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대류조선독립]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외

한부울 2008. 11. 22. 19:58

[대륙조선독립]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사회주의계열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일동맹을 하여 만들어진 단체로 5당이 모여 결성이 되었다. 공산주의 계열로 분류되고 있다. 조선혁명청년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를 일컬어 님 웨일즈가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설립경위


1931년을 기점으로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만주·북경(北京)·상해(上海) 등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된 해외운동 진영의 통일과 항일 역량의 규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김원봉(金元鳳, 일명 若山)의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2년 10월부터 상해에서 여러 차례의 준비회의를 가지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에는 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 등과 미주의 대한독립당·대한인국민총회·뉴욕대한인교민단 및 하와이대한인국민회 등 9개 단체가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한 뒤에는 활동무대를 난징(南京)으로 옮기고, 한국대일전선총동맹만으로는 실력이 약하고 내부가 순수하지 못하여 한국독립세력의 통일기관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인식,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열단 인사들을 중심으로 ‘통일동맹’을 기초로 한 새로운 정당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935년 6월 29일 신당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그 해 7월 5일 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족혁명당이 결성된 뒤에도 모체가 되었던 단체들은 표면적으로는 해체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실제로 여전히 독자적으로 대외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서로 다른 사상과 혁명노선으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상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 분열은 구성원간의 극복하기 어려운 사상적 주장과 독립운동방략의 차이 및 신당의 양대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池靑天) 양파의 대립에서 파생된 김원봉파의 전횡·독단 때문이었다. 조선의열단의 전횡·독단의 결과 한국독립당의 박창세(朴昌世)·조소앙(趙素昻)과 신한독립당의 민병길(閔丙吉)·조성환(曺成煥)·홍진(洪震) 등이 1935년 9월을 전후하여 탈당, 최대의 독립단체로 자처하던 한국민족혁명당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1937년 1월 당의 잔여 인물들은 다시 난징에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명하도록 결의하고, 김원봉·지청천·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윤세위(尹世胃)·김상덕(金尙德)·최동오(崔東旿)·천병일(千炳日)·유동열(柳東說)·김홍서(金弘敍)·이경산(李景山)·정팔선(鄭八仙)·정일붕(鄭日朋) 등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참여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 김원봉, 윤세주, 진이로

신한독립당 : 이청천, 신익희, 윤기섭

조선혁명당 : 최동오, 김학규, 김활석

한국독립당 : 김두봉, 조소앙, 최석순

미주한인독립당 : 김규식

그 외 : 이광제, 이관일

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2]


또한 님 웨일즈에 의하면 연맹 내부에서는 의열단 민족주의자, 중국공산당지부, 고려공산당 상해파, 고려공산당 시베리아파 등의 파벌들이 주도권 싸움을 했다고 전해진다.


노선 및 조직


그러나 1937년 3월 청당(淸黨)과 당적제적 등의 소란 속에서 이른바 비상대회를 열고 지청천일파가 조선혁명당을 다시 결성하여 탈당하자, 이때부터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을 독점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루거우차오사변(蘆溝橋事變) 이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당내 적색 과격분자들이 점차 김원봉의 중간적인 좌경노선에 자신들의 요구를 부합시킬 수 없어 탈당하기 시작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고, 공산주의자 왕지연(王志延) 등이 재차 탈당함으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김원봉 등은 이러한 당세의 약화를 만회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단일당운동을 제창하여 1943년 2월 제7차 전당대회에서 이전의 탈당분자, 청년전위동맹과 해방동맹이 합쳐 이루어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조선혁명당 해외전권위원회 등과 당의 개조형식으로 합병하여 임시정부의 양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다.


