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의 답답한 해석
[프레시안] 2008년 12월 15일(월) 오전 08:14
김운회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제 15 장-우리의 이름, 왜(Wa)
들어가는 말 : 광개토대왕비의 답답한 해석
광개토대왕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 부분은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써 조공을 하여왔는데 왜가 신묘년(391년) "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그 다음에는 글자가 망실되어 많은 논란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양국의 학자들이 아직도 입씨름을 하고 있죠.
그래서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거나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또는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오므로 고구려가 왜를 쳐부수었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단 주요 글자가 망실되어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주로 "왜가 391년 이후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 즉 부용국(식민지)로 삼았다."라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열도(일본)의 동북아의 고대사 즉 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라는 강대국이 있고, 한반도의 남부 및 열도에는 왜(倭)라는 강국이 있으며 한반도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소국들이 고구려와 왜의 부용국 또는 조공국으로서 이들 강국(고구려와 왜)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없이는 열도쥬신(일본인)의 생각을 고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도쥬신의 사학계처럼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자기논리로만 무장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두 나라는 지금까지 천년 이상을 반목(反目)하여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원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열도의 이 같은 해석에 대해 반도의 사학계는 다양한 대응을 해왔습니다. 그 동안 워낙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비문에 왜(倭 : Wa)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반도의 사학계는 이 왜를 열도의 왜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발로이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같은 논쟁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왜가 신라를 부용국으로 삼기위해서 대대적으로 침입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군이 신라를 도와주기 위해 내려온 것이겠죠.
이제 다른 부분을 봅시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영락) 9년(399년) 기해년에 부여(백잔)의 잔당들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평양 아래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여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의 군대가 돌아와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눈에 띄는 것으로 백제(반도부여)와 왜가 한무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군요. 특히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다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도무지 대응할 길이 없죠. 겨우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백제의 지원군으로 동원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어도 신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주도세력이 백제가 아니고 왜로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글쎄요. 백제는 고구려의 극심한 침공으로 꼼짝을 못하고 왜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걸까요?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
"(영락) 10년 경자년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라성 즉 경주 인근에 왜인(倭人)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즉 "(영락)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라는 말입니다. 원래 대방이라는 곳은 요동과 만주, 황해도 등 여러 지역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있는 말은 이후의 말들로 봐서 오늘날 평안도나 황해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가 황해도 지역까지 고구려를 공격해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전에 고구려가 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이것은 일본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의 기록은 한반도 남부를 원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군의 침공에 대한 일본(왜)의 반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에가미 나미오의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설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죠.
▲ 광개토대왕비 탁본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껏하는 얘기가 이 전쟁은 백제가 주도했을 것이며 왜군은 지원군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왜가 백제의 지원군이라는 얘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사의 연구 수준이나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제가 보기엔 왜라는 말이 한국인의 다른 이름 같은데요.
이것은 '왜 =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입니다. 왜 = 가야인 또는 규슈지역의 가야인 또는 요동과 한반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민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광개토대왕 시대라면 5세기 초입니다. 만약 왜가 고구려를 상대로 싸웠다고 하면 수천에서 수만의 군대가 전략적으로 신속히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왜가 현재의 일본지역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강력한 고구려군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2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것인데 이 많은 병력을 일본 열도에서 누가 조직하고 동원했으며 그 보급로는 어떻게 구성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도에서 그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이동시킬만한 항해술이 4세기 말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2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려면 동원되는 배만 해도 (사이메이 천황기의 기록과 대비한다면) 대형 선박으로 4백~5백여척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동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그 많은 군대와 큰 배가 동원되었다고 하면 행정조직이 고도화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의 일본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특히 4세기에서 5세기초까지 일본에는 어떤 기록도 없어, '신비의 4세기'라고 할 지경입니다.
그 동안 유라쿠 천황(곤지왕)까지의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거의 6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열도는 각종 정치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무슨 군단급 해외파병이 가능한 일입니까? 항공모함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1)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왜(倭) = 일본(日本)' 이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죠. 원래 왜(倭)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 -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로 잡아도 5세기 이후로 봐야합니다.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는 266년경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요.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 -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필자 주
(1) 고대의 전쟁과정과 전쟁 물자의 이동과 관련된 사항은 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삼인 : 2006) 22장, 29장, 42장 참고.
김운회 동양대 교수PRES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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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의 왜(倭)
[프레시안] 2008년 12월 19일(금) 오전 08:37
김운회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우리의 이름, 왜(Wa)
(2) 광개토대왕비의 왜(倭)
반도 쥬신에서는 왜(倭)를 현재의 일본 열도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3년 이후 반도쥬신의 북부(북한)를 중심으로 일본사를 반도쥬신의 역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들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가야 지역이4) 『삼국지』「위서(魏書)」동이전의 한전(韓傳)의 계통을 잇는 왜(倭)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라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던 것이죠. 물론 반도 쥬신의 사서인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타나는 왜(倭)라는 말은 가야뿐만 아니라 열도(일본)를 가리키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왜구의 그림
그 동안 이 왜(倭)의 존재를 일본에서는 야마토(大和) 정권 또는 한반도 남부 왜인으로 보았고5), 한국에서는 북규슈의 백제계 왜국6), 친백제 북규슈 세력7), 중국에서는 북규슈의 해적 세력8) 등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조금씩 잘못된 견해들입니다.
