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한부울 2008. 9. 25. 02:57

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제1부> 망명정부 수립에서 환국까지(1919∼1945)[조선일보]


해염현 남북湖… 日警에 쫓기던 金九선생 머물던 별장 '옛모습 그대로'

상해·가흥·중경=이선민기자 2005.01.11 19:17

 


#. 김구 피신처 嘉興

◆이봉창·윤봉길의 ‘배후’ 김구, 시골로 숨다


중국 상해에서 절강성의 성도(省都)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 상해에서 항주까지의 거리는 168㎞. 그 중간 100㎞ 되는 지점에 있는 가흥(嘉興)이라는 작은 도시가 목적지다.


가흥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피신한 곳이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로 옮겨갔다. 하지만 두 사건의 배후 조종자였던 김구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는 바람에 따라갈 수 없었다. 김구와 김구의 어머니, 두 아들 인·신, 그리고 이동녕·김의한·엄항섭은 중국 국민당 간부 저보성의 고향인 가흥으로 숨어들었다.


가흥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 먼저 신시가지가 나왔다. 시정부 청사 뒤를 돌아가니 오래된 건물들이 보인다. 김구 일행이 머물던 매만가(梅灣街)는 구시가지 남문 밖에 있다. 마침 매만가 일대는 김구 일행이 살던 집을 비롯해서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었다. 길을 안내한 진건강(陳建江) 가흥시 문물관리처장은 “가흥시 예산으로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고 바로 옆에 김구 선생 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살던 집은 서남호(西南湖)라는 호숫가에 있다. 2층 침실에서 내려다 본 서남호는 한가로웠다. 하지만 김구에게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제 경찰의 촉수가 가흥까지 뻗어왔기 때문이다. 그해 8월 김구는 거처를 가흥에서 남쪽으로 50㎞쯤 떨어져 있는 해염(海鹽)현 남북호(南北湖)라는 호숫가로 옮겼다.


가흥에서 남북호까지는 시골길이어서 자동차로도 1시간 가량 걸렸다. 김구가 숨은 곳은 저보성의 며느리 주가예(朱佳?)의 친정 소유 여름별장이었다. 언덕길에 올라서자 왼쪽으로 ‘김구피난처’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집 안은 옛 모습대로 보존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김구와 남북호의 인연을 말해주는 기념관이 있었다. 김구는 이곳을 드나들던 비서 안공근(안중근의 막내동생)·엄항섭 등을 통해 항주의 임정 상황을 전해듣다가 6개월 만에 가흥으로 돌아왔다.


임정이 가장 어려웠던 이 시절, 요인들의 삶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김구가 숨어있던 집에는 언제나 배가 한 척 매어 있었다. 만일의 경우 비밀통로로 빠져나와 호수를 이용해 피신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미 60대에 접어들었던 이동녕은 30~40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거친 밥을 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흥과 해염의 경우처럼 임정 요인과 관련된 중국의 자취는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찾는 한국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상해 임정 청사의 한국인 방문객은 지난해 20만명을 넘어섰고, 이제 그 물결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임정 유적을 찾는 사람들은 과연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던 독립투사들의 마음과 정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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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 경찰을 피해 숨었던 절강성 가흥시의 민가. 왼쪽 호숫가에는 언제나 도피할 수 있는 배가 한 척 매어 있었다.


#. 마지막 활동지 重慶

◆다시 확인한 진리 “뭉쳐야 힘을 발휘한다”


상해 홍교 공항을 이륙한 중국항공 비행기는 2시간 반을 날아 중경(重慶) 상공에 이르렀다.창밖으로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인구 3000만의 중경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중국 서남부의 내륙오지 도시 중경이 한국인에게 친숙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 5년 동안 머문 곳이기 때문이다. 1932년 상해를 떠난 임정은 중국 중·남부를 떠돌다가 1940년 3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중경에 자리잡았다. 국민당 임시 정부가 들어오기 전 인구 10만에 불과했던 중경은 당시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갑자기 팽창한 곳이었다.


임정은 중경에서 청사를 세 차례 옮겼다. 지금 ‘대한민국임시정부’ 간판이 걸려있는 곳은 연화지(蓮花池)의 마지막 청사다. 양유가(楊柳街)와 석판가(石板街)에 있던 첫 번째·두 번째 청사는 일본군의 공습으로 파괴됐고, 오사야항(吳師爺巷)의 세 번째 청사는 낡은 주택가로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중경 도심인 칠성강(七星崗)에서 택시를 내려 백화점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진에서 보던 임정 청사가 있었다. 지난 1995년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된 청사는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맨 뒤의 한 일(一) 자 건물인 4호는 없어졌던 것을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을 토대로 복원했다. 1호 건물에 자리잡은 ‘임시정부 약사(略史) 전시실’과 ‘군사활동 전시실’을 이선자(李鮮子) 중경임정 구지진열관(舊址陳列館) 부관장의 안내로 돌아보면서 임정의 활동이 생각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다방면에 활발했음을 알게 됐다.


중경의 임정 유적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광복군 총사령부 구지다. 중경의 번화가인 해방비(解放碑) 부근에 있는 이 3층 건물은 1000평 남짓한 작지 않은 규모다. ‘미원(味苑)’이라는 사천요리 식당 안에 있는 통로를 통해 낡은 건물로 올라가자 광복군 훈련장이었다는 마당이 보였다. 이선자씨는 “한국 정부가 이곳에 광복군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워낙 중심가라서 중경 시정부에서 허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경시 중심가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 건물. 3층에 1000평 남짓한 작지 않은 규모로, 오른쪽 앞에 있는 ‘미원’ 사천요리 식당을 통해 들어간다.


#. 上海 외국인공동묘지

◆상해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힌 독립의 꿈


상해 시내 서남쪽에는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이 있다. 손문의 부인 송경령이 1981년 세상을 떠난 후 안장되기 전까지 이곳의 원래 이름은 만국공묘(萬國公墓)였다. 만국공묘에 묻힌 사람 중에는 노신(魯迅) 등 중국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그 중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노백린(盧伯麟) 김인전(金仁全) 안태국(安泰國) 등이 포함돼 있다.


문을 들어서자 등소평이 썼다는 거대한 기념비와 송경령의 좌상(坐像)이 보였다. ‘외국인묘원(外國人墓園)’이라고 쓴 안내판을 따라가자 600여 기(基)의 평분(平墳)이 수십 줄로 늘어선 만국공묘 자리가 나왔다. 상해 복단대(復旦大)에 방문교수로 와 있는 한시준(韓詩俊) 단국대교수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임정 요인들의 묘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의 유해는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지만, 원래 자리에는 석판(石板)이 남아 있다.


상해의 터줏대감으로 임정 출범을 뒷바라지했던 신규식은 1922년 임정에 내분이 일어나자 25일 동안 절식(絶食)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묘소는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됐다.


만국공묘의 임정 요인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는 광복 후 다시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국과 한국의 적대관계가 큰 원인이었지만, 임정이 우리 역사에 제대로 자리잡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정의 역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져야 하고, 기본 자료도 충분히 수집되지 못한 실정이다. ‘임정기념사업회’는 2004년에야 출범했다.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은 온 국민이 임정에 대해 좀 더 많이, 제대로 아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어두워지는 묘역을 뒤로 했다.

 

 

1920년 4월 독립운동가 안태국 선생의 장례식을 위해 만국공묘에 모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가들. 임정초기의 드문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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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낳은 臨政, 밖으론 '독립' 안으론 '民主'

2005.01.02 18: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3·1운동의 소산이었다.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중국 상해(上海)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憲章)을 공포한 다음,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9월 11일 서울과 러시아령의 임시정부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진 1910년대의 국제 정세와 일제(日帝)의 무단통치 아래서 단련된 한민족의 역량은 1919년 3·1운동으로 분출되었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임정은 전제군주제 및 입헌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民主)·민본(民本)·민권(民權)의 민주공화제를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또 임시의정원이라는 대의기관을 설치함으로써, 권력의 분배와 견제라는 민주정치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였다.


이후 광복 때까지 6차례 다듬어진 헌법은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인도주의 이념을 기본가치로 삼았다. 주권을 되찾은 후 민족국가 건설을 염두에 두었을 6차 헌법에서는 노동권 중 파업권을 인정하였고, 수익권의 조항도 넣었다. 또 교육 및 직장과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였다. 이는 수정자본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복지국가를 표방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임정의 26년 역사는 방랑과 정착의 여정이었다. 1919년 4월 10일 상해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재의 서금이로·瑞金二路)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처음 열린 이래, 상해에서만 12차례 이상 소재지를 옮겼다. 현재 우리가 방문하는 임정 청사는 1926년 3월부터 윤봉길 의거로 상해를 탈출하는 1932년 5월까지 백래니몽(白來尼蒙)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에 있었던 마지막 청사다.


