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조선 독립군의 임팔(Imphal)전투란?

한부울 2008. 9. 24. 21:36

조선 독립군의 임팔(Imphal)전투란?

자은 최두환 (2008-09-21 09:02:54.0)


임팔전투는 무엇인가? 조선의 독립군과 관계가 없는가? 있는가?

국군 60주년이라면서 조선 독립군 광복군의 참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선 그 전투가  어떻게 우리들에게 인식되고 있는지 보자.


(1)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대 3개 사단(제15사단, 제31사단)은 버마와 인도 국경 인근의 정글과 거친 강을 헤치며 나아간다. 식량과 탄약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이다. 이들 앞에는 본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항공기, 탱크, 야포 등으로 중무장한 영국군(제14군 사령관은 윌리엄 슬림 장군)이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는 영국군을 공격해 그들로부터 식량과 탄약을 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머나먼 이국 땅의 정글에 들어온 10여만 명 가운데 거의 대부분 병사들은, 영국군의 중화기 앞으로 돌격하다 속절없이 죽는, 또는 정글 속을 헤매다가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는 등의 운명을 맞이했다. 2만이 넘는 부하들을 이끌고 영국군 코 앞까지 다가갔던 한 사단장은 계속 진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부하들을 철수시키는 일본 군대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다. 싸움은커녕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기 직전의 병사들에게, 사단장으로서는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육군이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중반에 벌였던 임팔작전의 개략적인 장면들인데, 여기에는 조선의 독립군에 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낄 수 없는 것일까? 작전이 없었나? 계속되는 설명을 또 보자.


(2) 임팔 전투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치른 전투로 무적 일본 육군과 영국 연방군 간에 있었던 처절한 정글 전투다. 1944년 초 남북으로 연결된 인도-버마 국경을 연해 서쪽은 영국의 슬림 장군이 지휘하는 제14군 예하 1개 영국군 사단과 3개 인도 사단이 전개했고, 동쪽에서는 일본 육군의 무다구지 중장이 지휘하는 제15군 예하 4개 사단이 임팔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다. 2월에 무다구지는 A사단으로 하여금 임팔 남쪽 아라칸 지역에서 양공(佯攻)을 실시함으로써 슬림의 예비대를 주공(임팔)이 아닌 타 지역에 조기 투입하도록 강요했다. … 이 공방전에서 영국군 수비대는 600명, 일본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 임팔과 코히마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일본 육군은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맛봤다. 전사자 3만 명, 환자·부상자가 2만5000명이었다.


(3) 버마에 인접한 인도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임팔(Imphal)은 널찍한 분지(30×60㎞)로 여러 갈림길이 사방팔방으로 수레바퀴살과 같이 나 있다. 때문에 임팔은 마치 바퀴 중심 같은 위치에 있다. 임팔 북방 약 110㎞ 지점에 코히마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서북 60㎞ 지점에 아삼(Assam)으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 디마푸르가 있다.

아삼-버마-태국으로 연결되는 열대우림 지역은 강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다. 5월부터 쏟아 붓는 몬순은 모든 육상 교통을 마비시킨다. 더욱이 정글에 있는 모든 관목(灌木)과 덩굴은 톱날과 같은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기 때문에 쉽사리 뚫고 나갈 수가 없다. 군인들이 800m를 전진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또 정글 도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극성스러운 모기는 밤낮 구분 없이 물어뜯는다.[위의 자료]


역시 임팔 전투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 동안, 즉 광복이 되기 전까지 전투가 치열하게 벌여졌다. 그 전투가 열대우림 지역이며, 한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다.

임팔은 어디 있는가?

그곳은 버마와 방글라데시의 어름에 있고, 아라칸(Arakan) 산맥을 낀 마니푸르(Manipur) 지역 친드윈(Chindwin) 강 상류 북위 25도 동경 94도에 있는 도시이다.

그런데 여기에 조선의 독립군 광복군이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되고서 3년 반만에 국제전쟁에 참여했다고 나왔다. 한번 보자.


