, "만일 사람을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의거하여 위 사건은 이 규정대로 시행되었다. 여진의 풍습에 살인하면 소와 말 30마리 보상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살상한 자들의 배상이 규정되로 시행되면서 완안부 사람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시조에 대한 사례로 청우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시조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신부집에 보낼 결혼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후에 아들 둘을 낳아 오로, 알로라 하였고 딸 하나를 낳아 주사판이라 하였는데 이로써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 14년(1136년) 함보는 시호를 경원황제, 묘호를 시조라 하였다. 황통 4년(1144년) 그의 능묘를 광릉이라 하였다. 황통 5년 시호를 추증하여 시조의헌경원황제라 하였다.[안동권씨대동보]陰曆癸未年6月2日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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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보(函普)
家庭
妻子兒女
明懿皇后,完颜部人。年六十余嫁始祖
金德帝
斡鲁
注思版(女)
兄弟子女
兄
阿古乃
胡十门
弟
保活里
石土门
迪古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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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德帝-乌鲁,又名訛鲁,金始祖函普之长子
家庭
思皇后
金安帝
辈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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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청 신라의 관계
其初部長本新羅人...
그 처음 부장은 본래 신라인인데... - 대금국지(大金國誌) -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금나라의 시조 이름은 함보인데 고려에서 왔다- 금사(金史) -
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 신라왕성에 의해 국호를 금이라 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女真酋長乃新羅人號完顏氏完顏猶漢言王也
여진 추장은 신라인에서 비롯된다. 호는 완안씨로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과 같다.- 송막기문(松漠記聞) -
神麓記曰女真始祖堪布出自新羅奔阿勒楚喀無所歸遂依完顔因而氏
... 後女眞衆豪結盟推為首領
신록기(神麓記)에서 기록하기를 여진 시조 감포(堪布)는 신라(新羅)로부터 나와
아륵초객(阿勒楚喀)으로 달아났다. 돌아갈 곳이 없어 드디어 완안(完顔)을 의지하였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 후에 여진의 여러 호걸들과 동맹을 맺고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이해 여진 아골타가 황제라 했다. ..본래 신라인이다.
..是歲 女真阿骨打稱帝 ..本新羅人 - 宣和遺事(선화유사)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신라왕의 성씨인 김(金)이 금나라의 먼 계통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其初帥長本新羅人
그 처음 수장은 본래 신라사람이다.-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髙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往二國互稱不為分别以史傳按之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為名史家附㑹之詞未足憑耳)...
금(金)의 시조의 이름은 합부(哈富, 예전에는 함보(函普)로 썼다)인데, 고려(高麗)에서 왔다.(안: 통고(通考) 및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 이르기를 원래 신라(新羅)에서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상고해 보니 옛 땅이 서로 섞여 있고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종종 두 나라를 혼동하여 분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기록(史傳)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신라 임금의 성(姓)은 김(金)이요, 서로 전하기를 수십 대에 이른즉 금(金)나라가 신라(新羅)로부터 나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라이름은 응당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금사(金史)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있는 금수(金水)의 발원지를 국명으로 삼았다”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짓는 자들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말이라서 믿을 것이 못 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癸丑金主阿骨打遣阿只等五人. 寄書曰: “兄大女眞金國皇帝致書于弟高麗國王.
自我祖考介在一方謂契丹爲大國高麗爲父母之邦小心事之契丹無道陵轢我疆域奴隸我人民屢加無名之師. 我不得已拒之蒙天之祐獲殄滅之. 惟王許我和親結爲兄弟以成世世無窮之好.” 仍遺良馬一匹.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庚子御宣政殿南門引見褭弗史顯等六人宣問來由. 褭弗等奏曰: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至于子孫義合歸附.’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在甲申年*閒弓漢村人不順太師指諭者擧兵懲之國朝以我爲犯境出兵征之復許修好故我信之朝貢不絶.不謂去年大擧而入殺我耄倪置九城使流亡靡所止歸. 故太師使我來請舊地若還許九城使安生業則我等告天爲誓至于世世子孫恪修世貢亦不敢以瓦礫投於境上.” 王慰諭賜酒食.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大邦큰나라: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고려사(高麗史) -
新羅宗室金俊의子克守를迎立하고部落의名을完顔이라하야因하야써姓이되니完顔은女眞語에王子라 蓋金俊이新羅亡한後에平州에서僧이되였다가女眞地로入하야新羅王子의禮遇를受하며 克守가阿之古村에居하야...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어찌하여 김준이 신라가 망한 후에 평주에서 승이 되었다가 여진 땅으로 들어가서 신라왕자의 예우를 수하며 극수가 아지고촌에 거하여...- 신단민사(神檀民史) -
本書以為滿族本三代遺風,民風純厚,源遠流長,各項習俗皆足以垂訓後世,除此之外,因滿族自新羅、渤海之時便有文字,其有許多習俗
본서는 만주족의 본래 3대에 걸친 유풍이 되는 바로서, 백성의 風俗이 순수하고 인정이 도타우며 먼 곳에서 비롯되어 길게 흘러가며, 각각의 習俗이 모두 후세에 이어지도록 가르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 이 외에의 것은 빼기로 한다.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왔고 발해의 때에 쉬운 文字를 가졌고 수많은 慣習과 風俗들을 지녔으므로 제도는 모두 아래에 담아 남기기로 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 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 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季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 盈歌死劾里鉢長子*烏雅朿{烏雅束}嗣位*烏雅朿{烏雅束}卒弟阿骨打立.”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 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 (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 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
昔金完顔氏以本出高麗。遇高麗甚厚。終不侵暴。愛州今義州本高麗地而陷於遼。及金滅遼。以愛州畀高麗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金傅雖降而麗王幷其外孫完顔阿骨打卽權幸之後乃宰割中國傳世百年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
김부金傅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에 병탄되었으나 그 외손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곧 권행權幸의 후예가 중국을 분할하여 백년이니 어찌 이른바 신명神明의 후예가 아니라고 하겠는가.(권행은 본래 김행으로 후백제를 치는데 도왔다하여 고려왕에게 권씨성을 하사 받는다.)- 해사록(海槎錄) -
부안(부령)김씨는 고려에 귀순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김일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경주김씨의 계파인데 이 부령김씨세보(扶寧金氏世輔)의 구전 기록에 의하면 김일의 아들이 기로인데 후에 승이 되어 법명은 정원대사라 했는데 아우가 여진으로 가자고 청하니 나라를 버릴 수 없다 하므로 기로를 두고 갔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이들 형제를 기록한 마의태자 유적지의 불서에는 정원대사, 보림대사, 보현대사가 있으나 여진으로 떠난 형제가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고, 사서에 나타나는 금시조 함보(=감포=합부)는 법명이라 한다.
마의태자는 김일 외에도 김분이 있었고, 경순왕에게는 마의태자 김일, 김분을 포함한 9남 3녀가 있었다. 해사록에 따르면 금의 시조가 경순왕의 직계후손이 아닌 외손 김행(당시 친족혼이 가능하였다)의 후손이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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