임정은 항주(杭州)→진강(鎭江)→장사(長沙)→광주(廣州)→유주(柳州)→기강을 거쳐 1940년 중경(重慶)에 안착하였고, 이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역할하였다. 윤봉길 의거 직후부터 중경에 도착하는 8년여의 이동기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고통의 피난길만은 아니었다. 숱한 시련 속에서도 중국민과의 연대를 강화하였고, 독립운동의 정치·군사적 이념 기반을 다듬어 갔다.


이 과정에서 임정의 지도체제도 몇 차례 바뀌었다. 대통령제(1919.9~1925.3), 국무령제(1925.3~1927.2), 국무위원회제(1927.2~1940.9), 주석제(1940.9~1944.4), 주석 및 부주석제(1944.4~1945.8)를 차례로 시험하면서, 민주정치의 훈련을 쌓았다. 윤봉길 의거 이후 피난 과정에서도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 회의가 중단되지 않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임정은 철저하게 삼권분립 원칙에 입각하여 운영된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임정은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광범위한 독립운동의 무대를 구축하는 한편, 우리 민족의 말과 글·역사·문화에 대한 보존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군사학 교재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의 운영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였다. 하지만 열강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 과정에서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국제질서의 냉혹함을 곱씹기도 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임정은 해방과 광복을 향한 의지와 의욕이 충만하였고, 근대민족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국가건설론을 준비하였다. 외무부장 조소앙이 중심이 돼 마련한 ‘건국강령’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또 1942년 이래 본격화된 독립운동세력의 임정으로의 통합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들은 임정을 구심점으로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절충과 타협에 입각한 민주정치 원리를 구현해 갔다.


한상도 교수 광복 후 1945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나누어 귀국한 이들을 맞이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군정체제였다.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사실은 해방의 또 다른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것은 해방이 독립운동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임을 알려주었고, 이는 남의 나라 땅에서 해방을 맞이한 약소민족 임시정부에 부과된 객관적인 조건이었다.


냉전체제의 고착과 함께 임정은 숱한 난관과 도전에 직면하였다. 갈 수 없지만 가야만 했던 길이었기에, 아쉬움과 통한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러하기에 분단의 극복과 통일에의 가능성을 염원할 때, 우리는 임정이 던지는 역사적 교훈을 외면할 수 없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한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환국하기 직전인 1945년 11월 3일 중경의 마지막 임정 청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위 기념촬영 사진의 배경이 된 중경 청사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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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3) 열강의 지지를 확보하라

2005.01.18 18:23


親美 이승만, 구미열강 냉대속 러시아와 차관교섭 희망

소련은 한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국가였다.


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 ‘러시아 장성’ 포타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제국 말기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고종 황제와 조정 대신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공을 세워 니콜라이 2세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으나,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여 차르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국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러나 1918년 2월 왕당파인 콜차크 제독의 주도하에 추방당한 그는 일본에 망명했고, 거기서도 축출되자 상해로 왔다고 했다.


포타포프는 임시정부의 대변지인 ‘독립신문’과 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포타포프는 “내가 귀국(貴國)에 체류할 때에 일본에게 강탈을 당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면서 “이제는 민족자결·민족평등의 대세 중에 처한 러시아 혁명당의 영수로서 대한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으리오. 나는 귀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를 약속하노라…이 뜻을 경애하는 귀 국민에게 고하기를 희망하노라”고 말했다.

 

                   포타포프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한 임정 기관지‘독립신문’1920년 3월 1일자.


포타포프의 출현으로 임정은 모스크바 특사 파견을 논의하게 됐다. 이 문제를 놓고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 사이에 협의가 오고 갔다. 1918년 5월 시베리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던 이동휘는 신흥 소비에트 러시아와 제휴함으로써 한국 독립을 달성하자고 했다. 임정 내 온건파 지도자인 안창호는 이 무렵 한·중·러의 ‘3국 연맹’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22일, 임정 국무회의는 안공근·여운형·한형권 3인을 모스크바 외교원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노령(露領) 한인들의 인심을 수습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여운형 파견을 반대했다. 안창호가 추천한 안공근은 당시 시베리아에 체류하고 있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인사회당 간부인 한형권만이 임정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한형권은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1920년 5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소비에트 주권에 처음 온 외국손님’으로 국빈 대우를 받았다. 소비에트 정부의 수상인 레닌과 외무인민위원장 치레린, 아시아 외교 담당 카라한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한형권은 이때 4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노농(勞農) 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한국 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赤衛軍)과 똑같이 충실하게 하여 줄 것 (3)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를 시베리아에 설치하여 줄 것 (4)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원조하여 줄 것 등이었다.

 

 

코민테른 회의 참석한 레닌과 박진순 대표 제2차 코민테른 회의 광경(1920년). 중앙에 자리잡은 레닌의 오른쪽에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이 보인다. 그는 임정 특사 한형권을 도와 소비에트 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해방 후 한형권의 회고에 따르면, 소련은 이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은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이 체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실제 소련은 임정에 금화 200만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고, 제1차로 40만루블이 상해에 유입되었다. 소련은 그처럼 한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 무렵 소련은 동방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을 지원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과 식민지의 연결고리를 끊어 놓으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소련과의 차관 교섭을 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1921년 11월 개최된 위싱턴회의 한국대표단. 앞줄 왼쪽이 단장 이승만, 뒷줄 왼쪽이 부단장 서재필이다.


이승만의 상해 체류기(1920.12 ~1921.5)에 작성된 ‘차관조건’이라는 문건을 보면, 차관 총액을 200만달러 이상으로 하고 이자는 연 4푼 내지 6푼이며 담보로는 독립 후 한국에서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관세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차관 목적은 군사비와 외교선전비 그리고 기업자본 조달이었다. 상환기간은 독립완성 후 5개년으로 정했다. 이 문건에서 차관 대상국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일차적으로 소련을 염두에 두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1921년 5월 이승만이 이끌던 임정에서 이동휘가 소련에 보낸 한형권을 즉시 소환하고 그 대신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1921년 초 이승만에게 임정의 대통령제를 위원제로 변경하자는 안을 제시했다가 거부당하자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동휘의 사임으로 임정은 대소(對蘇) 교섭의 창구를 바꾸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승만이 신내각과 차관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레닌 정부가 약속한 자금 가운데 일부는 이미 상해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자금은 주로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 경비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왜 친미(親美) 외교노선의 대표적 인물인 이승만이 소련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구미(歐美) 열강의 냉대였다. 미국이나 영국·프랑스는 한국의 독립은 물론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문제를 시종 일본의 내정 문제로 간주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1905년의 소위 ‘을사조약’에 의하여 한국은 국제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파리강화회의(1919. 1.12~6.28)에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된 것이었다. 승전국 일본은 일약 5대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이러한 상황이었으니 한국의 독립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일시적인 ‘외교적 계책’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가 국내외 민족운동세력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고정휴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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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

이승만 "親美외교"… 안창호 "실력 양성"… 이동휘 "무장 투쟁

2005.01.25 17:29

 

초기 임정을 이끈 세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노동국 총판 안창호(1878~1938)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시 임정은 ‘삼각정부(三脚政府)’라 불렸다. 이들 세 지도자의 결합은 임정이 지닌 이념적인 좌우합작과 지역적인 연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 세 지도자는 출신 배경, 독립운동 노선, 활동 기반,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 리더십 스타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대비되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생의 몰락한 왕족 후예였고, 이동휘는 함남 단천의 한미한 아전 집안 출신이었으며, 안창호는 평남 강서의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달리 이동휘와 안창호는 전통적인 차별 지역인 함경도·평안도의 평민 출신이었다.


이 같은 지역적·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난 민족운동 제1세대로서 어린 시절 유학을 공부했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주권을 상실한 이후 이들 세 지도자의 세력 기반과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는 뚜렷해졌다.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를 근거로 활동했고 미국식 공화제를 선호한 친미(親美) 외교론자였다. 안창호는 미주 서부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았고 역시 공화제를 선호했으나 외교에 의한 독립 달성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전쟁 준비를 추구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북간도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였고 사회주의자로 전환한 이후에는 신흥 소련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표로 했다.


정치 이념적으로 보면 이승만과 안창호는 우파, 이동휘는 좌파에 속했다. 세 사람은 모두 주권을 찾고자 노력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이승만은 권력 지향의 정치가, 안창호는 조직 관리에 능한 조직가, 이동휘는 현실타파형의 혁명가였다.