(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창군 68주년 기념식이 오늘(2008년 9월 17일 오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렸습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했고, 4개 지대로 편성돼 영국군과 연합해 1944년 3월 임팔(Imphal) 전투를 비롯해 1945년 7월까지 팀플, 티팀, 비센플 등 미얀마 각지에서 대일작전을 수행했습니다.[국방일보, 2008. 9. 17]


광복이 된지 63년이 지난 이제야 그 독립군 광북군이 열대우림의 임팔전투를 비롯해 광복 직전의 1945년 7월까지 무려 10개월 동안 영국군과 련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는 전쟁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전투지역이 "이국(異國)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임무였을까요?[국방일보, 2008 9. 17. 한국광복군 선언문]


바로 그 전투지역이 조선 땅이 아니었나요? 정말 이런 표현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대륙의 그 땅에서 조선의 독립군들이 전쟁을 한 것은 바로 조선 땅에서 행했던 것이다.


일본군이 10만 명이 넘었고, 5만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면, 련합군을 포함한 조선군은 얼마였을까? 그 중에 조선의 광복군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조선군은 과연 몇 명?

그런 많은 광복군이 한반도에서 그 대륙으로 건너갔는가? 아니면 그곳의 사람들이 조선 광복군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광복이 되어 한반도로 왔는가?

그대로 대륙에 남아있었는가?

적어도 광복군을 대한민국의 력사로 넣으려면 1919년 대한민국 건국부터 계산되어야 한다. "림시정부"란 명칭도 한반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그 땅의 "대한민국"의 완전한 정부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정체가 참으로 궁금하다.


[대륙조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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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사-임팔작전

2008/03/14 오후 3:31 | ☞ Dramatic life ☜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대가 버마와 인도 국경 인근의 정글과 거친 강을 헤치며 나아간다. 식량과 탄약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이다. 이들 앞에는 본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항공기, 탱크, 야포 등으로 중무장한 영국군이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는 영국군을 공격해 그들로부터 식량과 탄약을 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머나먼 이국땅의 정글에 들어온 10여만 명 가운데 거의 대부분 병사들은, 영국군의 중화기 앞으로 돌격하다 속절없이 죽는, 또는 정글 속을 헤매다가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는 등의 운명을 맞이했다. 2만이 넘는 부하들을 이끌고 영국군 코앞까지 다가갔던 한 사단장은 계속 진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부하들을 철수시키는 일본 군대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다. 싸움은커녕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기 직전의 병사들에게, 사단장으로서는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육군이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중반에 벌였던 임팔작전의 개략적인 장면들이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점차 열세로 빠져들던 1944년 무렵, 일본 육군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묘안을 찾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식 무사도로 무장한 한 야심만만한 장군이 한 가지 대담한 작전을 내놓는다. 인도와 버마의 국경지대인 임팔과 코히마로 진격하여, 연합군이 중경에 있는 장개석 군대에 직접 군수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보급로-당시 이를 통하여 막대한 양의 미제/영국제 무기와 군수물자들이 중국 곤명을 거쳐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게 지원되고 있었다-를 차단함은 물론, 열세에 놓여있던 전세를 다시 반전시킬 계기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장군은 일본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였다. 그는 휘하 모든 병력을 강력한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함으로써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하였고 대본영도 그의 야심에 가득찬 계획을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작전의 세부계획을 직접 담당했던 작전참모나 보급참모들 가운데에는 작전의 성공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병사들에게 원활하게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보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작전에 투입될 병사들은, 관동군이 있던 중국대륙으로부터 제15군 본부가 있는 말레이시아까지 이동해 왔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작전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마로 이동해야 했다.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수 천 킬로미터를 걸어 왔던 것이다. 이들의 피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또한 작전 도중 높은 산과 울창한 밀림, 그리고 세차게 흐르는 강을 건너 이동해야 했다. 피곤에 지친 병사들과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어려운 전장환경.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군수물자를 제 때에 원활하게 보급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의 수송 및 보급지원 능력은 형편없었다. 우세한 보급과 화력을 앞세운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일본군이 보유한 수송 차량이나 장비의 수와 질은, 병사들에게 최소한 지급되어야 하는 군수물자의 10분의 1도 제대로 수송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대부분의 군수물자는 인력이나 축력에 거의 의존해야 했다. 차량이 다닐 만한 길은 가뭄에 콩나듯 했고 매우 비좁았다. 그나마 그것도 비가 오면 진창으로 변해서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엄청나게 크고 물살이 세찬 친드윈강과 울창한 밀림으로 뒤덮인 산악지대는 수송보급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몇몇 보급장교들과 작전참모들은 보급능력이 크게 뒤떨어진 채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밀림 속으로 몰아넣는 작전의 무모함에 기가 질려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대는 무다구치의 강력한 자신감 앞에 묵살되고 만다. 결국 예정대로 제 15군 소속 약 3개사단 10여만명의 군대가 작전목표로 정해진 임팔과 코히마(인도-버마 국경에 있다.)를 향해 진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충분한 보급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 1~2주일밖에 버티지 못할 만큼의 군수물자를 지급받았고 이것은 정글 속을 다 통과하기도 전에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작전을 시작하면서 수송수단 및 식량자원으로 쓰기 위해 데리고 들어간 소들은, 기대했던 쓸모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행군하는 병사들에게 엄청난 짐만 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절벽을 통과하다 떨어져 죽거나, 강을 건너다 빠져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탄약과 식량이 부족한데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작전의 총 책임자였던 무다구치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족한 탄약과 식량은 진군하면서 점령하는 마을이나 도시, 또는 적의 병참기지를 점령하여 구하면 된다. 탄약과 식량이 없어 전쟁을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며 나약해 빠진 소리다. 임팔과 코히마를 점령하기만 하면 탄약과 먹을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을 것이다. 작전은 곧 끝난다."


