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Islam (Arabic: الإسلام; al-’islām)
이슬람교(아랍어: الإسلام al-islām 듣기 (도움말·정보))는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유일신 종교로,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신에 대한 순종”이란 뜻이다. 신자는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제정일치의 교리를 가졌기에 종교는 곧 정치이며 따라서 교리가 곧 법이다.
Mecca, one of the holiest places of Islam
이슬람교의 경전은 꾸르안(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아랍어: 지브릴)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1]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으나, 시아파를 따르는 무슬림은 전체 무슬림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소수이며,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며, 나머지 무슬림은 정통 이슬람인 수니파이다. 이슬람 안에서 무슬림 모두는 형제이며, 종파간에도 서로를 무슬림이라고 인정한다.
이슬람의 휴일
이슬람 신도나 국가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용어의 정의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이슬람 : 흔히 “이슬람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이름이다. 꾸르안에 명시하고 있는바 이것을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교”나 “회회교,” “회교,” “마호메트교” 등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무슬림 : 이슬람에의 복종자, 곧 이슬람을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시 “이슬람교도” 등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꾸르안
The first sura in a Qur'anic manuscript by Hattat Aziz Efendi
꾸르안 : 이슬람의 경전 이름이다. “읽다”(아랍어: 까라아)의 동명사로서 그 뜻은 “읽기”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꾸르안을 “코란”이나 “꾸란”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특히 “꾸란”이라는 말에는 “읽다”라는 뜻이 없다.
라쑬룰 라 : “성사(聖使)”라는 뜻으로 주로 무함마드(마호메트)를 가리킨다. 성사는 “알라가 보낸 사람”을 뜻하며, 이는 예언자보다 격이 높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이다.
이만 : 이슬람 교리에서 이르는 “여섯 믿음”을 가리킨다.
이바다 : 이슬람 교리에서 이르는 “다섯 의무”을 가리킨다. 이것을 “아르칸”이라 하여 “다섯 기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으므로 어린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 신당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자신은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무함마드가 메카 근교의 힐라산(山) 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어 주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40명, 10년 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 인사가 다른 유럽 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무함마드의 운명과 이슬람의 장래는 이 헤지라를 통하여 일변하였다.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힘을 합쳐 교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인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메카군과 싸워 630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인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의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 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무함마드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 강의 싸움에서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 왕조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 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시원(始原)
서기 610년경의 라마단월에, 무하마드는 메카교외에서 천사 가브리엘보다 유일신(앗라후)의 계시를 받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시작했다. 최초 그가 사람들에게 전한 계시의 가르침은 메카로 박해되었기 때문에, 622년, 무하마드는 야스리브(후의 메디아))에 피한다(헤지라이주사건).
가브리엘(히브리어: גַּבְרִיאֵל, 라틴어: Gabrielus, 그리스어: Γαβριήλ, 아랍어: جبريل)은 ‘하느님은 우리의 힘’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서 하느님의 전령(傳令)으로 일한다고 여기는 천사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이다.
메디나(아랍어: المدينة المنورة)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서부 헤자즈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메카 북쪽에서 약 350㎞ 지점에 있는 성지로, 무함마드가 622년 메카에서 추방당하여 헤지라(성천)를 행한 곳으로서, 그 묘가 있다.
헤지라(아랍어: هِجْرَة)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움마(아랍어: أمة)는 이슬람의 교단(敎團) 내지 종교 공동체를 말한다
야스리브에 이슬람교의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한 무하마드는 주변의 아랍사람들을 점차 지배하에 넣어 630년 마침내 메카를 점령했다. 그 다음 년에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죽지만 미래를 잇는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예언자의 대리인(칼리프Caliph)로 정해졌다.
