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한부울 2008. 6. 29. 22:13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21세기 중국과 장정

[한국일보] 2008년 06월 09일(월) 오전 02:59


대장정은 '현대 중국'을 일궈낸 거대한 인간 드라마


1934년 10월 16일 저녁. 마오쩌둥(毛澤東)과 농민들로 구성된 8만5,000명 홍군은 횃불을 들고 중국 남부 장시(江西)성의 작은 도시인 위두(于都)를 떠나 긴 도피 여정에 들어갔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을 피해 역사적인 1만km의 장정을 떠난 것이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을 선언했다. 반면에 장제스는 살아남은 60만의 병력을 싣고 대만으로 도주해야했다. 이로부터 다시 59년, 따라서 장정으로부터 74년이 흐른 2008년 현재. 중국은 미국, 일본에 이은 세계의 3대 경제대국으로 웅비하고있다. 그리고 이같은 웅비의 상징으로 유치한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물론 티베트사태와 쓰촨·四川지진으로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지만).


그리고 앞으로 26년 후이자 장정 100주년이 되는 2034년에는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또 앞으로 41년 후이자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론 조만간 중국이 위기에 부딪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기는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체제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현재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장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정은 현대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다.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면서도 왜 자신들의 체제를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라며 사회주의라는 말을 고수하는지, 또 왜 공산당이라는 사실상의 일당체제를 계속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장정은 그 자체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 드라마이다. 적에 쫓기고 해발 5,000m의 설산과 죽음의 늪지대등자연과 싸우며 중국의 오지를 헤매면서도 치열한 내부 투쟁을 해야 했던 장정의 이야기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한 연구자가 잘 지적했듯이 셰익스피어조차도 결코 쓸 수 없는 극적인 드라마이다.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황토고원의 산시(陜西)성에 도착해 국민당군 추격대를 몰살시킨 1935년 10월 18일까지 368일동안 24개의 산을 넘었고 해발 4,000m 이상의 만년설산 5개를 포함해 18개의 산을 넘었다. 또 장시성에서 출발해 산시에 도착할 때까지 중국 전체 27개 성의 절반에 가까운 12개성을 거쳐 62개 도시를 점령했다. 마오가 장정이 중국 전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그씨를 뿌린 파종기라고 이야기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홍군은 장정기간 중 18일간의 야간 행군, 235일간의 주간 행군을 함으로써 총 253일간 행군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115일은 전투를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중 56일은 홍군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놓고 마오가 이끄는 중앙군(제1방면군)과 장궈타오(張國燾)가 이끄는 제4방면군이 격론을 벌여 발이 묶인 채 쓰촨 북서부 지방에서 원치 않은 휴식을 해야 했었다. 이를 빼고 나면 사실상 행군을 하지 않은 '휴식일'은 59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 중에서 15일은 하루 종일 전투를 했다. 결국 하루 평균 40km를 걸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밖에 하루 종일 전투를 한 15일 이외에도 매일 평균 1건의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 같은 초인적 강행군으로 결국 출발 당시 8만5,000명에 달하던 홍군은 도착 때에는 8,000명(4,000명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줄었다. 특히 원래 출발했던 사람은 3,000명에 불과했다. 서른 명에 한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번 특집은 한국인으로는, 아니 비중국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직접 장정을 돌아보고 쓴 장정 기행기이다. 물론 홍군처럼 1년을 들여 걷지는 못했고 대신 차를 타고 돌았다. 구체적으로, 6개월간의 중국 현지 어학연수 및 자료조사를 포함해 1년 반 동안 준비를 했고 2008년 3월 10일부터 4월 28일까지 49일간 자동차로 하루 평균 11시간씩 1만3,500km를, 항공기 이동거리를 포함할 경우 1만8,000km를 장정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직접 보고, 취재한 기록이다. 특히 거리로 보자면 1만3,500㎞의 60% 이상인 8,000㎞를, 시간으로 보자면 총 500여 시간의 70% 이상인 350여 시간을 한국인들이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오지 등의 비포장도로를 헤치고 가야 했다. 그 과정은 파란만장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다.


워낙 오지라 길이 나쁜데다가 올림픽 등으로 길을 수리한다고 다 뜯어 놓아 길이 길이 아니었다. 가는 길이 도중에 차가 다니지를 못하는 길이라 다시 돌아가 동서남북으로 시도를 했다가 '4수'만에 성공한 적도 있다. 30km를 6시간 반 만에야 통과할 수 있었던 공포의 비포장도로도 있었다. 자오핑두(皎平渡)라는 곳을 가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먼지가 20cm씩 쌓인 험난한 산길을 오토바이?타고 넘어야 했다.


게다가 갑자기 터진 티베트사태로 두 차례나 추방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쓰촨 서북의 장족(티베트족) 지역인 루딩(定)교 취재 중 위험지역이라는 이유로 공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추방을 당했다. 며칠 뒤 다른 장족 지역을 가기 위해 4,532m의 고지를 넘어 10시간 만에 도착한 도시 입구에서 저지당해 다시 빙판길의 그 고지를 넘어 돌아와야 했다.


그 결과 일정도 계획보다 보름정도 줄이고 쓰촨 서북부의 930km 구간을 건너뛰어야 했다. 원래 장정이 1만km였으니 약 10분의 1구간을 다녀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

나 그 바람에 목숨을 구했는지 모른다. 출입저지를 당한 지역이 바로 최근 쓰촨 지진이 일어난 지역으로 출입저지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취재를 하다가 지진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장정은

1)국민당군과의 투쟁이자

2)자연과의 투쟁이었으며

3)내부노선 투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21세기 장정'은 좀 다른 투쟁이었다.

1) 길과의 투쟁,

2)길 때문에 못 간다는 운전기사와의 투쟁,

3) 나쁜 길로 인한 시간과의 투쟁,

4) 출입금지 등 규제와의 투쟁,

5)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인내력)과의 투쟁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 장정에 통역 겸 총간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 오만용씨, 조선족 보디가드였던 김문석군, 그리고 험한 길과 살인적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 차를 몰아준 세명의 운전기사 등에게 감사 드린다. 재정적 지원을 해준 현대자동차와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주한 중국대사관에도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가장 빚지고 있는 것은 현지에서 만난 수많은 민초들이었다. 열악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 준 맑은 미소가 어려웠던 장정을 참고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실 70년 전 장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도 바로 이들 민초들이었을 것이다. 쓰촨 장족지역에서 하룻밤을 같이한 한 장족과 한족 부부는 민족화해가 무엇인가를 생활로 보여주었다. 티베트문제의 지혜로운 평화적 해결과 쓰촨 지진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넷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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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한국일보] 2008년 06월 09일(월) 오전 02:58


난창봉기·추수봉기·징강산 유격전

 


공산당 창립·4.12학살의 상해…서울 능가 상전벽해

1차 全大 열린 2층 건물 옆 파리 연상 카페촌 묘한 공존

첫 난창봉기 기념 소총像, 폭력 對 비폭력 다시 생각케


베이징(北京)발 상하이(上海)행 비행기. 비행기속에서 상하이,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난창 (南昌)을 중국현대사와 연결시켜 생각해봤다. 청나라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의 제국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1912년 멸망했다. 이후 중국은 각 지역을 지배하는 군벌들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쑨원(孫文)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서구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1912년 국민당을 창설했다.


한편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성립됐고 국제공산당본부(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국민당과 국공합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져 국민당의 장제스가 교장으로 취임했고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초빙됐다. 젊은 공산당원들도 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실세가 된 장제스는 1927년 군벌들을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들어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다. 수십만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이를 돕기 위해 총파업에 들어가 "장제스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상하이의 갱 두목이자 악덕 매판자본가과 뒷거래를 했고 장제스가 방조하는 가운데 갱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사라졌다. 역사적인 4.12학살이었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운동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은 반작용으로 무장투쟁이라는 좌파노선으로 선회했다. 그 첫 작품이 난창봉기이며 두 번째 작품이 추수폭동이다. 1927년 8월 난창 공안국 국장인 주더(朱德)가 국민당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초대해 발을 묶은 가운데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격파하여 난창을 장악했다. 그러나 광둥(廣東)으로 진군해 혁명근거지를 만들려는 계획은 이동 중 국민당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실패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에게 고향인 후난(湖南)에서 추수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9월 마오의 후난병력은 일부 소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피해도 컸고 목표한 창두(成都)ㆍ창사(張沙)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오는 후난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상하이의 두 얼굴


상하이는 중국 '붉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오랜 조차지였던 역사적 유산에 기초해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을 능가하는, 아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카이라인과 와이탄(外灘ㆍ해변가에 자리잡은 상하이의 유서깊은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이를 증언해준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 사회주의의 상징이자 메카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곳이 바로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하이의 선진적 노동자들은 1920년대 투쟁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중심적인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이 점에서 상하이는 상반되는 '두 개의 얼굴'을 한 도시이다.


1921년 7월23일. 마오를 비롯한 13명의 사람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내에 있는 한 이층건물에 모였다. 53명의 공산당원들을 대표한 대의원들로 이들은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30일 이 같은 모임을 냄새 맡은 경찰이 수색에 들어갔다. 이들은 급히 피해 인근 호수의 유람선에게 창당선언문을 낭독했다. 마침 제1차 전대 회의지에서는 저우언라이 회고전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성지답게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13명의 대의원들이 회의를 하던 방은 촬영이 금지돼 있었으나 사무실에취재목적을 설명해 촬영을 허락 받았다. 사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 장정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세력인 4방면군 사령관으로 장정의 방향과 관련해 마오와 갈등을 벌렸던 장궈타오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결국 당내 소외세력이었던 마오와 당내 최고엘리트였던 장궈타오가 장정을 놓고 갈등을 겪고 결국 마오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엄습한 것은 혼란감이었다. 이 유적 바로 옆에 파리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카페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의 최고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코앞에 이 같은 카페촌을 만들도록 허락한 중국. 이를 실용주의라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실 제 1대 전대 회의지와 카페거리 신천지, 이처럼 현재의 중국의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즉 지척에 위치한 이 두 곳의 공존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자본주의 못지않게 시장경제를 추진해 가고 있는 소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하이의 최고 매력은 와이탄의 야경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은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걸, 조명이 다 꺼져서 죽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지난 구정의 폭설로 발전과 송전에 문제가 생겨 관광객이 많은 주말만 조명을 켜고 주중에는 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불이 꺼져 황량한 와이탄거리의 모습이야 말로 환경오염과 에너지난에 봉착한 세계의 불안한 미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폭설의 경우 결국 환경오염에 따른 기상이변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상이변은 전력난을 낳았다.


어디 전력뿐이랴. 고갈의 위기에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석유값은 또 어떠한가. 사실 이 같은 에너지, 그리고 천연자원 문제 때문에 중국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중앙아시아 등 에너지와 자원강국들로부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방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의 석유와 에너지의 소비량은 앞으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국, 나아가 세계의 에너지난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 뻔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색상으로 원을 그린 천장과 벽.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거대한 소총.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해, 포스트모던한 팝아트 설치 미술의 한 장면이었다. 다음 날 난창봉기 기념관을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충격적이게도 이 같은 형상이었다. 공산당의 혁명유적 기념관이니 당연히 무겁고 칙칙한 사실주의적 조형을 기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창봉기는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배반당한 뒤 행한 첫 무장봉기이다. 따라서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한 조형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말이었다.


조형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오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말이 잘못 인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마오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나 의회와 같은 민주적 정치를 혐오하고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곤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그 같은 발언이 나오게 된 맥락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오는 이 발언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의해 국공합작을 배반당하고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결정한 우한(武漢)회의에서 했다. 따라서 그 말은 피의 희생의 생생한 체험에 기초해 평화노선은 적의 폭력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을 가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현실분석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거꾸로 선 장총 조형물을 보면서 역사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가 결국 승리하며 비폭력의 힘이 폭력보다도 더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규범적으로는 폭력이나 이에 대한 대항폭력(난창봉기식의), 나아가 비폭력을 넘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반폭력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현실을 알수록 역사에 있어서 폭력의 힘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자신이 없어진다. 고대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같은 무장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운동만 했다면, 그리고 중국의 농민들이 공산당의 지도아래 홍군을 조직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면, 노예의 사슬과 오랜 봉건적 수탈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 별로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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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한국일보] 2008년 06월 12일(목) 오전 02:4

 


농민혁명 숨결 '마오의 고향'… 길 없는 곳에서 길은 시작됐다


난창(南昌) 다음의 행선지는 추수폭동의 현장이자 마오의 고향인 창사(長沙). 창사는 후난(湖南)성 최고의 관광지인 장지아지에(張家界)를 가본 이들이라면 중간에 들렀을 후난성의 성도이다. 난창에서 창사까지는 530km로 도로사정이 나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행히 추수폭동기념관은 창사시 70km 못 미친 원자(文家)시에 위치해 오후 5시 전에 도착했다. 내부 수리 중이어서 닫힌 기념관에 다행히 수위실 직원이 있어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왔다고 하자 문을 열어 줬다.


원자시는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등 후난지역 공산당원들이 창사부근의 여러 지역에서 추수폭동 후 국민당군의 추격을 받자 이곳에 모여 창사 공격을 포기하고 징강산(井岡山)이 있는 남쪽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그 곳에 유격기지를 만들어 지구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곳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난창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장총을 형상화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농민봉기를 상징하기 위해 장총과 횃불을 든 농민의 손을 형상화했다. 기념관 안에는 추수폭동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농민, 혁명 중심에서 소외층으로


추수폭동은 후에 중국혁명의 주동력이 된 농민이 처음으로 중국현대사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전까지 중국공산당은 러시아혁명의 경험과 이에 기초한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해 농민이 아닌 노동자를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의 학살로 끝나기는 했지만 상하이(上海)의 노동자 봉기가 보여주듯, 그 때까지만 해도 기존질서에 전투적으로 저항해 싸운 건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추수폭동을 통해 중국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압제에 저항해 무기를 든 것이다. 장정에 참여한 홍군 중 농민은 노동자(30%)보다 두 배 이상 많은 68%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중국을 가능케 해준 일등공신은 농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재 농민, 특히 농민출신으로 도시에서 불법노동일을 하고 있는 농민공, 그리고 노동자는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외세력이다. 물론 개혁개방에 따른 경제발전으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농민들이 절대빈곤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심각하다. 중국사회과학원이 최근 지난 10년간의 개혁성과의 분배율을 조사한 결과 공무원(29.2%), 연예인(20.2%), 민영기업주(자본가)와 자영업자(17.7%), 국영기업 및 집단기업 간부(16.1%) 등이 많은 수익을 나누어가진 반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공(0.5%)과 농민(1.3%)은 노동자(0.9%)와 함께 가장 수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해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농촌세를 폐지하는 혁명적인 조치를 취했다. 유구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이 소작료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심각한 도농간 양극화 해결에는 역부족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우울한 기분으로 기념관을 나왔다.


저녁은 후난식으로 했는데 역시 명성대로 매웠다. 후난 출신답게 매운 음식을 좋아한 마오는 평소 “혁명가는 매운 것을 잘 먹어야 한다”며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명 이더ㆍ李德)을 놀리곤 했다는데, 그래서 호남출신에 혁명가들이 많은 것인가?


마오의 생가로 가는 비포장길


샤오산(韶山)은 창사에서 서남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은 이곳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잡혔을 정도의 오지이다. 길조차 없던 이곳에서 마오는 태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국부가 된 마오의 생가 아닌가. 따라서 샤오산을 찾아가는 길은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길이 비포장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같으면 아스팔트로 잘 닦아놓았을 텐데 이렇게 엉망인 것은 마오에 대한 우상화가 덜 됐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엉망인 길이 참을 만 했다.


