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윤봉길 사진이 맞다는 주장이 친일사관

한부울 2008. 11. 12. 13:29

윤봉길 사진이 맞다는 주장이 친일사관

[데일리안] 2008년 11월 07일(금) 오전 08:59

 

◇ 오른쪽이 1932년 아사히신문이 게재한 문제의 사진, 왼쪽이 거사 3일전 태극기 앞에서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


필자는 1932년 5월 1일자 <아사히신문> 1면과 2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지난 1999년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 필자가 이 사진에 의문을 품었던 동기는 다음 세 가지 과정을 통해서다.


첫째, 필자가 주상하이 한국총영사관 문화·경제영사 재임당시 1996년 2월부터 1999년 8월까지 주말과 휴가기간을 이용, 중국 전역을 누비며 중국정부문서보관소, 중국내 도서관자료를 수집하여 왔다.


목적은 중국 내 한민족 독립운동 100대 사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이를 꼼꼼하게 기록 정리함으로써, 독립운동 사적지가 망각되거나 왜곡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물은 2001년 동방미디어에서 CD로 제작,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한 바 있다. 윤 의사 사진진위 여부는 이러한 작업 중에 품은 의문중의 하나이다.


둘째, 윤 의사 유족들이 “윤 의사는 바바리코트를 입지 않았다”며 수차례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1992년, 1993년, 1995년 1997년 모두 4차례, 7종의 일간지에 윤 의사의 6촌 동생이며 생전에 12년 동안 같이 생활한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지도위원 윤명의 옹을 비롯한 유족들이 양재동 윤 의사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윤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 의사 실제모습과 닮지 않았다며 공론화했었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측은 윤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 옹(당시 83세, 작고, 본명: 윤영석, 현재까지 사진이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고 있는 특정 방계유족 1인의 선친)이 견본과 윤 의사 실제 모습과의 유사성을 확인해 주었다고 강조하며 흐지부지 묵살되었던 기사를 읽고 깊은 의문을 품은 바 있다.


셋째, 1999년 4월 담당 영사로서 제67주년 윤봉길 의거 기념식을 준비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준비하던 중 거사 3일전 태극기 앞에서 찍은 진짜 사진과 문제의 아사히신문과 너무나 차이가 많은 것을 포착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10대 도서관에 든다는 상하이도서관의 근대문헌 자료실을 찾았다. 거기서 필자는 ‘THE CHINA PRESS(미국계)’ ‘THE SHANGHAI TIMES(미국계)’ ‘THE NORTH-CHINA DAILY NEWS(영국계)’ ‘THE NORTH-CHINA HERALD(영국계)’ ‘THE CHINA WEEKLY REVIEW(미국계 주간지)’ 등 영자지와 <신보(申報)>, <중앙일보(中央日報)>, <신문보(新聞報)>, <대공보(大公報)> 등 중문지에 실린 윤 의사 의거 기사를 살펴봤다.


필자가 열람한 이들 9종의 1차 자료(당시 열람기록부를 작성했을 때 내 앞에는 한국사람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중국인, 일본인 하다못해 독일인도 있었는데 우리 학계와 언론계는 도대체 뭘했는가? 1차 자료도 살펴보지 않고 당시 적국이었던 일본의 자료만 맹신하여온 결과가 아닌가?)에 따르면 윤 의사는 현장에 있던 일본군인들에게 참혹한 집단 구타를 당해 만신창이 상태로 끌려갔고, 입고 있던 ‘회색 양복’ 역시 찢긴 상태였다. 지면 관계상 1932년 4월30일자 <상하이타임스> 현장 스트레이트 기사 하나만을 살펴보자.