수나파와 시아파의 분리
무하마드 사후도 이슬람 공동체의 세력 확대는 머물지 않고, 4대의 정통 칼리프의 지도의 아래 이슬람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제국으로 성장해 갔다. 그 결과 무하마드의 후계자의 리더쉽 아래, 이슬람교는 급속히 확대하여 현재에 이르는 이슬람 세력범위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교 세력 확대는 개종 외에도, 군사적 정복으로 확대하여 갔던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확대와 함께 내분도 생겨 3대 칼리프의 사후, 4대 이후의 유동이 심하여 무하마드의 사촌형제 아리와 그 자손만이 이슬람 공동체를 지도하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시아파( 와 그 이외의 수나파(무하마드 이래의 관습(순나)에 따르는 사람의 뜻)로, 이슬람 공동체는 크게 분열했다. 결국, 이슬람 제국은 우마이야 왕조의 우마위야가 칼리프를 세습하여 지배한다. 정치적 소수파가 된 시아파는 점차 분파를 반복하여 이슬람세력을 좁혔다.
순나(아랍어: سنة)는 특정한 관습을 사회와 개인을 구속하는 규범적 가치로 하여 그것의 강제력을 인정한 것을 말한다.
우마이야 왕조 또는 우마위야 왕조(아랍어: بنو أمية)는 660년부터 750년까지 아랍 제국을 다스린 첫번째 이슬람 칼리파 세습왕조이다.
이슬람 제국의 시대
8 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의 칼리프 統은, 보다 무함마드의 계에 가까운 아바스 왕조에 쓰러져 아바스 왕조가 일어난다. 아바스 왕조는 아랍인 이외로 이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을 이슬람교로서 아랍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여기에 이슬람 공동체의 국가는 아랍 제국으로부터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이슬람 제국으로 전환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아바스 왕조의 영향으로 정복자의 아랍인의 사이에만 대부분 머물고 있던 이슬람교의 신앙은 페르시아인등의 타민족에게까지 퍼져갔다.
아바스 왕조 (Abbasid Caliphate)또는 압바스 왕조 (아랍어: لعبّاسيّون)은 아랍 제국의 두번째 이슬람 바그다드 칼리파왕조의 이름이다. 아바스 왕조는 750년 초대 칼리프 왕조인 우마위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조를 세웠고 1258년 몽골족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킬 때까지 아랍 제국을 다스렸다.
또, 국가로서의 이슬람 제국도, 아바스 왕조아래에서 공전의 번영을 맞이했다. 이 시대, 이슬람교의 상인은 광역 무역을 활발히 실시하여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에 여행을 떠나갔으므로 차츰 이슬람교의 포교 범위는 확대되었다.
또, 신학을 시작으로 하는 많은 학문이 돋보여 이슬람법(샤리아)이 정비되어 갔다. 한편 소박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신학에의 반발로부터 신비주의(이슬람 신비주의)가 태어나 이슬람 이전의 다신교의 흔적을 남기는 성자숭배와 결합되어 퍼져 갔다.
그러나 동시에 아바스 왕조의 시대에는 이베리아반도에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의 잔존 세이리키가 세운 후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북부아프리카에 시아파의 파티마왕조(Fatimid Caliphate)가 일어나 똑같이 칼리프하고 칭하여, 칼리프가 대립하는 한편 각지에 지방 총독이 독립해 갔다. 이렇게 하여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 분열은 결정이 된다.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 파티마 칼리프조는(아랍어: الفاطميون)는 아랍 제국의 시아파 이슬람 왕조로 909년부터 1171년까지 이집트, 북아프리카, 레반트를 다스린 왕조이다. 이 왕조의 군주 (칼리프)들은 이슬람의 시조인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의 이름도 파티마라고 정했다.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의 또 다른 분파인 이스마일파였다
근대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교를 섬기는 대제국 오스만 제국이 크리스트교도의 유럽 앞에 약화됨을 목격한 이슬람교의 사람들 중에서, 현상을 개혁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의 정도 이슬람교로 회귀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일어난 와하브운동을 단서로 하는 이 운동은 이슬람 부흥과 총칭되는 조류로 발전하고 있어, 많은 과격하고 교의적인 이슬람교를 낳았다. 한편으로 순조롭게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사상을 몸에 익히고 이슬람의 개혁을 실시하는 사람들도 다수 출현해, 이슬람은 전근대에도 더욱 더 다양한 실태를 가지게 되었다.