임팔과 코히마를 향해 진격하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던 영국 제14군 사령관은 윌리엄 슬림 장군이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첩보를 통해서 일본군의 작전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일본군은 밀림을 통과하면서 기진맥진할 것이었고, 화력과 보급에서의 우세가 전투에서의 승리를 판가름할 것이었다. 보급이 취약한 일본군의 상황을 간파했던 영국군은 일본군을 최대한 깊숙이 끌어들이면서 적의 보급로를 교란시키고 차단함으로써, 적이 식량과 탄약이 완전히 떨어진 만신창이 상태에 놓여있을 때 총 공격을 가해 적을 궤멸시키기로 작전을 세운다. 일본군보다 우세한 보급을 해야 했던 영국군은 항공기를 통한 공중보급을 선택했다. 산악지형인데다 밀림으로 뒤 덮힌 작전지역에서 육상을 통한 보급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므로 항공기에서 직접 군수물자를 아군에 떨어뜨리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었다. 이를 위해 영국군은 수많은 항공기들을 지원받았다. 또한 일본군이 임팔과 코히마에 당도하기 훨씬 전 부터 영국군은 이미 다수의 항공기를 동원해 차량, 탱크, 야포 및 중화기, 개인화기, 식량, 탄약등의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훈련을 여러 차례 실시했다. 영국군은 아군에게 일본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양의 군수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일본군 앞에 포진한 영국군은 보급과 화력에서 이미 적을 압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보급로 근처에 침투한 영국군들은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적의 진격과 보급 활동을 교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하기 이를데없었던 일본군의 보급능력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군 항공기들은 일본군이 손에 넣을만한 군수물자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켰다. 무다구치가 약속했던 "적에게서 빼앗아 쓸 수 있는"군수물자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진격 도중 우기가 시작되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에 길은 진창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은 무거운 군장을 지고 허기가 진 상태에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웠다. 말라리아나 이질과 같은 전염병도 병사들을 엄습했다. 질병 치료에 필요한 약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는 계속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 3개 사단은 예정대로 작전지역 근처까지 도달하였다. 제 15사단은 임팔 인근에 도착했고 제 31사단은 임팔 북쪽에 위치한 코히마를 점령했다. 물론 그 곳에서도 일본군이 그렇게 기대했던 식량과 탄약은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이미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병사들이 숨을 거두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일본군을 엄청난 화력을 동원해 총 공격했다. 엄청난 수의 항공기와 야포, 전차들이 포화를 퍼부어댔다. 결과는 비참했다. 영국군의 반격을 아직 받지 않았던 31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2개 사단은 거의 궤멸직전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히마에 도착한 31사단에는 남하하여 임팔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데다 탄약도 부족한 상태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작전에 매우 회의적이었던 31사단장은 결국 상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독단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무다구치를 비롯한 대본영은 이러한 사태에 크게 당황하였고 결국 나머지 2개 사단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철수 결정은 너무나 늦었다. 철수 길에 오른 일본군 병사들에게는 여전히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수해가는 도중 만나는 그 어떤 마을에서도 쌀 한 톨 구할 수 없었다. 고된 철수 행군 속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보급능력을 무시한 채 오기와 정신력에 의지해 무리하게 작전을 감행한 결과 일본군은 처절한 실패라는 대가를 치렀다. 처음 작전에 투입된 병력 10만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일본군은 3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전투 중에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굶어 죽고 병들어 죽거나 독사나 독충에 물려 죽었다. 무단으로 작전 중 철수를 결정했던 31사단장은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나 군법회의에 회부되지도 또한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31사단장이 군법회의에 회부되면 그에 의해 임팔작전 진행 중에 있었던 군 장성 및 간부들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위들이 폭로될까봐 상부에서 염려한 탓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의 실패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엄청난 인명과 군수물자의 손실을 야기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 바로 일본 군부 특유의 비  효율성은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의 희생을 초래했던 일본 군부는 자국 군인들에게 조차도 가혹하고 무책임했다. 어쩌면 이는 대의와 명분으로 포장한 화려한 미사여구의 장막 저 너머에 있는 전쟁의 진정한 모습을 알려주는 조그마한 실마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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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戰史 임팔 전투

