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유구왕국(琉球國 Ryūkyū Kingdom)은 열도에 존재했다.

한부울 2009. 3. 26. 21:45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원문에 분명코 濟州 라고만 되어 있는데 번역 해석은 제주도()라고 해버린다. 황제라고 칭했다고 하면 무조건 명나라 청나라라고 해석해 놓고 이어 中, 朝, 國이란 단어가 나오면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중국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과연 이와같은 해석이 온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절대 그런 해석은 우리에게 이롭지 못한 것이고 스스로 옭아매어 작게 만드는 해석일뿐이다.

명조, 청조라는 것은 조선내에 있는 정부이름이다.

좀더 의미를 둔다면 대외적인 명칭일뿐이다.

그러한 것을 일제가 역사를 갈라놓는데 이용하였을 것이다.

中國하면 명나라 청나라라고 하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고종대에 보면 고종임금이 신하에게 중국이라고 하면서도 따로 청나라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나라가 중국이라면 임금이라도 청나라사람이라고 해선 안된다.

중국사람이라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실체와 청나라가 다르고 조선은 그것을 냉정하게 구분하였다는 말이다.

그것을 보더라도 중국이 청나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조선은 중원에 존재하는 천자국일 가능성이 많다.

조선이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동북영토를 조차지 한 부분에서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한 것은 청정부에게 일을 맡겨 놓았는데 어설프게 일처리를 하였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中國은 나라의 중앙일 수도 있고 나라 중앙에 황제가 존재하는 즉 중앙정부일 수도 있으나 명, 청이라고 단편적으로 인요하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무조건 中國이라고 하면 명나라나 청나라를 대칭한다고 하는 것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사대관에 따른 속국이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향상 가려 써야 바른 역사를 아는 길이다.

中國은 나라 안에 있는 정부(황제가 있는 곳) 즉 中朝와 같은 의미이다.

조선시조 태조 이성계를 高黃帝라고 칭을 했듯이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유구국은 지금의 열도일가능성이 많다.

유구국을 지금 오키나와섬을 말하고 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갖다 붙이기가 아닐 수 없다.

오키나와 그곳에 유구국이 존재하였다면 지금 열도가 온전할 수가 없다.

과거 삼한과 고려, 조선이 열도를 영향권에 넣고 지배했다고 하지만 독립적 자치권을 부여하고 실체를 인정하였을 수도 있다.

유구국은 기반이 나름대로 확실한 전통왕조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오키나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섬에서 수백년(1429년 - 1879년) 명맥을 유지하다가 일본에게 패망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신생국인 일본이 지금의 열도에 태생한 시기가 1872년이라했다.

동남아 자바에서 대륙남동쪽을 근거지로 한 해적무사집단이 정치집단으로 변신하여 열도로 이동한 시기가 1872년이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열도 전쟁이 일어난 시기이다.

바로 유구국이 저항하다가 1879년에 망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논리이다.

유구국은 오키나와섬을 기반으로 한 작은 나라 보잘 것 없는 나라가 아니라 적어도 열도를 근거로한 전통왕조였음을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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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6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5월 11일(정묘) 3번째기사

예조에서 유구국에서 조선인 두 명을 송환시켜준 사실 등을 아뢰다

 

○宴琉球國中山王使者道安于禮曹。 禮曹錄道安之言以啓

“一, 去庚午年, 貴國人四名, 漂泊于臥蛇島, 島在琉球、薩摩之間, 半屬琉球, 半屬薩摩。 故二名則薩摩人得之, 二名則琉球國王弟, 領兵征歧浦島而見之, 買獻國王, 王置于闕內, 厚加撫恤。 一, 中山王云: “往年, 我國人十二名, 漂到朝鮮海邊丑山浦, 朝鮮厚待, 優給衣糧送還, 我至今深感。 肆將二人, 常置眼前, 厚給衣服、飮食。 汝今適來, 我甚喜之, 付汝送還。” 一, 琉球國地暖, 水田之穀, 一年再熟, 土産則只有麻苧, 而商船四(集)〔隻〕, 故四方之物, 無不備焉。 朝官衣服, 則與中國人無異; 無職人之衣, 袖口稍寬, 以色絲刺肅袖口, 以別尊卑。 一, 琉球國與薩摩和好, 故博多人經薩摩往琉球者, 未有阻礙。 近年以來, 不相和睦, 盡行擄掠。 故却從大洋迤邐而行, 甚爲艱苦。 今我等出來時, 商船二艘, 亦被搶擄。