이때 이들이 표방한 것은 공·농 소자산계급을 당의 주요 기초로 하고 국민헌법 제정과 보통선거제 실시, 토지개혁·남녀평등, 그리고 민족자유·정치자유·경제자유·사상자유의 4대 자유에 입각하여 인류평화를 실현한다는 신민주공화국의 건립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직은 대표회의 중앙집행위원회 및 그 예하의 각 부로 되어 있다. 각부의 책임자는 주석 김규식(金奎植), 총서기 김원봉, 비서처주임 신기언(申基彦), 조직부장 김인철(金仁哲), 선전부장 손두환(孫斗煥), 재정부장 성현원(成玄園), 통계부장 신영삼(申榮三), 미주총지부 주석 김강(金剛), 미주총서기 이경선(李慶善) 등이었다


집행부

서기부 : 부장 김원봉, 부원 윤세주, 김상덕 외 1명

조직부 : 부장 김두봉, 부원 김학규, 안일청, 최석순

선전부 : 부장 최동오, 부원 신익히, 성주식

군사부 : 부장 이청천, 부원 김창환 외 1명

국민부 : 부장 김규식, 부원 조소앙 외 1명

훈련부 : 부장 윤기섭, 부원 3명

조사부 : 부장 이장제, 부원 진의로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은 임시정부의 김구를 영입하기 위하여 공석으로 두었으나 공석으로 지속됨으로 서기부와 조직부가 그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였다.


중국내 지부


일제정보기관이 1927년 파악한 이 조직의 본부 및 지부의 단원은 다음과 같다.


광동에는 김원봉, 김성숙, 최원, 이영준, 김건운, 최영암, 해유재, 김택, 노건, 김필립, 김유광, 박효삼, 강평국, 오성륜, 이유곤이 있고,

무창에는 진공림, 진갑수, 박태섭, 유원도, 백계, 최승련, 이벽파, 박시창이 있고,

남창에는 노을용, 이집중, 왕자랑, 이기환, 김권준, 이기삼, 최영택이 있었다.


초기활동


조선민족혁명당의 초기활동은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7년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된 조선민족전선연맹(약칭 民線)의 활동으로 대표되는데,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여 중국의 항일투쟁 대열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7년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이동하여 충칭(重慶)에서 한 활동을 보면, 1939년 7월 17일 결성된 전국연합진선협회로서의 좌우합작이 우익측의 반발로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1941년 이전까지는 항상 임시정부의 반대입장에 서서 무시 또는 무관심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국토를 수복하기 이전에는 해외에 상징적으로 성립한 정부는 결코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폴란드·네덜란드·프랑스 등의 망명정권의 수립과 임시정부를 한국인의 상징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여 지원하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결정태도를 보고 임시정부에 대한 반대행위를 수정하여야만 되었다. 따라서, 임시정부 참여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여 1942년 10월 25일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선전부장 김규식과 학무부장 장건상(張建相) 2인을 임시정부에 입각시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하는 4인을 입각시켜 임시정부 안에서 명실상부한 제1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좌우합작은 조선의용군의 광복군 합류 및 인도연락대(印度連絡隊)의 파견 등 많은 활동을 남기기도 했으나, 조선민족당을 포함한 민선의 임시정부 참여는 다시 임시정부 내부에서의 좌우의 파벌싸움에 따른 심각한 내부문제를 야기하였다.


즉, 권총도난사건과 그 여파, 1943년 중국의 100만 원 차관문제로 생긴 각원(閣員)의 집단사표파동, 1942년 10월의 개헌파동, 제35차 임시의정원회의의 국무위원인선파동과 같은 대표적인 사건으로 내부적 갈등이 임시정부를 파국 직전까지 몰고갔다.


재원


중국 국민당의 삼민주의역행사에서 월 200원의 경상비와 기타 지원비를 김원봉에게 지불하였고, 국민당 정부와 중국측 요인들로부터 상당한 재정지원을 받았다.


