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메이슨의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647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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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Society of Jesus
예수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리메이슨의 사상과 조직을 흡수하여 창립되었고, 프리메이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고, 많은 예수회 사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점입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예수회(라틴어: Societas Iesu)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이다.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예수회 설립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냐시오 로욜라는 군복무 중 중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중, 중세 로마 가톨릭 영성가인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등의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였다. 신학을 공부한 그는 1534년 8월 15일 6명의 동료들과 함께 가난, 순결, 순종, 순례와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수도 단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예수회 설립에 참여한 6명 중 한 사람이자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프란시스 하비에르 신부는 1549년 유럽교회 역사최초로 일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154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한 그는 이 수도 단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바오로 3세는 '예수회'라는 이름을 내려 이 수도회를 승인하였다.
여기서 이들이 일본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다만 cipango 라 했다.
그것이 현재 일본이란 이름으로 불리울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cipango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열도일수가 없다.
예수회 회원인 프란시스 하비에르 신부가 방문한 곳은 인도를 유럽인들이 하나 둘 방문하기 시작 시기 1498년 이후라고 보았을 때 인도근방을 벗어 날 수가 없다.
cipango 가 jipangu 가 되고 giappone 가 되었다가 근세기에 japan 으로 둔갑하였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후세 많은 사람들 필요에 의하여 변질되고 변형되어 신뢰성을 잃어버린 기록이라고 하지만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cipango 는 황금이 넘쳐나던 나라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열도는 그렇지 못하다.
예수회의 특징
예수회는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서원인 청빈, 순결, 순종 외에 영혼의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항목이 덧붙여 있다. 이것은 예수회만의 특징으로 이와 같은 규정은 대응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수도회는 전통적인 수도회의 모습 중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수도원의 외향적인 모습보다는 인적·내적인 관계를 더 중시하며 수도자의 복장도 갖추지 않는다. 수도원의 전통적인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전도활동이나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을 하고 있다. 개신교 중심으로 여러 신자들은 이에 대해 종교의 형식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예수회의 선교 역사
예수회는 아직 개신교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중국과 중·남미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하였고 유럽교회 역사최초로 일본에서 전도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되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Pax Christ'(주님의 평화) 등의 라틴어 전례용어와 사제가 제단 쪽으로 돌아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예배양식을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예배양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예전 개혁에 따라 현지용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논리학, 라틴어, 법학 등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학교 설립 등의 교육 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교, 대한민국의 서강대학교 등이 예수회 소속의 로마 가톨릭계 대학교이다.
The Chapel of St. Denis, Rue Yvonne le Tac, Paris.
Fresco of Approving of bylaw of Society of Jesus depicting Ignatius of Loyola receiving papal bull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 from Pope Paul III. The fresco was created by Johann Christoph Handke in the Church of Our Lady Of the Snow in Olomouc after 1743.
Ratio Studiorum, 1598
Jesuit missionary, painting from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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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Society of Jesus)
1540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F.사비에르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를 말한다. 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 받은 초대회원들로부터 유래하며 1540년 9월 27일에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을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여 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중국식 음사(音寫) 그대로 야소회(耶蘇會)로 써 왔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이 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 ·교육 ·문화 ·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특히 교육 사업에 역점을 두어 1547년 처음으로 예수회 대학을 개설한 이래, 세계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하여 226개의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을 설립하였으며, 4000여 개의 중 ·고교와 기타 교육기관 등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이 수도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4년이며 1960년에 서강대학교, 1962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1974년 수원에 '말씀의 집'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성 이그나티우스 야간학교'(고등학교 과정)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의 인격적이며 지적인 교육에 힘쓰고 있다.
이와 함께 예수회 회원을 양성하는 과정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사제지원자들은
(1) 지원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올바른 지향과 동기를 가지고 예수회원이 되기를 갈망하여야 한다. 이 기간은 각자의 성소와 관련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이에 응답해 나가는 식별의 시기이다. 또한 예수회 수도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도 이루어진다.