도착하자 국부의 생가답게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특히 관광버스들이 많았다. 완만한 언덕길로 올라가자 왼쪽에 연못이 나오고 오른쪽 언덕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생가가 보였다. 마오가 공부보다 일을 하라는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투신을 하겠다고 겁을 주어 아버지의 항복을 얻어냈다는 연못이다. 뒷날 마오는 “대가 끊기기를 원치 않는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해 승리했다”며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계급투쟁에 승리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빚 투성이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마오가 집에서 운영하는 쌀가게의 도제가 되어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업료마저 안 주겠다고 하자 서당에 가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해야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의 편이었다. 어머니와 외가의 설득으로 그는 사범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좌파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가 아는 마오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 역사란 묘한 것이다. 생가는 당시의 중국 농촌기준으로는 상당히 부유한 수준의 꽤 큰 집이었다. 방이 여섯 개 달린 기와집이니 부농이었던 셈이다. 사실 펑더화이(彭德懷) 등 일부를 제외하면 마오, 덩샤오핑(鄧小平),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혁명 지도자들도 대부분 부농이나 중산층 출신이다.


징강산과 좌파 수호지?


창사에서 징강산으로 향하자 첩첩산중에 들어섰다. 80년 전 추수봉기에 실패하고 마오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남은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향하던 그 길이다. 감회가 무량했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징강산은 해발 900m 정도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진 평평한 산이다.


그러나 후난과 장시성의 경계에 위치해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이미 이 지역에는 500명의 화적 떼가 자리잡고 주민들에게 소작료와 세금을 받으며 사실상의 정부로 행세하고 있었다. 마오는 이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남부로 가기 위해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들과 공존하기로 했다. 이후 지역 토호들을 공격해 처형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이들을 부하로 두게 된다.


보기에 따라, 그가 자주 읽었던 수호지의 의적과 비슷한 모습이 된 것이다. 즉 현대판 송강 비슷해졌다. 신문은 그를 중요한 화적두목으로 보도했다. 그 때문에 마오는 모스크바와 중앙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주더(朱德)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전설적인 ‘주-마오 군대’군대가 탄생했다.


흔히 중국에는 다섯 성지가 있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마오의 시신과 혁명박물관이 있는 베이징(北京)이다. 두 번째는 마오의 생가인 창사, 세 번째가 바로 징강산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마오가 장정 중 권력을 잡게 되는 준이(遵義)이고, 마지막으로 장정을 끝내고 홍군의 수도가 된 옌안(延安)이다. 징강산은 5대 성지중의 하나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고급 리조트와 숙소들이 즐비해 마치 한국의 고급 리조트타운에 온 기분이었다. 수백억원을 들여 외양만 번지르르하게 만들어 놓아 그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광주 5.18기념묘역처럼 혁명유적의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화돼 있다는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상당히 많은 계단을 지나자 뾰쪽한 금빛 조각들이 난창과 창사에서 본 소총 조형물처럼 하늘을 향해 찌르고 있는 모양의 징강산 혁명열사기념비가 나타났다. 징강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창을 든 어린 손자와 함께 아마도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깊은 주름의 할머니의 모습의 조각이, 오른쪽에는 홍군과 그를 그리는 아내의 모습을 한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깊은 주름의 할머니는 발밑의 호화스러운 리조트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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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정의 출발

[한국일보] 2008년 06월 16일(월) 오전 02:40

 


死地에 남은 동료 목숨 값으로 백만 대군 포위를 뚫고…

1만명 희생된 원조 출발지 루이진 毛가 도강한 위두의 위세에 밀려나

준설작업으로 엉망진창 된 위두江엔 여덟 자식 잃은 어머니 통곡이 흘러

수소문 끝에 만난 99세 老홍군 "농민 세상 약속 믿고 주저 안했지"


징강산(井岡山)에서 세력을 키운 마오(毛澤東)는 산을 내려 와 국민당이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장시(江西)성의 루이진(瑞金)지역을 장악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은 장시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 인구 1,000만명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마오가 루이진으로 정했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오를 국가수반인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했다(당시 모스코바는 대부분의 자금을 제공하고 있어서 중국공산당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중앙당이 위험한 상하이(上海)를 떠나 안전한 루이진으로 이동해오면서 당서기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이후 모스코바에서 유학한 스물다섯 살의 청년 보구(博古)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도착해 당을 장악했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도 도착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을 움직이는 삼두체제가 자리 잡았다. 마오는 권력에서 소외됐다. 한편 국민당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마오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홍군을 소부대를 나누어 유격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패배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홍군은 적의 약점을 이용해 네 차례의 포위작전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34년 들어 국민당군은 100만 대군을 동원한 5차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삼인위원회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나가 다른 곳에 있는 홍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장정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자신들이 결정한 이 같은 홍군의 이동이 1만km의 역사적인 장정이 되리라고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마오도, 장제스(張介石)도 마찬가지였다.


원조논쟁


저녁 늦게 루이진에 도착해 찾은 곳은 홍군광장. 31년 11월7일 중국공산당이 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마오를 주석으로 선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는 하얀 돌로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서’라고 써 있었고 그 글씨가 끝나는 곳에 포탄모양을 한 붉은 색의 높은 기념탑이 나타났다.


루이진의 상징이 된 홍군열사기념탑이었다. ‘기이한 살생부’(루이진에 남을 사람들의 명단)에 의해 주력군이 루이진을 빠져 나가도록 이곳에 남아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옥쇄한 이름 없는 홍군들을 생각했다. 그들이야 말로 잊혀진 장정의 진정한 영웅들이 아닌가.


해가 진 캄캄한 밤길로 루이진을 벗어나자 루이진시의 경계에 ‘장정 출발지 루이진’이라는 현수막이 나타났다. 오던 길에 지나온 위두(于都)에서도 ‘장정 출발지 위두’라는 현수막을 본 기억이 났다. 그럼 장정 출발지가 두 군데란 말인가? 한마디로 마포에 가면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 ‘원조 최대포’ 간판과 같은 ‘원조 논쟁’이다.


장정 출발지 원조는 과연 어디일까. 루이진인가, 위두인가?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위두이다. 루이진에는 소비에트임시정부 흔적 등은 남아 있지만 장정과 관련된 제대로 된 기념관이 없다. 그러나 위두에는 거대한 장정 기념관과 장정 기념탑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장정출발을 하려면 루이진이 아니라 위두로 간다.


물론 당지도부가 위두를 장정의 도강지점으로 선택해 34년 7월 루이진에서 위두로 사령부를 옮기고 장정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정부와 주력군은 루이진에 있었고 위두가 루이진의 서쪽에 위치해 루이진에서 위두를 통해 서쪽으로 장정을 떠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이진이 장정의 출발지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즉 ‘원 출발지’는 분명히 루이진이었다. 참가자들만 해도 그렇다. 루이진은 당시 23만명 인구에 3만5,000명이 장정에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위두는 비슷한 22만명 인구에 1만6,000명이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숫적으로도 루이진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왜 원조논쟁에서 위두가 우세인가. 간단하다. 출발당시 당지도부가 위두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오가 위두로부터 장정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고 따라서 원조논쟁에도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장정 출발당시 마오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는 것이지 원래 소비에트수도는 어디였고 주력군이 어디서 출발했는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참과 거짓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란 결국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력관계를 의미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주장이 생각났다. 역사가 기억을 둘러싼 정치투쟁인 것이 바로 이 같은 이유이다.


기념관 가는 길은 공사 중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기념관을 가기 위해 이리 저리 헤맸다. 거기에는 위두강의 도하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있었고 그 뒤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가자 장정을 결정한 3인방의 얼굴로부터 장정을 위해 위두강을 건너기 위한 부교를 만드는데 사용했던 문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군인 신발 만들기 등 위두 주민들이 장정을 떠나는 홍군을 위해 했던 다양한 지원들을 유형별로 그려 놓은 것이다.


홍군과 민중은 물과 물고기과 같은 관계여서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홍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마오의 지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도하지점에 기념돌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뒤로 배가 놓여 있었다.


이 같은 배 800척을 동원해 부교를 여러 개 설치하고 34년 10월16일 저녁 6시 횃불을 켜고 강을 건너 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마오는 말라리아의 후유증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강을 건넜다. 당시 그는 마흔 살이었다.


74년 전 마오가 건넌 위두강은 모래를 캐내기 위한 준설작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 되어 옛날의 맛은 나지 않았지만 강을 바라보고 있자 이날 열 명의 자식 중 여덟 명을 장정에 떠나보냈다는 위두의 한 어머니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49년 홍군이 장제스군에 승리한 뒤 위두를 지나간다고 해서 이 어머니는 3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거리에 나와 자식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99살의 노홍군을 만나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99살의 장정 참여 노(老)홍군을 만났다. 홍군 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생각 밖으로 건강했지만 귀가 어두워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놀라며 반가워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사탕을 선물하고 기념품으로 만들어간 장정 기념 손목시계도 직접 손목에 채워드렸다. 막내아들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어 청바오양(曾保樣) 할아버지를 상대로 인터뷰를 했다.


-언제, 왜 홍군이 가담했습니까?

“22살이었던 1932년이었어. 당시 소작을 짓는 소작농이었지. 그런데 농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주저 없이 참가했어.”

-장정 중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펑더화이(彭德懷)부대에서 기관총사수를 했지. 7kg이나 나가는 기관총을 메고 다녔어. 한번 져봐, 얼마나 무거운지.”

-가장 힘들었고 위험했던 일은 뭐였던가요?

“라오산(老山)이나 대설산 같은 고산을 넘는 것이었지. 가파른데다가 산소가 부족해 여러 번 기절할 뻔했어. 내 부대에서 7~8명만 살아남았지만 나는 상처하나 안 입었지. 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이 돌봐주신 것이지. 그래서 이후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소고기를 안 먹어.”

-장정 후 무엇을 했습니까?

“옌안(延安)에 있다가 일본이 망한 뒤 장제스군과의 해방전쟁에까지 참전하고 당의 배려로 결혼했다가 53년 고향으로 돌아왔어. 장정 전에는 글을 못 읽었는데 장정 중 글을 배워 귀향한 뒤에는 정부의 농업생활조합 같은 데서 창고관리원으로 일했어. 장정 참여했다고 정부가 30년 전 5,000위엔을 지원해줘서 지금의 집을 지었어.”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3남 1녀고 마누라는 5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어. 현재 막내가 나를 모시고 있지.”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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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샹강의 패배

[한국일보] 2008년 06월 19일(목) 오전 02:48

 


水葬 당한 4만 紅軍·권력 쥔 毛… '역사의 아리러니'가 흘러

간신히 살아남은 홍군도 묘얼산이 삼켜 패배 계기 中공산당 毛 전략·전술 채택

中서 파란 눈 사위가 가장 많다는 리강 마을 사람들의 공연에 홍군 물결을 봐


“이후 샹강(湘江)의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장정에 참여했던 홍군장군이 이후 회고록에서 이처럼 썼다. 샹강에서 죽은 수많은 동료들의 시체들을 샹강의 물고기들이 먹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당군의 저지선을 연이어 돌파한 홍군은 1934년 11월말 광시(廣西)장족자치주의 구이린(桂林)에서 가까운 샹강에 도착했다.


이곳은 국민당군의 마지막 저지선인 4차 저지선이 쳐 있었다. 11월30일, 항상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온 린뱌오(林彪)부대가 국민당군을 견제하고 있는 사이 삼인위원회와 마오(毛), 그리고 당지도부가 강을 건넜다. 그리고 12월1일 3만여 명의 홍군이 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4만 이상의 군대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야포 등 중무기들, 발전기, 인쇄기, 의료용 엑스레이 등 ‘움직이는 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구색을 맞춰 갖고 가던 장비들을 강 속에 던져버려야 했다. 12월3일, 홍군의 피로 붉게 물든 샹강 위에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같은 혁명서들이 둥둥 떠다녔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정확치 않다.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주일가량 계속된 전투에서 국민당군의 공격과 비행기 폭격으로 1만5,000명 이상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반면 장정에 비판적인 외부인들은 샹강 전투는 홍군이 지어낸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전투는 없었고 샹강을 건너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농민들이 도주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장제스(張介石)가 마오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지휘부와 주력군이 강을 건너는 것은 내버려둔 뒤 공격을 시작해 나머지 군대를 해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 샹강에서 도주한 농민들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샹강 전투가 없었고 5만 이상의 군을 잃은 것이 탈영과 도주 때문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샹강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삼인위원회, 특히 보구(博古)와 브라운이 준이(遵義)회의에서 권력을 잃고 마오가 권력을 잡게 되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샹강전투의 패배가 없었다면 왜 보구와 브라운이 순순히 권력을 내놓았겠는가? 일설에는 보구가 샹강전투 후 충격을 받아 샹강을 바라보며 권총자살하려는 것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말렸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샹강의 패배가 있었기에 마오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마오식 전략과 전술을 중국공산당이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샹강전투의 패배는 중국혁명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역사가 중국공산당에게 준 시련내지 ‘불행으로 포장된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역사의 간지라고나 할까?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미소


샹강으로 향했다. 길을 돌아 돌아서 오후 네 시쯤 샹강이 있는 싱안(興安)에 도착했다. 우선 찾기로 한 곳은 도강작업을 총지휘한 홍군 지휘본부가 있던 삼관당이라는 이름의 낡은 서당. 사진으로 봤던 낡은 건물은 새롭게 단장했고 이름도 홍군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까운 집에 물어보자 현사무실에서 관리를 하니 거기 가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하필 토요일이라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여기서 이틀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홍군당과 그 뒤로 샹강이 잘 보이는 전망대를 찾아 나섰다. 홍군당 옆의 낡은 집으로 들어가 옥상에 올라가자 새로 단장한 홍군당과 샹강이 보였다.


샹강은 그 동안 변한 것인지 폭이 그리 넓지가 않았다. 비를 맞으며 샹강을 내려다보자 이 비가 강에서 죽어간 무수한 홍군들의 피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저녁식사에서 샹강의 생선요리는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샹강열사기념공원으로 향했다. 비는 거세졌다. 많은 계단 위에 높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단 앞에는 거대한 조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 쪽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조각으로 이곳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큼지막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각도 그랬거니와 정말 인상적인 것은 그 옆에 있는 약간 작은 보조 조각이었다. 전쟁에 대립하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조각은 한 어린이와 여인을 조각한 것이었다.


눈을 감은 그 여인의 엷은 미소(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거의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와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이를 보는 순간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저 같은 평화의 웃음이 가득 찬 세상은 불가능한 것인가. 비가 내리고 밤이 오고 있었지만 그 미소 대문에 밤새도록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라오산의 좌절과 리강의 장이모


샹강을 건넌 홍군은 장정 중 부딪친 여러 산 중 첫 시련의 산을 만났다. 그 지방에서는 늙은 라오산제(老山界)라고 부르는 묘얼산(苗儿山)이었다. 샹강 서북쪽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800m로 높거니와 아주 가팔라서 홍군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샹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홍군들은 한 명밖에 걸을 수 없는 좁은 절벽 길에서 밥도 굶은 채 서서 잠을 자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날 해가 떴지만 많은 말과 병사들이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90도 각도의 절벽에서는 환자들까지도 들것에서 내려 바위를 기어올라가야 했다.


묘얼산으로 향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자 기가 막힌 대나무 밭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대나무 경치는 쓰촨(四川)의 촉해죽림(蜀海竹林)이 유명하다는데 그곳까지 따로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나자 다리가 나타났고 묘얼산공원이라고 써놓은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웬걸, 문이 닫혀 있고 대신 팻말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공사로 공원을 폐쇄한다는 공고였다. 무슨 공사들이 그리 많은지, 가는 곳마다 공사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너무도 많았다. 맥이 빠졌다.