분열


김원봉과 김두봉이 주동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이 참여하여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5명이 여기에 참여하고, 송병조, 차이석 2명만이 참여하지 않았다. 김원봉과 김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을 구실로 임시정부를 취소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창당 두달만에 조소앙이 탈퇴하였고, 임시정부는 잔류한 송병조, 차이석에 더하여 이동녕과 조완구 그리고 김구를 다시 국무위원으로 선출하여 임시정부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5당 합당은 무산되었다.조소앙은 항주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고, 신한독립당계의 홍진, 조성환 등도 탈당하여 재건된 한국독립당에 합류하였다. 1936년 김구는 이동녕과 함께 대한국민당을 설립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통합하는 시도가 실패한 후, 민족혁명당의 비롯한 사회주의계열은 1937년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을 조직하여 협력하였으나 민족혁명단 내에서도 분열이 계속되었다.[3] 주도권 다툼에서 소외된 이청천은 제2차 전당대회에서 김원봉이 총서기로 선출되자 이청천은 조선혁명당을 발족하여 민족혁명당과 대립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은 의열단의 확대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참여


민족혁명당은 분열 이후 좌익계의 조선민족전위동맹에 참여하여 조선의용대의 제1지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의용대의 화북진출 이후 지도력을 잃은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제5기 제4차 당중앙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광복후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뒤 당은 10월 10일 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거행하고, 국내외 각 민주당파와 민주영수(民主領袖)를 단합하여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김원봉·성주식·김상덕은 중앙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946년 3월까지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4월부터 활동에 착수하여,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서울 및 지방에 지부조직과 상해·로스앤젤레스·하와이 등지에 총지부를 설치하는 조직결성에 노력하는 한편, 김원봉·성주식 등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참여하여 좌우의 통일합작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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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해방동맹 [朝鮮民族解放同盟]

 

1930년대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활동의 주요 인사는 김성숙(金星淑) 등이다. 1926년 전후 중국 내 각지에 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은 민족·공산 양계통으로 분립되어 통일전선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1936년 이후 이 동맹의 일부 인사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부터 이탈했다. 마침내 같은 해 3월 난징(南京) 한족회의 김성숙·손두환(孫斗煥)·김철남(金鐵男) 등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동지 20여 명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집단으로 자처했으나, 실은 제3국제공산당과의 관계는 긴밀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즈음 중국의 항일혁명군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후 이 동맹은 김규광(金奎光)·박건웅(朴健雄)·장명(張明) 지도 하에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 이르러 이 동맹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및 이정호(李貞浩) 등과 공동으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朝鮮民族解放鬪爭同盟)을 조직하고 좌파 진영 중의 김원봉 등과 뜻과 행동을 같이하려 했다.

그러나 성과가 별로 없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은 허베이(河北)로 갔고 점차 중국공산당이 쫓겨간 옌안(延安)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이후 충칭(重慶)에 남아 있던 자들은 이 동맹을 재차 회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제휴하고자 했다.


충칭시대의 이 동맹은 동맹원이 적었으나 각자의 능력과 의욕이 커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정치에 영향력을 끼쳤다. 정치입장에 있어서 레닌(Lenin, U.)과 스탈린(Stalin, J.)노선의 실행자에 속한다고 자인했으나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에 대해서도 옹호 지지한다고 했다.


특히 청년전위동맹의 인사들이 물러간 이후 이 동맹은 보다 명확한 주장을 표방했다. 반일혁명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모든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는 결합해 임시정부 아래에서 현 단계에서 우선 민족해방운동을 완성하고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해방 이후에 결행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사회주의 당파는 이 때 민족주의 당파와 긴밀한 합작을 위해 “임시정부·반일민주강령·태극기, 임시정부의 한국독립지도자 선배를 시종 옹호한다.”는 등 4위1체의 중심사상을 공동노력, 실천하는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 동맹은 1939년부터 민선(民線:조선민족전선연맹)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과 같이 광선(光線: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단일당 창당을 목표로 7당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민족진영의 광선(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인원이나 역량으로 보아 우세해지자 “민족주의를 위해 공산주의 조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성명서를 낸 뒤 탈퇴했다. 미국 본토에서 참가한 한국인 단체가 김원봉의 좌파단체와 합작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이 동맹이 앞장서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7일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 약칭聯協)가 정식으로 성립, 선포되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이러한 연협의 단결을 깬 것은 좌파였다. 이 동맹은 1941년 12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원(臨時議政院議員)에 김성숙·박건웅 등이 참여하여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1938년 5월 1일 기관지로 ≪신조선 新朝鮮≫을 창간해 사회주의 선전에 주력하다가 조선민족전위동맹과의 통합이 이루어져 1940년 12월 충칭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김성숙·박건웅·이정호) 등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이들은 1943년 5월 10일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한국애국부인회·한국청년회 등 10여 개 단체와 공동으로 재중국자유한인대회(在中國自由韓人大會)의 명의로, 전세계 반침략 각국 정부 및 국민에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어야 되고 한민족은 당연히 자유민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엠파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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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朝鮮民族戰線聯盟]