因示博多、薩摩、琉球相距地圖。 又錄漂流人萬年、丁祿等所言以啓:

一, 庚午年十二月, 我二人及石乙、石石今、德萬、康甫等六名, 同乘一船, 忽於海中遭風, 漂到臥蛇島, 康甫、德萬皆病死。 島中居民, 三十餘戶, 半屬琉球, 半屬薩摩。 島人率我二人, 往水路三日程, 加沙里島留十餘日間。 琉球國人甘隣伊、伯也貴, 因事到本島, 見萬年, 帶歸于家。 翼日詣闕, 持白、靑段子各二匹還家, 卽率我詣闕, 意必買進我也。 中山王曰: “年少, 可學火筒。” 使與火筒三人同處。 有一人入苧庫偸苧, 我適見之, 告於管事人, 奏中山王。 王曰: “朝鮮人, 老實。” 因置眼前, 凡鐵物、段子、香木、銅錢所藏之庫, 使我看守, 庫內出入者, 脫衣見之。 留三月間, 琉球人完玉之又到加沙里島, 用銅錢買丁祿, 帶還, 使喚。 同里人來告萬年, 萬年卽告王, 命萬年, 乘馹往其家, 率來, 用奴一人換。 使因與同處, 賜羅衣各二領, 一日三時饋食, 一時米二升。 留三年間, 道安等入歸, 王曰: “常欲解送, 然無知路人, 汝其帶去。 若朝鮮喜之, 則諸處漂來朝鮮人等, 亦皆刷還。” 一, 琉球國地煖, 冬月無氷雪。 每年九月播種, 十一月移種, 五六月間刈獲, 肥田則再種結實, 瘠田則已刈之根, 生蘖發穗而已。 且穀熟則刈穗留槀, 以糞其田。 一, 地不平廣, 路多高低, 無車輛。 一, 父母死, 不服喪, 食肉如常, 哭不哀, 不祭, 不作佛事。 一, 朝鮮人六十餘, 漂到琉球, 皆物故, 只有年老五人生存。 其女子, 皆與國人交嫁, 家産富饒。 老人等略曉朝鮮語。 一, 琉球國王, 或一二月一受朝, 或一月內再受朝。 朝會時, 坐于三層殿上, 群臣具冠帶, 拜于庭下。 一, 中原使臣二船, 持、蜜、羊、酒等物到國, 中山王弟率軍士, 備旗皷、雨傘, 出迎于郊, 入殿內宴慰。 一, 男子, 常服袖廣如長衫; 尊者, 袖口及衣上, 以五色絲繡獸形, 衣色則或黑、或白、或紅; 婦人, 或着廣袖衣如長衫, 或着短襖及裙, 無繡, 短襖之制, 似我國而差長; 僧人, 長衫亦似我國。 一, 土産, 則只有麻、苧而無木綿, 人戶十分內, 一分養蚕, 然亦不實。 一, 男子頭髮, 結于左耳上, 餘髮環結于右耳上, 以白布裹之, 如之形; 婦人髮, 向後作髻, 如我國鄕吏之髻; 小女向後垂之。 冬月不着煖襖衣, 牛馬, 四時抹以靑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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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사자(使者) 도안(道安)을 예조(禮曹)에서 연회하였다. 예조에서 도안의 말을 기록하여서 아뢰기를,

 

1. 지난 경오년1265) 에 귀국(貴國) 사람 4명이 표류하다가 와사도(臥蛇島)에 정박하였는데, 그 섬은 유구도(琉球島)와 살마(薩摩)의 사이에 있어서 반은 유구국에 속(屬)하고, 반은 살마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2명은 살마인(薩摩人)들이 데려가고, 2명은 유구국왕(琉球國王)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포도(岐浦島)를 정벌하다가 이들을 발견하고 사서 국왕에게 바치니, 왕께서 궐내(闕內)에 두고 후하게 무휼(撫恤)하기를 더하였습니다.

 

1. 중산왕(中山王)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우리나라 사람 12명이 조선(朝鮮) 해변의 축산포(丑山浦)에 이르었는데, 조선에서 후대하여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으니, 우리가 지금까지 깊이 감사한다. 이에 두 사람을 항상 안전(眼前)에 두고 의복과 음식을 후하게 주었는데, 네가 지금 마침 왔으니, 내가 매우 이를 기뻐하여 너희들에게 부쳐서 송환(送還)하겠다.’ 하였습니다.