‘중국 최고의 풍경’. 구이린의 리강(漓江)을 부르는 명칭이다. 구이린에서 5시간 유람선을 타고 리강을 감상하면 도착하는 곳이 양슈오(陽朔). 유명한 장이모(張藝謀) 감독이 만든 ‘인상’이라는 수상 뮤지컬로 최근 각광을 받는 아담한 도시이다. 그런데 양슈오는 ‘중국에서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는, 듣기에 따라 명예스러울 수도 있고, 별로 명예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관광지인 만큼 서양의 젊은이들이 많이 여행을 와서는 이 곳 아가씨들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해 현지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아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 됐다고 한다. 그만큼 리강의 세계적인 명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인상’은 12개의 기암 산봉오리와 길이 2km, 넓이 500m의 리강을 무대로 이용하고 마을 사람들을 포함해 배우 1,000명이 등장하는 대형 뮤지컬이다. 대형 야외세트와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뮤지컬이라는 특이성과 스케일도 대단했지만, 뮤지컬은 환상 그 자체였다.


뮤지컬은 빨강, 파랑, 하양, 노랑 등 색깔별로 장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색깔과 소수민족의 복장과 문화를 결합시켜 환상적인 예술을 만들어냈다. 특히 빨강이 주제인 첫 장이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어둠이 내린 검은 강 속에서 수십 명의 소수민족들이 여러 줄을 이루어 좌우로 늘어서서 100m가 넘을 것 같은 붉은 천을 펼쳤다 내렸다 하자 눈앞에는 빨간색의 거대한 파도가 생겨났다. 평생 본적이 없는 충격적인 붉은 색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자니 그 빨간 색의 파도가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남아온 중국의 농민들을 상징하는 붉은 황토의 물결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천 년의 억압을 깨트리기 위해 일어서는 홍군들의 봉기 물결 같은 착각을 느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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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오의 부활

[한국일보] 2008년 06월 23일(월) 오전 03:01

 

 

큰 형 리더십' 毛, 가난의 땅서 '모스크바 보이'를 누르다

"중국에는 중국에 맞는 전략·전술 있다" 소련 업은 20代 보구 꺾고 권좌 복귀

중국 역사 물줄기를 바꾼 준이회의장 하루 2000명 몰려 '홍색관광' 거점화


"삼 일 이상 하늘이 맑은 날이 없고, 세 자 이상 땅이 평평한 곳이 없으며, 은화 세 냥 이상 돈을 가진 사람이 없다." 구이조우(貴州)에 대해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장정 중 홍군은 12개 성을 지나갔다. 그 중 홍군이 가장 오래 머문 지역이 바로 가난의 땅 구이조우이다. 장정 기간의 3분의 1인 거의 넉 달을 구이조우에서 보냈다. 츠수이(赤水)라는 강을 네 번이나 건너는 등 구이조우를 뺑뺑 돌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홍군이 지나간 12개 성 중 중국의 역사를 바꾸는데 가장 기여한 곳을 하나만 고르라면 그곳이 구이조우이다. 구이조우에서 마오(마오쩌둥ㆍ 毛澤東)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중국공산당의,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묘얼산(猫兒山)을 넘은 홍군은 붙잡은 국민당군 옷으로 변장을 하고 구이조우의 주요 도시인 준이(遵義)를 무혈점령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준이회의와 함께 보구(博古)와 브라운이 2선으로 물러나고 마오가 권력에 복귀한다.


준이에서 중국공산당은 구이조우, 윈난(雲南), 쓰촨(四川)지방의 방대한 영토에 새로운 근거지를 설치하며 이를 위해 우선 양쯔강(揚子江ㆍ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동북 쓰촨에 자리잡고 있던 장궈타오(張國燾)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홍군은 츠수이로 진격했지만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북상하는데 실패한다. 이에 마오는 국민당군으로 하여금 홍군의 진군방향을 가름하지 못하도록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츠수이를 네 차례나 건너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중 한 군데가 바로 중국을 대표하는 술인 마오타이(茅台)를 생산하는 동네인 마오타이다. 그리고 적의 예상을 깨고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준이로 돌아가 이를 다시 한 번 점령함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트린 뒤 서남에 있는 윈난성으로 빠져 나갔다.


중국역사를 바꾼 땅 준이


준이는 당시에도 인구 50만(현재 100만)명의 큰 도시였다. 적지 않은 홍군들은 여기서 전깃불과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을 난생 처음보고 놀랐다고 한다. 1935년 1월15일, 독일 혁명가 로자 룸셈부르크가 학살을 당한 날로 홍군은 그를 추모하는 대중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 회의실에 모였다.


정치국 위원만이 아니라 확대회의를 열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보구였다. 그는 샹강(湘江)전투 등 그간의 전투의 패배와 관련해 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구 후에 입을 연 것은 저우언라이(周恩來). 그는 그간의 패배와 관련해 자신을 비롯한 지도부의 실수를 인정하며 진솔한 자기비판을 털어 놓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원티엔(張聞天)이 보구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발한 뒤 브라운의 무능도 질타했다.


이어 마오가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나 계속된 연설에서 마오는 중국고사를 인용해 송곳 같은 풍자로 보구와 브라운을 비판했다. '모든 면에서 우위인 국민당군을 상대하려면 유격전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패배주의로 몰면서 정면대결을 고집한 보구와 브라운의 전략 전술은 군사적 모험주의로서, 결국 소비에트의 근거지를 모두 잃고 샹강에서 대패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중국에는 중국에 맞는 전략과 전술이 있는 법"이라는 말로 발언을 끝냈다. 3일이나 계속된 회의는 결국 3인 군사위원회의 기능을 정지하고 마오를 정치국 상임위 위원으로 선출했다.


회의지에 도착하자 마오가 특유의 흘려쓰는 글씨체로 쓴 '준이회의 회의지' 현판이 걸린 건물이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장정 기념지 중 마오가 직접 현판을 써준 곳은 이 곳 뿐이라고 한다. 하긴 준이에서 기사회생했으니 안 그렇겠는가.


명성답게 회의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하루 평균 입장객이 2,000명에 입장료 수입 만해도 매일 10만위엔(한화 1400만원) 정도이니 이 정도면 '홍색관광'(장정 등 공산당의 역사와 관련된 관광)도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회색 기와를 얹은 아담한 집의 이 층으로 올라가자 회의실이 나타났다. 중국역사를 바꾼 현장이다. 회의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갈색 사각형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의자가 빙 둘러 있었는데 모두 앉으면 별로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이 좁은 방에서 얼마나 뜨거운 설전이 오갔을지 상상이 갔다. 보구와 브라운을 비판하는 마오의 포효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기념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준이회의는 중국혁명의 방향을 크게 바꾼 관건"이라는 마오의 어록. 이어 화롯불을 가운데 피워 놓고 논쟁을 하고 있는 회의 참석자들의 조각과 사진이 나타났다.


참석자들의 양력과 사진을 진열하고 주요 참석자들의 발언 요지도 요璿?놓았다. 단지 모스크바의 신임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과 20대에 중국공산당을 총지휘한 보구의 앳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20대에 고시를 통과해 검사가 되어 범죄를 심판하는 것도 문제가 많은데 그 나이에 세상과 인간의 심리를 얼마나 안다고 혁명을 총지휘하겠는가.


들것의 반란과 스킨쉽의 정치


'붉은 교수'는 왕자샹(王家祥)의 별명이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최고 엘리트 이론간부들을 키우는 모스크바 홍색교수학원을 졸업한 수재로, 이후 소련이 중국 소비에트구역에 전권대표로 파견한 모스크바그룹의 핵심이다.


그는 장정 전 폭탄 파편이 창자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어 고무관으로 몸 속 고름을 계속 밖으로 빼내야 했고, 대나무로 만든 들것에 누운 채 장정 길에 나섰다. 정치국 정위원이었던 장원텐(張聞天) 역시 보구의 모스크바 유학동기인데도 실세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 그도 들것 신세를 져야 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역시 들것을 타고 있었던 마오는 이들에 접근했다. 나이가 한참 많은 마오는 큰 형같이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줬고 중국고사에 능통한 입담으로 이들을 사로잡았다. 예상대로 왕자샹과 장원텐은 준이회의에서 마오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들것의 반란'이었던 셈이다. 결국 마오식의 '스킨십 정치'가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준이회의의 회의장을 보고 있으니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알 고어와 이회창이 선거에서 인간미가 넘치는 부시와 노무현에게 패배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스킨십 정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 양옥선생', 그리고 '독립건물선생'. 당시 홍군들이 지도부를 비아냥거릴 때 사용하던 표현이다. 모스크바 양옥선생은 모스크바 유학파를, 독립가옥선생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브라운을 가르치는 말로 그가 독립건물에 따로 살면서 각종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준이회의는 양옥선생과 독립건물에 대한 마오의 승리, 다시 말해 코민테른과 모스크바파에 대한 토착세력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기초한 도시봉기에 대한 농촌혁명의, 전면적인 시가전에 대한 유연한 게릴라전의, 도시노동자노선에 대한 농민노선의 승리다. 1930년대 중국은 여러 면에서 러시아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권위에 기초해 러시아의 경험과 지시를 절대시했다. 황석영의 <손님>이 생각났다. 황해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의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외래사상 맹신을 비판한 소설이다. 준이회의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장정과 중국혁명을 보면 보편적 법칙이라는 이름아래 서구의 경험을 맹종하는 것 보다 개별국가의 특수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역사나 사회현상의 보편적 측면을 무시하고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북한과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은 결국 사회주의국가들에서도 유례없는 권력 세습이라는 희극을 만들어냈다.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사회과학의 어려운 숙제를 다시 한 번 고민하면서 준이를 떠났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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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한국일보 2008.06.26 02:44:06]

 


일진일퇴 '붉은 강 도하' … 마오, 퇴로를 얻고 딸을 잃고

투청 들어서니 거대한 '츠수이 기념관' 관광객은 없는데 3D 첨단시설 떡하니…

중국 최고의 술빚는 마을 마오타이에선 가난에 찌들은 민초들 일상 '아이러니'


준이(遵義)를 떠나 츠수이(赤水ㆍ적수)의 현장인 투청(土城)으로 가기 위해 시수이(習水)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뜩이나 험한 길을 공사를 하느라고 완전히 파헤쳐 다닐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비까지 왔다. 홍군의 야간행군을 생각하며 어두워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질퍽이는 길을 비를 맞으며 걸고 또 걸었다. 결국 30km를 6시간 반 만에야 주파할 수 있었다.


장정 내내 성한 국도와 지방도로를 본 적이 거의 없다. 낡은 기간시설을 보수하고 건설경기로 경제를 부양시키는 한편 마을 사람들을 건설공사에 동원해 어려운 농촌에 소득을 올려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올림픽을 겨냥한 측면도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호텔에 도착해 여권을 내밀자 생전 처음 받아보는 외국인 거주등록절차를 몰라 공안을 부른다고 했다. 밤늦게 불려 나온 공안은 장정 70주년 때 장정을 재현한 중국 젊은이들을 취재하러 외국인이 한번 왔을 뿐이며, 한국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6시간 반의 강행군, 최초의 한국인


츠수이. 강바닥이 붉은 돌로 되어 있어 마치 붉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구이조우(貴州) 북서부의 강이다. 1935년 1월28일, 홍군은 츠수이가 흐르는 투청 동쪽에 진을 쳤다. 군지휘권을 장악한 만큼 마오(毛)는 첫 전투를 큰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다. 그는 홍군이 자주 사용해온 작전대로 매복해 있다가 추적군을 역으로 공격해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로 오히려 대패를 했다. 비상지도부 회의를 통해 북진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츠수이를 건너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공병대에게 하루 밤사이에 부교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불가능할 것 같은 임무를 완수했고 전멸을 면한 홍군은 츠수이를 건너 도피했다. 숨을 돌린 마오는 홍군에게 다시 츠수이를 건너 준이를 재탈환하라고 지시했다. 적의 의표를 찌른 이 작전은 적중했고 마오는 첫 승리를 거뒀다. 마오는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마오타이(茅台)를 통해 츠수이를 건넜다.


마오타이를 건넌 뒤 선발대로 하여금 적의 눈에 잘 띄게 큰 길로 서북쪽으로 진군하도록 한 뒤 주력군은 여러 군데로 나누어 다시 츠수이를 건너 구이양(貴陽) 쪽으로 남하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서 두 달 이상을 소모했던 츠수이 4도하가 끝났다.


마오의 딸과 깨어진 독


투청은 마오에게 양면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큰 패배를 안겨준 곳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멸을 피하고 후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투청의 츠수이 도하가 없었다면, 현재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시수이에서 투청으로 가면서 문득 마오의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이 떠올랐다.


장정 출발 시 이미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이 곳 투청에서 애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하루 뒤 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라는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육감대로 아이는 얼마 뒤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두 달 뒤 허쯔전은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격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마오가 장칭(江靑)과 결혼을 하면서 이혼과 함께 소련으로 보내졌지만 우울증 등으로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다.


투청에 들어가자 거대한 기념관이 나타났다. 츠수이 도하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등 장정 중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첨단시설이었다. 그러나 가끔 연휴 때나 단체관광이 올 뿐 관람객이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츠수이의 의미가 크지만 도로사정 때문에 아무도 올 수 없는 이 오지에 이 같은 첨단 기념관을 만든 것은 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첨단시설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인 것은 한 깨어진 물독을 끈으로 묶어 놓은 것과 두 푼의 동전이었다. 한 노인이 기증을 한 것인데, 장정 시 홍군이 자기 집에 와 머물다가 실수로 독을 깬 뒤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독 값으로 주고 간 돈이라는 것이다.


노인으로서는 그 동안 보아온 국민당군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태도라 감격스러워 버리지 않고 있다가 기념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기증을 해왔다고 한다. 중국내전에서 홍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증언하는 역사적 증거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마오타이는 어떻게 국주가 됐나


마오타이는 투청과 준이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츠수이가 흐르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 도시는 예부터 '맛있는 술의 강'이라는 이름의 좋은 강물로 독한 백주를 만들어 츠수이를 통해 쓰촨(四川)에서 들어오는 나룻배에 실어 보내던 곳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홍군이 마오타이에 들어와 행군할 때 아직 술을 모르는 10대의 어린 홍군이 가게의 큰 항아리에서 마오타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마침 오랫동안 걸은 발이 피곤하고 열이 나 이 항아리 속의 액체를 발에 부어 씻었다고 한다. 그러자 독주의 알코올이 날아가며 시원해지고 소독효과까지 있어 여러 병사들이 다리 등의 소독에 사용했다고 한다. 뒤늦게 현장에 온 나이가 든 홍군들이 술임을 알고 마셨더니 엄청나게 독한 데다 맛도 기가 막혔다. 다들 마신 뒤 남은 것은 모두 싸 갖고 떠나 동네의 술독을 텅 비고 말았다.


물론 마오도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어차피 양조장 주인들은 다 도망간 뒤인데다 술도 자신들의 것이 아니어서 홍군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이후 혁명에서 성공한 뒤 베이징에 돌아온 마오는 그 때 마셨던 마오타이의 백주를 그리워했다. 또 그때 마오타이의 주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는 뜻에서 외국 정상과의 만찬 등 국가적인 행사에 마오타이를 쓰도록 했다. 이에 따라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술 '국주(國酒) 마오타이'가 탄생한 것이다. 현재 마오타이는 거대한 국영기업이다.


마을 입구에도 '중국 최고의 술 빚는 마을'이라는 운치 있는 아치형 문이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서자 냄새 때문에 코를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된장 비슷한 냄새였는데 술 빚는 마을답게 전체가 누룩 냄새였다. 그 향기로운 마오타이를 만드는 냄새가 이처럼 고약하다니 아이러니컬했다.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중국최고의 술을 만드는 술도시 답게 아주 고급 호텔이 있었지만 방이 없었다. 마오타이 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인데 마오타이 대리점 등 관련 고객들로 일 년 내내 만원이라고 한다. 마오타이가 운영하는 또 다른 호텔을 소개 받았지만 다시 퇴짜를 맞았다. 마을에는 잘만한 숙소가 없었다. 결국 위성도시로 가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마오타이에는 마오타이가 없다


저녁 겸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마오타이까지 와서 마오타이 맛을 보지 않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오타이를 파는 곳이 없었다. 즉 마오타이에는 마오타이가 없었다. 대신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독을 진열해 놓은 술집들이 즐비했다. 잔술을 파는 곳들이다.