(2) 수련기: 입회가 결정된 자는 2년간 기도생활과 실제적인 예수회의 삶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이 기간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 나아가 예수회를 삶을 통해 배우며, 영신수련에 따른 대피정과 병원실습 그리고 가난한 이들 속에서의 현장 체험등 여러가지 훈련을 통해 수도생활을 더욱 열망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수련이 끝날때 청빈. 정결. 순명의 자발적인 수도서원을 발하게 된다.
(3) 철학과정: 허원을 발한 사제지망자는 3년간 철학과 신학의 기본과정을 공부하면서 세속적 사고방식 내지는 가치관의 제 유형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사유를 익히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입각하여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배우게 된다.
(4) 실습기: 철학과정을 마친 후 2년 혹은 3년간 대학이나 중,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젊은이들의 동반자로서 영신지도와 성소계발의 사도직을 수행하거나,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등, 여러 사목활동을 통하여 구체적인 봉사의 삶을 배운다.
(5) 신학과정: 실습후 3년간에 걸쳐 인간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신비에 대하여 배우고, 이 과정이 끝날 때에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인간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사제 서품 후에도 계속해서 철학과 신학을 비롯한 각자의 전공 분야를 더 깊이 연구할 수 있다.
(6) 제3수련기: 제3수련은 사랑의 능력을 배양하여 본회의 정신에 완전히 젖어서 더 깊은 투신을 할 수 있도록, 약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영신생활 및 사목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으며 피정지도 및 사도직의 실제적 경험을 쌓는다.
다음으로 평수사 지원자는 사제지망자와 같이 지원기와 수련기를 거쳐 허원을 발하게 된다. 수련이후의 과정은 적절히 조정된 신학과정과 함께 각자의 배경에 따른 분야별 연수가 이루어진다. 평수사들은 예수회 안, 밖에서 사제회원과 협력해서 갖가지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에 봉사하는 사람이 된다.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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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데 로욜라
Saint Ignatius of Loyola (Spanish: Ignacio López de Loyola) (1491 – July 31, 1556)
이냐시오 데 로욜라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San Ignacio de Loyola, 1491년 12월 24일 - 1556년 7월 31일)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공동체인 예수회를 창립한 사람이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7월 31일. 흔히 검은 사제복이나 전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며, 가끔씩 갑주를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모토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모든 것(Omnia ad maiorem Dei gloriam)’이다. 상징물은 가시에 찔린 심장과 IHS이며, 예수회와 군인의 수호성인이다. 이냐시오에게 전구를 청하면 사악한 주문이나 늑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생애
1491년 스페인 기푸스코아의 명문 귀족 가문인 바스크 가문에서 11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도나 마리나인데 그를 낳고 바로 죽었다는 설과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아버지 벨트란은 그를 유모인 마리아 가린에게 보내어 기르도록 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벨트란은 이냐시오를 신부로 만들고 싶었으나, 그의 성품이 신부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 장차 용감한 기사로 출세하려고 했다.
1521년 이냐시오는 10대에 왕실의 회계사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엘랴르의 집으로 보내졌다. 이냐시오는 나바라 영주의 군대에 소속된 기사가 되었다. 그는 팜플로나 요새 방어전에서 요새를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던 중 포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에 성서와 여러 성인들의 삶에 대한 전기와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 독서를 통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병상에서의 종교 서적 독서를 계기로 이냐시오는 이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거칠게 살았지만,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점점 읽을수록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고, 자연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어 현세의 허무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1522년 이냐시오는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고 난 다음, 고해성사를 하고 성지 순례를 떠났다. 거의 1년 동안 극빈자 수용소나 동굴 속에서 기도, 단식, 고행을 하며 지내며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횡포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당시 이냐시오는 이미 33살이었는데, 자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성직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남의 조소를 받아가며 그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대학교에까지 입학해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틈틈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동료를 규합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심지어 이단자로 취급되어 결박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저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희생과 인내가 보답되어 비로소 1529년 두 제자가 생겼다. 바로 피에르 파브르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였다. 그 후 또 4명의 훌륭한 대학생들도 이에 참가했으므로, 이들 7명은 우선 이냐시오와 같이 묵상을 하고 1534년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념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성당에서 서원을 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냐시오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성지 순례를 계획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병으로 인해 할 수 없이 연기하게 되었고, 의사의 권유로 스페인으로 돌아와 1년간 수양해야만 했다.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그 곳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곧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려고 하였다. 이때가 1537년의 봄이었는데, 아직도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성지순례는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성지순례는 중지하고 그 대신 수도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되었다.