 

 

1919년 11월 29일 이동휘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당시 임정에서 논란이 분분하던 이승만의 독립운동노선에 대해 묻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은 통합된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달리했다. 안창호와 이동휘는 통합 임정을 전폭적으로 승인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통합 임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통합 임정 출범 초기에 이동휘와 안창호는 동지적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중순 여운형의 도일(渡日)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간에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1920년 1월 말 한형권·여운형·안공근을 모스크바 특사로 선정한 것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결과였다. 곧이어 이동휘와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녕·신규식·이시영 등 기호파 총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임정은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 아울러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실시해온 애국금 제도를 폐지함과 동시에 구미위원부가 독립공채 발행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이는 이동휘와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였다.

 

 

上海에 도착한 이승만 임정 대통령 1920년 12월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임정 대통령을 환영하는 모임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화환을 두른 사람이 이승만이고 그왼쪽은 이동휘 국무총리, 오른쪽은 안창호 노동국 총판이다.


이제 이승만이 구미위원부의 공채 발행을 통해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고 국내로부터의 자금도 단절되면서, 임정은 몇 달째 집세도 못 낼 정도의 재정궁핍 상태에 빠졌다. 재정 독점과 임정 활동 부진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고 판단한 국무총리 이동휘와 6명의 국무원 비서장·차장들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이승만의 축출과 임정 개혁이었다.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을 골자로 한 이승만 불신임 이유서와 국무총리 사퇴서를 제출하고 6월 22일 북중국의 위해위(威海衛)로 떠났다. 김립(국무원 비서장) 윤현진(재무차장) 이규홍(내무차장) 김철(교통차장) 등도 동맹 사직을 시도했지만, 현상 유지와 이승만 퇴진 불가를 주장한 안창호의 사직 위협에 밀려 좌절되었다.


이동휘는 사퇴서 제출 1개월20일 만인 8월 11일 국무총리직에 복귀했다. 이동휘가 사직을 번복하고 복귀하게 된 이유는 상해에 온 국제공산당 파견원 보이틴스키의 권고였다. 보이틴스키는 소련 정부와의 차관 교섭을 위해서는 임정 국무총리 명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이제 이동휘는 이승만과 안창호의 협력에 연연하지 않고도 모스크바 자금을 바탕으로 한 무력 양성과 소련 적군과의 제휴로 일본과의 최후 결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0년 가을 서·북간도 한인 사회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경신참변(간도사변)은 임정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동휘측과 안창호측은 치열한 급진론·준비론 논쟁을 교환했다. 이동휘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등 급진론과 전면적인 임정 개혁을 주장했고, 안창호는 이에 맞서 실력준비론을 설파했던 것이다.


미주로부터 태평양을 건너온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으로 참석한 가운데 1921년 1월 5일 이후 3차례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이동휘와 다른 간부들 사이에 그동안 심화되어 온 노선 갈등이 분출되었다. 특히 이동휘와 이승만은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았다. 이동휘는 3·1운동 직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하며 대책 수립을 요구했고, 대통령 1인이 주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제의 폐지와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의 개혁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동휘의 공격을 무시했고, 다른 국무위원들 역시 이동휘의 임정 쇄신안에 반대했다.


1921년 1월 24일 마침내 고립된 이동휘가 임정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통합 임정은 파국을 맞았다. 이동휘의 사임은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 유동열(4월 15일),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남형우(4월25일)의 연속 사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5월 11일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남으로써 통합 임정은 출범 1년 반 만에 와해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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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 곳곳서 '반침략전쟁'

2005.02.22 18:56


"日帝에 무력으로 맞서자"


이봉창 의사, 1932년 1월 8일 도쿄서 日王 마차에 폭탄 던져

4월 29일 상해선 勝戰잔치 열던 일본군 향해 윤봉길이 ‘거사’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은 다섯 달 새 여섯 번이나 추진돼…


"훗날 지하에서 다시 만납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7시, 윤봉길을 보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인애국단장 김구가 던진 목멘 이별인사였다.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놀라게 만든 거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터졌다. 한인애국단의 불같은 공격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를 ‘윤봉길 의거’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6년을 넘어서면서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선택했다. 적의 주요 인물과 침략기관을 제거하고 폭파하는 의열투쟁은 191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931년 말에 결성된 한인애국단의 투쟁이 앞서 전개된 의열투쟁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일제 침략에 맞서 벌인 반침략전쟁(反侵略戰爭)이라는 점이 그 차이다.

 

 

윤봉길 의거 현장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 공원)의 윤봉길 의거 현장에 세운 "매원". 안쪽으로 기념비가 보인다. 이선민 기자.


한인애국단의 투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에 도쿄로 파견되었다. 일본 왕 처단이 목적이었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일왕(日王)의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 뒤편을 따르던 대신이 탄 마차 밑에서 폭발하였고, 더구나 습기가 차서 폭탄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 날뛰고 대열이 흐트러지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것도 경계가 삼엄한 왕궁 입구이자 경시청 정문 앞이었다.


1900년생인 이봉창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이 자랑할 만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길러진 사람이다. 서울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철도기관사 견습사원으로 일하다가 일본에서 직장을 얻어 살았다. 그런데 조상이 같다면서 우의를 내세우던 일본이 자신을 식민지 백성인 ‘조센징’으로 대접하는 순간, 식민지인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31년 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그는 김구를 찾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왕 폭살에 나섰던 것이다.


일제 경찰은 김구를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이봉창에 대한 고문과 회유를 거듭했다. 하지만 이봉창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명령한 사람이 ‘백정선’이라고 말할 뿐, 김구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굽히지 않았다. 사실 백정선은 김구가 사용한 가명이다. 김구가 백정선이란 이름으로 도쿄의 이봉창에게 급히 1백 달러를 보낸 송금 영수증이 지금도 그 날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이봉창 의거가 터지자, 중국 신문들은 일제히 이 거사를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함(不幸不中)’으로 보도했다. 상해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이를 핑계삼아 상해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중국 제19로군과 중앙군의 저항에 막혀 이기기 어렵게 되자, 일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하여 중국과의 협상을 끌어냈다. 이에 일본군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일왕 생일인 4월 29일에 맞춰 승전 기념 잔치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했다.


일본군에게 폭격당한 상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들이 치를 떨며 지켜보던 그 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은 식장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풍비박산시켰다.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군사 최고지휘관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 시게미즈(重光葵)를 비롯한 요인들을 다치게 만든 것이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상에서 패전국의 상징처럼 목발을 짚고 나타나 항복 서명했던 외무대신이 바로 시게미즈다. 시게미즈가 윤봉길의 의거로 중상을 입은 것은 일본 패망의 계시였던 셈이다.


윤봉길은 1908년생으로, 열살 때 충남 예산의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에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했다.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를 편찬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주력하던 그는 1930년 3월 상해로 망명했다. 김구에게 자신이 민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한 윤봉길,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홍구공원 의거를 벌인 것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총체적으로 맞받아친 반침략전쟁이었던 한인애국단의 투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1932년 전반기에 일제 침략의 판도를 따라가며 이에 맞서는 파상적인 공격이었다. 1932년에 접어들면서 다섯 달 사이에 거사가 여섯 번이나 추진되었다.


이봉창을 도쿄에 파견한 1931년 12월 이후, 반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한인애국단의 계획과 작전은 철저하게 일본의 침략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침략 본거지 도쿄에서 일본 왕을, 서울에서 식민지 통치기구인 조선총독을, 임시정부 소재지 상해에서 일본군 사령부(이즈모함)를, 일제의 만주 침공과 통치 근거지인 관동청과 주역인 관동군사령관 및 만철 총재를, 일본군의 수뇌부가 모인 홍구공원의 ‘천장절 및 승전 기념식장’을 공격하거나 시도한 것이 그를 말해준다.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은 의열투쟁이란 범주를 넘어서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분쇄하려는 반침략(反侵略) 전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인애국단원들의 활약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불러일으켰으며, 침체된 독립운동계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만주에서 농업용 수로를 둘러싸고 만보산 사건이 터지고, 일제가 이를 조작하여 한·중 양국인 사이에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평양에서 중국인 화교들이 공격받고 집단으로 귀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이 커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한인애국단의 투쟁은 하루 아침에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중국의 여러 기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면서 성원하고 나선 것이다. 또 이를 통해서 당시까지 임시정부를 원조하지 않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김구가 남경의 중국중앙군사학교에서 장개석을 만나서 협상을 벌였고, 한국 청년들을 낙양의 군관학교에서 교육시킬 수 있게 만듦으로써 군사력 양성의 길을 열게 됐다. 뒷날 한국 광복군 창군(1940년)의 바탕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훗날 지하에서 만나자던 영웅들, 한인애국단의 반침략전쟁을 몸으로 빚어낸 그 영웅들은 서울 효창공원에 누워 있다. 지금 그곳을 민족공원화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서 반갑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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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후 국내외 애국자 수천명 상해로…

2005.03.01 17:08


한인들의 다수는 독립운동가였는데, 佛 조계에 살면서 한인 거주 지역을 형성했다.