마오타이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명성에 비해 너무도 가난한 도시였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 가난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마오타이회사와 마오타이 시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마오타이는 돈도 많이 벌고 직원들 대접도 잘 해주면서도 일반주민과 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오타이가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불만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 <두 도시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마오타이야 말로 그 이야기의 전형이다. 흥정거리는 '마오타이 왕국'과 그 밖의 가난하기 짝이 없는 '비(非)마오타이의 마오타이'라는 두 도시이다. 정작 홍군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것은 마오타이 회사가 아니라 마오타이시의 민초들이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마오타이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곳을 떠났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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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진사강을 건너라...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자우핑두로 가는 길의 필자.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이 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면서 필자는 고난의 행진을 하던 홍군 지휘부와 남미대륙을 질주하던 체 게바라를 떠올리며 벅찬 감회에 젖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진사강. 홍군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불과 일곱 척의 나룻배로 이 강을 건넜다.


진사강(金沙江)은 쓰촨(四川)성과 윈난(雲南)성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윈난에서 쓰촨으로 북상을 하기 위해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랜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이 강을 건너는 유명한 나루터가 자오핑두(絞平渡)이다.


“쫑위 따올러(결국 도착했구나)”. 1935년 4월30일, 진사강이 내려다보이는 산 꼭대기에서 잘 생긴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 지휘관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밤 사이에 완전무장을 한 부하들을 이끌고 무려 80km를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지도부를 경호하는 최정예부대인 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으로 활약하던 양림이라는 한인이었다.


마오는 정예군으로 하여금 윈난의 성도인 쿤밍(昆明)을 공격하는 것처럼 작전을 전개하여 국민당군을 쿤밍 방어에 주력토록 하면서 한편으로 주력군은 진사강을 건너 쓰촨으로 북상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진사강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양림은 80km를 쉬지않고 달려온 피로도 잊은 채 망원경으로 산 아래의 자오핑두를 살펴보았다.


산 아래쪽 나루터는 텅 비어 있는 반면 여러 척의 배들이 강 건너편인 쓰촨 쪽에 정박해 있었다. 홍군의 도강을 우려한 국민당군이 이미 배를 강 건너로 도피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나루터 아래쪽 진흙 밭에 묻혀있는 나무조각을 발견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작고 부서졌지만 배가 틀림없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밑에 구멍이 나 탈 수가 없는 폐선이었다. 구멍 난 곳을 옷 등으로 메워 물이 새어 들지 않게 하고 마을을 뒤져 사공을 찾아낸 뒤 “우리는 홍군이다.


악덕지주를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10년 내에 다시 돌아와 농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양림은 이렇게 설득한 사공과 임시로 수리한 폐선을 이용해 건너편에 정박 중인 나룻배를 탈취하기 위한 야간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사공은 양림과 함께 권총 등으로 무장한 특공대 9명을 강 건너편에 내려줬고 양림은 적을 기습공격해 제압한 뒤 나룻배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7척의 나룻배와 36명의 사공들을 동원한 도강작전을 수행해 9일 만에 모두 진사강을 건넜다. 사공들에게는 은화가 주어졌다. 이후 국민당군이 도착했을 때는 나룻배들은 이미 강을 떠내려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자오핑두로 가려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산길을 지나가야 한다. 아무도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아 하루 종일 수소문하고 다녀서야 간신히 차를 구할 수 있었다. 가보니 그 이유를 알만했다.


험준한 산길도 그렇지만 두께가 20cm는 됨직한 먼지 위를 달려가야 했다. 지구의 먼지란 먼지는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이 길을 예술이라고 할만한 솜씨로 세 시간 정도 운전을 하자 반대편에 이르렀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5분쯤 내려가자 트럭이 30~40대쯤 줄을 서 있었다. 아래서 어제 밤에 트럭 한대가 고장 나는 바람에 모든 차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자 “잘 모르지만 오늘 중으로는 힘들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떻게 찾아온 자오핑두인데 여기서 다시 좌절한단 말인가.


옆의 농가에 오토바이가 보였다. 농가의 젊은 주인에게 오토바이로 자오핑두까지 데려다 달라고 흥정을 했다. 가는 동안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정말 살인적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내려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빠르게 흐르는 진사강과 그 위에 세워진 초록색 다리가 나타났다. 나 역시 양림과 같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쫑위 따올러.”


다리를 건너자 정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언덕 위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사강 도강을 기념하는 동상으로, 그 때 그 사공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들의 손에 높이 쳐들린 건 홍군들을 태워준 배의 노였다. 매번 느낀 것이지만 장정기념동상 등은 모두 당시의 상황을 조형적으로 잘 상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모습이 나를 놀라게 했다. 동상 바로 옆에 중국에서 퇴폐업소의 상징인 가라오케집 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진입도로조차 없는 이 작은 마을에까지 가라오케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장정 기념동상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위치에 가라오케집 허가를 내준 것인지.


물론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효과는 엄청날 뿐더러 단지 가라오케집만으로 개혁개방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오케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가 가져다 준 대표적 상징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장정 기념동상과 그 옆의 가라오케 간판의 대비는 개혁개방 시대의 장정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씁쓸함을 금방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장면이 눈에 띄었다. 때묻지 않은 맑은 표정의 어린 여자아이 3명이 구리로 만든 기념동상의 설명판 위에 아예 소꿉살림을 차려 놓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기념동상과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 오지에 누가 찾아오겠는가.


아무도 찾지 않는 동상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모했고 이를 나무라거나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원래 홍군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공들이 꿈꾸었을 세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홍군도, 사공들도 자신들의 기념물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것에 오히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라면 죽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취재도 마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익숙해져서인지 마음의 여유가 생겨 왼쪽의 풍광(오른 쪽은 산비탈이었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약에라도 취한 듯 온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동차와 달리 360도로 탁 티인 시야, 얼굴을 스치는 바람,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토바이를 타는지 이해가 됐다.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옆으로 펼쳐진 장군바위와 기암절벽을 보고 있자 그 아름다움에,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장정을 재촉했을 홍군들의 열정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문득 체 게바라가 대학시절 친구와 한 대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횡단했던 ‘모토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갑자기 내 자신이 그 영화의 장면처럼 게바라가 되어 남미대륙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이번엔 73년 전의 양림이 되어 장군바위를 바라보며 행군을 하는 착각에 빠졌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 왔다가 이렇게 장정에까지 참여해 죽음의 행진을 해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독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번엔 마오가, 그 다음엔 야전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순간은 게바라, 순간은 양림, 순간은 마오, 또 다음 순간은 펑더화이, 스스로의 변신이 빠르게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것은 엑스타시 그 자체였다. 먹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마약도 이보다 더 황홀하겠는가.


아, 이는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니 내 생애 느껴 보았던 어떠한 절정보다도 강렬한 절정의 순간이었다. 아직 할 일이 많고 아내와 딸아이도 걱정이지만 만약 이대로 죽어야 한다면 이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정말 주저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음이 나왔다.

후원: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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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리하이의 피의 맹세

 

리하이의 장정 기념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석상. 홍군 선봉대의 지휘관 류보청(가운데)과 리족 족장이 피의 술잔을 나누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았다.


 

 

 

리하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리족 여인들. 홍군은 리족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935년 5월. 진사(金紗)강을 건넌 홍군은 쓰촨(四川)성의 수도인 청두(成都)방향으로 북상했다. 좁고 꼬불꼬불한 전형적인 쓰촨의 오솔길이어서 이백(李白)이 일찍이 “쓰촨의 길을 걷는 것은 푸른 하늘을 기어 올라가기보다 어렵다”고 말한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행군의 어려움이상으로 홍군을 괴롭힌 것은 리(蠡)족 지역이 가까워지면서 생겨나는 불안감이었다. 특히 소수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공격을 받더라도 반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큰 부담이었다.


쓰촨출신으로 선두를 맡은 류보청(劉佰承) 앞에 옷을 홀딱 벗은 일개 중대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리족의 습격으로 옷과 소품을 다 털렸다는 것이었다. 얼마 가지않아 반쯤 벌거벗은 일련의 리족이 몽둥이와 낫 등을 들고 길을 막았다.


통행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돈을 주면서 통역에게 “홍군은 국민당 한족 군벌과 싸우는 농민들의 군대”라고 설득을 했다. 그러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검은 천을 두른 근엄한 얼굴의 두목 같은 사람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류보청이 그에게 홍군을 설명하자 그는 도와주겠다며 의형제 맺기를 제안했다. 류보청이 흔쾌히 응하자 그는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붉은 수탉을 한 마리 잡아 그 피를 두 사발에 나눈 뒤 함께 마시자고 했다. 그곳이 리하이(蠡海)라는 호숫가였기에 이를 ‘리하이의 피의 맹세’라고 부른다. 류보청은 형제애의 표시로 자신이 차고 있던 권총을 풀어 리족 부족장에게 선물했고 홍군은 그의 호위 속에 무사히 리족 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한족과 소수민족의 평화로운 공존


리하이로 향했다. 가까워지자 나폴레옹식의 모자를 쓴 여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리족의 복장이었다. 기념관에 도착하자 여러 차들이 와 있고 사람들도 많아 놀랐다. 대부분의 장정 기념관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어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관람이 아니라 기념관 자체를 위한 기념관들이 많았다. 혹 있는 관람객도 대부분 직장 등에서 단체로 관람 온 ‘행사용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리하이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선 주말이라 가족단위 여행이 가능한 날이었고 리하이가 대도시인 청두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찾아오기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기념관 문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앞에는 설산이 보이고 100m미터도 안 되는 곳에는 리하이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장정 기념관 관람이외에도 자연환경이 가족들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곳이다.

기념관 마당에는 검은 두건을 쓴 리족 족장이 류보청과 피의 술잔을 나누는 모습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그 둘이 앉아 술잔을 나눈 돌을 현장 보존하고 있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장정 등 글들을 공식적인 중국어인 간자체 외에 리족의 전통언어로도 써 놓은 것이었다.


그만큼 리족을 존중한다는 증거였다. 기념관에는 류보청이 리족 부족장에서 선물한 권총, 홍군의 깃발을 들고 있는 리족 부족장의 사진 등 소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또 이를 관람하며 메모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집단과 개인 자율성의 딜레마


기념관을 나와 오른쪽의 리하이 호수로 향했다. 여러 가족들이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산책을 하거나 자리를 깔아 놓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한쪽 물가에는 까맣게 탄 리족 어린이들이 미끼도 없는 원시적인 낚시대로 물에 들어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 속에 난 그 옆의 한 나무에는 아마도 청두에서 놀러 온 것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의 같은 또래 한족 어린이들이 나무에 매달려 낚시장면을 구경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낚시하는 리족 어린이들의 얼굴이 73년 전 리족 족장의 얼굴로, 그리고 나무에 매달린 한족 어린이들의 얼굴이 한족 홍군지휘관 류보청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어린이집단이 바로 옆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은 리족과 한족 홍군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했던 리하이 협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차를 타고 리하이를 떠나자 여러 생각들이 엉키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리하이의 맹세는 홍군의 소수민족 정책과 소수민족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당시 리족은 노예사회였으며 리족 부족장은 노예주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홍군지휘관이 무사통과를 위해 노예주와 의형제를 맺으며 노예사회라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눈을 감은 것이다. 과연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소수민족의 자율성, 소수민족의 문화의 존중이라는 이름하에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그른 것이라는 논리 하에 이들의 전통에 개입해 노예제를 혁파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집단에 대해 개인의 자율성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집단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개입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자율성을 지켜주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이 짓밟히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개인의 자율성과 집단의 자율성간의 딜레마이다.


상반된 리족과 티베트식 해결방식


생각이 이같이 발전하자 장정도중 터져 나온 티베트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이에 대한 나의 지식은

▲독립국가 티베트를 중국의 홍군이 1950년대에 침공해 점령했으므로 독립을 허용하거나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티베트는 이미 청나라 때부터 중국에 합병됐고 다만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의해 중국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이 침공해 점령했던 것을 홍군이 다시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두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이다.


특히 후자에 대해선 홍군 점령전의 티베트는 사원이 다수 농민과 민중을 지배하는 봉건사회였다는 점에서 홍군은 봉건적 압제로부터 티베트민중을 해방시킨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더 알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에 대한 역사성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하기에는 지식이 모자란다. 다만 티베트의 더 많은 자율성에 대한 요구는 중국정부가 당연히 귀 기울여야 하는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문제와는 별개로 이 같은 요구를 중국정부가 물리력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잘못됐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국이 티베트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물리적 대응 방식이 아니더라도 시간은 중국편이다.


많은 티베트의 젊은이들은 이미 티베트의 언어와 문화를 잊은 지 오래이며 이는 앞으로도 가속화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최대무기는 많은 한족들의 티베트이주와 경제력 장악이다. 이 점에서 물리적 대응은 중국을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주목할 것은 홍군이 리족과 티베트에 취한 정책간의 대비이다. 홍군은 리족에 대해서 리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자율성을 지켜준다는 이름아래 노예제라는 개인 자율성의 파괴를 외면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경우 봉건제로부터 개인의 자율성을 해방시킨다는 이름아래 티베트라는 ‘소수민족’내지 집단의 자율성을 침해했다. 즉 정반대의 정책을 취한 것이다. 리족식 해법도 문제가 있지만 티베트식 해법역시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아무리 봉건적 질서가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티베트의 다수민중이 바라지 않는데 외부세력이 “그것은 틀린 것이니 내가 대신 해결해 줄 게” 하고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서구제국주의가 제3세계의 식민화를 “낡은 비인간적 질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문명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 것이 잘못됐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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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루딩교를 장악하라....

 

70여년 전 홍군이 앙상하게 남은 쇠사슬에 매달려 목숨을 내걸고 도강을 감행한 루딩교를 이제는 관광객과 주민들이 한가하게 건너가고 있다. 그 때와 달리 나무 상판이 깔려 있지만 그래도 사이사이 발 밑으로 보이는 다두강의 급류는 너무나 무서웠다.

 

 

루딩교를 건너자마자 현지 공안으로부터 검문을 당하는 일행. 인근 기념품 가게에서 빌린 홍군 모자와 복장을 착용한 키 큰 이가 필자다.

 


청나라 강희대제 39년인 1700년. 티베트와 쓰촨(四川)성의 성도인 청두(成都)의 중간에 있는 캉딩(康定)지역에서 티베트계인 장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너무 먼데다가 제대로 된 도로도 없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너무나 애를 먹었다.


특히 청두평원과 티베트지역을 가로지르는 다두강(大渡河)은 큰 장애였다. 반란을 진압한 뒤 강희대제는 진압군을 용이하게 티베트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이 강에 다리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장정의 클라이막스 중 하나를 이루는 루딩(瀘定)교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청나라는 이 다리를 짓기 위해 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 기술자들을 거액을 주고 초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리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딩교는 길이 101m에 너비가 3m를 넘는 웅장한 현수교로 13줄의 굵은 쇠사슬이 지탱하고 있다. 그 중 9줄은 다리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데 줄과 줄 사이에 나무판자를 깔아 간격을 메웠다.


문제는 13개의 굵은 쇠사슬이 21톤이나 나가는 1만2,164개의 체인으로 만들어져 있고 각각의 기둥이 20톤에 달해 공사에 막대한 쇠가 필요하다는 것. 청나라는 필요한 쇠를 구하지 못해 고생을 하다가 97일 만에 한 산속에서 철광을 찾아냈다고 한다.


1705년 다리가 완공되자 강희대제는 이 다리가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라는 뜻에서 ‘루딩’ 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실제 다리가 이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차와 소금, 비단 등이 티베트의 라싸로 들어가고 티베트의 모피와 약재가 청두로 들어오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은 확실하다.