 

1. 유구국(琉球國)은 땅이 따뜻하고 수전의 곡식이 1년에 두번씩 익고, 토산은 오직 베와 모시뿐이나, 그러나 상선(商船) 4척이 있기 때문에 사방의 물화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조관(朝官)의 의복(衣服)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으나, 관직(官職)이 없는 사람의 옷은 소매통이 조금 넓은데, 색실[色絲]로써 소매통에 수(繡)를 놓아서 존비(尊卑)를 구별합니다.

 

1. 유구국(琉球國)과 살마(薩摩)가 서로 통호(通好)하기 때문에 박다(博多) 사람으로 살마를 거쳐서 유구국에 가는 자는 장애(障礙)가 없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서로 화목(和睦)하지 못하여 노략질을 마구 행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큰 바다를 돌아서 물결에 시달리면서 가므로, 심히 고생스럽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나올 때에 상선(商船) 2척도 또한 창탈되어 사로잡혔습니다.”

하고, 박다(博多)·살마(薩摩)·유구(琉球)의 서로 떨어진 지도(地圖)를 내보였다. 또 표류(漂流)하였던 사람 만년(萬年)·정록(丁祿) 등의 말한 바를 기록하여서 아뢰기를,

 

“경오년1266) 12월에 우리 두 사람과 돌[石乙]·돌돌이[石石今]·덕만(德萬)·강보(康甫) 등 6명이 한 배에 같이 탔다가 갑자기 바다 가운데에서 바람을 만나서 표류하여 와사도(臥蛇島)에 표류 정박하였는데, 강보·덕만은 모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섬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30여 호(戶)였는데, 반은 유구국(琉球國)에 속하고, 반은 살마(薩摩)에 속하였습니다. 섬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거느리고 수로로 3일 노정(路程)을 가서 가사리도(加沙里島)에 10여일 동안 억류되었습니다. 유구국 사람 감린이(甘隣伊)·백야귀(伯也貴)가 일로 인하여 본도에 이르렀다가 만년을 보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대궐에 나아가서 백단자(白段子)·청단자(靑段子) 각각 2필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즉시 나를 거느리고 대궐로 나아갔으니, 나를 반드시 사서 바쳤던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산왕(中山王)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려서 화통(火筒)을 배울 만하니, 화통을 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3인이 같이 거처하였는데 1인이 저고(苧庫)에 들어가서 모시를 훔치는 것을 내가 마침 이를 보고 일을 맡아 보는 사람에게 고하여 중산왕(中山王)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조선사람들은 노실(老實)하다. 하고, 인하여 안전(眼前)에 두고 모든 철물(鐵物)·단자(段者)·향목(香木)·동전(銅錢)을 저장하는 창고를 나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하고, 창고 안에 출입하는 자들은 옷을 벗고〈일을〉보았습니다. 3개월 간 머물렀는데, 유구인 완옥지(完玉之)가 또 가사리도(加沙里島)에 도착하여 동전(銅錢)을 주고 정록(丁祿)을 사서 데리고 돌아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만년에게 고하므로, 만년이 즉시 왕에게 고하니, 만년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그 집에 가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노예1인을 주고 맞바꾸었고 인하여 같이 거처하였습니다. 비단 옷[羅衣] 각각 2벌[領]씩을 내려 주고 하루에 세끼씩 음식을 먹이었는데, 한 때의 쌀이 두되[升]이었습니다.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도안(道安)등이 〈섬〉에 들어왔다가 돌아가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풀어서 보내고자 하였으나,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너희가 그를 데려가거라. 만약 조선에서 기뻐하거든 여러 곳에서 표류하여 온 조선 사람들도 또한 모두 쇄환(刷還)하라. 하였습니다.

 

1. 유구국은 땅이 따뜻하여 겨울철에 얼음과 눈이 없고, 매년 9월에 파종(播種) 하였다가 11월에 묘종을 옮겨 심고 5, 6월 사이에 베어 거두는데 기름진 땅에서는 두 번 심어서 결실(結實)을 하고, 척박한 땅에서는 이미 베어 낸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삭이 팰 따름입니다. 또 곡식이 익으면 이삭은 베고 짚은 그대로 두어서 그 땅의 거름으로 합니다.