와하브운동(Wahhabi or Wahhabism)은 아랍인들이 쿠란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이슬람교의 민족 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와하브 왕국이 성립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가 리야드로 된 것은 이 운동이 리야드에서 일어난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Rise of the caliphate and Islamic civil war (632–750)
The territory of the caliphate in 750
Crusades, Reconquista and Mongol invasion
Artistic depiction of the Battle of Hattin in 1187, where Jerusalem was recaptured by Saladin's Ayyubid forces
urkish, Iranian and Indian empires (1030–1918)
The Taj Mahal is a mausoleum located in Agra, India, that was built under Mughal rule
아랍색
소말리아, 코모로, 지부티 같은 일부 이슬람국가를 빼고는 국기에 빨강, 초록, 검정, 흰색만 넣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파랑을 아랍색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
이슬람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믿는 유일신 종교이다.
이슬람 교리는 매우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하며, 6신(信) 5행(行)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5행을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보아 아르칸(기둥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6신은, 다음의 6개이다.
神(Allāh)
天使(malakh)
啓典(Qur'an)
使徒(Muhammad)
來世(yawm al-Qiyāmah)
定命(qadar)
이 중, 특히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교의에 관련되는 것이 신(앗라)과 사도(르술)이다. 이슬람교는, 앗라가 유일한 신인 것으로, 그 초명을 받아 예언자가 된 무함마드가 진정한 신의 사도인 것을 단단하게 믿는다. 이슬람교에 입신하여, 이슬람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증인의 앞에서 신 외에 신은 없음과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라고 하는 2문구로부터 되는 신앙고백(샤하다)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고 있다.
또, 이슬람교가 취해야 할 신앙 행위로서 정해진 오행(5기둥이라고도 한다)은, 다음의 5개로 되어 있다.
신앙 고백(shahadah)
예배(Salah)
喜捨(Zakat)
단식(Sawm)
순례(Hajj)
이것에, 聖戰(성역)을 6개째의 기둥으로서 더하려는 의견도 있지만, 전통적은 위의 5개이다.
이러한 신앙 행위는, 예배이면 1일중이 정해진 시간, 단식이면 1년 중이 정해진 달(라마단, 라마단)에 모든 이슬람교가 일제히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행위를 집단에서 일체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이슬람교끼리는 서로의 유대를 인식하여, 이슬람교의 공동체의 일체감을 높이고 있다. 집단의 일체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신앙 행위가 순례(핫지)이며, 1년중이 정해진 날에, 이슬람교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모든 순례자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같은 순로를 더듬어 일련의 의례를 체험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중심가 모스크에서의 쌀라 풍경
이만(6신)이란 알라와 천사, 경전, 예언자, 마지막 심판, 정령에 대한 여섯 믿음이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Five Pillars
이슬람은 믿음(إيمان, īmān)과 실천 (دين, dīn)으로 이루어진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은 수니파의 가장 기본적인 다섯 의례(실천; دين, dīn)를 가리키는 말이며, 시아파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수니에서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순니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신앙고백(샤하다) -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선언.(제1의 기둥)
기도(살라트) - 하루에 다섯 번 알라에 기도해야 하므로 여행을 하다 일정한 시간이 되어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제2의 기둥)
자선(자카트) - 일반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자들의 재산의 2.5%나 농민들의 연 생산의 10-20%정도이며, 이 돈이나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제3의 기둥)
단식(사움) - 라마단(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어떠한 성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제4의 기둥)
메카 순례(하즈) - 이슬람력 12월(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라면 모두가 일생에 한 번은 행하는 것이 좋다.(제5의 기둥)
Muslims performing salah (Islamic prayer)
Rituals of the Hajj (pilgrimage) include walking seven times around the Kaaba in Mecca.
