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잡다

패루(牌樓)-김홍도 作 숭실대 연행도

한부울 2009. 5. 16. 01:37
솟을대문 패루(牌樓)는 대륙조선의 패루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7870

*************************************

왜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대륙풍의 그림만 나오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대륙조선이 중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란 말인가?

이 그림은 한반도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일원 중 참가한 김홍도가 여행길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대륙조선에 존재하던 김홍도가 대륙연경에서 자연스럽게 대륙조선 수도 연경풍경을 그린 것임에도 왜 부득불 중국이라고 하여 애써 대륙조선을 망각하려고 애를 쓰는지 그저 안타까운 생각만 든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린 대륙풍 그림을 진단한답시고 하나같이 지금 연행도처럼 중국풍이라고 때려 맞추고 그것도 모자라 모사했다거나 모방하였다고 조선의 유명화가들의 실력을 한마디로 폄하하고 모사(模寫)꾼으로 만들었다.

과연 그러한지 학자의 양심을 걸고 스스로 자문해볼 일이다.

중국풍이라 함은 대륙풍이고 대륙풍이라 함은 대륙조선이라고 해야 함에도 그런 주장은 그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헛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실제 사물을 바르게 볼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올바른 말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나서 자란풍경, 우리가 늘 보전 광경, 우리가 나고 자란 터전, 우리의 고향, 우리가 매일 접하던 마을, 고을풍경이 아니고서야 그렇듯 자세하게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사하고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 한반도조선 화가들은 모두가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매일 가 볼 수도 없는 머나먼 곳을 가보았던 것처럼 그렇듯 자세하게 섬세하게 실체를 담아 그렸다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가 아니고서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아래 보도기사에서 1789년 연행사절 일원으로 연경을 다녀온 김홍도가 그린 작품임이 확실하다는 결론이라면 김홍도가 대륙에 살았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김홍도가 살았던 곳이 바로 대륙조선의 실체인 것이다.

대륙조선의 수도 연경!

그곳 궁성에 대륙조선의 패루(牌樓)가 여기저기 솟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사학들은 지금부터라도 실체를 말하고 반성해야 한다.

보통사람도 보이는 사실을 왜 하나같이 애써 못 본체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

솟을대문 패루(牌樓)-김홍도 作 숭실대 연행도

[연합뉴스] 2009년 04월 21일(화) 오전 10:35


"김홍도 作 연행도"

 

조선 사신단의 중국 사행길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그린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燕行圖) 전체 14폭 중 북경의 저명한 서점 거리인 유리창. 이 연행도 작가가 단원(檀圓) 김홍도(金弘道)로 밝혀졌다는 조사 보고서가 공식 제출됐다. / 연합.


연행사절 노정 파노라마 묘사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김홍도 작품임이 확실하다고 보고한 연행도(燕行圖)는 총 14폭을 전체 627.2㎝ 길이인 종이에 세로로 이어붙인 형식이다. 이 중 제1폭은 청나라로 파견되는 조선 사신단이 정월 초하루에 북경의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에서 청 황제를 배알하고 신년 하례하는 의식 절차를 '조선사신 부 연경시 연로 급 입공 절차'(朝鮮使臣赴燕京時沿路及入貢節次)라는 제목 아래 기록했다.


조선의 외교 절차 등을 기록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문헌에도 그대로 보이는 이 문장은 이 연행도가 중국에 무수하게 파견된 사신단 중에서도 새해 첫날 중국 황제를 조알(朝謁)하는 동지사(冬至使)를 소재로 했음을 엿보이는 대목이다.


나머지 제2폭 이후 14폭까지가 실제 연행과 관련한 그림이다.

현재는 1장짜리 두루마리 형식이지만 원래 이런 모양은 아니었다.


화면 하나는 세로 35.4㎝, 가로 45.3㎝ 정도 크기이며 각 화면 가운데는 접힌 흔적이 있다. 따라서 이 연행도는 원래는 책 형태인 화첩(畵帖)이었다가 나중에 이를 소장한 누군가가 배접을 해서 두루마리 형식으로 바꿨다고 짐작된다.


각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느 장소, 어떤 일을 그렸는지를 밝힌 제기(題記)가 있었지만 훼손되어 대부분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연행도 전문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은주 박사는 다른 연행도나 현지답사 등을 통해 각 화면이 무엇을 소재로 했는지를 다 밝혀냈다.


이에 의해 제2폭 화기는 '臺'(대)라는 한 글자만 남았지만 구혈대(嘔血臺)임을 알아내고, 제3폭은 누가 봐도 만리장성 그림이며, 실제 화기에서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글자를 희미하게나마 확인한다. 4폭에서는 영원패루(寧遠牌樓)라는 제목을 읽을 수 있다.


5폭 제목은 완전히 지워졌지만 산해관(山海關) 동라성(東羅城)임을 알아냈고, 6폭은 중간에 한 글자가 지워졌지만 망해정(望海亭)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7폭은 '門'(문)이라는 마지막 글자만 남았지만 조양문(朝陽門)임이 드러난다. 첫 글자가 지워진 8폭은 태화전(太和殿)임을 쉽사리 알 수 있고, 9폭은 조공(朝貢)이란 두 글자가 뚜렷하다.


10폭 이후 13폭까지는 모두 제목 글자가 없어졌지만 각각 벽옹과 오룡정(五龍亭), 정양문(正陽門), 그리고 유리창(琉璃廠)임을 알 수 있으며, 마지막 14폭은 서산(西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따라서 제2폭 구혈대 이후 6폭 망해정까지는 한양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과정까지 들른 주요 사적을 그렸으며 7-9폭(조양문ㆍ태화전ㆍ조공)은 실제 청 황제를 배알하는 행위를 소재로 했다.


반면 10폭(벽옹) 이후 14폭(서산)은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마친 사신단이 북경 일대를 유람하면서 들른 주요 관광지나 명승지를 소재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행도는 1931년 동경부(東京府)미술관에서 열린 조선 명화 전람회에 처음 소개됐으니, 당시 그 도록으로 발간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에는 연행도 중에서도 제12폭인 정양문을 게재하고는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이 소장한 노가재연행도(老稼齋燕行圖)라고 했다.


노가재란 연행을 한 경험이 있는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호. 이에서 비롯되어 후대에 이 화첩은 노가재가 1712년 11월 3일 동지사 정사이자 친형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동행한 김창업의 사행(使行)과 관련된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것이 숭실대 교수를 역임한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1907-1970)의 수중에 들어가고, 1967년 그가 설립한 한국기독교박물관 전체를 숭실대에 기증함에 따라 소장처가 이동됐다.


이후 이 연행도는 어찌 된 셈인지 1760년 작품이라 소개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연행도 제10폭이 소재로 삼은 벽옹은 청나라 국가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공묘 서측에 1784년 겨울 준공됐다는 점에서 제작 시기는 당연히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그 영인본을 제작하면서 이 연행도를 상세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작시기와 관련해 이런 중대한 사실을 밝혀내고, 아울러 그것이 다름 아닌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확신해도 좋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