 

1. 땅이 편편하거나 넓지 못하며 길이 많이 높고 낮아서 차량(車輛)이 없습니다.

 

1. 부모가 죽으면 상복(喪服)을 입지 않고, 고기를 먹기를 보통 때와 같이합니다. 곡(哭)하는 데 슬퍼하지 않고 제사(祭祀)도 지내지 않으며, 불사(佛事)를 행하지 않습니다.

 

1. 조선(朝鮮) 사람 60여 명이 유구(琉球)에 표류하여 왔으나, 모두 사망하고 다만 나이 많은 5인이 생존하여 있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은 모두〈그〉나라 사람들과 혼인하였고 가산(家産)도 부유합니다. 노인(老人)들은 조선(朝鮮)말을 조금 알고 있습니다.

 

1. 유구국왕(琉球國王)은 혹은 1, 2개월에 한번 조회(朝會)를 받기도 하고, 혹은 1개월 안에 두 번 조회를 받는데, 조회(朝會)할 때에는 3층 전(殿)위에 앉고, 여러 신하들은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고 뜰아래에서 배례(拜禮)합니다.

 

1. 중국(中國) 사신(使臣)의 배 2척이 면()·꿀[蜜]·양(羊)·술[酒] 등의 물건을 가지고 나라에 이르렀는데, 중산왕(中山王)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고(旗鼓)와 우산(雨傘)을 갖추고서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여, 전(殿)안에 들어와서 연회(宴會)하여 위로하였습니다.

 

1. 남자는 항상 소매가 장삼(長衫)처럼 넓은 옷을 입고, 존귀(尊貴)한 자는 소매통과 옷 위에 오색실[五色絲]로써 짐승의 모양을 수놓았고, 옷의 색깔은 혹은 검기도 하고, 혹은 희기도 하고, 혹은 붉기도 합니다. 부인들은 혹은 장삼(長衫)처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기도 하고, 혹은 짧은 도포[短襖]와 치마[裙]를 입는데, 수를 놓지 않으며, 짧은 도포의 제도는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하나 조금 길고, 중[僧人]의 장삼(長衫)은 또한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1. 토산(土産)은 오직 삼[麻]과 모시뿐이며 목면(木綿)은 없고 인호(人戶)의 10분 안의 1분이 양잠(養蠶)을 하지만, 그러나 또한 불실(不實)합니다.

 

1. 남자는 머리털을 왼쪽 귀 위에서 맺고, 나머지 머리털은 오른쪽 귀 위에서 고리로 맺고서 흰 수건으로서 속을 싸서 회회인(人)의 모양과 같으며, 부인들의 머리털은 뒤로 향하여 상투[髻]를 틀어서 마치 우리나라의 향리(鄕吏)의 상투와 같습니다. 소녀들은 뒤로 향하여 〈머리털을〉 내려뜨렸습니다. 겨울철에도 따뜻한 도포 옷을 입지 아니하고, 소와 말은 사철 푸른 풀을 뜯어 먹습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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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왕국(琉球國 Ryūkyū Kingdom) 은 열도를 근원지로 했다.

 

존속 기간 : 1429년 - 1879년


류큐왕국(표준어: 유구왕국, 琉球王國, 중국어: 流球國/琉球国)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류큐 제도에 있었던 왕국이다. 당시 정식 명칭은 유구국(流球國)이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조선 등과의 무역으로 번영했으며, 무역에 참여한 류큐의 상인들은 결속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포르투갈 상인의 기록이 있다.


역사


류큐 왕국은 1429년, 제3대 尚巴志 왕의 산잔 통일(三山統一)에 의해 성립되었다.


건국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추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의 삼산(三山)시대가 시작된다. 세 나라는 추잔의 尚巴志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 왕국이 세워진다.


第一尚氏王朝


尚巴志는 산잔 통일을 통해 류큐 왕국을 연다. 하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하였고 중앙집권적 왕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尚巴志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 왕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간다.


第二尚氏王朝


尚德왕이 급사하면서 尚泰久王의 중신이었던 金丸(尚円王)가 왕위를 선양받는다. 그는 尚円王을 자처하여 第二尚氏王統을 연다. 第二尚氏王統때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번(薩摩藩)이 침공해오자 류큐는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 奄美諸島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된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다시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을 되찾는다.