2005/02/25 23:17


출처 : WORLD WAR 전문 분야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백엽기사철십자장★

 

버마에 인접한 인도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임팔(Imphal)은 널찍한 분지(30×60㎞)로 여러 갈림길이 사방팔방으로 수레바퀴살과 같이 나 있다. 때문에 임팔은 마치 바퀴 중심 같은 위치에 있다. 임팔 북방 약 110㎞ 지점에 코히마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서북 60㎞ 지점에 아삼(Assam)으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 디마푸르가 있다.


아삼-버마-태국으로 연결되는 열대우림 지역은 강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다. 5월부터 쏟아 붓는 몬순은 모든 육상 교통을 마비시킨다. 더욱이 정글에 있는 모든 관목(灌木)과 덩굴은 톱날과 같은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기 때문에 쉽사리 뚫고 나갈 수가 없다. 군인들이 800m를 전진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또 정글 도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극성스러운 모기는 밤낮 구분 없이 물어뜯는다.


지네, 독사,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전갈, 무서운 통증을 일으키는 덤덤파리, 모기장을 뚫고 들어와 피를 빨아먹는 물소파리, 길이 2.5~15㎝의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산(山)거머리가 있다.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는 거머리들은 나뭇잎이나 가지 등에 붙어 있다가 나무 밑으로 사람이 지나가면 `쉬~와'(소나기 오는 소리)하며 떨어져 옷을 뚫고 들어가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말라리아·이질 등의 역질은 언제든지 생명을 노린다.


임팔 전투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치른 전투로 일본 육군과 영국 연방군 간에 있었던 처절한 정글 전투다. 44년 초 남북으로 연결된 인도-버마 국경을 연해 서쪽은 영국의 슬림 장군이 지휘하는 제14군 예하 1개 영국군 사단과 3개인도 사단이 전개했고, 동쪽에서는 일본 육군의 무다구지 중장이 지휘하는 제15군 예하 4개 사단이 임팔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다. 2월에 무다구지는 A사단으로 하여금 임팔 남쪽 아라칸 지역에서 양공(佯攻)을 실시함으로써 슬림의 예비대를 주공(임팔)이 아닌 타 지역에 조기 투입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B사단으로 하여금 임팔-코히마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도록 하고 C사단은 코히마를 공격토록 했다. 3월 말께 일본군이 코히마 -디마푸르의 보급로를 끊자 임팔의 수비대는 완전히 고립됐고 영국군과 일본군은 임팔로 통하는 길 위에 얼룩말 무늬와 같이 몇 겹으로 서로 엇갈려 위치하게 됐다.