…군중들 사이를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곳에 한국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하여 때려 눕혀졌다. 주먹질,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뚱어리 위로 쏟아졌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도록 이상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총검을 가진 군인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하였다. 군경들이 비상경계선 안에서 윤봉길의 몸뚱아리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대가 나타났다. 그 한국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집어 들려 짐짝처럼 통채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아사히 사진 속 인물이 만 24세 청년 윤의사와 골상 자체가 다르고 회색양복 아닌 바바리코트 차림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수상한 것이라 논외라 치자. 일제에게는 자국의 육군대장(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급 이상의 최고위직)을 비롯한 일본침략군 이동체를 섬멸한 현행범을 일본군경과 함께 팔짱을 끼고 중절모를 손에 들게 하고 전방을 활짝 개활한 채로 모셔가는 장면이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과문한 탓인지 필자는 지난 10여년 간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동서고금을 통하여 요인 암살범, 아니 어떠한 범행, 범인도 저렇게 전방이 활짝 열린 현행범 체포사진은 단 한번이라도 본 적이 없다.


또 당시 신문기사들은 현장에서 연행된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 등 7~40명 선이었다고 보도하였다. 더구나 폭탄이 터진 단상 앞쪽엔 파편으로 부상을 입은 일본관중 3명이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식의 기사도 다수 있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김준엽(전 고대총장), 김학준(매헌 윤봉길 평전 저자) 두분의 윤봉길 의사 연구 최고권위자들에게 DHL로 자료를 송부하여 두 분으로부터 “사진에 문제가 있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특히 당시 인천대 총장이었던 김학준 현 <동아일보> 회장은 발굴 직후 편지를 보내 "윤봉길 의사에 대한 국내의 분분한 주장과 오류를 바로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통해 공감을 표한 바 있다.( 1999.4. 29 동아일보 기사, 김학준 친필사인 편지 참고)


하지만 그 후에 필자가 받은 정신적 인격적 고통과 상처는 필설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몽 같은 것이었다. 정말 뜻밖에도 윤봉길 의사의 방계유족 1~2인이 내게 엄청난 인격적 모독과 함께 당시 행동에 제약이 많았던 필자의 외교관 신분을 악용하여 행정적 인사적 정치적 탄압을 집요하게 가하여왔다.

 

                                    ◇ 아사히 2면에 윤봉길이라고 캡션이 달린 사진. 


급기야는 순국선열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필자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까지 하였다. 당시 이모 담당검사는 “일제시대의 아사히 신문에 대한 모독이라면 몰라도.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폭행에 의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묻힐 뻔한 사실을 발굴해낸 피고소인에게 누구보다 고맙게 여겨할 고소인을 사회통념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뭔가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되나 윤봉길 의사를 보아서라도 (무고죄 같은 맞고소는 하지 말고) 참아달라고 극구 만류한 바 있으며 당연히 필자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처럼 드높고 맑은 진실을 가릴 수 없는 법, 필자가 발굴해낸 내용은 기정사실화되었으며 대부분 초중고 역사교과서들은 문제의 사진이 가짜임을 확인하고 자진 삭제하여왔으며 금성출판사가 2007년도에 마지막으로 삭제한 바 있는 등 지금은 거의 통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진속 인물이 윤봉길 의사라고 밝힌 것이다. 그 논거가 참으로 황당하여 필자는 최근 3~4차례 몇몇 매체에 조목 조목 반박논리를 펼친 바 있다.


따라서 사실관계가 궁금한 독자 제위께서는 이를 검색참조하시길 바라며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문제를 다시 언급하자니 그동안 특정 방계유족 1~2인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인격적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여기에서는 세세한 논거를 반복하는 대신 아래 단장을 통해 그동안의 소회를 귀결하고자 하니 너그러이 혜량하여 주시길 바란다.