홍군은 다두강를 건너 북상을 하기 위해 루딩교를 장악하기로 했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루딩교가 이번에는 홍군이라는 새로운 반란군의 구세주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역사는 때로는 그 주역들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한다.


쇠사슬에 매달려 불길을 뚫고


루딩교 탈취명령을 받은 두 군대는 다두강를 가운데에 두고 행군을 했다. 길이 좁은데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로 인해 길이 미끄러워 한 발만 헛디뎌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다시 행군을 떠나려는 순간 말을 탄 전령이 나타나 명령문을 전했다.


“29일까지 루딩교를 탈취하라.” 29일이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갈 길은 240리(약 100km)나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진군한 최대속력은 하루에 160리 였는데 이보다 더 빨라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밥을 해먹을 수 없어 생쌀을 씹고 물을 마시며 행군을 계속했다.


해가 진 뒤 한 마을에서 대나무 울타리를 통째로 사 그것으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 행군을 했다. 밤을 샌 야간행군으로 1935년 5월29일 아침 6시 특공대는 루딩교에 도착했다.

다리의 서쪽 편을 장악하고 건너편을 보니 모래주머니로 만든 참호에 국민당군의 총구가 보였다. 그러나 기막힌 것은 다리에 달랑 쇠사슬만 남아있고 그 위에 깔려있던 널빤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국민당군이 걷어갔다는 것이었다. 저 다리를 어찌 건널 것인가? 나팔소리와 함께 특공대가 쇠사슬에 매달려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국민당군의 총탄이 쏟아졌다. 한 병사가 강물로 떨어졌다.


총알보다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리를 내며 발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더 무서웠다. 건너편이 가까워지자 앞에서 갑자기 불이 솟구쳤다. 국민당군이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나 한 대원이 앞장서 불길을 뚫고 뛰어 들었고 나머지 군대로 그를 따랐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때 돌연 적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진군해 온 홍군이 나타나 도착, 총격을 가하자 포위당한 상황을 깨닫고 도주한 것이다. 홍군은 널빤지를 모아 다시 다리에 깔았다. 루딩교를 탈취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루딩교에서 실제 전투가 있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36년 에드거 스노와 가진 인터뷰에서 처음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루딩 이야기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당시 루딩교에는 제대로 된 국민당군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문짝을 빌려갔던 것을 기억했고, 어떤 이는 홍군이 다리에 덮을 나무를 구하고 다녀 만일을 위해 준비해준 관을 내주었다는 증언이 있음은 밝히고 있다.

이는 나무를 놓지 않고는 걸어서 다리를 건너갈 수 없었던 다급한 상황을 의미한다. 또 루딩교의 전투에 과장이 있다 해도 장제스(張介石)가 자연이 홍군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다리의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공안에게 추방당하다


루딩교에 도착했다. 루딩은 아담하면서도 그 동안 보아온 시골의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였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 위치를 확인한 뒤 근처의 한 카페에 내렸다.

어제 한국에서 비행기로 청두로 날아온 한국일보 장재구 회장과 차마고도의 비디오작가 박종우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오지, 그것도 역사적인 루딩에서의 만남은 너무도 반가웠다.


장정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을 들라면 당연 루딩교이다. 앞으로 다리 진입소로 쓰이는 중국전통 건축물을 배경으로 허공에 매달린 쇠사슬 다리가 시각적으로 그 어느 장정의 유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장정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 비디오 등에서도 수백 번 본 적이 있는 다리이다. 그렇게 너무도 익숙한 루딩교가 나타났다. 루딩교가 장정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장정을 재연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입장료를 받는 진입소로 들어가자 기념품가게, 홍군 복장을 빌려 주는 가게 등으로 복잡했다. 박 감독이 특집에 쓸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홍군복을 한 벌 빌려 내게 입어보라고 했다. 바지는 그렇고 해서 상의를 입고 홍군모자를 썼다. 영락없는 ‘홍군 손호철’이다.


루딩교로 나가자 우선 다두강의 물소리가 나를 긴장시켰다. 여러 번 책으로 읽은 것이지만 역시 다두강의 급류는 무서웠다. 쇠사슬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다리답게 무척이나 흔들렸다. 그리고 바닥도 쇠사슬에 나무 조각들을 얹어 놓은 것인 만큼 나무 조각 사이로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그 위를 걸어 건너면서 자꾸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나무 조각도 없는 다리를 쇠사슬에 매달려 건넜다는 홍군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그런데 진입소 밖으로 나오자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외국인들로 보이는 일행이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다니자 누군가 신고를 한 것 같았다. 여권을 보여주자 이곳에 온 여행목적을 묻길래 “장정 취재 중”이라고 답하며 준비한 서류까지 보여줬다.


그러자 공안은 “이곳은 최근의 티베트사태로 인해 위험지역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며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벗어나 청두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간즈(甘孜)에서 시위가 발생한 사실은 알고 있었고 루딩이 행정구역상으로 간즈 장족 자치구에 속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시위발생지역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공안은 아무래도 우리가 청두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권을 복사한 뒤 돌려주고도 자신들이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며 4륜 구동차로 앞서가며 따라오라고 했다.


결국 이들은 루딩 행정구 끝까지 가서야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러고도 미덥지 않았는지 그곳 차량 검문소를 지키는 경찰에게 우리 차의 번호를 적어두도록 지시한 뒤 한참을 미행하다가 돌아갔다. 루딩에서의 짧은 행복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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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짚ㅅㅣㄴ 신고 설산을 넘다

 

저 멀리 흰 눈 덮인 장대한 산이 대장정 기간 홍군이 최악의 고난을 겪으며 행군한 자진산, 일명 다쉐산이다. 정면으로 산이 보이는 위치에 당시 나무 지팡이를 짚어가며 고통스럽게 산을 넘어가던 홍군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자진산( 金山)을 넘겠다고? 포기해. 그 산은 새들도 못 넘어. 선녀들만 넘을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선녀산이라고 불러. 산꼭대기에서 입을 열면 산신령이 노해서 숨이 막혀 죽게 하고 사람들이 이야기만 해도 산신령이 노해서 산사태를 일으키는 곳이야". 자진산 입구 마을에 있는 노인들은 대설산(大雪山)으로도 불리는 자진산을 넘겠다는 홍군의 계획을 이렇게 만류했다.


루딩(瀘定)교를 건넌 홍군은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대설산맥의 설산을 넘어 북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이동해 티베트 경계를 따라 북상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대설산 동쪽의 북상로를 통해 쑹판(松潘) 쪽으로 진격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안은 인구가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식량조달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고, 세 번째 안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힘들더라도 설산을 넘기로 했다.


"설산을 넘을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두꺼운 옷도, 몸을 덥힐 술도 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마을 주민들의 귀띔으로 구할 수 있던 것이 고추와 생강이었다.


몸에 열이 나도록 이들을 넣고 끓은 물을 한 대접 먹이는 것, 나무를 깎아 지팡이를 만들도록 지시하는 것, 그리고 설맹을 방지하기 위해 눈을 감쌀 헝겊조각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5,000m의 설산을 넘기 위해 지도부가 병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장정 최악의 고난, 대설산 행군


산을 오르는데 꼬박 6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일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느 산과 같은 녹지대가 나타났다. 사기가 높아진 홍군은 노래를 합창했다.

"야, 눈이다." 두 시간쯤 걸어 산허리에 이르렀을 때 선발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방출신으로 눈을 처음 본 병사들은 넋을 잃었고 어린아이들처럼 기뻐했다. 아직 이들은 이 눈이 자기들에게 가져다 줄 시련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자 갑자기 안개 속이었다. 주위가 흐릿해지더니 봉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초여름인 6월이었는데도 찬 기운이 엄습하면서 광풍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리며 우박이 쏟아졌다. 대오는 순식간에 병사들의 고함과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됐다. 시련의 시작이었다. 우박이 그치고 태양이 다시 보였지만 추위는 더욱 심해졌다.


신발이 없어 짚신을 신은 일부 병사들은 짚신사이로 들어오는 눈 때문에 발이 얼기 시작했다. 숨조차 쉬기가 어려워졌다. 고산증 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쓰러졌다.


숱한 전투를 앞장 서 지휘한 린뱌오(林彪)도 여러 차례 까무러쳐 호위병들에게 실려 산을 넘어야 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생사고락을 해온 경호원도 쓰러져 직접 마오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넘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산을 내려왔을 때 심하게 기침을 했다(곧 그는 결핵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게 된다).


여자들은 대설산을 넘은 뒤 모두 달거리가 끊겼다. 많은 병사들은 대설산이 장정 중 그 어느 전투나 고난보다 힘든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오후 3시, 선발대가 정상에 도달한데 힘을 얻은 병사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뒤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쉬웠을 뿐 아니라 즐거웠다.


한 병사가 눈 위에 헝겊 조각을 놓고 그 위에 앉아 썰매를 타기 시작했고 모두를 그를 따라 환호의 소리를 지르며 썰매를 타고 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자진산의 선녀들은 이 같은 광경을 조용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으리라.


장족 가이드와 홍군


야안(雅安)을 떠나 바오싱(宝興)으로 향했다. 바오싱은 대설산을 넘으려면 지나야 하는 작은 마을이다. 그나마 대설산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로 여기에서 점심도 먹고 정보도 수집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해 마을에 들어서 작은 다리를 건너가자 오른 쪽에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에는 홍군과 관련된 두 개의 작은 조각이 보였다. 하나는 빨래하는 아낙을 홍군이 옆에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며 도와주는 조각이었다.


안쪽에 있는 또 다른 조각은 홍군복장을 한 여자가 칠판에 홍군의 이야기를 써 놓고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에는 나무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는데 머리가 허연 중년 남자가 그 의자에 앉아 조각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마치 70년 전으로 돌아가 여자 홍군이 바오싱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홍군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앉아 그러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로 더 들어가자 커다란 붉은 기념탑이 나타났고 뒤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은 점심시간이라 닫혀 있었다. 기념탑 조각은 머리에 두건을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다른 두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자진산을 안내한 이 동네의 장족 안내자가 홍군에게 자진산을 넘는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이 지역은 장족지역이고 홍군이 자진산을 넘도록 도와준 것은 자진산을 잘 아고 있는 장족 안내자였다.


저 안내자는 최근의 티베트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해졌다. 기념탑에는 또 말을 끌고 눈에 발이 빠지면서 설산을 오르는 홍군의 모습이 부조형식으로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었다.


식사를 하고 대설산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길이 엉망이었다. 강을 막아서 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댐을 앞에 두고 두 길이 나타났다. 왼쪽 길이 원래 우리가 가려던 길인데, 오른 쪽으로는 '개선된 길'이라고 씌어 있었다.


물어볼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왼쪽 길로 들어섰다. 댐 공사 현장이 아래로 보이는 길을 따라 계속 산길을 올라가자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 길이 대설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맞는데 댐 공사와 자진산 공원 공사로 길이 폐쇄됐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다시 좌절인가?


저 대설산을 바라보며


할 수 없이 갈림길로 돌아와 오른쪽 길로 다시 올라갔다. 강을 가운데에 두고 아까 갔던 길과는 반대쪽 길이다. 강을 가운데에 놓고 원래의 길은 강 왼쪽, 이 길은 오른 쪽으로 나 있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사트럭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차 경적을 울려대고 내려서 한참 항의를 한 뒤에야 이들이 길을 비켜주어 지나갈 수 있었다. 엉망인 비포장 산길을 한참을 달려갔다.


그러기를 얼마일까. 작은 마을이 오른 쪽 언덕 위에 나타났다. 설산이 보이고 그 앞에 작은 라마사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진에서 보아온 대설산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길가에 작은 장족 가게가 있어 기념탑 가는 길을 물었다. "차는 들어가지 못하니 요 밑에서 걸어서 왼쪽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기념탑 주변 길 바닥에 부서진 하얀 조각들이 즐비했다. 자세히 보니 홍군의 모습이었다. 최근 낡은 기념탑을 부수고 새 것을 지으면서 버려진 옛 기념탑의 잔해였다.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10m 정도의 기념탑 뒤로 댐을 만들고 있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 푸른 산이 보이고, 다시 그 산 뒤로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자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난의 현장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기념탑에는 '중국노동자농민 홍군 제1방면군'이라는 큰 글씨와 '자진산 넘음 기념'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대설산을 향하고 있는 쪽 탑 하단에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어렵게 자진산을 넘는 홍군들을, 그 반대쪽에는 자진산을 넘은 뒤 환호하는 홍군을 조각해 놓았다.

원래 계획대로 자진산을 넘어가 보지는 못하더라고 더 올라가서 자진산의 눈이라도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강을 건너 자진산 쪽으로 가는 길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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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잃어버린 930km

 

홍군의 행군경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다쉐산(大雪山)을 바라보면서 올라가는 험로.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인 탓에 얼마 못 가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 이 험로를 다시 되돌아 나오는 좌절을 겪었지만 곧 이어 발생한 인근 대지진을 생각하면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지들! 동지들!" 다쉐산(大雪山)을 넘자 제4방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들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곳이 샤오진(小金)이다. 공안의 통제를 피해 두장옌(都江堰)으로 돌아 원촨(汶川)바로 못 미쳐 쓰꾸냥산(四姑娘山)으로 빠졌다.


지붕이 평평한 장족 특유의 돌집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산을 한참 올라가자 '해발 4532m'라는 팻말이 보였다. 평생 올라가 본 최고의 고도가 페루 티티카카 호수의 4200m였으니 개인적으로는 기록 갱신이다. 조금 걷자 숨이 찼다.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앞에 검문소가 나타났다.


이곳부터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것이다. 4532m 고지를 넘어 근 열 시간을 달려 왔는데 여기서 쫓겨난다 말인가? (그러나 곧 이 지역에서 지진이 난 것을 생각하면 공안덕분에 목숨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공안은 500m 앞 언덕에 작은 기념탑이 있으니 거기서 사진 찍고 오는 것은 허락해주겠다고 했다. 붉은 벽돌 위에 하얀 기둥을 세운 소박한 기념탑이 나타났다. '홍군 장정 제1ㆍ4방면군 해후 기념비'라고 씌어 있었다.


아래쪽 붉은 벽돌 벽의 옆면에는 제1방면군, 제4방면군이라고 쓴 깃발아래 두 군의 병사들이 서로 만나 얼싸안고 있는 장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를 보니 마오쩌둥(毛澤東)의 제1방면군이 다쉐산을 넘어 제4방면군을 만나 느꼈을 감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여러 책을 통해 이 같은 해후의 행복이 아주 짧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 역시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긴 고통의 순간이 찾아왔다.


민족화해의 부부


해발 4532m의 빙판길을 다시 밤에 되돌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자기로 했다. 샤오진현의 르륭(日隆)이라는 마을인데 언덕위쪽으로 '정부여관'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르륭의 진(鎭ㆍ우리나라 리에 해당하는 작은 행정단위) 정부건물의 1층에 있는, 진 정부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바로 옆에는 경찰서가 있고 건물입구에 '인민정부', '인민무장부', '공산당' 간판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이 만에 하나 불상사가 있어도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그곳에 묵기로 했다.


사람 좋게 생긴 중년부부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부에 임대료를 내고 여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나와 동갑인 남편은 한족, 부인은 장족이라고 한다. 최근의 티베트사태 때문에 유심히 관찰했는데 평생 본 부부 중 가장 금실이 좋았다.