 

1930년대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항일민족연합전선단체. 1937년 12월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해 조선민족해방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일명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의 4개 단체가 참가해 결성한 민족주의 좌파계의 항일민족연합전선이다.


이 연합전선조직은 처음 난징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곳이 일제의 침략으로 곧바로 점령되자 한커우(漢口)에 본거지를 두었다가 이어 우창(武昌)으로 옮겨갔다. 이 연맹의 결성은 1932년의 대일전선통일동맹, 1935년의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이어지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자의 항일전선통일의 움직임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연맹은 참가단체의 단일당으로서 합당이 아니라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한 협의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의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통일전선형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항일통일전선의 기운은 성숙되고 있었지만 아직 김구(金九) 등 우파민족주의자들과는 제휴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金元鳳), 조선민족해방자동맹의 김규광(金奎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柳子明) 등이 대표로 구성되어 전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완성을 위한 출발점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주요 공작방침으로, 첫째 조선국내 외의 민족통일전선을 촉진할 것, 둘째 광범한 통일적 중한민족연합전선을 건설할 것, 셋째 전민족을 발동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 연맹은 중국국민당중앙정부 및 장개석(蔣介石)계의 특무기관인 이른바 삼민주의역행사로부터 군자금으로 월 3,000원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면서 국공합작기라는 당시의 상황에서 중국국민당 및 공산당이 지도하는 각종 단체와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이 연맹의 산하에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 내의 한국인들도 직접 항일전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연맹의 통제 아래 중국과 함께 조직적으로 항일전에 참가할 부대의 조직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해 이 연맹에서는 1938년 7월 이후 각 방면에서 가맹해 온 좌파의 청년 및 군관학교 출신의 조선민족혁명당원 혹은 특별훈련반을 졸업한 청년 약 100여 명으로써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정치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일면 우한(武漢)에서 중국측의 자위단 근무에 종사하였다.


이 연맹의 이러한 노력에 뜻을 같이 하여 각지에서 참가하는 자가 속출해 총단원 약 18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단체로서 정식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맹하기 위해 같은 해 9월 초순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개칭하고 선언을 발표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예하 조직이 되었다고 일제 관헌자료는 전하고 있다.


어쨌든 항일전의 초기에 조선혁명당 내부에서 좌파의 청년들이 전시복무단이라는 이름 밑에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 등의 조선민족혁명당은 당초부터 무장해 항일전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방치한다는 것은 자파 세력의 역량 분산을 초래할 것이었고 또한 중일전쟁은 날로 격렬해지고 있어서 군사조직인 의용대의 결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필요성이 높아져갔다.


그리하여 민족혁명당과 그 민족통일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는 정식 결성계획을 1938년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 1주년이 되는 날에 제출하였다. 그 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의 승인을 얻어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출범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장으로는 김원봉이 되었다. 6명으로 구성된 지도위원으로 민족혁명당의 이춘암(李春岩), 해방동맹의 김규광, 전위동맹의 최창익, 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자명 등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지도자들이 선임되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정부군 산하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두었다. 국공합작의 이 시기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진용도 부장은 용공항전파의 천청(陳誠), 부부장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제3당의 황기상이었으며 병력은 약 3개 중대였다.


조선의용대 출범 당초의 대원수는 120명, 본부임원 14명, 제1구대 박효삼대장 이하 42명이 호남·강서 방면을 담당하고, 제2구대 이익봉대장 이하 74명이 안휘·하남 방면을 맡고 있었다.


