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설날, 설화 조심

한부울 2009. 1. 24. 14:12
 

설날, 설화 조심

[한겨레신문] 2009년 01월 19일(월) 오후 07:49

 

 

이번 설 비교금지·투정금지·다툼금지

명절 때 싸우는 집 의외로 많아

꾹꾹 참다가 자극 들어오면 폭발


설을 앞두고 각종 주부 사이트들의 게시판에 불이 붙고 있다. 명절 스트레스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친정에 늦게 가라셔요.” “장인 얼굴 보기도 싫다는 남편… 미워요.” “회사일 때문에 늦게 오겠다는 동서… 난감합니다.”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꿈을 꾸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무사히 설을 보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서는 집들이 많다. 평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무심코 꺼냈다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집안 분란을 일으키기 십상인 때가 바로 명절이다. 그래서 설을 잘 보내는 방법 중의 하나가 말조심.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지 않는가. ‘설빔’은 주지 못할지언정 ‘설화’(舌禍)만큼은 피해보자.


피로는 설화의 시작

설 연휴 중 가장 말조심해야 할 상대방은 주부들이다. 갖가지 특별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명절은 한국의 주부들에게 가사노동의 ‘막장’이다.


명절 기간 중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이를 방증한다. 시청률 조사기관 티엔에스 미디어코리아가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명절 연휴 시청률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온 가족 시청량은 크게 늘지만 주부들은 감소한다. 지난해 설 연휴 동안 40~50대 성인 남성의 시청 시간은 평소보다 2시간 이상 늘어난 반면 30대 여성들의 시청 시간은 72분이나 줄었다. 오정화 차장은 “이 기간 중 주부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온 가족이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등돌리고 일하는 며느리들의 소외감을 잊지 말자. 누적된 피로는 자칫 명절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 신체적 스트레스가 쌓이면 평소 하던 말이라도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일하는 주부 곁에서 재미있는 입담도 나누고, 입에 먹을 것도 넣어주고, 주방 주변을 정돈해주는 센스도 발휘하자. “음식 맛이 왜 이래” 따위의 맛투정은 금물이다.


시댁·친정 적절한 배려를

명절은 자신의 원가족(결혼 전 가족)을 만나는 기회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배우자 가족은 타인이다. 며느리, 사위로서 사랑받는 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감투’다. 그래서 배우자의 가족은 조심스런 관계다. 하지만 가부장제 전통이 뿌리깊은 우리 사회에선 남편이 부인에 비해 원가족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결혼해 일가를 이룬 뒤에도 남편은 부모와 쉽게 분리되지 않고, 영향도 많이 받는다. 따라서 원가족이 모이는 명절 때, 남편은 부인의 스트레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명절 때 주부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는 시어머니의 ‘더 있다 가라’는 말이다. 빨리 친정에 가려고 아픈 허리를 가누며 설거지를 끝낸 며느리에게 시누이 올 때까지 더 있으라든가, 연휴가 짧으니 친정엔 가지 말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임세원 교수는 “자기중심적으로 상대가 싫어하는 말을 하는 건 상황·감정·반응들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연휴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기혼 자녀나 배우자들이 시간을 적절히 배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술 한잔 걸친 다음 며느리·사위에게 평소 누적된 불만사항을 얘기하는 건 ‘금기사항’이다.


품고 있던 건 계속 품자

“우리 집은 왜 명절만 되면 싸워?” 아이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집들이 의외로 많다. 명절만 되면 꾹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는 사람들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족 구성원들을 보자마자 평소 쌓여 있던 섭섭한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치밀어 올라온다. 피로가 누적되거나 자신의 내면에 잠재돼 있는 수치심, 불편함, 분노 등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면 더욱 격해진다. 임세원 교수는 “통제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부추길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알코올과 재산다툼”이라며 “명절 때 특히 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단 상황이 벌어지면 배우자 등 주변인들이 서둘러 개입해 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소 충동적인 성향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에서 함께 조심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전에 가족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아예 옛일을 들추지 말고 편안하고 즐거운 이야기만 주고받는 것이 좋다. 서로 엉킨 문제나 오해를 푸는 기회는 일단 유보한다. 특히 종교나 정치 문제 등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견해가 다를 경우 이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건 위험하다.


설은 덕담을 주는 자리

“너 반에서 몇등 하니?” “너네 아빤 어릴 때 공부 잘했다” 하는 어른들의 말 속에서 아이들은 분노와 적개심을 느낀다. 특히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엄친딸’(엄마 친구 딸)과의 비교는 아이들의 감정을 극한으로 내몬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인간에겐 누구나 ‘사회적 비교’의 욕구가 있다“며 “엄친아나 엄친딸을 예로 드는 것은 좀더 분명히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가족간에 서로를 저평가하는 것은 상대를 비난하더라도 나를 허용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라는 것. 하지만 그 말이 주는 마음의 상처의 깊이를 생각하면 이런 비교의 욕구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친척들이 아이를 비교하거나 무시하면 “우리 아이는 노래에 재능이 많아요” “얘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어요” 식으로 중간에 개입해주는 게 좋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흔쾌히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곽 교수는 “나를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는 건강한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대의 생각을 바꾸려 하거나 나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하지 말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실제로 나는 안 그런데’ 하는 식으로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이다. 집은 인정의 욕구와 비교의 욕구가 맞부딪치는 공간이다. 타인이면서도 타인이 아닌 집단이 가족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하고 긍정적인 말로 행복감을 높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 설에 그 의무를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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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금풀기도 좋은 명절

무리하지 말고 풀려면 화끈하게


흔치 않은 일이지만, 가족끼리 케케묵은 앙금을 푸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권아무개(46)씨는 3년 전 설날 처음으로 두 여동생에게 사과했다. 외아들이라고 혼자만 대접받은 게 미안해서였다. 설날 윷놀이를 할 때 여동생들이 이긴다 싶으면 할머니는 판을 엎곤 했다. “정초부터 ‘계집애’들이 어디 오빠 기를 꺾으려 드느냐”는 거였다. 사과를 받아주리라 생각했지만 반응은 의외였다. “맞아. 그때 우린 사람도 아니었지 뭐.” 새삼 동생들의 깊은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김아무개(30·대학원생)씨는 언제나 형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살아온 남동생에게 사과했다. 동생은 울면서 “왜 그랬냐”고 옛일을 들춰 따져물었다. 변명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냥 미안하다고만 얘기했다. 이아무개(39·직장인·여)씨는 돈을 빌려가고 연락을 끊은 남동생에게 지난 설 때 문자를 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얼굴이나 보자.” 가족들은 명절 때 돈, 집, 차, 아이들 성적 얘기를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모인다.


명절날 모인 김에 가족끼리 해묵은 감정을 풀자고 옛일을 들춰내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잘못을 용서받기로 작정했다면 집안의 위계를 떠나 온 마음을 풀어놓고 사과하는 것이 좋다. 단 “너도 잘못했잖아”라고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강요하면서 상대를 비난하는 일은 삼간다. 상대를 용서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방법이다. 풀리지 않는 복잡한 문제를 피해가고, 서로 얘기하지 않는 원칙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명절 스트레스를 한결 덜 수 있다.


이유진 기자 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