너무도 선한 인상의 두 부부, 그리고 평생 싸움 한 번 안 했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부를 보고 있자니 이들이야말로 민족화해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족과 장족이 이들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다면 티베트사태와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두 번째 좌절


두 차례의 좌절로 생각해둔 비상대책을 실행에 옮겼다. 쓰촨(四川) 북부지역과 간쑤(甘肅)성은 출입이 금지된 장족 지역이니 회족 자치주인 링샤(宁夏)의 수도 인촨(銀川)으로 날아가 거기서 차를 빌려 거꾸로 동쪽으로 올 수 있는 곳까지 온 뒤 그곳부터 다시 서쪽으로 다시 장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쑹판(松潘)초지 등 약 930km 구간을 빼먹게 되는데 그 구간은 외국인 출입금지가 풀린 뒤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하고 나자 허탈해졌다. 눈을 감고 가지 못하게 된, 즉 잃어버린 930km를 복기해보았다.


샤오진에 도착한 마오는 1935년 6월25일 제4방면군의 사령관 장궈타오(張國燾)와 만났다. 마오는 북으로 진군해 간쑤와 싼시(陝西)성에 근거지를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쓰촨에 기반을 갖고 있던 장은 쓰촨을 벗어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의견을 조율하느라 홍군은 근 두 달을 이 지역에서 허비했다. 결국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갖고 있던 군사위원회 총정치위원 자리를 장꿔타오에게 내주고야 북상 합의를 얻어냈다.


마오의 군대는 간쑤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쑹판초지를 통과해야 했다. 끝없는 풀밭과 아름다운 들꽃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숨어 있었고 그 물들이 모여 죽음의 늪을 이루고 있었다.

멀쩡한 땅이 갑자기 끝없는 심연으로 변해 늪 속으로 말과 홍군을 삼켜 버렸다. 게다가 이곳 고원지대는 8월 한 여름에도 우박이 쏟아지고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었다. 고인 물들은 녹슨 것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었는데 마시면 배탈이 나고 이질에 걸렸다.


제대로 잠 잘만한 곳도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굶어죽거나 늪에 빠져 죽었다. 먹을 것이 없는 병사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씹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일주일 걸려 초지를 통과했을 때 살아남은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장족에 진 빚


"내가 장정 중 외국에 진 빚은 장족에게 진 빚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빼앗아 온 것들을 돌려줄 것입니다." 마오는 1936년 에드거 스노와의 면담에서 이처럼 말했다. 마오 스스로 홍군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던 '8개 주의사항'(농민의 것을 훔치지 말라 등)을 장족에게는 어겼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왜 그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까? 두 가지 이유이다. 쓰촨 북쪽의 장족 지역은 유목지로서 인구가 적고 식량이 부족했다. 그곳에 수많은 홍군이 들이닥쳤으니 식량부족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는 약 22만명의 장족이 살고 있었고 식량은 자급자족을 하고 조금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10만 대군이 들어온 것이다. 둘째, 장궈타오와의 논쟁으로 이곳에 너무 오랜 시간(92일) 머문 것이다. 장족은 한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제스(張介石)는 라마고승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해 공산주의는 라마교와 장족의 적이라는 것을 설교하는 한편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숨기지 않는 곡물은 압수하고, 홍군에게 곡물이나 식량을 팔면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따라서 홍군이 이 지역에 들어갔을 때 장족은 다 숨어버리고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을 살 수도 없었고 대지주의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밭에서 여물고 있는 보리를 무단으로 베어 먹어야 했고 장족들이 키우는 야크를 잡아먹어야 했다.


자신들의 생명줄인 식량을 빼앗기자 장족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홍군을 공격했다. 결국 이들간의 악연은 1950년 홍군의 티베트 점령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상당히 오래 된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사용하는 논리(티베트의 전통질서는 봉건적 사원경제의 압제체제이며 홍군이 티베트민중을 이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줬다는 주장)도 바로 장정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홍군은 쓰촨 서북부의 한 사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승려 1,000명의 이 절은 홍군이 협상 특사로 보낸 장교를 세 번이나 죽여 버렸고, 승려들은 밤에 말 타고 사원 밖으로 달려 나와 홍군들의 목을 베었다. 홍군이 접근하면 총격을 가하고 폭탄을 던졌다.


홍군은 한 달이나 계속된 전투 끝에 1,000명의 병사를 잃은 뒤에야 사원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자 홍군은 충격에 빠졌다. 방마다 곡식과 말린 야크 고기, 소금, 설탕 등 먹을 것이 가득 넘쳐 났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사원에는 먹을 것이 넘쳐 나다니. 이를 보면서 홍군은 티베트사회가 민중의 고혈을 짜는 봉건적 사원경제체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티베트민중 자신이 아니라 외부세력이 대신 해방시켜 주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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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좐으로 날아가다...

 

류판산 장정기념관’ 으로 오르는 길. 길 중간에‘장정 정신 확장하여 화해사회 건설하자’는 구호가 씌어 있고, 그 뒤로 마오쩌둥이 <류판산> 시를 지었던 정자가 보인다.

 

                                                           마오의 <류판산> 시비.

 

 

장족지역인 쓰촨(四川) 서북부지역의 진입에 두 차례 실패한 뒤 비행기 편으로 청두(成都)를 떠나 인촨(銀川)으로 향했다. 티베트문제로 공항의 경비가 삼엄했다.


짐 검사도 까다로워 카메라와 캠코더의 배터리 때문에 세 번이나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링샤(宁夏)의 수도이자 실크로드 기차의 출발지인 인촨은 인구 60만 명의 도시로 중국에서 생산되는 구기자의 반 이상을 생산하는 구기자의 집산지이다.


인촨에 도착하자 계속 비가 오던 구이조우(貴州)나 쓰촨과 달리 황토고원과 서부 사막의 일부답게 공기가 건조하고 상쾌했다. 인촨, 그리고 홍군이 지나간 장정로여서 우리가 가려는 류판산(六盤山)은 모두 링샤 회족 자치주에 속해있다. 그만큼 이슬람교도인 회족이 많이 살고 있다.


도시도 구이조우나 쓰촨에서 봤던 낡은 도시들이 아니라 신도시로 깨끗했다. 중국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서부개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로 역시 새로 만든 고속도로였다.


동부 해안가에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여기에서 번 돈으로 낙후한 서부내륙지방에 투자해 도로 등을 건설하는 중구의 서부개발은 정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합쳐 놓은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시장과 이윤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라면 누가 장기적 관점에서 서부에 이같이 대대적인 돈을 들여 도로 등에 투자를 하겠는가? 도중에 지나간 한 도시는 이 같은 생각을 더욱 갖게 했다.


도시로 들어가자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끝없는 물의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도로도 차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8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부자동네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최후의 고산


류판산 지역으로 들어가자 전형적인 황토고원들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모든 것이 반대였다. 다른 지역은 평지에 강이 흐르고 산들이 보인다. 그러나 황토고원의 길은 모든 것이 밑으로 있다. 차가 달리는 평지가 고원이기 때문에 길옆에 깊은 계곡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곡 아래로 물이 흐르고 집들과 마을도 계곡 아래에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내려가는 것”이고 “평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평지로 올라간다”고 이야기한다.


황토고원에서 특이한 것은 집의 지붕과 설계였다. 이 곳의 전통집들은 중국의 전통가옥처럼 지붕의 가운데가 높고 양쪽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은 구조였다. 그리고 그 낮은 쪽이 마당 안쪽을 향하고 있다.


모든 것이 척박하고 비조차 귀한 곳이라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남의 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차가 달리면서 그 같은 모양의 지붕이 나타날 때마다 황토고원의 어려운 생존조건에 가슴이 아팠다.


류판산까지는 길이 좋지 않았다. 두시간 여를 달려 류판산에 도착했다. 류판산은 쓰촨의 설산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홍군이 넘은 마지막 고산이다. 그리고 진시황과 한무제, 당태종 이세민 등은 서쪽 정벌과 북쪽 정벌을 위해, 칭기스칸은 반대로 남쪽 정벌을 위해 넘었던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산이다.


높이가 2800m로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지만 마오쩌둥(毛澤東)과 홍군이 넘었을 당시만 해도 구름 사이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야 했던 산이었다.


이 산이 특히 유명한 이유는 마오가 산을 넘으며 <류판산>이라는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시를 지었던 곳에 정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 올라갔다. 큰 길에서 벗어나 작은 길로 산속으로 올라갔다. 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 꽤나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이 같은 산 꼭대기에 저렇게 큰 건물을 세워놓았는지 신기했다.

올라가 보자 ‘류판산 장정기념관’이었다. 내가 본 책에는 모두 정자 이야기만 하고 기념관 이야기는 전혀 없었는데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었다. 류판산은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자 정말 살이 엘 정도로 추웠다.


기념관 앞에는 마오가 시를 지었던 정자가 있었고 그 밑에는 ‘장정 정신을 확장하여 화해사회 건설하자’는 구호가 씌어 있었다. 또 그 앞에는 회족 특유의 창이 없는 모자를 쓴 목동이 양을 몰고 가고 그 사이를 홍군이 행진하는 조각이 있었다. 조각 역시 이 지역이 회족이 많은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기념관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기념관 왼쪽에 서 있었던 커다란 광고판이었다. 거기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샤오캉(小康)사회를 달성하자’고 씌어 있었다. 중국에 와서 많은 구호들을 유심히 보아 왔지만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구호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 구호를 보면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란 결국 자본주의”라는 난창(南昌)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말이 생각났다. 과연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란 것이 존재하는지, 또 그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마오와 홍군에 참여한 농민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가 소위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시인 마오


제1, 제2, 제4방면군의 붉은 깃발을 길게 옆으로 펼친 모양 위에 ‘장정 정신은 영원히 빛나리라’라는 장쩌민(江澤民)의 글씨를 크게 확대해서 써 놓은 거대한 조형물을 지나 많은 계단을 올라가니 기념관이 나타났다.


거대한 시설이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문이 닫혀 있었다. 다행이 안에서 지나가는 직원이 우리를 보고 문을 열어줬다. 단체 관람 외에는 관람객이 없다고 한다. 하긴 교통수단이 없으니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을 것이다.


하도 비슷비슷한 진열물들을 여러 장정 기념관에서 보아서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 다만 류판산의 역사를 소개한 것들은 흥미로웠다. 오래 전에 지은 다른 장정 기념시설들과 달리 이 기념관은 가장 최근에 지은 것으로 최근 급속히 성장한 중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듯 가장 규모도 컸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들인 것 같았다.


이 꼭대기에 이만한 시설을 지으려면 장정정도는 아니라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별로 오지 않는 이 곳에 이같이 웅장한 시설을 지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사실 장정 기념물은 소박한 시설이 그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닐지.

기념관을 나오려는데 안내원이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옥상으로 나가자 그 위에 높이 50m가 넘는 거대한 장정 기념비가 나타났다.


지금껏 본 것 중에서, 아니 존재하는 장정 기념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념물이었다. 단지 비석으로 세운 것이어서 그런지 조각도 없고 그냥 밋밋한 4각형 모양이었다. 거기에 ‘류판산 홍군 장정기념비’라고 쓰고 마오의 유명한 <류판산> 시를 특유의 마오 필체 그대로 써놓았다.


바람이 너무 불고 추웠다. 그래도 류판산의 옛길이 잘 보일 것 같아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고 간신히 걸어 건물 끝으로 가 밑을 바라봤다. 그러자 마오가 류판산 꼭대기에서 보았을 산의 모습과 굽이굽이 길이 나타났다. 추위에 떨면서 그의 <류판산>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은 높디높고 구름조차 맑은데 天高云淡

남으로 줄지어 나르는 기러기, 시리도록 바라본다 望断南飞雁

장성에 이르지 못한다면 누가 대장부라 부르랴 不到長城非好汉

지나온 길을 헤어보니, 어느덧 이 만 리 屈指行程二萬

육반산 고개 마루 위에서 六盘山高峰

홍기는 서풍 받아 힘차게 펄럭인다 紅旗漫卷西風

말고삐를 움켜쥐고 먼 길을 걷는 오늘 今日长缨在手

타고 온 저 말, 매어둘 날이 언제일까 何时缚住苍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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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4군 해후

 

 

대장정 당시의 마오쩌둥(오늘쪽)과 장궈타오. 홍군 최고지도자 중 한명이었던 장궈타오는 이후 의견충돌로 마오와 결별한 뒤 국민당에 투항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후이닝에 세워져 있는 ‘중국 노동자 농민 제1ㆍ2ㆍ4군 화합 기념탑’. 이곳에서 홍군의 집결로 사실상 장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탑 전면에 홍군 3군의 해후를 상징하는 3개의 홍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류판산(六盤山)을 떠나 장정코스를 역으로 달려 동쪽으로 후이닝(會寧)으로 향했다. 후이닝은 최근 티베트문제로 시위가 일어난 바 있는 간쑤(甘肅)성의 수도인 난조우(蘭州)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간쑤성은 외국인들이 쓰촨(四川)성으로부터 진입하는 것이 제한돼 있어 걱정을 했는데 문제는 없었다. 간쑤성이긴 하지만 동쪽에 위치해 장족들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히려 회족들이 많았다.


마을에는 홍기 모양에 장정도시라고 쓴 장식을 가로등에 쭉 설치해 놓아 장정도시의 긍지가 강함을 보여줬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사진에서 본 높은 중국 전통가옥 양식의 탑이 나타났다. 1ㆍ2ㆍ4방면군 회합 기념탑이다.


마침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탑 앞의 넓은광장에서 사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장정 역사현장 학습일 것이다. 학생들 뒤에는 소총을 세운 듯한 꼭대기에 별을 매달고 가운데 홍군의 얼굴을 새긴 뒤 전체를 붉은 천으로 감싼 힘 있는 조각이 있었다.


앞에는 1ㆍ2ㆍ3 방면군의 회합을 상징하여 3군의 붉은 군기 셋을 세워놓고 뒤에 ‘중국 노동자 농민 제1ㆍ2ㆍ4 군 회합 기념탑’이라고 쓴 10층 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탑에 올라 내려다보자 1936년 10월19일 이 광장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3군 병사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들의 해후로 사실상 홍군의 장정은 끝을 맺었다.


물론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앙군(제1방면군)은 한해 앞서 1935년 10월18일 우치(吳起)에 도착함으로써 368일 만에 장정의 막을 내렸다. 우리가 흔히 장정이 끝났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2ㆍ4방면군은 장정을 계속, 1년 뒤에야 이 지역에 접근했다.

소식을 들은 마오는 영접 선발대를 보냈다. 중앙군의 선발대는 10월2일 인구 2,000명의 후이닝으로 진격해 도시를 장악했다. 저우언라이(周銀來)가 도착해 2ㆍ4군 영접준비를 했다.

10월8일 장궈타오(張國燾)가 4방면군을 거느리고 도시로 들어와 성대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이미 이 지역을 지나쳤던 허롱(河龍)과 2방면군은 연락을 받고 되돌아왔다.


3군은 축제로 밤을 새웠다. 이로써 홍군 전체의 장정이 끝난 것이다. 얼마 뒤 장궈타오, 저우언라이, 허롱은 함께 말을 타고 마오가 기다리고 있는 바오안(保安 후에 즈단ㆍ志丹으로 바뀌었다)으로 입성했다.

후이닝에서 다시 류판산을 거쳐 장정의 최종 목적지인 싼시성으로 향하면서 제2ㆍ4방면군을 생각해 봤다. 장정이 승자인 마오와 제1방면군을 중심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4방면군의 비극


마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장궈타오의 4방면군은 쓰촨 동북부에 근거지를 잡고 있다가 다쉐산(大雪山)을 넘어온 마오의 군과 해후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마오와 견해가 달랐다. 쑹판(松潘)초원을 건너 간쑤성으로 들어가려는 마오와 헤어져 쓰촨 서북쪽의 아바로 갔다. 그러나 겨울을 거기에서 날 수는 없었다.

 

장궈타오는 마오 군의 장정이 거의 끝나가던 35년 10월10일 “청두(成都)를 공격하겠다”며 남하를 시작, 루딩(瀘定)교로 향했다. 또 다른 부대는 샤오진(小金) 에서 다쉐산을 넘어 바오싱(寶興)으로 진군했다. 마오 군 진군방향의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국민당군의 핵심을 격파하며 청두에 가까워졌다.