이냐시오가 로마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이냐시오가 도중에 있는 라스토르라 소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던 도중, 갑자기 황홀한 탈혼 상태에 빠져 성부가 나타나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용모가 보였다. 예수는 부드럽게 그를 내려다보며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 고 말하였다.
과연 그 말대로 로마에 도착한 후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냐시오는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는데 쾌히 승낙을 얻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540년 9월 27일에는 그들의 수도회 예수회에 대한인가가 정식으로 내려졌다.
이 수도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다른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 영적 왕국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교회를 분열시킬 때에도, 이냐시오와 그 동료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며 교회의 손해를 보충하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이냐시오는 남은 인생을 로마에서 설교를 하고 예수회의 규칙과 규범도 집필하면서 남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수면 시간은 3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고신극기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때로는 몇 개의 구운밤으로 식사를 떼운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며 온순하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와 같이 할 것을 권하고, 고행은 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냐시오는 1556년에 사망했는데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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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용해서 중국(대륙조선)을 식민지화 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16세기말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정훈[고대전쟁사]
(위 표현대로 예수회가 대륙조선을 식민화하기 위하여 왜구무사집단을 용병으로하여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벌렸고 근대역사대로 한다면 명(중국)까지 치지 못했으니까 미완의 결과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명이 조선이고 중국이기 때문에 실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러한 성격의 전쟁을 치루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근대역사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사실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신생국인 일본출현이다. 일본의 정치세력주체는 그 당시 인도 스리랑카지역, 동남아해안, 대륙남부해안 등지에서 활동하던 왜구이고 해구이며 해적무사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곳에 산재하면서 전역을 거점으로 약탈과 살인 해적질을 하였던 무리로서 서구탐욕자들의 항해시대를 막고 항로를 방해하는 엄청난 장애요소로 존재했던 무장세력으로서 예수회가 보는 관점에서 상당히 골치아픈 실체였음이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런 환경속에서 bigdeal이란 음모가 없었다고 단정 할 수 없다.)
에스파냐 국왕에 의해서 중국(대륙조선)을 식민지화해야합니다. 일본은 풍요롭지도 않고 너무 강하므로 정복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 무력은 중국정복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크리스트교의 일본포교를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1582년 동인도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필리핀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산체스에게 보낸 서간)
중국에 2~3천명의 일본인 크리스트교도를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종군 하고 있으므로 육지와 바다의 전투에 익숙하고 용감한 군인들이며, 한달에 1에스쿠도 또는 2에스쿠도의 급료만 받고도 기뻐하면서 이 정복 사업에 뛰어들고 참배해 폐하에게 충성할 것이다.
(일본 포교장 프란시스코 카브랄)
카브랄 (Francisco Cabral 1528∼1609)
예수회 신부. 포르투갈령 산 미겔섬(아조레스제도) 출생. 리스본에서 교육을 받고, 1554년 인도의 고아에서 예수회에 들어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몇 개의 코테지오[大神學校(대신학교)] 원장직을 지낸 뒤, 1568년 제2대 일본포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581년까지 일본의 가톨릭 최고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는데 그의 엄격한 성격은 일본인들과 맞지 않는 데가 많았고, 순찰사(巡察師) A. 발리냐노의 일본 순응방침과 대립되어 1583년 마카오로 떠났다. 1586년까지 그 고장의 신학원 원장직을 지냈고, 1586년 고아에 부임, 1592년부터 1597년까지 인도관구장(管區長)을 지냈다.
1758 medio escudo fernando
Jesuits in China.
Life and works of Confucius, by Prospero Intorcetta, 1687.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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