수니파 무슬림에게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수니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복장을 갖추고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무슬림들
다른 종교와는 달리 이슬람의 교조는 유일신 알라이다. 흔히 ‘교조 무함마드’라고 부르는 호칭은 다른 종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관용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이슬람의 경전인 꾸르안에는 오로지 유일신 알라에게서 받은 ‘계시’만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 기록하는 ‘인간의 말’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천국
이슬람에 있어서의 천국(jannah)은 신교를 관철한 사람만이 사후에 영생을 얻는 곳으로 여겨진다. 크리스트교와 달리, 이슬람교의 성전 코란(Qur'an)에서는 이슬람에 있어서의 천국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써지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남성은 천국에서 72명의 처녀(Houri)와 섹스를 즐길 수가 있다. 그녀들은 몇회 섹스를 실시해도 처녀막이 재생하는 모아 두어 영원의 처녀로 여겨진다. 또 결코 악취가 없는 술이나 과일, 고기 등을 좋아할 만큼 즐길 수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뒤에 기술한 성역(지하드:Jihad)에 관해서도, 과격파 조직이 자폭 테러의 인원을 모집할 때에 이러한 천국의 묘사를 이용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여겨져 문제가 되고 있다.
분포
국가별 신자 분포
주로 중동과 터키,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신강위구르자치구), 북아프리카, 러시아(주로 남부지역), 카프카스,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에 이슬람교가 존재한다. 여기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과거 이슬람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이슬람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다.
유럽에서는 알바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주로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이슬람교가 존재한다. 일부는 독일, 이탈리아, 몰타, 그리스, 스웨덴에도 존재한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교가 제2의 종교 세력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유럽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무슬림에 대한 차별(취업, 교육) 등의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브라질에 이슬람교가 극소수로 존재하며, 오세아니아에서는 파푸아뉴기니가 극소수로 존재한다. 실례로 유명한 흑인운동가인 말콤X는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개종한 무슬림이다. 대한민국에는 약 1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터키군의 선교 활동과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공화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 의한 것이다. 한국인 신도는 약 2만 명 정도이다.
종파
이슬람에는 기독교와 같은 ‘이단’의 개념은 없다.[출처 필요] 하지만 다수 신도는 스스로를 주류, 수니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 무슬림이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 무슬림과 나머지 종파이다.
수니파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란 꾸란, 하디스 및 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 법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로 나뉘어진다.
하와리즈 파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를 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난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하와리즈(탈퇴자)이다.
하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하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순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시아파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것이 시아 이슬람이다. 시아는 '쉬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 초기 칼리파들의 뒤를 이은 우마위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1258)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한 쉬아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아파는 우마위야 왕조 창시자 무아위야 1세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ayn)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됐다. 카르발라와 인접한 나자프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사원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시아파들의 최대 순례지가 되고 있다.
후세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 정월(Muharram) 10일, '모하라 아슈람'은 시아파들의 최대 추모제 날이자 명절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이날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 후세인의 고통을 체험한다. 시아파는 초기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떠받드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훗날 유대 유일신교의 한 분파인 그노시즘(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순니의 이슬람 주류와 신학적으로도 갈라섰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이맘'이라는 인도자의 존재. 순니가 말하는 이맘은, 꾸란을 독경하고 에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쉬아의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꾸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아야툴라 루흘라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 종교지도자 알라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희생과 순교를 중시하는 시아파들은, 이 지점에서 구세주 신앙과 만난다. 특히 알리 이후 열두 이맘의 시기가 지나고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이맘파'에게서는 메시아사상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사라진 12대 이맘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마흐디)로서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다. 훗날 많은 이들이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등장하기도 했다.
열두 이맘파와 자이드파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는 이란과 이라크 인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드물게 분포하고 있고, 레바논과 파키스탄, 인도 등지에 소수파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경우 왕가는 알리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순니 말리키파다. 자이드파는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열두 이맘 중 후세인의 아들인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는데, 여기에 자이드를 포함시켜 다섯 이맘파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자이드파는 알리 이후 순니파 칼리프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을 빼면 교리상 순니와 같다. 예멘 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이스마일파와 암살단파
시아파 중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고 매력적인 것, 그런 이유로 옛 문헌이나 소설에 가장 자주 소재로 다뤄졌던 것이 이스마일파 즉 일곱 이맘파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대신 6대 이맘 자아르 알 싸디끄(765년 사망)의 장남 이스마일을 추종하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빈민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 맞서 인기를 모았다. 10세기 한때 메카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긴장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 파티마 왕조(909-1171)를 세운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909-934) 세력이다. 이들은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까히라(al-Qahirah 승리자; 오늘날의 카이로)라는 도시를 세웠다. 칼리프조는 까히라에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 이슬람 교리의 본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알 아즈하르(al-Azhar)성원(聖院)을 만들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 국력을 키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를 세력권에 넣었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한때는 카이로의 세력에 맥을 못 췄다. 그러나 1171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1138-1193; 살라딘)에 멸망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는 다시 수니파의 손으로 들어갔다.