1920년 3·1운동 1주년 겸 임시정부 수립 1주년 기념행사에는 5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강연과 애국가 제창을 한 후, 태극기를 손에 들고 가두시위를 펼쳤다.

중국의 대도시 중 한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 바로 상해다.


최근 상해가 경제중심으로 지위가 강화되면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상해에 와서 발전의 기회를 찾고 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한국인이 가장 어려웠을 때, 가장 많이 찾아온 곳도 상해였다.


19세기 중반 상해 개항 직후부터 한국인들은 상해에 와서 무역에 종사하거나 유학을 했고, 관리들도 출장을 왔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는 상해에서 장기간 거주한 한인은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로 간의 내왕도 많지 않았다. 1908년 초 한국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상해연합회’를 설립,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한국 정부에 의해 곧 해산됐으며, 1910년 이전 반일(反日) 독립운동에 뛰어든 상해의 한인은 많지 않았다.


상해로 한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한다는 이념 아래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했고, 그 중 다수가 상해에 왔다.


비교적 일찍이 상해에 와서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는 신규식(申圭植)이다. 그는 1911년 상해에 와서 1912년 7월4일 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해의 애국지사들이 연합해서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일제가 국내의 반일 운동을 진압함에 따라 애국지사들이 끊임없이 상해로 건너왔다.

 

 

신규식 선생 상해 한인사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신규식(왼쪽). 그가 묻혔던 상해 외국인 묘지에는 묘지석이 남아 있다.


1917년 상해에 사는 한인들은 300명에 달했고,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였다. 독립국가 건립의 신념이 상해 한인들을 긴밀하게 단결시키기 시작했고, 독립운동을 이념으로 삼는 상해 한인사회도 점차 모습을 갖춰갔다. 이로써 상해는 국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3·1운동 발생 후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국내외에서 상해에 건너왔다. 당시 상해에 있던 선우혁(鮮于爀)은 “1919년 독립운동 폭발 후, 국내외에서 상해에 모여든 애국자와 지사들은 수 천명에 달했다”고 했다. 상해에 온 한인들의 절대 다수는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진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일본이 개입할 수 없는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하비로(霞飛路) 주변에 점차 한인 거주 지역을 형성했다. 상해 한인의 증가에 따라 전체 한인단체를 하나의 교민 조직으로 묶을 필요가 있었다. 1919년 3월 3일 100여명의 한인들이 상해의 중국세계학생회관에 모여 고종 황제 추도회를 거행했다. 이 회의에서 광복 사업을 이끌어갈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교민친목회’를 결성했다.


3월 16일 회의에서 교민친목회 회칙을 통과시켰고, 지도 기구를 선출했다. 교민친목회는 이후 ‘상해 한인거류민단’으로 발전했다.


교민 조직의 발전은 상해 한인 사회의 형성을 가리킨다. 한인(韓人)이 상해에 온 이래 동제사, 고려교민친목회, 신한청년당이 생겨났다. 한인 독립운동이 이렇게 증가함에 따라 점차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구를 건립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일찍이 1917년 신규식과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 선언’을 통해 최고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었는데, 이런 필요성은 점차 상해 한인사회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바로 이런 공동인식이 임시정부 수립을 가져온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상해 한인사회는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각종 독립운동이 펼쳐졌고, 상해 한인사회의 지지 아래 이 운동은 소수 엘리트의 활동이 아니라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1919년부터 1932년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날 때까지, 임시정부가 주관한 활동에 매 차례 수백명의 한인이 참가했다.


1920년 3월 1일 임시정부가 상해 하령배극(夏令配克)극장(현재의 신화극장)에서 가진 3·1운동 1주년 겸 임시정부 수립 1주년 기념행사에는 5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강연과 애국가 제창을 한 후, 태극기를 손에 들고 가두시위를 펼쳤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상해 한인사회에 변화가 생겨 친일(親日) 한인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1931년 3월 친일 한인들은 ‘친일·동족상애(同族相愛)’를 표방하면서 ‘상해조선인친우회’를 조직, 독립운동 세력에 대항했다.


이런 가운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인들의 천장절 경축회장에 폭탄을 투척, 일본군 주요 지도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시키자 프랑스 조계 당국도 임시정부를 비호하던 태도를 바꿔 일본이 조계 내의 독립운동가를 단속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임시정부는 계속 상해에 머물 수 없어 이웃한 항주로 옮겨갔다.

 

 

임정이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상해 지역 민족교육의 중심이었던 인성학교는 1935년 일제와 친일 한인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난 이후, 친일 한인에 대한 견제력이 사라졌고, 일제도 이들에게 대량의 자금을 지원, 친일 한인 세력이 더욱 창궐하기 시작했다. 1935년 3월 3일 상해 조선인친우회는 상해 조선인거류민회로 개조됐고, 일제가 한인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1935년 11월 상해 민족교육의 중심이던 인성(仁成)학교가 조선인거류민회와 일본의 이중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후, 반일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한인들은 상해를 떠났고, 반대로 친일파 한인들이 대거 상해에 들어왔다. 1938년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자 상해는 친일 한인들의 세상이 됐고, 조선인거류민회는 한인거류민단을 대신해 상해 유일의 한인 업무를 관리하는 단체가 됐다. 조선인거류민회는 상해 한인의 신사 참배와 국방헌금, ‘충령표창회헌금’을 조직하고, 후방 근로에 참가했다.


순커즈 교수 한인들은 위안소를 경영하거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등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다. 심지어 한인들은 스스로 자기 공장을 군수공장으로 개조해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생산, 대륙 침략의 공범이 됐다. 이처럼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던 상해 한인사회는 점차 친일 한인사회로 추락했다.


이와 같이 상해 한인사회는 독립운동과 임정을 뒷받침했던 측면도 있고, 일제 침략에 협력하는 측면도 있었다. 국가를 빼앗긴 한민족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상해 한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매년 수십만의 한국인이 상해를 찾는다. 가장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한국 선열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분투한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국인들은 계속 상해에 와서 애국선열의 자취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순커즈<孫科志>중국 복단대 교수)

 

 

1921년 3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최한 3·1운동 제2주년 기념식이 상해 거주 한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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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난 겪던 임정(臨政)에 헌신적 자금지원

2005.03.01 17:09


상해의 한인사회는 임시정부의 주요 동력이었다. 한인 사회의 자금 지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정 수입이 없어 재정 곤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에 대해 한인들이 자금을 지원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21년 8월 13일 개최를 앞둔 태평양회의에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100여명의 한인들이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가 성립된 후 9개월 만에 117명의 한인이 955위안을 모아 전달했다. 1인당 평균 8.2위안을 냈는데, 이는 당시 보통 노동자 한 달 수입의 절반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김시문(金時文)이란 사람은 한인들이 거주하던 보강리(保康里)에 금문양행(金文洋行)을 세웠는데 사실은 만두가게였고, 자금도 5000위안밖에 안 됐다.


하지만 1925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자금 곤란으로 거의 정간될 위기에 빠지자, 김시문은 독립신문을 계속 발간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또 상해에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을 경영하던 한진교(韓鎭敎)도 업무 이외 시간에는 직접 독립운동에 참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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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거사' 직후 7곳 옮겨다녀

제2부 (1)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서

2005.03.09 03:38

 

 

기차에서 사탕수수 밭까지는 불과 몇 걸음 사이였지만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총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기차에서 내려 밭까지 뛰어가 몸을 숨겼는지 모르겠다.”


“건장한 청년 10여명이 배에서 내려 밧줄을 배에 묶고는 강변을 따라 그 밧줄을 끌고 올라갔다.”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이었던 정정화는 독립운동 시절을 기록한 ‘장강일기’에 그렇게 썼다. 광주(廣州) 인근 불산(佛山)을 탈출하여 유주(柳州)로 향하던 임정 요인과 가족들의 절박함이 손에 쥘듯 생생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7년 역사에서 상해 시절이 13년, 이동 시절이 8년여, 그리고 중경 시절이 5년 남짓이다. 그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동시절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상해나 중경 시절과 달리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의 투쟁으로 던진 승부수는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고난의 길로 연결됐다. 상해 홍구공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임시정부는 긴급히 항주로 피신했다.