3월19일 일본군은 임팔 58㎞ 지점까지 육박, 서북쪽의 코히마를 포위했다. 일본군의 맹공에 직면한 코히마의 영국군 방어선은 점점 축소돼 마지막에는 400~500m의 삼각형 속으로 몰리게 됐다. 부상병들은 아무런 방호대책도 없는 벌판이나 무개호(無蓋壕)에서 수술을 받았고 느닷없이 떨어지는 포탄으로 남아 있는 다른 팔마저 3m 저쪽으로 잘려 나갔다.


코히마 공방전의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영국 무관들이 사용하던 고지 위의 정구장에서 벌어졌다. 4월8일 밤 영국군은 정구장의 한쪽 끝에 참호를 파고 들어박혔고 일본군은 반대쪽 끝에 대치했다. 얼마 전만 해도 백구(白球)가 교환되던 정구장에 지금은 양국군이 던지는 수류탄과 총탄이 난무했다. 전투는 다음날까지 계속됐으나 영국군·일본군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코히마는 포위된 지 1주일 만에 물과 탄약·의약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수송기가 투하하는 보급품은 대공포와 좁아진 방어 지역 때문에 대부분 일본군 지역에 떨어졌다. 영국군의 보급품은 오히려 일본군이 이용했고 반대로 영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마침내 코히마 수비대는 좁혀진 방어선의 어느 방향으로부터도 일본군에 노출되고 말았다.


4월18일 코히마 수비대가 최후를 각오하고 있을 때 제161여단의 펀자브 부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왔다. 간발의 차이로 수비대는 회생(回生)했으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정구장을 사이에 두고 혼을 뺄 듯한 전투가 시작됐다.

결국 아라칸으로부터 새로운 원군이 도착하고서야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구원하러 들어온 병사들은 요새 내의 시체 썩는 냄새에 구역질을 했다. 파리 떼가 들끓고 시체에서는 구더기가 바글거렸다. 악취는 옷이나 머리카락에까지 배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방금 전사한 전우의 피비린내가 섞이면 위 속의 노란물(위액은 노란색이며 무지하게 쓰다)까지 토한다. 이 악취는 음식물에도 스며들기 때문에 며칠이고 음식물을 한 톨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다. 먹으면 위까지 내려가기 전에 거꾸로 밀고 올라온다. 커피는 이럴 때 넘길 수 있는 유일한 음식물이나 배부르게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공방전에서 영국군 수비대는 600명, 일본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출처] 戰史 임팔 전투(1)|작성자 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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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인면지구작전참전 事例


박 영 진(朴永晋) 1921. 3. 27~1950. 6. 25

경북 고령(高靈) 사람이다.


1939년 광복군 제5지대장인 나월환이 광복군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개설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뒤 졸업하였다.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합하여 개편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주중경(駐重慶) 영국대사관 부관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池靑天) 총사령관과 주인도(駐印度)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멕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의거하여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그는 공작대 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12월 전방지구인 임팔(Imphal)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제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그는 제201부대 본부와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여 1945년 연합군이 버마지구의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버마 중북부 지역으로 배치되어 버마 수도 랭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 전과를 올리면서 동년 7월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p.120~121.


註・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94・267・613面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5卷 85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781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946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231・478・479・483・608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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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응 국(文應國) 1921. 6. 10~ 號 : 斗山

황해도 안악(安岳)사람이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여 중국중앙간부훈련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후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영국과의 군사협정에 의하여 주인면공작대(駐印緬工作隊)에 편입되어 임팔, 만다레 및 랑궁 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939.


註・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40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13卷 613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6卷 167・229・231・404・477・479・480・483・545・608面

[한국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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