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수호

일본이 먹칠한 '독도' 누가 살려냈나

한부울 2009. 1. 7. 18:35
 

일본이 먹칠한 '독도' 누가 살려냈나

[오마이뉴스] 2009년 01월 07일(수) 오전 11:55

 

▲ 독도가 일본의 부속 도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 1951년 6월6일 '총리부령 24호' 법령. 3항에 울릉도, 독도, 제주도가 함께 포함돼 있다.  ⓒ 이국언 


일본이 패전 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독도를 자국의 부속도서에서 제외한 법령까지 공포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가운데, 언론들도 앞 다퉈 새해 벽두 터진 이 대형뉴스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종종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나타내는 일본의 고지도나 문서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2차대전 이후 법령을 통해 독도를 "일본의 부속 도서에서 제외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쐐기를 박는 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제공한 것은 우리 정부나 전문 학계도 아닌, 가장 혹독한 수난을 직접 겪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란 사실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일제 피해자들 내팽개친 한일회담


잊을 만하면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배경은, 해방 60년이 넘도록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명예회복조차 받지 못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끈질긴 투쟁이었다. 바로 지난 2006년 12월 일제 피해자들이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제기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소송 과정에서 이번 법령의 단초가 드러난 것.


일본을 상대로 한 과거사 소송에서 연거푸 패소의 쓴맛을 본 일제 피해자들은 자연스레 패소의 원인으로 대두된 1965년 한일협정 문서에 주목해 왔다.


급기야 피해자들은 당시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제 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자며 우리정부를 상대로 한일협정 문서 공개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2005년,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한일협정 문서가 4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다. 


한국정부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 여파에 힘입은 일제 피해자들이 다시 한번 용기를 낸 건 지난 2005년 말경. 한국에서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12월 일본과 한국의 시민 424명(일본 153명, 한국 271명)에 의해 '한일회담 문서 전면 공개를 구하는 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2006년 4월 25일 외무성을 상대로 한일회담 문서 공개청구를 제기한 것이다.   


이금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 회장, 이용수 군 위안부 할머니, 최봉태 변호사 등 한국 측 원고대표 3인을 포함한 한일 양국의 원고대표 10명은 차일피일 관련 문서 공개를 미루는 외무성을 상대로 그해 12월 정식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1년 7개월여 만에 승소판결을 얻어냈다.

 

▲ 일본 기타큐슈 외곽에 위치한 영생원에 모셔져 있는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의 무연고 유골. 해방 60년이 되도록 혼백마저 이국을 헤매고 있다. ⓒ 이국언

 

외무성, 독도 등 민감한 부분 '먹칠' 공개


외무성은 결국 지난해 5월경부터 약 6만여쪽에 달하는 관련문서를 공개하기에 이르렀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이것은 누더기 문서나 다름없었다. 외무성이 내놓은 문서 중 약 25%는 판독이 불가능하도록 까맣게 먹칠이 된 상태였던 것. 외무성이 고의로 한일간에 민감한 내용에 대해서는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도에 관한 언급 역시 먹칠된 부분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한일회담 문서공개를 요구하는 회'와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의 관련 사실 추적 끝에, 마침내 문제의 먹칠된 내용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배제해 왔던 1951년 당시 일본 정부의 법령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밖에도 외무성의 문서를 통해서 일본이 한일회담 당시 시종일관 독도문제를 국제분쟁으로 몰고 가 종국에는 국제사법재판소(IJC)나 제3국의 조정을 통해 해결하려 했고, 회담을 맺는 최종 서명 당일까지 집요하게 이를 주요 의제화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듯 독도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 배경에는, 이처럼 해방 60년이 넘도록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투쟁이 있었다. 아울러 팔순 노구를 이끌고 현해탄을 넘나들어야 했던 우리 일제 피해자들의 절박한 삶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지난 3일 일본이 51년 6월 6일 공포한 '총리부령 24호'와 같은 해 2월13일 공포한 '대장성령 4호'를 통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배제했던 사실을 찾아내 청와대에 서면 보고했다고 밝혔다.

 

▲ 일본 외무성이 지난해 공개한 1965년 한일회담 당시 일본측 문서 내용의 일부. 독도가 언급된 부분이 고의로 까맣게 먹칠된 채 공개됐다. ⓒ 이국언 

 

'총리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의 소유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거 식민지 섬'과 '현재 일본의 섬'을 구분한 내용이 담겨있으며, 법령에서는 스스로 울릉도, 독도 및 제주도를 일본의 섬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독도 버금가는 내용 더 많다"


▲ 최봉태 변호사가 일본 외무성이 문서의 주요 내용을 까맣게 먹칠한채로 공개한 1965년 당시 일본측 한일회담 문서를 보여주며 일본의 오만한 태도를 규탄하고 있다.  ⓒ 이국언 

 

2010년이면 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 된 지 100년. 중요한 것은 정작 대일 과거사 규명이 비단 독도 하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제 피해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일제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만 하더라도 정작 '먹칠'된 부분처럼 주요 부분이 완전 공개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정의회복의 길은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일제강제동원 특별법과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에도 불구하고 일제 피해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미봉책에 불과한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태평양전쟁전후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일부 위로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 대상에서조차 제외된 상태다. 재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국내 동원자, 생환 사망자, 조카, 사후 양자 등을 아예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걷어 채이고 정부에서도 찬밥 취급 받고 있는 것이 일제 피해자들의 솔직한 처지인 것.


이와 관련 최봉태 변호사는 "일본이 아직까지 은폐하고 있는 부분에는 독도에 버금갈 만큼의 민감한 내용들이 훨씬 더 많다"며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 자금을 제공했을 뿐, 일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에 대해서는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독도를 단순히 영토문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라는 카드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이런 차원에서도 우리정부가 아직 일본정부로부터 어떠한 사과와 보상도 받고 있지 못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 피해자 문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오마이뉴스 이국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