상해에 잠복해 있던 김구도 자신이 거사를 주도했다고 성명을 발표한 뒤 상해와 항주 사이 조그만 시골 도시인 가흥(嘉興)으로 몸을 숨겼다. 김구가 숨을 죽이며 밀정을 따돌리는 동안 임시정부는 항주에서 정세를 지켜보았다. 임시정부가 가흥의 남호(南湖)에서 선상(船上) 국무회의를 가지기도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항주에 잠시 머물던 임시정부는 내륙인 남경(南京)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여 진강(鎭江)에 자리잡았다. 이곳은 상해와 항주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목인데, 상해에서 고속도로로 두 시간 남짓 걸린다. 정부는 진강에 머물렀지만 요인들은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만약 임시정부가 남경에 존재한다면, 장장(長江)을 거슬러 올라 함포 사격을 가하겠다고 일본이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협박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경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움직였다. 무엇보다 김구가 장개석과 가진 면담이 대표적이었다. 한인애국단 거사 이전에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도와준 일은 거의 없었다. 일본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한인애국단 거사 직후 중국 정부만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모두 임시정부를 격찬하고 나섰다. 김구는 장개석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고, 장개석은 낙양(洛陽)군관학교에 한인 청년을 초급 군사간부로 양성하는 장치를 만들어 주었다.

 

 

진강 시절에 임시정부는 참으로 고단한 기간을 보냈다. 김구가 이끈 한국국민당이 유일한 바탕세력이었고, 그마저도 정부 소재지와 요인 거주지가 달랐으니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남경에 머물던 요인들에게 급하게 활동 무대를 옮겨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7년 7월에 터진 중일전쟁이 그것이다. 임시정부는 급하게 정치적인 통합을 일구어 나갔다.


전쟁 발발 직후인 8월에 이청천과 조소앙 등 우파 세력들이 김구를 중심으로 집결하고 미주 지역 6개 단체가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고, 전시 체제를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다가 전쟁이 시작된 지 넉 달 만인 11월에 중국 정부가 중경(重慶) 천도를 선언하자 임시정부도 11월 말에 급하게 배를 마련하여 남경을 떠났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면서 벌인 30만명 대학살사건을 두 주일 앞둔 긴박한 순간이었다.


김원봉이 좌파를 이끌고 남경에서 무한(武漢)으로 이동하여 자리잡는 사이에 임시정부는 장사(長沙)로 방향을 잡았다. 곡물 가격이 싸고 홍콩을 통해 국제 사정을 접하기 편리한 곳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호남성(湖南省)의 성도인 장사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1938년 5월‘남목청(楠木廳) 사건’이라 불리는 총격 사건에 휘말렸다. 우파 3개 정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조선혁명당 당사에서 요인들이 피습당한 사건이다.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그리고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재건파 사이에 통합을 위한 모임이 열렸는데, 통합 논의에 불만을 가진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권총으로 회의 장소를 덮친 것이다. 김구와 조선혁명당의 현익철·유동열·이청천이 차례로 총격을 당했다. 현장에서 김구는 절명 상태에 빠졌고, 병원으로 긴급하게 후송되어 수술 끝에 간신히 살아났다. 현익철은 사망하고, 유동열은 중상을,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해외 소식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의도에서 장사를 떠나 광동성 광주로 남행하였다. 광주 시내에 연락처를 두고 정부는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불산(佛山)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혼을 빼놓는 일이 터졌다. 일본군이 광동성에 상륙한 것이다. 그래서 허겁지겁 짐을 꾸려 북북서 방향으로 탈출했다. 광주 시장 오철성(吳鐵城)이 관리를 붙여주면서 교통편을 마련해 주어 그나마 이동이 가능했다.


연로한 노인과 가족들이 포함된 100명 넘는 대가족이 더러는 버스로, 또 더러는 배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에 도착한 곳이 유주(柳州)였다. 유주는 뛰어난 산수로 널리 알려진 계림(桂林)에서 서쪽으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이다.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여 반전(反戰) 활동을 펼치면서 장차 광복군의 원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가행진과 문화공연을 벌여 중국인들에게 항전 의식을 고취시키고, 수익금으로 부상당한 중국 장병을 위문하였다.


1939년 4월에 임시정부는 유주를 떠나 북상하였다. 중국 정부의 전시 수도인 중경 바로 아래에 있는 기강(?江)에 도착한 것이다. 1년 반 동안 임시정부는 이곳에 머물면서 정치적 통합과 군대 결성을 준비해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긴 때는 1940년 9월이다. 상해를 출발한 1932년 5월 이후 이동 기간이 8년을 넘는다. 항주와 진강, 그리고 남경을 중심으로 잠복 활동하던 5년과 장사와 광주·유주·기강을 거쳐 중경에 이르는 3년으로 양분된다.


이 기간 동안 임시정부는 공습을 피해가며 이동하면서도 전시체제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가 중경 시대에 한국광복군 결성, 건국강령 선포, 좌우합작 달성으로 나타났다.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날이었지만, 한 순간도 정부 역할을 망각한 일이 없는 길이었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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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2) 임시정부를 지킨 사람들

2005.03.16 03:57


김구·이동녕 등 국무위 7인, 해체위기마다 임정지켜내 가난한 임정의 살림을 맡아 고생하던 차이석은 안타깝게도 해방 직후인 9월 중경에서 작고했다… 명문집안 출신 이시영은 자금조달을 맡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 서 실천했다

 

 

7인의 국무위원 임정이 항주를 떠나기 직전인 1935년 11월 선임된 새 국무위원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이동녕·이시영, 뒷줄 왼쪽부터 송병조·김구·조성환·차이석.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장에 던진 폭탄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침체됐던 한국 독립운동에도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상해 프랑스 조계에 13년간 자리를 틀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프랑스 정부가 더 이상 임시정부를 품을 수 없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우선 항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곳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1940년 중경에 안착할 때까지 8년 넘게, 임시정부는 수도 없이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이동 속도는 더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임정 요인과 직원들 뿐 아니었다. 가족도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1백수십명이 넘는 대부대가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 관계자와 가족은 목선을 타고 동정호(洞庭湖)를 건너기도 하고,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기도 하였다. 밥을 지어먹어야 하니 이것저것 가재도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중국정부가 지원했고 미주 교포들의 원조가 있었던 데다 중국 물가가 싸서, 김구는“난민치고는 고등난민”이라고 했지만, 몹시 어려운 피난살이였다.


임시정부를 항주로 옮긴 뒤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까지 맞았다. 해체를 주장한 것은 1932년 11월 통일전선을 내걸고 좌·우파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그 세력이 주도하여 1935년 7월 결성한 민족혁명당이었다. 7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5명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임정을 사임했다.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는 여전히 국무위원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로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임시정부 고수를 주장한 세력은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개편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김구였다. 윤봉길 의거 뒤에 상해를 탈출하여 가흥에 머물다 남경으로 옮긴 그는 1935년 11월 국무위원으로 복귀했다. 1933년 3월 임시정부를 떠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그가 2년 반 만에 돌아온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이동녕(1869~1940) 김구(1876~1949) 이시영(1869~1953) 조성환(1875~1948) 송병조(1877~ 1942) 조완구(1882~1955) 차이석(1881~1945) 7인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다. 바로 이들이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1939년 10월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유동열과 이청천(지정천)을 추가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3당 연립내각을 구성하였지만, 이 때는 임시정부의 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였다.


한국국민당 소속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이동녕·김구·차이석·이시영·조성환의 5인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다. 20~30대에 만난 이들은 환갑을 전후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로 노선의 차이를 보인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참여하여 정부와 의정원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좌파 계열과의 제휴에 부정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독립운동세력 가운데에서도 가장 연로하고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이동녕 장례식 1940년 3월 임정이 기강에 있을 때 별세한 이동녕의 장례식 모습. 이동녕은 1920~30년대 임정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으며 김구의 후견인이었다.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끈 김구는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거쳐, 1940년 10월 헌법개정 이후에는 주석으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한인애국단을 주도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어내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


일제의 감옥에 있을 때,“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잘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달라고”(‘백범일지’) 기도했던 그는, 실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문지기를 자청하였다. 임시정부가 옮겨 다니는 동안 그 대단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돌아갔고, 자신은 그보다 일찍 장사에서‘남목청(楠木廳) 사건’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광복군의 창설을 도모했다. 자신은 사회주의 계열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지만,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서는 주위의 반대도 무릅썼다. 1939년 5월 좌파세력의 대표격인 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함께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公開信)’을 발표했던 것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해 7월 좌·우파 7개 정당은 통일회의를 열었으나 실패하였고, 19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41~42년에는 좌파를 임시정부에 참여시켜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임시정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김구인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재덕(才德)이 출중한데도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앞에 내세우고 자기는 남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고치도록 이끌었던”(‘백범일지’) 지도자가 바로 이동녕이었다. 초기부터 임시정부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비롯하여 국무총리·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동 시기에도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김구의 후견인이었다. 김구는 이동녕이 돌아간 뒤 일이 생길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어른으로 존경 받던 그는 1940년 3월 기강에서 별세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년 2월 유주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이들은 임정의 새 장을 열어가는 주역이었다.