특히 한반도 남부의 왜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저 한국인이지요. 도대체 열도에 제대로 된 국체나 국가도 없는데 그 국민만이 반도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앞서 본대로 왜에 대한 개념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 문제와도 결부되어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의 경우 고구려군은 왜백제연합군(倭百濟聯合軍)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왜에 대하여 크게는 대화조정(大和朝廷)으로 보는 설, 북규슈(北九州)의 백제계 국가로 보는 설, 임나지방의 별명으로 보는 설 등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왜에 대한 문제는 1960년대부터 반도 쥬신(한국)과 열도 쥬신(일본) 사이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데, 당시에 열도의 학자들은 비문의 왜를 대화조정(大和朝廷)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결국 이런 사고에서 열도 쥬신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는 식의 논리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열도 쥬신의 반도 쥬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구실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에 대하여 일본의 연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학자는 북한의 김석형(金錫亨) 교수(김일성 종합대학)로 여기서 말하는 왜는 북규슈(北九州) 지방에 있던 백제계(백제 분국)인 왜국으로 고국인 백제를 위해 동원되어 조선에 출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김석형 교수는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내기도 했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김석형 교수의 견해는 오류입니다. 김석형 교수의 견해는 부여계와 왜를 완전히 같다고 보는데 그것은 잘못이지요. 그리고 이 시기에 고국으로 그 많은 군대를 보낸다는 자체가 동화같은 얘기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에 대하여 그것이 야마토 조정의 군대이든, 백제분국의 군대 이든 모두 북규슈로 비정한 것은 타당성이 부족합니다.
첫째 지금까지 본대로 5세기 초에 대전(大戰)을 수행해낼만한 정치적인 실체가 제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도대체 규슈 지역에 어떤 강력한 국가가 있어 대고구려 전쟁을 수행한다는 말입니까?
둘째 설령 야마토 조정의 실체가 존재한다해도 4세기말에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로 출병하여 고구려의 대군과 싸울 정도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째 고구려와 싸운 왜가 일본 내에 있었다면 왜의 대군(大軍)은 전쟁이 필요한 시기에 신속하게 쓰시마(對馬) 해협을 건너야 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조선(造船) 기술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9)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지적한대로 당시 야마토 조정이 군단급 병력을 동원한 기록은 고사하고 중대급 병력도 제대로 동원한 기록이 믿을 만한 사서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에 대하여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교수는 고구려와 싸운 왜군의 중핵 혹은 대부분은 바다를 건너지 않은 왜인(倭人), 곧 임나 지방에 있던 왜인이었을 것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인·왜병도 육지와 이어진 곳에 살고 있던 왜인·왜병이며,10) 신라에서는 7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와 접해 있던 임나지방을 왜(倭)라고 불렀다고 주장하였습니다.11) 이와 관련하여 키노시타 레이진(木下禮仁) 교수는 『삼국사기』의 왜관계 기사들이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집중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12)
이 논의들도 말이 안됩니다. 열도 쥬신의 사학계의 거목조차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양국의 사학자들의 소중화주의적 질환이 심각한 정도입니다. 한번 봅시다. "바다를 건너지 않은 왜인(倭人), 곧 임나 지방에 있던 왜인"이라는 말이 우습군요. 임나지방에 있는 왜인이라는 표현이 말입니다. 이 말은 그저 임나지역민 즉 가야인이라고 하면 간단한 말이 될 터인데 표현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이시기에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나 국민의식이 제대로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임나지역에 있던 왜인이라는 말이 상식적이지 않죠. 그저 가야인들이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어쨌든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일본의 대부분 사가들이 중국 사서 왜인전에 보이는 왜인 거주구역의 중심이 오늘날의 일본 열도라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倭)', '왜국(倭國)', '왜인(倭人)'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각종 사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그 내용이 지금의 일본 열도와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본 것입니다. 탁견(卓見)이 분명합니다.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산해경(山海涇)』, 『논형(論衡)』,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왜 관계 기사를 여러 차례 검토하였습니다.13) 그 결과 그곳에 등장하는 왜인의 거주지역이 현재 중국의 화북(華北)이나 화남(華南), 혹은 한반도 남부에 조금씩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왜(倭)'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고, 신화시대(神話時代)에는 천황과 그 가족만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전설시대(傳說時代)에는 야마토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역사시대에서는 이주민들(부여계를 말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왜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중국·조선 사서의 왜(倭) 관련 기사(記事)들을 검토하여 왜가 가야의 별칭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가야의 재지호족(在地豪族)으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왜 왕권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의 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노우에 교수의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견해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도 앞으로 보겠지만 쥬신의 전체 역사에서 고찰한 왜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왜라는 개념은 단순히 일본 열도나 중국의 화중, 화남 및 한반도 남부의 사정만으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의 요소들과 변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倭)는 범쥬신(Pan-Jüsin) 즉 범 한국인들의 명칭이며, 이 명칭은 단순히 한반도나 일본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의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요하(遼河) 등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나는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거주한 친부여계 한국인들임을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를 통하여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좀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들을 검토하고 그 타당성을 검정할 것입니다.
필자 주
(4) 일본에서는 주로 가라(加羅)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5) 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119쪽.
(6) 金錫亨『초기조일관계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 1966), 297쪽.
(7) 千寬宇 "廣開土王凌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일조각 : 1979)
(8) 王建群(박동석譯)『廣開土王碑硏究』(역민사 : 1985), 236쪽.
(9) 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116~121쪽.
(10) 井上秀雄 앞의 책, 390쪽.
(11) 旗田巍「三國史記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日本文化と朝鮮』2(朝鮮文化社 : 1975)
(12) 木下禮仁「5世紀以前の倭關係記事」- 三國史記を中心として『倭人傳を讀む』森浩一編(中央公論 : 1982)
(13)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한서(漢書)』의 경우는 지리지(地理志),『후한서(後漢書)』는 선비전(鮮卑傳),『삼국지(三國志)』는 동이전(東夷傳),『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본기(新羅本紀) 등의 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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