1940년 2월에는 의용대 본부임원 94명, 제1지대 박효삼 지휘 아래 78명, 제2지대 이익성 지휘 아래 75명, 제3지대 김세일 지휘 아래 63명 등 모두 30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군 산하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로서 중국의 항일전을 지원하는 국제지원군의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싸우는 혁명무장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족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8년 10월 난징지방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여기에 배치되어 정치공작을 하고 있던 조선의용대는 큰 타격을 입고 우한으로 퇴각하고 일부는 광시성(廣西省)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내부에서는 김원봉의 항일노선에 불만을 지닌 좌파세력이 점차 증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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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자연맹 [朝鮮革命者聯盟]

 

1930년대 후반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유자명(柳子明)·정화암(鄭華岩)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중국 내의 무정부주의 단체로서, 1936년11월2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조선민족전위동맹(朝鮮民族前衛同盟)등 각 단체와 제휴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약칭民線)을 결성해 대일섬멸작전에 임하였다.


1937년11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등 좌파 계열의 단체와 함께 민선에서 대표대회를 정식으로 소집, 다섯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이 연맹의 명칭과 규약·강령 등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중국 동부에서 일어난 전쟁(중일전쟁)으로 난징이 위험에 처하자 우한(武漢)으로 오게 되었다.


그해 12월 한커우(漢口)에서 정식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선언서를 발표, 좌익 정당의 통일을 기하는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연맹의 투쟁 강령 제5항 ‘중국 항일전쟁에 참가’한다는 규정에 따라 1938년10월10일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뒷날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제1지대로 합편(合編), 통합됨과 동시에 직접 중국 군사작전인 항전의 대열에 참가한다.


1939년11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약칭光線)의 김구(金九)주도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김원봉(金元鳳)과 토의 끝에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광선’과 ‘민선’은 이미 1939년7월17일에 충칭(重慶)에서 정식으로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약칭 聯協)를 성립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각 파의 역사와 배경·주의(主義)·신앙·의식·이해관계 등의 차이로 화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7당통일회의(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성립으로 독립운동정당 단체 간에 통일의 기운이 조성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이 민족의 통일과 완전 독립보다는 공산주의의 조직 이념을 앞세우며 탈퇴를 선언했다.


나머지 5당만으로 민족주의적인 새 정당을 조직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져 8개조의 협정에 서명까지 완료하였으나, 이후 공산주의계인 나머지 2개 단체마저도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워 이탈해 버렸다. 큰 기대를 걸었던 5당 통합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셈이 된 것이다.


이 연맹에서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중국내륙으로 확전되어 가던 1938년 한국의 열혈청년들을 모두 규합한 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편성하였다. 이의 본부를 옛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에 배치하고 한국국적의 병사들을 모집하며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전개하다, 1941년1월1일 광복군 제5지대(지대장羅月煥)로 편입되었다. 훗날 나월환이 살해되자 다시 제2지대로 조정, 편제되었다.


좌파의 탈퇴로 통일 단일당의 염원이 수포로 돌아가자 민족계인 광선 중심의 3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이동녕(李東寧)의 유지를 받들어 1940년4월1일 한국독립당을 재건, 발족시켰다. 1943년10월 충칭에서 열린 제35차 임시의정원회의 때 의정원 의원 수 총계는 48명으로, 그 중 한국독립당 등 집권당이 24석을 차지해 세력이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야당격인 조선민족혁명당이 12석을 차지했고,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좌파로 임시의정원에서 4석 정도의 미세한 위치였다. 조선혁명자연맹은 주로 유자명과 정화암·이달(李達) 등 20여 명의 무정부주의파와 무당파(無黨派)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정부 합류후 의석수와 세력에서 밀려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하였다.[엠파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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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전지공작대 [韓國靑年戰地工作隊]

 

1938년 중국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광복군(光復軍)을 결성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한국청년들의 초모공작대로서 중국 류저우(柳州)·충칭(重慶)·시안(西安) 일대에서 맹렬히 활약하였다.