1935년 임시정부 해체가 제기됐을 때, 차이석과 송병조는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특히 비서장으로 가난한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차이석은 안타깝게도 해방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9월, 환국 준비에 바쁘던 중경에서 작고했다. 목사인 송병조는 1920년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있었는데, 중경에서도 같은 직을 수행하다가 1942년 2월 별세했다. 이 두 사람은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된 뒤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이끌기도 했다.


조성환은 한말 무관학교 출신으로 주로 군사 분야의 책임을 맡았다. 임시정부가 1939년 서안에 파견한 군사특파단의 책임도 그의 몫이었다. 명문 출신 6형제가 국권 피탈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로 이야기되는 이시영은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에 애를 썼다.


최기영 서강대 교수 조완구는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구황실 우대를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깐깐한 성품으로 청렴했다. 조완구와 차이석의 의복은 무명으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두 벌뿐이었다고 한다. 이동녕·송병조·차이석은 살아 광복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환국한 뒤 김구는 이동녕과 차이석의 유해를 국내로 옮겨 효창원에 모셔 임시정부를 지켜낸 공을 기렸다.


(최기영 서강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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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침체 벗어나려 당 만들어

2005.03.23 08:13


"정부보다 黨이 독립운동에 효과적"


정당을 결성하자는 논의는 임시정부 수립 당시부터 있었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정부보다는 당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임시정부가 침체 상태에 빠지면서, 당을 조직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다.


1926년 국무령으로 취임한 홍진(洪震)이 ‘민족대당(民族大黨)’의 결성을 촉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전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유일당 운동의 바람은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 휘몰아쳤지만, 1929년 말 결렬되고 말았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것은 유일당 운동의 여파였다. 좌익세력이 탈퇴하자,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한독당을 창당한 것이다. 유일당 운동의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만주에서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던 세력들도 정당을 결성하였다. 1929년 말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이, 1930년 7월에는 북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이 결성된 것이다.


그리고 남경에서도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던 인사들이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고, 급진적인 청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의열단도 정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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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1)중경에 정착, 통합정부를 이루다

임정 보선에 좌파 참가… 좌우통합 20년 노력 결실

2005.04.06 04:12

 

중국 서부 사천성에 위치한 중경(重慶)은 사람 살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너무나 무더워서 남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화로’에 속하는 곳. 1년에 9개월이나 안개가 끼어 해가 나오면 개가 짖는다는 곳. 그래서 중일전쟁 때 일본의 공습을 피해 중국 정부가 임시수도로 삼고 항전을 벌인 곳이 중경이다.


가릉강이 양자강으로 합류하는 틈바구니에 솟은 거대한 암반도시, 거기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밤에 보면 마치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독립지사들은 회고했다. 그곳에 임시정부가 도착한 것은 1940년 9월이요, 5년 동안 터전으로 삼았다.


중경시대는 임시정부가 활기찬 시절이었다. 고난의 이동기를 접고 안정된 바탕 위에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패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 외교적 성과, 좌우합작 달성 등 많은 업적을 일궈냈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좌우 세력이 그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1938년 말에 김구가 미리 도착해 내륙을 거슬러 올라오던 임시정부 본진(本陣)의 이동을 원격 지휘하고 있었다. 또 1939년 후반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김원봉이 계림에서 조선의용대를 지휘하다가 중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합작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1939년 후반 기강(?江)에서 열린 7당 회의와 5당 회의가 그 서막이었다. 1920년대 유일당운동과 1930년대 합작운동에서 못다 이룬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세력이 임정에 참여한 1942년 10월 제34차 의정원 의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외쪽에서 다섯 번째가 김구이고 오른쪽 끝이 민혁당 지도자 김원봉이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직전에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우파 세력이 하나로 통합하였다. 1940년 5월에 한국국민당(김구), 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이청천)이 새롭게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것이다.


이들은 “3·1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임을 선언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근간으로 강령을 정했다. 이들이 지향한 ‘신민주국가’는 완전한 광복이라는 터전 위에 정치·경제·교육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해 안으로는 균등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세계일가(世界一家)를 구현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완전한 광복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설, 보통선거제 실시를 통한 정치적 균등 실현, 토지와 대(大)생산기관의 국유화를 통한 경제적 균등 실현,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적 균등 실현, 그리고 광복군 편성과 의무 병역 실시 등을 당강(黨綱)으로 채택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룬 신민주국가, 그것이 지향점이었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당(한국독립당)·정(임시정부)·군(한국광복군)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서 다음해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확립했다. 제2차 대전 발발이 임박한 시점에 광복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확신을 가진 임시정부가 환국하여 건설할 국가상을 마련한 것이다.


건국강령은 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建國) 등 3장 24개 항으로 구성됐다. 총강은 민족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복국과 건국은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할 단계를 설정해 추진할 임무와 절차를 규정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민족국가는 개인이나 특정 계급의 독재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신민주국이요, 정치·경제·교육에서 국민 모두가 균등한 권리를 가지는 균등사회를 목표로 삼았다.


결국 광복 이후에 세울 국가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기우는 국가가 아니라, 한민족이 기반이자 한국민을 기본 단위로 삼는 전민적(全民的) 국가였다. 이는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표명된 것이기도 하고, 좌파 세력의 대표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과 흡사하여 합작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기도 했다.

 

 

        1941년 11월 임정이 제정·반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광복 후 건설할 국가상을 담고 있다.


한편 좌파 세력도 중경에 발판을 굳혔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구성하던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정당 세력이 모두 중경에 도착하였고, 1941년을 지나면서 임시정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장개석의 종용과 정세 변화가 주효했다. 좌파 가운데 핵심인 조선민족혁명당은 한빈과 이정호가 탈당하고 당군(黨軍)이던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華北) 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만을 유일한 지원 대상으로 삼자 돌파구 마련이 시급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틀 뒤인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참여를 결의하고 한국독립당과 통일협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대회 선언에서 “종래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불관주의(不關主義)를 취해 왔으나 내외 정세가 변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1942년에 들어 정치적인 결속에 앞서 군대의 통합이 실현되었다. 5월에 조선의용대 본대 병력이 광복군으로 합류하여 신편 제1지대가 되고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관 겸 1지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적인 합류가 뒤따랐다. 1942년 10월 25일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23명에 대한 보궐선거가 있었고, 여기에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9명이던 국무위원의 수를 11명으로 늘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 장건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어서 1943년 10월에 열린 제35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48명 가운데 24석을 차지한 한국독립당을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이 12석, 그리고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 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좌파의 핵심 김원봉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임시정부는 이름 그대로 좌우합작이자 통합정부를 달성한 것이다. 사회주의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주요 이념 중 하나로 등장하면서 좌우 이념이 형성된 이후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여년간 통합을 추구하던 끝에, 마침내 중경에서 결실을 보았다.


임시정부가 1942년에 달성해낸 좌우 통합은 보기 드문 성공 사례이고, 우리의 소원이자 숙원 과제인 분단문제 해결에 교시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 독립이라는 최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좌우 세력이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경제적으로는 평등의 요소를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이념적인 격차를 줄여 열린 공간에 합류하면서 신의를 쌓아간 과정과 성과는 역사적 교훈이 된다.


(김희곤·안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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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2) 임시정부의 국군, 광복군

2005.04.12 19:19


중국내 무장조직 대통합… 새 조국의 國軍을 꿈꾸다


1940년 9월15일 창설… 병사모집·선전활동 중국군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中과 갈등 광복후 美군정 해산령에 끝내 귀국 못해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는 광복군 창설을 공포하고,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광복군의 창군(創軍)이 “임정의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대일(對日) 연합군의 자격으로 항전할 것을 천명했다. 이어 9월 17일에는 중경(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창건식이 거행됐다. 이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이 이끄는 10개 처(處)와 2개 대(隊)로 총사령부를 조직하고, 그 밑에 3개 지대(支隊)를 두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탄생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중앙이 임정 주석 김구이고, 그 왼쪽은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이다.


광복군의 창건은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임정 수립 이래 오랜 목표가 성취된 것이었다. 임정은 이를 위해 이동기의 역경 속에서도 군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모병(募兵)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초에는 미주 한인(韓人) 사회에 광복군 창건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그들의 성원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광복군은 먼저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군사조직의 통일을 추진했다. 첫 번째로 1939년 1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중심이 돼 만든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1일 광복군의 5지대로 편입됐다. 이어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총부 및 1지대가 광복군 1지대로 재편성됐다. 광복군에 2년 앞서 결성되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던 조선의용대 병력의 합류는 임정과 광복군의 대표성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중국 관내(關內)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 조직이 됐다. 그리고 이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1지대(지대장 김원봉, 본부:중경), 2지대(지대장 이범석, 본부:서안), 3지대(지대장 김학규, 본부:부양)와 제3전구공작대·제9전구공작대·토교대(土橋隊)의 진용을 갖추었다.