장은 자신감에 넘쳤고 병사들도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장제스(張介石)는 20만 대군을 청두 방어에 투입했다. 평지에 전선이 펼쳐지면서 국민당군의 폭격이 힘을 발휘했다. 일주일 사이에 장궈타오는 병사 1만을 잃고 출발했던 서북쪽의 장족 지역인 간즈로 밀려나야 했다. 군대는 4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모스크바의 밀사였다. 모스크바는 린뱌오(林彪)의 사촌을 내몽고를 통해 싼시(陝西)성으로 보냈다. 그는 마오를 만나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즘의 대두를 설명하면서 위기의 시대에 당이 단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궈타오와도 오랜 친분이 있던 그는 무선으로 장궈타오도 설득했다. 그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장궈타오는 중앙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그가 후이닝으로 진군해 온 것이다.


그러나 4군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36년 9월 소련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마오와 중국공산당이 요청한 다수의 무기를 외몽고를 통해 지원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3군이 연합군을 구성해 물품인도지역까지 돌파하기로 했다. 장궈타오 군 4만, 마오 군 2만, 허롱 군 2만 등 8만군의 총지휘관으로 마오가 추대됐다.


이들은 닝샤(寧夏)의 황하를 건너 외몽고로 북상하기로 했다. 10월24일 여성부대를 포함한 4군의 선발대가 황하를 건넜다. 그러나 이후 국민당군의 폭격 등으로 나머지 군은 도강에 실패하고 작전을 포기했다.


4군은 둘로 나뉘어 절반인 2만여 명이 강을 건너 이미 전진하고 있었다(비판적 학자들은 마오가 당내부 정치 때문에 의도적으로 4군을 위기로 몰고 갔으며 이미 강을 건넌 4군 선발대에게도 작전취소 사실을 알리지 않아 이들을 전멸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황하를 건너 서진한 4군 선발대는 보급이 중단되고 고립돼 추위와 기아, 그리고 지역소수민족(마족)의 공격으로 거의 전멸했다. 특히 여성부대는 대부분 적군에게 잡혀 윤간을 당하고 사창가에 팔려갔다. 결국 당내 권력뿐 아니라 자신의 병력도 잃게 된 장궈타오는 국민당군에 귀순하고 말았다.


2방면군의 행적


난창(南昌)봉기의 영웅 허롱이 이끈 2방면군의 행군은 상대적으로 순탄한 편이었다. 후난(湖南)성 서북쪽에 근거지를 갖고있던 허롱 부대는 후난과 구이조우의 경계를 오가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군이 건너간 우강 근처 마을에서 한참 전에 주더(朱德)가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앙지도부의 행방을 알게 된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국민당군과 간헐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구이조우(貴州)를 횡단한 2방면군은 윈난(雲南)의 군벌에게 중국의 고사를 들어 홍군과 싸우다가는 장제스에게 먹힐 것이니 우리와 싸우지 말라는 밀서를 보낸 뒤 윈난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윈난으로 들어가자 지역군벌 롱윈(龍雲)이 홍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허롱은 쿤밍(昆明) 공격을 명령했다.


놀란 롱윈은 군대를 철수해 쿤밍 방어에 집중시켰고 홍군의 윈난 통과를 묵인했다. 2방면군은 윈난 동쪽에서 진사(金沙)강을 건너간 중앙군과 달리 윈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쿤밍을 거쳐 서북쪽으로 진군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성이 있는 리장(麗江)으로 들어갔다. 리장에서는 한족과 지역의 소수민족인 나시(納西)족이 홍군을 환영했다.


이어 샹그릴라로 북상한 2방면군은 부근의 유명한 라마 불교사원인 쑹짠린쓰(松贊林寺)사원과 장족의 소수민족종교를 존중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36년 4월말 이들 2만여 군대는 별 탈없이 진사강을 건넜다.


이후 2방면군은 둘로 나뉘어 한 부대는 매리설산을 거쳐 티베트의 국경을 따라 북상해 쓰촨의 서북쪽 끝으로 진군했고, 또 다른 부대는 자신들이 진정한 샹그릴라라고 주장하는 다오청(稻城)을 거쳐 북상한 뒤 36년 6월 말 간즈에서 합류했다.


허롱은 이곳에 주둔하던 장궈타오와 정보도 교환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장궈타오가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자고 하자 “엿이나 먹으라”고 일축한 뒤 마오와 제1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그들이 있던 싼시 쪽으로 진군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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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혁명의수도

 

장정 직후 홍군이 수도로 삼았던 옌안은‘장정 도시’ 이미지를 이용한 이른바‘홍색기지’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단체관광객들이 당시 홍군 지도부가 사용한 중앙대강당 연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마오쩌둥과 에드거 스노. 이 대담은 훗날 대작<중국의 붉은 별>을 탄생시켰다.

 

 

1935년 10월18일, 류판(六盤)산을 떠난 마오쩌둥(毛澤東)과 병사들이 마침내 싼시(陝西)성 우치(吳起)에 도착했다. 그러나 닝샤(寧夏)군벌의 기병대가 후미를 쫓고 있었다.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이들이 더 이상 추격을 못하도록 손을 보라고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이후 성리(勝利)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 한 야산에 저격수들을 매복시켜 이들을 몰살시켰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결정타를 맞았고, 홍군 중앙군의 도주행군은 끝이 났다.


장정을 368일이라고 하는 것도 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8,000명(4,000명이라는 설도 있다)도 채 되지 않았다. 출발당시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출발했던 이들은 3,00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승리였다.


우치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황토고원의 길답게 먼지가 많이 났다. 돌고 돌아 도착하니 ‘우치, 중앙홍군 장정 승리 종착지’라는 대형 선전판이 맞았다. 드디어 2만5,000리 장정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시내에 들어가 장정 광장을 구경한 뒤 성리산을 물었더니 바로 뒷산이라고 했다. 작은 야산인데 이 곳 역시 공사 중이었다. 차를 내려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인부들이 성리산전투 기념탑을 만들고 있었다.


공사 먼지를 뚫고 올라간 산꼭대기 잡목들 사이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마오가 밑에 앉아 전투장면을 지켜봤다는 나무다. 그곳에 서자 우치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이곳에서 마오는 홍군의 저격에 추격군이 연이어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 동안 국민당군에게 쫓기며 쌓인 울분을 시원하게 해소했을 것이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이름이 들어간 시를 써주었다. 마오가 장정 중 특정인 이름을 넣어 쓴 유일한 시라는 점에서도 그가 이 승리를 얼마나 감격해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부터 30년 뒤 마오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아래 평생 심복이었던 펑더화이를 처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해가 지는 우치를 내려다보면서 비정한 역사를 생각했다. 조용히 마오가 펑더화이에게 헌사한 ‘펑 대장군’이라는 시를 읊어보았다.


흔히 장정은 홍군이 우치에 도착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홍군은 우치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바오안(保安)으로 이동했다. 바오안은 이후 홍군이 옌안(延安)을 수도로 정해 이동하기까지 머문 임시수도가 됐다. 마오와 홍군지도부들이 머물던 기념유적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193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마오, 저우언라이(周恩來), 보구(博古)가 머물던 토굴이 있었다. 36년 12월. 마오는 이 토굴 밖 마당에서 푸른 눈의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의 붉은 별>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젊은이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홍군의 심장으로 숨어 들어온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애드거 스노였다. 그는 한달간 이곳에 머물며 마오와 인터뷰를 한 뒤 38년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세계 3대 르뽀문학의 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은 마오와 장정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혁명 수도와 서부개발


장정, 그리고 혁명홍군의 도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옌안이다. 장정이 끝난 뒤 1년 반 뒤인 37년 1월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내전이 본격화하는 47년까지 10년 동안 홍군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옌안에 도착했다. 옌안은 2년 전 들렀을 때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시안(西安)까지 고속도로가 완공이 됐고 사방에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을 짓고 있었다. 우치, 즈단(志丹ㆍ바오안의 현 지명)에서도 목격한 것이지만 옌안에 들어서 가장 놀란 것은 건설 붐이었다.


서부개발과 석유 덕분인 듯 했다. 나중에 취재해 보니 옌안에는 1000억 위엔(14조원)을 투입돼 홍ㆍ황ㆍ녹ㆍ흑 4대 산업기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홍색기지는 혁명의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이용한 홍색관광지 발전 계획이다. 실제로 지난해에만 사상최고 수준인 650만 명이 옌안을 방문해 35억 위엔을 썼다고 한다.


황색기지는 황토고원의 지질적 특징과 문화적 특징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고, 녹색기지는 세계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사과 등 이 지역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가공할 수 있는 중국 최고의 석유화학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흑색 기지)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방에 지어대는 건물들을 볼 때 과연 다 분양이 될 것인지부터 걱정이 됐다.

이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지는 ‘옌안혁명기념관’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1950년에 지은 낡은 기념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인데 아직도 공사 중인 것을 보니 엄청나게 큰 기념관을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군지도부가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본부를 옮겼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토굴 등이 여럿 있다. 그 중 양자링(楊家嶺)으로 향했다. 홍군지도부가 1938년부터 47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마오 등의 토굴숙소와 함께 중앙대강당과 혁명정부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중앙대강당은 42년 건설돼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린 큰 건물이다.


강당 안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옆얼굴을 겹치게 한 동그란 그림아래 ‘중국 공산당 제 7차 전국대표자 대회’라고 쓴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연단 앞에서 여럿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시안○○○ 유한공사’라고 쓴 작은 현수막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회사에서 온 이른바 홍색유람이었다. 바람도 쐬고 역사공부도 할 겸 단체로 많이들 온다고 했다.


밝은 회색 홍군복을 입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지난 번 왔을 때 만났던 그 아가씨였다. 기념촬영을 위해 관광객들에게 홍군복을 빌려주는 아가씨인데 싹싹하고 자기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데다가 웃는 모습이 가히 ‘살인미소’여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언제 내가 옌안에 다시 와 또 만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너무도 반가웠다.

강당을 나와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지도부의 토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2년 전에는 마오의 책상에 앉아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아 그럴 틈이 없었다. 확실히 옌안의 홍색산업은 뜨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바오타산에 올라


숙소를 잡은 뒤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바오타(宝塔)산에 올랐다. 바오타산에는 옌안의 상징이 된 바오타라는 탑이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만들어졌고 송나라 때 중건된 유서 깊은 탑은 높이가 20층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44m터나 된다.

게다가 산 위에 세워져 있어 당시 허허벌판이던 1930~40년대의 옌안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반드시 사진 속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세워진 목적과 상관없이 홍군 혁명수도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시 보아도 운치가 있는 우아한 탑이었다. 탑 사이로 지는 석양과 옌안시를 내려다보면서 장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굽이치는 강을 건너고, 설산을 넘고, 죽음의 초지를 건넜던 장정은 지금 70여년이 지나 차를 타고 돌아보았어도 정말 ‘피와 용기로 쓴 대서사시, 패배이자 승리였고 절망이자 희망이었던 대서사시’이었다.

그 길을 다시 밟아온 험난했던 여정도 이제 끝나 간다고 생각하니 문득 <장정>이라는 시를 읊고 싶어졌다. 마오가 장정을 끝내며 썼고, 이후 장정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다.

홍군은 고단한 원정길도 겁내지 않았네(红军不怕远征难)

깊은 강과 험난한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네(万水千山只等闲)


바오타산에 올라


숙소를 잡은 뒤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바오타(宝塔)산에 올랐다. 바오타산에는 옌안의 상징이 된 바오타라는 탑이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만들어졌고 송나라 때 중건된 유서 깊은 탑은 높이가 20층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44m터나 된다.


게다가 산 위에 세워져 있어 당시 허허벌판이던 1930~40년대의 옌안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반드시 사진 속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세워진 목적과 상관없이 홍군 혁명수도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시 보아도 운치가 있는 우아한 탑이었다. 탑 사이로 지는 석양과 옌안시를 내려다보면서 장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굽이치는 강을 건너고, 설산을 넘고, 죽음의 초지를 건넜던 장정은 지금 70여년이 지나 차를 타고 돌아보았어도 정말 ‘피와 용기로 쓴 대서사시, 패배이자 승리였고 절망이자 희망이었던 대서사시’이었다.


그 길을 다시 밟아온 험난했던 여정도 이제 끝나 간다고 생각하니 문득 <장정>이라는 시를 읊고 싶어졌다. 마오가 장정을 끝내며 썼고, 이후 장정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다.


홍군은 고단한 원정길도 겁내지 않았네(红军不怕远征难)

깊은 강과 험난한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네(万水千山只等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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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한인들 

 

한인 혁명가로 옌안에서 활동한 김산의 아들 가오융광(왼쪽)씨를 만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가 아무도 찾지 않고 돌보지도 않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오후 늦게 나자핑(羅家坪)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장정, 나아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는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한인들의 피와 땀도 배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상기하며 양림과 무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장정에 참가한 한인은 30여명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대부분 전사하고 살아서 장정을 완주한 사람은 양림과 무정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무정은 양림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1905년 함경북도 출신으로 14살 때 3.1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당군의 포병장교로 근무했으나 국민당군에 실망해 공산당에 가입한다.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上海)쿠데타 때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옥하여 펑더화이(彭德懷)의 포병단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홍군에 대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펑더화이와 무정뿐이었다.


장정 후 무정은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일성이 지배하는 북한에서 포병총사령관을 지내는 등 북한군의 요직을 거쳤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195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회ㆍ진사강을 건너라>에서 소개한 바 있는 양림은 1898년 평안북도 출신으로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해 윈난(雲南)육군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필사적으로 항일을 하겠다는 뜻에서 ‘필사적’의 중국어 발음(삐스더)와 비슷한 삐스디(毖士梯)를 중국이름으로 정했다. 졸업 후 중국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뒤 난창(南昌)봉기 등에 참가해 능력을 인정 받았다.


중앙지도부를 경호하는 최정예 부대인 군사위원회 간부단의 참모장으로 장정에 참여했고 진사(金沙)강 도하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장정을 끝낸 넉 달 뒤인 1936년 2월 황하를 건너는 동진작전에서 특공대를 직접 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38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옌안의 한인(1): 김산


장정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옌안(延安) 하면 떠오르는 한인이 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다.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거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스가 중국 공산당을 취재하기 위해 1937년 옌안에 왔다가 도서관에서 수준 높은 영어책을 빌려가는 사람이 있어 수소문해 만난 것이 바로 한인 혁명가로 이곳에 와 있던 김산이었다.


웨일스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쓴 김산은 본명이 장지락으로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와 베이징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좌익 서적을 읽고 사회주의에 경도됐다.


1925년 중국 공산당원이 됐으나 1930년대 두 차례나 일본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아무런 자백을 하지않아 풀려난다. 그러나 이렇게 석방된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사 당에서 축출되는 등 시련을 겪은 그는 1936년 소수민족 해방전선을 창설하고 옌안지역에 만들어진 소비에트지구에 조선혁명가 대표로 와 있었다.


유학시절 <아리랑>을 읽고 감동을 받았지만 이후 학교공부와 먹고 사는 일로 그를 잊어버린 사이 그의 책은 한글로 번역되어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다. 그리고 그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안타까웠다. 2005년 노무현정부가 사회주의계열에 대해서도 항일투쟁 등을 인정하기로 함에 따라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뒤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베이징(北京)에 도착해 장정을 떠나오면서 그의 아들인 가오융광(高永光)씨를 만났다. 공대를 졸업하고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은퇴했다는 가오씨는 1937년 1월 생으로 70살이 넘었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김산이 죽은 뒤 한족인 김산의 부인은 재혼을 했다. 가오씨는 새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이다.


사진을 보니 아버님은 키가 크던데 선생님은 키가 작으시네요

“그래요.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 키는 180cm가 넘었다는데. 어머니 키가 작아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실 것이고, 어머님은 어떤 분이었어요

“허베이(河北) 출신으로 학생회장을 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그러다가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강한 분이었지요.”