윤봉길 의사 거사 당시 다수의 미국계와 영국계 신문, 중국신문 등 현지 1차자료들과 김준엽 전 고대총장과 김학준 현 동아일보회장을 비롯한 전문학자들의 역사고증들과 수많은 문헌자료들과, 세계 최고수준의 한국 성형외과 저명 전문의 4인 전원일치의 감정결과들과, 모든 초중고 역사교과서 편찬 전문가들과, 윤명의 옹을 비롯한 용기와 양심을 잃지 않은 유족들의 증언들과, 심지어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도 ‘사진 가짜다’라고 실토하는 등(SBS스페셜, 08.6.15방송)


일본 신문 사진 속 사람은 윤 의사가 아님이 이토록 확실시 되었건만,


일제는 그토록 조선인을 사랑하사, 자국의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일제강점기 육군대장은 총독급 이상임, 역대 조선총독 8명은 모두 대장에서 임명되었으며 전범수괴 도조 히데끼는 중장에서 총리로 취임한 후에야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바 있음)를 비롯한 일본군국주의 사령부의 이동체를 섬멸한, 저들의 입장에서는 ‘극악무도한 폭탄테러 현행범’을, 일제 군경들이 그와 함께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중절모를 들린 채로, 신사적으로, 인도적으로, 호위하듯이 모셔갔을 것이라고 아직도 철썩 같이 믿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은 혹시 일제에 빙의된 일제의 영원한 신민(臣民)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한낱 기우(杞憂)에 불과하길 진심으로 기원하며......밝아오는 새벽의 미명을 바라보며, 밤새 드리웠던 사색의 낚시 줄을 감아 올렸다.


우리 역사의 대어(大魚)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며 핏빛 편린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들의 촉발점과 대폭발이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 죽은 김주열 군의 사체 - 4.19’,

‘광주 시위 시민에 대한 가혹한 진압- 5.18’,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참혹한 희생-6월 민주항쟁’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보다 훨씬 젊은 나이, 만 24세,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의 청년 윤봉길 - 지금 같으면 군대를 전역하고 갓 복학한 대학교 3학년 생 쯤 이었으리라.


그날의 선홍의 더운 피 낭자한 몸뚱어리, 북어포처럼 쫙 쫙 찢겨진 회색양복, 앳된 한국청년의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 조국의 부모형제 동포들이 보았더라면, 알았더라면, 아니 전하여 듣기나 하였더라면,


평소에는 한없이 선량하고 인내심 강하더라도, 불의와 압제에 희생된 젊은 피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여온 우리 민족사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3.1 운동을 훨씬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한민족 대동일치단결의 항일 무장투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일제는 일찌감치 현해탄 건너로 쫓기어 갔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의 힘에 의한 자주독립을 달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냉전체제의 산물 3.8선도 없었고,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동족상잔의 비극 6.25도, 그리고 21세기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이 뼈아픈 남북 대치 국면은, 그런 점에서 일제는 과연 당시 아시아 최강의 군국주의, 제국주의국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군사력 외교력뿐만 아니라, 피지배민족의 특성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 능수능란하게 가하는 언론 통제 조작술도 겸비하였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인지라, 사건 진상과 관련한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당하였던 우리 민족이 힘이 약하고 운이 없었던 탓으로 치자. 그런데 지난 10월 8일, 20세기 전반 일제치하가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가 “한창때라 기절했다가도 금방 일어설 나이라는 황당한 논거 등으로 진위논란 윤봉길 의사 사진은 진짜” 라고 결론을 내리는, 우리 스스로 윤 의사를 왜곡하고 모독하는 기막힌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당사자인 일본 신문도 과거를 반성하며 ‘사진이 가짜다’라고 자인한 마당에, 그것도 현재의 우방국 ‘일본국’이 아닌, 과거 적국이었던 ‘대일본제국’의 입장을 저토록 두둔하려는 맹목적 짝사랑의 곡절과 배후를, 한 학인은 도무지 가늠할 길 없어 참담하다.


결국 사진 진위 여부를 신중히 다루지 않은 일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일진데, 지금까지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앞으로 절대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하기에는 자신들도 지금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느껴버린 것은 아닌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짝사랑의 상처가 너무 깊고, 너무 무겁고, 너무 오래 간다.


글/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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