 

                                           광복군 대원들의 군사 훈련모습(1943년).


광복군의 활동은 크게 모병(募兵)과 선전(宣傳)으로 나눌 수 있다. 모병 활동을 위해 대동(大同)·포두(包頭)·상요(上饒)·서안·부양 등지에 징모(徵募) 분처가 설치됐고, 서안과 부양에는 각각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또 기관지 ‘광복(光復)’(국·한문판과 중국어판)을 발행하고, 중국 국제방송 및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국내외 동포와 중국인 및 국제 사회를 상대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활동은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이는 광복군의 성격과 지위를 둘러싼 한·중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군의 독자적인 조직을 허용하여 또 하나의 팔로군(八路軍)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원군으로 삼으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1년 상반기에 조선의용대의 일부 병력이 중국 공산당 관할 구역으로 이동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장개석은 참모총장 하응흠(何應欽)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직접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양측의 적지 않은 신경전을 거쳐 중국인 군사참모와 정치지도원을 받아들이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중국 정부가 광복군의 창건을 인정하고 활동을 허용한다는 절충이 이루어졌다. ‘한국광복군 활동 9개 기준(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은 바로 이런 방침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후 광복군은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임정이 1944년 중반 ‘9개 기준’의 실효(失效)를 선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측은 할 수 없이 8월 23일 김구에게 ‘9개 기준’의 취소를 통보했다. 이에 임정은 10월 7일 중국측에 원조를 보장하는 군사협정의 체결을 요구했다. 양국은 협상 끝에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지원 방안’에 합의했다. 일체의 군비(軍費)는 협상 후 차관의 형식으로 임정에 제공한다, 광복군의 경상비는 매월 임정에 지급한다, 한국인 포로는 감화를 거쳐 광복군에 인계한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월 11일 임정은 2지대장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3개 지구대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하고 한반도 진입을 서둘렀다. 8월 16일, 선발대인 독수리팀을 태운 미군 비행기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입수한 미군 비행기는 기수를 돌렸다.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하여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였으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혀, 이튿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임정은 10만명의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군’의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북경·남경·상해 등지를 무대로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 병사들을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오광선(吳光善)을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서울 동대문 밖에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대전에는 한국광복군 경비대훈련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대한국군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광복군 본대가 환국한 후 국군으로 발족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듯이, 광복군 국내지대도 미군정의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에 의해 해체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버린 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한상도·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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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3)미·중의 승인을 위한 전시외교

2005.04.19 19:14


對日 연합군에 참여, 독립국 지위 얻길 바랐지만…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미국은 이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일본과 그 동맹국인 독일·이탈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전선과 유럽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이듬해 1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중국·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본 정부도 3000만 인민을 동원하여 민주국 및 반(反)침략 진선(陣線)에 참가하여 공동분투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10일에는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대일선전(對日宣戰)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정은 이 성명서에서 일본과의 합병조약 및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한반도와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고 선포했다.


中선 조소앙, 美선 이승만 활발한 활동

美, 한국문제로 연합국간 이해다툼 우려

결국 완전독립 아닌 신탁통치로 결론


임정은 이러한 성명을 통하여 그들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되면 임정은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하여 군수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합국들로부터 사실상의 승인을 획득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시, “만 1개년이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중국·미국·영국 등 연합군의 교전단체로서 참가하고 국토 수복시까지 전투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워 둔 바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포착되었다.

 

 

對日선전 성명서 1941년 12월 10일 임정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발표된‘대일선전성명서’.


임정의 전시외교는 중국 국민당 정부 및 중경에 있는 각국 공관을 상대로 전개되었다. 그 방법은 인적 접촉과 대회 개최, 성명서 등의 발표였다. 외무부장 조소앙이 이러한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주장과 논리를 요약해 보면, (1)임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망명정부로서 한국민을 대표하고 있다 (2)광복군을 비롯한 한인 무장집단은 대일전쟁에서 실질적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3)전후(戰後) 한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즉각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워싱턴DC에서는 주미(駐美)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인 이승만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정계·언론계·학계 및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親韓會)의 지원을 받으며 미 국무부·군부·정보기관들과 접촉했다. 1942년에는 3·1절을 맞이하여 백악관 바로 앞에 위치한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다. 미국 각처에서 온 한인 100여명과 한미협회 임원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 등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대회 진행은 워싱턴의 WINX 방송을 통해 실황 중계되었다.

 

 

임정 승인해달라 美서 한인자유대회 1942년 2월 27일 미국 워싱턴DC 라파예트 호텔에서주미외교위원부 등이 주최한‘한인자유대회’. 임정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이승만은 임정의 참전 외교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미주에서는 한인 청년들과 유학생들로 구성된 ‘자유한인부대’를 창설하고, 극동에서는 임정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미 전략첩보국(OSS)과 접촉했다. 이승만은 이때 극동에서 2만5000명의 병력을 바로 동원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5000명씩의 추가 증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문제로 연합국 열강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전후(戰後) 동아시아에서 대두될 중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미국은 전후 한국의 독립 대신 신탁통치 실시 방안을 내놓았고, 중국·영국·소련은 이에 원칙적인 동의 의사를 표시했다. 이리하여 1943년 12월 1일에 한국이 전후 ‘적절한 시기’에 독립될 것이라는 카이로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후 임정 주석 김구는 “만일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 끝에 한국에 무조건 자유 독립을 부여하기를 실패할 때에는 우리는 어떤 침략자나 또는 침략하는 단체가 그 누구임을 물론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신탁통치의 명분으로 제시된 한국민의 자치능력 부족에 대하여, “세계 어느 사람이 특수한 권리를 가지고서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있고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곧 파시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박했다. 이후 임정은 전후 한국의 즉각적이며 절대적인 독립을 요구했지만, 연합국 열강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임정의 전시외교가 벽에 부딪힌 이유는 인적·물적 기반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초반 중경 거주 한국인은 300~400명 정도였다. 이들 대부분은 임정과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거처와 생활필수품을 제공받았다. 미주(美洲) 한인사회로부터의 자금 지원은 임정 유지비로 충당되었는데, 이마저 1944년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임정은 재정적·군사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임정의 승인 외교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임정은 중국에 종속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 임정은 좌·우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는 중경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경우, 소련 또한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조선인을 동원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미국은 임정 승인 문제에 있어 소련의 반발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자칫 미국이 구상하는 대일 연합전선 구축에 균열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전후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미주 한인사회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주미 외교부의 개조 문제로 분열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한인 그룹들에 대한 ‘공평한 대우’를 내세워 은근히 미주 한인단체 및 지도자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는 경쟁적인 한인 그룹 중 어떤 그룹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중경의 미국대사관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결국 이런 안팎의 요인들이 겹쳐서, 임정의 전시외교는 커다란 의욕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말았다.


(고정휴·포항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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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4)후기 임정의 주역들

2005.04.26 17:53


김구 주석체제 강화… 左右통합후 40·50代 진출 늘어

부주석-김규식, 외교-조소앙, 군사-김원봉이 맡아

박찬익, 對中교섭 큰 역할… 엄항섭은 宣傳서 두각


중경 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여전히 60대 이상의 독립운동 원로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점차 40~50대가 포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좌우 합작의 ‘통일전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1940년 10월 주석제가 채택되면서 김구가 주석, 이시영·조성환·조완구·조소앙·박찬익·송병조·차리석이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이들은 대부분 여러 차례 국무위원을 역임한 한국독립당의 원로들이었다.


이어 1941년 12월 좌파 계열이 임시정부를 ‘혁명의 최고통일기구’로 인정하고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으며, 10월 임시의정원의 보궐선거와 국무위원의 증원으로 좌파 계열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장건상, 민족해방동맹의 유동열, 한국독립당의 황학수가 국무위원에 추가됐다.


또 1944년 4월 주석·부주석제가 확립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정으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좌우 합작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박찬익·조소앙·조경한(이상 한국독립당) 장건상·성주식·김붕준·김원봉(이상 민족혁명당) 유림(무정부주의자연맹) 김성숙(민족해방동맹) 등이 선임됐다.


아울러 국무위원회 휘하의 행정부서 책임자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내무)·최동오(법무)·최석순(문화)·엄항섭(선전)이었고, 1945년 3월 문화부장이 김상덕으로 교체됐다.


임시의정원은 이같은 인선에 대해 “이번에 선거된 주석·부주석 및 국무위원은 우리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공헌이 많은 민족적 지도자들이며, 또 우리 민족의 각 혁명 정당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연합 일치하여 생산한 전민족 통일전선의 정부”라고 평가했다.

 

 

광복 후 1·2진으로 나눠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3일 서울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구이고, 그 오른쪽에 김규식·조소앙이 차례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제공


한편 임시의정원은 1942년 송병조의 별세로 홍진이 의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의정원 의원도 한국독립당이 절반, 좌파 계열과 무소속이 절반을 차지했다.