주요 참여 인사는 나월환(羅月煥)·김동수(金東洙)·박기성(朴基成)·김천성(金天成)·김유신(金有信)·김찬원(金贊元)·백정현(白正鉉)·이하유(李何有)·이재현(李在賢) 등이다.


일제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일을 때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에서 이 공작대를 조직, 청년을 뽑아 부대를 편성하였다.


주로 시안을 본거지로 삼아 일본군의 기밀 탐지, 일본군 내에 있는 한적사병(韓籍士兵)을 초모해 선무공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공작대는 충칭에서 재조직, 강화되면서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으로 정식 편제되었다.


1939년 10월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일명 복무대라고도 함.)는 류저우시대의 청년공작대원까지 선택적으로 수렴해 30여 명 규모로 조직되었다. 류저우나 충칭에서 조직, 운영되던 청년공작대 또는 복무대는 하나의 정공대(政工隊)의 모습을 띠고 발전해 광복군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가담했던 한국청년들은 전장에 나가 중일전쟁의 확전을 막고 침략자를 박멸분쇄하는 것이 공통적인 염원이었다. 30∼40여 명의 공작대원 중에는 10여 명의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출신의 인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요한 책임 간부진은 대장에 나월환(뒤에 광복군 제5지대장), 부대장에 김동수, 군사조장 박기성(歐陽軍), 정훈조장 이하유, 예술조장 한유한(韓愈韓, 韓亨錫), 공작조장 이재현 등이었다.


그뒤 1941년 1월 1일 나월환 대장이 전대원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중국 전시간부 훈련반에서 1년간 훈련을 받고 뤄양(洛陽)·정저우(鄭州) 등지에서 징모 제5분처가 되어 광복군 활동에 기여하였다.


1942년 3월 지대장 나월환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송호성(宋虎聲)이 보임되었다가 같은 해 5월 제2지대로 재편성되었다. 기관지로 ≪한국청년 韓國靑年≫이 있다.[엠파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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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년전위동맹 [朝鮮靑年前衛同盟]

 

1938년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을 개칭한 좌익계의 항일청년단체이다.


본래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1938년 6월 10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당원 가운데 당의 노선과 당수 김원봉(金元鳳)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최창석(崔昌錫)·왕해공·김원길 등 주로 성자군관학교(星子軍官學校) 졸업생 49명이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조직한 것으로 한커우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뒤 김원봉측의 종용도 있고 재정 상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에 복귀하였다. 같은 해 9월 초순 조선민족청년전시복무단은 명칭을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고치고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된 민족통일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 가맹하였다.


10월 10일에는 김원봉이 대장이 되어 개편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핵심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내의 이 동맹에 속한 좌파계 인물들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가고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 의용대원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흡수되었다.


한편, 이 동맹에 속해 있던 청년들은 김원봉의 교섭으로 난징(南京)의 중앙군관학교에 설치된 특별반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의 군사교관은 김홍일, 소대장은 이익성(李益星)이었는데 1년에 120여 명의 한국청년이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동맹은 조선민족혁명당 내에서도 차차 그 위치를 확고히 하여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무렵의 이 동맹에는 뒤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로 항일전에 활약한 김학무(金學武)·이상조(李相朝)·김창만(金昌滿) 등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요한 임무였던 항일전쟁에서 이 동맹은 정찰·선전공작 등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에 우창(武昌)·한커우가 일본군에게 함락된 뒤에는 군사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당시의 이 동맹의 진용에는 맹주에 김학무, 맹원에 진동명·박무·강진세·김창만·김경설·허금산·이철·조명숙·김엽·공명우·안창선·박창진의 이름이 일제 관헌측 문서에 전하고 있어 초창기의 중진들이 이미 이 동맹을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일전쟁의 전황이 점차 중국측에 불리해지면서 조선민족혁명당계의 인사들은 중국국민정부의 후퇴와 함께 충칭(重慶)으로 옮겨갔고 이 동맹의 좌파인사들은 뤄양(洛陽)을 거쳐 옌안으로 향하였다 [엠파스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