암살단파는 '산상의 노인'이라 불렸던 이란계 지도자가 11세기 말 파티마조와 결별하고 이란과 시리아를 잇는 산악지대에 요새를 만들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아사신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는 영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다룬 기록들이나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서술(동방견문록)' 등 옛 문헌들에는 '산상의 노인'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나와 있다. 암살단파는 자객을 이용, 주로 순니파 칼리프들을 살해했다. 현대의 학자는 암살단파가 예루살렘을 놓고 전쟁을 벌였던 기독교 세력보다는 오히려 순니 기득권층에 더 큰 위협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에 살해된 최초의 희생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말리크 샤 1세(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년 사망)였다.
암살단파는 순니 지도층을 살해,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 이슬람권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13세기 내분이 일어나면서 약화됐고, 이란을 점령한 몽고군에 의해 섬멸됐다. 시리아의 분파도 이집트, 시리아에서 득세한 맘루크조에 의해 제거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추종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암살이 아닌 사업에 종사해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슬림 부유층을 형성하고 있다.
알라위파(Alawis)와 드루즈파(Druzes)
이스마일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파들로,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 주요 교리에서 워낙 벗어나 있어, 쉬아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순니-쉬아 이외의 제3의 종파로 분류되곤 하며 심지어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되기도 한다.
알라위파(Alawi)는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극단화시켜 신격화했는데,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파'라 불리기도 한다. 레바논, 시리아에 많은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할 뿐 아니라 기독교 의례까지 받아들여 부활절까지 축하하곤 한다. 시리아에서도 인구의 1%만이 알라위파이지만 장기집권 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전대통령과 그 아들로 세습정권을 이어가고 있는 바샤르 알 아사드 현대통령이 이 종파인 덕에 권력층이 되어 있다.
드루즈파는 11세기 이스마일파에서 나온 다라지(Darazi)라는 인물이 숨은 이맘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창시했다. 비밀주의가 강하며, 레바논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과 달리 하킴이라는 칼리파가 신의 현신이라 주장하며 일신론을 믿는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돼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며 영혼은 윤회한다고 믿는다. 이슬람의 하지(순례) 기간 축제를 열긴 하지만 순례 자체는 하지 않으며 라마단 금식도 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찬양한다. 교리와 관행으로 보아, 이슬람이라기보다는 별도의 종교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바비파(Babis)와 바하이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는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진리의 문을 뜻한다. 바비파는 구약성서와 조로아스터, 중국에서 전해져온 유교 사상과 불교 등의 예언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이들은 이란의 부패한 왕정에 반대하다가 잔혹한 탄압을 당했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추종자들은 바하울라라는 예언자를 추종하는 바하이파로 계승됐다. 바하이의 가장 큰 관용과 사회의식이다. 이들은 이맘 알리가 남긴 메시지는 사회를 개혁하고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는 여성 평등, 교육과 국제평화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바하이는 대부분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금주 금연, 채식 등을 선호한다. 이들도 이란 정부의 박해를 받았으며, 왕정이 끝나고 1979년 이슬람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탄압을 받고 있다.
수피(Sufi) 사상
이슬람 쉬아에서 갈라져 나온 신비주의 수피즘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사상에 가깝다. 현대 서구문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수피즘은 금욕적인 자기수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위키백과]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힌두교(Hinduism) (0) | 2009.05.09 |
---|---|
이슬람율법 (Shari'ah) (0) | 2009.05.09 |
수인:무드라[手印] (0) | 2009.05.03 |
불교(佛敎, Buddhism) (0) | 2009.05.02 |
우상숭배 안돼..40대女 암자 불상 파괴 (0) | 2009.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