광복군은 1940년 창설 이래 이청천(지청천)이 총사령을 맡았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김원봉이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지만, 좌우 합작으로 운영되는 형태였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를 이끈 것은 여전히 김구(1876~1949)였다. 그는 1940년 10월 주석에 선출되어 정부를 대표했고 임시헌장 제정 이후 그 권한은 더욱 강화됐다. 김구는 열강의 임시정부 승인, 광복군과 미국 OSS(전략첩보국)의 군사협력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 증대에 진력했다. 또 국외 무장세력 간의 연대도 도모하고 있었다.


김규식(1881~1950)은 선전부장을 거쳐 신설된 부주석을 맡았다. 한말(韓末)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임시정부 초기 파리강화회의 대표와 구미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됐지만,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에서 영어·영문학 관련 저술과 영문 시집까지 발간한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외교를 전담한 조소앙(1887~1958)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했다. 이어 2년여 유럽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승인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제창한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이념이 됐으며,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되어 독립 후 민족국가 건설론으로 자리잡았다.

 

주석·부주석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확대 정비한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제36차 회의가 끝난 뒤 발표한 선언문.


김원봉(1898~1958)은 광복군 부사령을 거쳐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반일(反日) 테러 투쟁을 지속하다가 황포군관학교를 마쳤고,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한 바 있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적 경향이 강했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청천(1888~1959)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단·고려혁명군·정의부·한국독립군 등을 지휘했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임정에 참여한 그는 1939년 10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광복을 맞았다.


홍진(1877~1946)은 한말에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판사·검사·변호사로 일하다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6년 국무령에 선임됐다. 유일당 운동에 적극 관여했으며 그가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문서는 임시정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박찬익(1884~1949)은 중국과의 교섭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가까워 한·중 합작 항일운동에 일찍부터 관여했다. 1933년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기회를 만들었던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이끌었다.


엄항섭(1898~?)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문장이 뛰어나 선전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2년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을 알리기 위하여 발행된 중국어본 ‘도왜실기(屠倭實記)’는 김구가 약술한 것을 엄항섭이 정리한 것이다. 환국 뒤에도 김구가 발표한 성명서의 대부분은 그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장건상이나 유림은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고 탈출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장건상은 임시정부 대표로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위하여 연안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유림은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리고 김성숙은 김산이 지은 ‘아리랑’에 나오는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충창’,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처럼 중경 시절 임정에는 다양한 배경과 경력, 이념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옴에 따라 힘을 모아 광복의 그날까지 투쟁했다.


(최기영·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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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5·끝) 광복과 감격어린 환국

2005.05.03 17:47


광복군 국내 진입’ 작전개시 찰나에 日 항복

환국후 美軍政 벽에 막혀 과도정부 수립 차질

신탁·조건부독립 반대한 ‘완전독립’ 정신 남겨

1987년 헌법에 ‘대한민국은 臨政 계승’ 명문화


1945년 8월 10일, 일제(日帝)가 항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제의 항복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미국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작전 계획은 1946년 봄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으로 잡혀 있었고, 그해 말이 되어야 항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임정은 여러 방법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제주도를 거점으로 진입하려는 구상도 그중 하나였다. 김구가 미국의 중국전구(戰區)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해 주면 임시정부가 그곳에 들어가 한국인을 영도하여 미군의 작전을 돕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 그것이었다. 중국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 압록강으로 진입한다는 구상도 있었다. 이를 위해 국무위원 장건상(張建相)을 연안에 보내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추진하였고, 연해주에는 이충모(李忠模)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첩보기구인 OSS와의 합작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방법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 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것이었다.

 

 

김구와 'OSS 책임자' 도너번.1945년 8월 초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을 합의하고 나오는 임정 주석 김구와 OSS 총책임자 도너번 장군.


1945년 8월 4일, 3개월에 걸친 광복군의 OSS 훈련이 완료됐다. 김구는 곧바로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을 대동하고 서안으로 향했다. 제2지대 본부에서 OSS측과 회의,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작전에 합의했다. OSS 총책임자인 도너번소장은 이 자리에서 임정과 미국이 공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OSS와 협의를 마친 김구는 서안 시내로 나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제2지대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OSS측과 합의했던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하고, 이범석(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국내정진대를 편성하였다. 8월 18일 이들은 미군 비행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고, 김구는 중경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임정은 ‘국내에 들어가 임정을 국민들에게 봉환’하기로 결정했다. 임정은 3·1운동을 계기로 국민들이 수립한 것이고, 27년 동안 자신들이 대행해 왔던 정권을 국민들에게 갖다 바친다는 논리였다. 김구 주석이 중경에 돌아온 후 활동 방향을 정립,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해방은 “허다한 선열(先烈)들의 보귀(寶貴)한 열혈(熱血)의 대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英勇)한 전공(戰功)에 의한 것”임을 천명하고, 임정이 추진할 당면 정책을 밝혔다. 국내에 들어가 각계 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45년 12월 19일 '임정 개선 환영대회' 1945년 12월 19일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했다/백범기념관 제공


하지만 임정의 환국은 쉽지 않았다. 중경에서 국내로 이동하는 교통편도 문제였지만,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이 ‘임시정부’ 명의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항복 후 한반도는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고,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입국하려면 미군정의 승낙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정은 이처럼 환국 과정에서부터 미군정이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미군정은 입국에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미군정은 확약을 받고서야 상해로 비행기를 보냈다. 임정 요인은 29명이었지만, 보내온 비행기는 15인승이었다.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들어가는 순서를 정해야 했다.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어졌고, 11월 23일과 12월 1일 각각 환국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으니 정부도 들어온 것”이란 김구의 언급이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개인 자격이지만 국내동포의 입장에서는 정부”라는 성명이 그것이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정이 귀국한 것으로 환영, 12월 19일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환국 후 임정은 정부로 활동했다. 12월 3일 임정 요인들은 김구의 숙소인 죽첨정에 모였고, 신문은 이를 ‘환국 후 최초의 국무회의’로 보도했다.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 대표들을 소집하여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2월 31일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한다”는 내용의 포고를 발표했다. 미군정이 이를 ‘임정의 쿠데타’로 규정했듯이, 임정이 정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정은 미군정이란 벽을 넘기 어려웠다. 미군정은 임정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임정을 와해하는 공작을 추진했다. 임정이 대응책으로 강구한 것은 변신이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2월 14일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그 시도였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의정원을, 최고정무위원회는 국무회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임정 요인들은 이를 국회와 정부로 여기고,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광복 후 3년 만에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임시정부가 사용한 국호였고, 제헌 헌법은 임정의 헌법을 참조했다.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것도, 임정이 그것을 채택하여 운영해 온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7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임정에 있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한시준/단국대 교수 임정이 남긴 주요한 자산이 있다. ‘완전 독립’ ‘자주 독립’이 그것이다. 이것은 임정의 정신이었다. 임정이 27년 동안 존립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정신 때문이었다. 이에 어긋나면 임정은 참지 않았다. 미·영 사이에 국제공동관리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임정은 즉각 반대하는 한편, 1943년 5월 재중(在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대규모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을 보장하며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을 붙였을 때도 그랬다. 조건부 독립을 반대하며, “일제 패망과 더불어 즉시 독립되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독립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지자 즉각 반탁 운동에 나선 것은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의 연장이었고, 미군정과 대결한 것도 그 정신 때문이었다.


(한시준·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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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2005.05.03 17:42


臨政연구 美日자료 의존 수립기념일 실제와 달라

 

 

     임정이 4월 11일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음을 보여주는‘한민(韓民)’제13호(1938년 4월 30일 발행).


임정 연재를 마치며 두 가지 알려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는 임정이 27년 동안 활동했지만, 그 문서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임정의 문서는 두 차례에 걸쳐 망실(亡失)됐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임정이 있던 프랑스 조계를 급습하여 문서 대부분을 약탈해 갔다. 그 이후의 문서는 환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지만, 6·25전쟁 때 모두 없어졌다. 임정에 대한 연구가 임정 문서보다는 일제의 정보자료나 미국측 문서에 크게 의존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임정의 활동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거나, 해석이 잘못될 여지가 없지 않다.


둘째는 임정수립기념일을 잘못 거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4월 13일을 임정수립기념일로 정해 놓고, 이날 기념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임정에서는 4월 11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임정이 4월 11일에 기념식을 거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정의 국회인 의정원 회의록에도 1945년 4월 11일 제26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올해가 광복 60주년이 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또 그 정통성과 뿌리를 임정에 두고 있지만, 임정 문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거기에 수립기념일마저도 임정과 다른 날을 정해 거행하고 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