말기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의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1879년 일본 제국은 무력으로 왕국 체제를 폐지, 류큐왕국의 국왕 상소를 멋대로 일본 도쿄에 압송하였다. 류큐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尚泰왕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졌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사실상 류큐를 몰락시켰다(류큐 처분, 琉球處分). 결국 류큐 왕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후 별다른 논의 없이, 류큐 독립주의자의 의견조차 묻지 않고, 미국이 점령한 채 일본의 영토로 간주되었으나, 현재에도 류큐민족의 민족자결정신에 의거하여 류큐 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종교


고유 종교


옛날부터 류큐는 고유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기코에오키미우둔(聞得大君御殿/きこえおおきみうどぅん), 수의둔치(首里殿内/しゅりどぅんち), 마카베둔치(真壁殿内/まかべどぅんち), 기보둔치(儀保殿内/ぎぼどぅんち)가 있었다.


기독교


류큐 왕국에서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전래는 쇼호 왕의 치세인 1622년,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고 포교를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 일본에선 기독교가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종교로 간주되어(기독교의 교리 중 '자살금지'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사회질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할복'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추가로 임진왜란의 맹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2차 전국전쟁당시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고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맞섰지만 패배하여 결국 할복을 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그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처형한 후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미 1612년 기독교 금령으로 금지가 된 상태였지만, 자와 섬이나 루손 섬에서 왕래한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서 기항을 한 관계로 류큐 제도에서 포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불교


류큐왕국은 조선에서 주어진 불전(佛典)을 연못(엔칸치 圓鑑池)안에 섬을 만들어, 건물(벤자이텐도오 辯財天堂)에 보관했다.


문화


류큐 왕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이곳에서 개발된 가라테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국과 류큐왕국


한국과 류큐왕국의 공식적인 교류는 고려시대로부터 시작했다. 1389년,류큐왕국은 왜구의 피로인(노예)이 되고 있던 고려인을 보호해, 고려에 송환했다. 고려사 신창(辛昌) 원년 팔월 참조. 조선시대가 와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왕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또한 자주 류큐왕국(유구국)에서 표류하여 경상도나 제주도에 도달한 표류자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며, 대부분의 경우는 인도적으로 처우하여 돌려보내도록 했다.하지만, 1430년대에는 류큐과 조선 사이의 항로(航路)에 왜구가 많이 나와, 또,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하는 일본인 (상인)이 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를 경유한 교류으로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 세종5년 정월 사일 참조.


임진왜란과 류큐왕국


임진왜란 직전, 일본은 명나라를 치도록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조선에 하게 된다. 한편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협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마침 류큐왕국의 사신이 일본의 침략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보고하여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섬라와 류큐왕국, 조선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후 명나라가 조선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과 그 진로에 있는 조선을 정복하려고 해서, 류큐에 조력을 명령했지만, 류큐는 명의 책봉국 이었기 때문에 끊었다. 덧붙여 실제로 임진왜란 으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갔을 때, 류큐는 일본군에 반만 식료를 제공하고 있다. 덧붙여 이 때, 일본으로부터 위협에 가까운 서신이 류큐에 보내지고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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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尚円王1469年 - 1476年(1415年 - 1476年)

                                尚真王1477年 - 1527年1月(1465年-1527年1月12日)

                          尚元王1556年 - 1572年(1528年3月5日-1572年4月1日)(満44歳没)

                                尚寧王1589年 - 1620年(1564年-1620年10月14日)

                   尚豊王1621年 - 1640年(1590年12月10日-1640年6月22日)(満49歳没)

                      尚貞王1669年 - 1709年(1645年1月3日-1709年8月18日)(満64歳没)

                             尚敬王1713年 - 1752年(1700年8月3日-1752年3月14日)

                       尚穆王1752年 - 1794年(1739年5月3日-1794年2月19日)(満54歳没)

                     尚灝王1804年 - 1834年(1787年7月14日-1834年7月5日)(満46歳没)

                             尚育王1835年 - 1847年(1813年8月19日-1847年10月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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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왕국의 마지막 왕 19대 尚泰왕은 일제(명치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졌다.

                                   琉球国王:1848年6月8日 - 1872年9月14日

                                   琉球藩王:1872年9月14日 - 1879年3月11日

                                   (1843年8月3日-1901年8月1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