아버지가 김산이라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조선족이라는 느낌은 받았어요. 그러다가 대학생이 된 뒤에야 아버지가 조선족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이야기해줘서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아버지에 대한 책인 <아리랑>을 언제 처음 봤습니까?

“1970년 당시 옌벤(延邊)의 조선문제연구소장이라는 분이 홍콩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보고 구입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후예가 있는지 찾아 나섰는데 연배 분들이 살아 계셔서 어머니를 찾아 왔었어요. 그 때 그 분들이 책을 갖고 와서 봤는데 가슴이 뭉클했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는 복권이 언제 됐나요?

“복권을 신청할 준비를 해 놓았다가 1980년대 초에 해서 곧 복권됐어요. 1997년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러 옌안에 가서 찾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2005년 아버지의 훈장을 받으러 한국에 갔었는데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인정해줘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뿌리를 생각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여행을 준비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김산이 웨일즈를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마오의 베리야(스탈린의 비밀경찰 대장으로 무자비한 숙청으로 악명이 높았다)라고 할 캉성(康生)에 의해 바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숙청당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책도 나오기 전에 죽은 것은 몰랐다. 김산은 웨일즈와 인터뷰당시 자신이 만주에 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신분보호를 위해 2년간 출간하지 말 것을 부탁해 <아리랑>은 1941년 처음 출간됐다.


다시 말해, 자신의 책이 출간됐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그것도 일본군의 총알에 의해서라 아니라 혁명동지들의 총알에 의해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국민당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양림은 너무도 행복한 편이다.


그의 피는 어디에 흘려져 있는 것인가? 우리가 어제 다녀온 양자링(楊家嶺)의 뒷산인가? 아니면 바오타(寶塔)산의 구덩이인가? 마오쩌둥(毛澤東)은 그의 처형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먼 이국 땅에서 개죽음을 당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국의 운명처럼 나의 삶은 패배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에서는 승리하고 있다”던 그의 말이 생각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산, 잘 가시오.


옌안의 한인(2): 조선혁명 군정학교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나자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개발 붐으로 이미 사방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또 아파트를 짓고 있어 옛 모습을 서술한 책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작은 다리를 찾아냈는데 앞에 ‘나자핑’이라는 돌 팻말이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가자 양쪽에 지저분한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왼쪽으로 한 노점상이 팔려고 쌓아놓은 물건들 사이로 비석이 하나 보였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였다. 독립운동의 중요한 유적이건만 아무도 찾지 않고 돌보지도 않아 노점상의 창고로 변한 모습에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노점상들이 주섬주섬 물건들을 치웠다. 기념비에 쓰인 내용은 조선혁명군이 1944년 3개월간의 행군 끝에 이곳에 도착해 학교를 지어 12월 완공했고, 45년 2월 주더(朱德)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을 했으며, 김두봉이 교장을 지냈고 1945년 8월 하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북조선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찾아간 학교 터와 숙소역시 폐허가 되어 있어 가슴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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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안사변

 

 

시안사변 현장에 전시돼 있는 장쉐량에 관한 자료. 한창 때의 얼굴 사진 (왼쪽 위)을 비롯해 그에 대한 여러 자료와 사진을 다양하게 갖추어 놓았다

 

시안사변 현장 부근에 상업용으로 꾸며놓은 장제스의 집무실. 이 곳에선 관광객을 장제스 복장으로 분장시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다. 혁명의 적까지도 돈벌이에 활용하는 중국인들의 상술이 놀라울 뿐이다.

 


장쉐량(張學良)은 만주군벌의 아들로 아버지가 암살을 당한 뒤 만주를 물려받았으나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20만 병사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장제스(蔣介石)의 신임을 받은 그는 이후 시안(西安)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30만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토를 잃은 일 때문에 강력한 항일주의자였던 그는 국민당군이 휴전하고 공산당과 손을 잡아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장제스 몰래 홍군과 밀사를 주고받았고 홍군에게 우호적 자세를 보였다.


당시 홍군은 장정을 끝내고 옌안(延安)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세력을 넓히지 못한 채 고립돼 있었다. 이 같은 처지의 홍군을 구한 것이 바로 ‘시안사변’이었다. 이 점에서 장정의 진정한 끝은 시안사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다.


홍군을 살린 장쉐량


앞에서 살펴보았듯 1936년 10월, 홍군은 소련이 제공하는 군수물자를 보급받기 위해 황허(黃河)를 건너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국민당군의 저지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1936년 12월4일 시안으로 날아왔다. 12월12일 새벽, 장제스는 매일 하듯이 잠옷 차림으로 아침체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웬 총소리야? 빨리 알아봐.” 보좌관에게 지시했다. 보좌관이 나가보자 경호실장이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고 장쉐량의 부하들이 총을 쏘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믿었던 장쉐량의 쿠테타였다. 장제스는 잠옷 바람으로 산으로 도주해 바위 뒤에 숨었다. 그러나 두 시간 뒤 장쉐량의 부하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장쉐량은 후에 자신이 장제스로 하여금 공산당과 손을 잡게 함으로써 제2의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투쟁에 나서도록 압박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장제스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마오쩌둥(毛澤東)과 내통해 장제스를 제거하고 중국의 실권자가 되고 싶어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가 홍군을 살린 것은 사실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장쉐랑이 보낸 전용 보잉기를 타고 시안으로 날아왔다. 장쉐량, 저우언라이, 장제스 간의 협상이 진행됐다. 장제스는 결국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내전을 종식하고 항일투쟁을 벌이겠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장쉐량의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이 같은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공산당은 합법적 정당이 됐고 국민당으로부터 무기와 예산을 정기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게 됐다. 즉 200만 명의 인구와 12만㎢의 영토를 할당 받았고 4만6,000명의 군대에 대한 무기와 급여를 지급 받았다. 대신 홍군은 국민당군의 제8로군으로 편입됐다.


장제스 살린 스탈린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코민테른은 처음부터 국민당과 장제스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에 대해 제1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며 국민당에 입당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장제스가 공산당을 대량학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시안사변이 나자 마오는 모스코바에 장제스의 살해를 승인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장제스를 죽이는 것은 항일 통일전선을 심각하게 훼손할 뿐 아니라 일본의 중국침략을 도울 수 있는 친일행위라고 극력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시안사변 자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장제스의 난징(南京)정부 역시 장쉐량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시안으로 이동하는 한편 장쉐량의 군대에 폭격을 가했다.


소련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장쉐량은 결국 장제스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자신의 행동이 사려 깊지 못했다면 잘못을 빌었다. 한편 스탈린은 장제스가 제2국공합작을 받아들여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회유책을 썼다.


모스코바에 유학 갔다가 인질로 잡혀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張經國)를 보내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소련의 개입으로 장제스-저우언라이-장쉐량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그러나 장쉐량은 가지 말라는 저우언라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비행기를 타고 그를 따라 난징으로 갔다. 그 결과 이후 50년 이상 장제스의 인질로 연금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장제스는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도주할 때도 그를 데리고 갔다. 장제스가 죽은 뒤에야 연금에서 풀린 장쉐량은 하와이로 이민을 가 2001년 그곳에서 100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제스와 마오보다도 25년 더 오래 살아 남은 것이다.


이처럼 장제스의 2인자 장쉐량이 마오와 홍군을 살렸고, 거꾸로 스탈린이 극우반공주의자 장제스를 살렸으니 역사란 정말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스탈린은 이후 1949년 내전당시에도 홍군이 장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주한 장제스군을 공격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즉 중국이 홍군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시안사변의 흔적


시안에는 크게 3개의 사변 관련 유적이 있다. 우선 장제스의 숙소와 장제스가 도망갔다가 잡혀온 현장이다. 그리고 장쉐량의 공관이 있다.


시안 시내에 있는 장쉐량의 공관은 지난번 시안에 왔을 때도 못 봤던 곳이다. 이번에도 공사 중이라 닫혀 있었으나 사정을 얘기하고 마당까지 들어가 공관의 전경은 찍을 수 있었다.

장쉐량이 자신이 주장하듯 항일투쟁을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장제스를 제거하고 일인자가 되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인지 모르지만, 역사는 엉뚱한 조연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시외를 벗어나 있는 시안사변의 현장을 찾았다. 문득 시안사변이 12.12 군사쿠데타와 같은 12월12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12.12가 ‘시비시비’여서 시비를 거는 쿠데타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같은 군사 쿠테타라도 중국의 12.12가 역사적으로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의 12.12는 반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전혀 다르다.

사변의 현장은 시안 최고의 관광지인 진시황릉의 병마총에서 가까운 화칭츠(華淸池)에 위치해 있다. 우선 장제스가 도망간 화칭츠 뒷산으로 올라가던 도중 장제스가 앉아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장제스의 사무실 모양을 꾸며놓고 장제스 옷을 빌려주어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 곳이었다. 중국의 상업주의라니!


더 올라가자 계곡의 돌 사이에 ‘장제스 은신처’라고 써 놓은 곳이 나타났다. 천하를 호령하던 독재자가 잠옷 바람으로 이곳에 쭈그리고 앉아 겨울 추위에 떨면서 두 시간을 있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때의 굴욕감이 아마도 그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도 장쉐량을 연금에서 풀어주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굴욕감이 농지개혁과 같이 중국 민중 절대다수가 바라는 개혁을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와신상담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는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 것이다. 만일 장제스가 그 때의 굴욕감을 개혁의 와신상담으로 발전시켰다면 시안사변은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장제스의 한계였다.


화칭츠 뒤뜰에 있는 우젠팅(五間廳)은 장제스가 홍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회의를 주재하던 회의실과 집무실, 숙소, 그리고 경호원 숙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장쉐량이 자신들을 살려준 만큼 입구에는 하와이에서의 노년생활까지 장쉐량의 사진들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사무실 바깥벽에는 당시 장쉐량의 군대와 장제스의 경호원들간에 벌어진 총격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의 총알구멍에 투명한 유리를 씌우고 ‘시안사변의 총탄자국’이라고 써 놓았다. 당시 장제스를 체포한 장쉐량의 특공대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온 한인도 끼여 있었다니 그 총탄이 한인 병사의 총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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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마치며

 

스모그로 가득 찬 도시 거리를 걷고 있는 중국의 노동자들 모습에서 환경파괴, 빈부격차 등 현대 중국이 안고있는 문제들이 압축적으로 보여진다. 70년 전 홍군이 혹독한 대장정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꿈꾸었던 미래의 중국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40여년 뒤인 2050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동부연해와 내륙간의 불균형과 환경파괴, 에너지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번 장정여행은 이 문제들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해줬다. 중국의 환경문제는 심각하다. 가는 곳마다 도로 공사 등으로 자연생태계가 여지없이 깨지고 있었다. 오지에도 제대로 된 강들이 남아있지 않았고, 차들이 내뿜는 매연과 밥을 하기 위해 때는 나무나 석탄의 연기 등으로 숨 쉬기조차 힘든 곳이 많았다. 생활 쓰레기들이 사방에 버려져 있었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싼시(陝西)성에서 석유가 발견돼 채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경유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모습도 보았다. 상하이(上海)의 와이탄(外灘)도 주중에는 조명을 끄는 등 많은 지역에서 정전을 경험해야 했다. 중국이 지금처럼 빠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심각하다. 빈부격차는 더욱 큰 문제다.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다. 계수가 1이면 완전 불평등, 0이면 완전평등 식으로 숫자가 클수록 불평등하다. 자본주의 선진국 중 가장 빈부격차가 적은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0.211이고 가장 심한 미국이 0.368수준이다. 우리의 경우는 군사독재시절 0.310수준으로 높았던 지니계수가 민주화이후 낮아져 1997년 경제위기 전에는 0.283을 기록했다가 경제위기후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하자 0.358까지 높아졌다.


중국은 0.2이었던 지니계수가 개혁개방이후 높아지기 시작해 1981년 0.3, 2000년 0.417를 기록했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은 2005년 기준으로 무려 0.496을 기록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빈부격차가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얘기다. 장정여행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지를 주로 지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낙후한 중국의 농촌의 실상을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삶은 도시의 화려한 소비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보니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다.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을 막는 규제정책에 따라 사실상 불법으로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 농민공(農民工)들은 이런 신분 때문에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이 점에서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동부 연해와 내륙지역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후진타오(胡錦濤)의 ‘화해 사회론’(일종의 조화사회론)은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문제는 화해사회론이 시장경제가 전면화하면서 날로 심해지고 있는 불평등을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 뿐이 아니다. 티베트사태는 중국이 안고 있는 두 개의 아킬레스건을 보여주었다. 민족문제와 민주주의이다. 소수민족은 2000년 기준으로 중국의 인구의 8.4%인 1억600만명 수준이지만 전체국토의 63.7%를 차지하고 있다. 분명 티베트는 다른 소수민족과 다른 측면이 많지만 그렇다 해도 티베트문제는 중국의 심각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티베트인들의 자치요구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은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물론 13억 인구가 서구식 선거와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확대하지 않고 일류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얼마 전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는 정치체제 개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산당 권력을 점차 제한하고 중국의 의회 격인 전인대와 언론계, 종교계, 시민사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3단계에 걸쳐 정치개혁을 추진, 2040년까지 민주와 법치가 발전한 현대화 국가건설을 완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규범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경제 자유화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계속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할 일일 것이다. 날로 심화하는 불평등, 민족 문제, 민주주의 등 21세기 중국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농민들을 수천 년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장정의 정신이 지금 중국에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70년 전의 장정정신에 기초해 화해사회로 나가는 ‘21세기 신(新)장정’이다.


문화혁명의 광기 지고 중국식 개혁개방 가속중국 공산당은 시안(西安)사변으로 회생의 기회를 맞고 항일투쟁에서 기반을 확대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2차국공합작은 깨지고 홍군과 국민당군은 내전에 들어간다. 여기서 홍군이 승리,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했다.50년 한국전쟁이 터진 뒤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미군이 반격이 시작되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중국은 참전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보냈으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한다. 이에 마오는 한국전에 홍군을 파견했고 참전한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50년대 말 마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한다. 장정의 뿌리가 된 농민들을 인민공사라는 집단농장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소련식의 농ㆍ공 분리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마을마다 뒷마당 제철소를 만들어 농기구들을 직접 만들게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정책으로서 사방에 굶주린 농민들이 속출했다. 최소한 2,0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59년 루산(盧山)에서 당 지도부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고향 창사(長沙)의 농촌사정을 전하면서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 화가 난 마오는 "여러분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들로 홍군을 만들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협박했다. 펑더화이는 국방장관에서 쫓겨났으나 마오 역시 국가주석자리를 류샤오치(劉少奇)에게 물려줘야 했다. 류샤오치는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함께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인민공사에서 임대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경제가 회복되자 마오는 문화대혁명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당과 베이징(北京)이 자본주의에 물든 주자파(走資派)들로 가득 차있다"며 젊은 대학생들이 홍위병이 되어 당ㆍ군을 공격하고 나섰다. 마오의 처 장칭(江靑) 등 4인방이 주도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자파로 몰려 쫓겨났다.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는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낡은 자본주의의 유제들을 없앤다는 이름아래 전통문화들을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하방시켰다. 76년 마오가 죽자 군ㆍ당의 원로들이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을 체포함으로써 광기는 끝을 맺는다. 이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개방을 추구해 나갔다.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동부 해안지역에 경제특구를 만들어 수출을 위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89년 정치사회적 개혁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텐안먼(天安門) 광장의 학생시위가 발생하자 이를 유혈 진압했다. 경제개혁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한 중국형 개혁모델이 자리 잡았다. 덩의 지도아래 중국은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뤘고 후계자인 장쩌민(江澤民) 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나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권력을 장악한 후진타오는 화해사회론을 내걸어 분배 문제의 해결에도 노력하고 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