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이성계 호적' 필사한 기록 발견

한부울 2008. 9. 4. 21:50

이성계 호적' 필사한 기록 발견

[연합뉴스] 2008년 09월 04일(목) 오후 03:12

 

 

토지박물관 '준원전 고사록' 공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 중인 국보 131호 '이태조(이성계)호적원본'(李太祖戶籍原本)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복구한 문서 중 일부의 순서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필사본 문헌이 발굴돼 공개됐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은 조선왕조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흑석리에 왕조 건국을 기념하고자 세운 전각으로 이성계 호적을 보관하기도 했던 '준원전'(濬源殿)과 관련한 조선시대 기록을 담은 '준원전 고사록(故事錄)'을 최근 입수했다고 4일 밝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태를 묻은 곳이기도 한 영흥 땅에 건립된 준원전에는 세종 25년(1443) 태조 어영(御影.임금의 초상)이 봉안됐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됐다. 또 그 관리를 위해 종6품 전령(殿令)과 종9품 직급인 전참봉(殿參奉)을 각각 두 사람씩 배치했다.


토지박물관이 입수한 필사본은 표지에는 '고사록'이라 표기되고 본문은 모두 49장인 1책이다. 문서 크기는 32 x 23㎝.


이 문서는 준원전 실무자들인 전령이나 전참봉이 예전부터 기록해 둔 각종 일기나 등록(謄錄), 고문서 등을 종합한 것으로 특히 그 첫머리에는 '국보호적'으로 일컫는 이성계 호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토지박물관 검토 결과 고사록은 현존하는 이성계 원본 호적의 첫 부분을 그대로 필사한 것은 물론, '근안'(謹案. 삼가 생각건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평설에는 호적 내력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담고있다.


"태조 장적이 본부(本府.영흥부)에 전래됐다. 일찍이 임진왜란 이전에는 철장(鐵裝.철심이나 철판으로 책을 제본하는 일) 1권 형태로 준원전에서 보관해 오다가 임란 때 왜적에게 훼손됐다. (왜적에게) 짓밟힌 나머지 8장을 난리가 끝난 뒤에야 겨우 거두어 배접지(보존을 위해 문서 뒤에 덧붙이는 종이)를 덧입혔다 한다. …그리고 제5장에는 호구사목(戶口事目)이 있으니 거기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이방원)의 잠저(潛邸. 즉위 이전) 때 직함(職銜)과 어휘(御諱.이름)가 있으므로 이 또한 희귀해 특별히 기록해 둔다. (하지만 문서에는 글자가) 닳아 없어진 곳이 많다"


고문서 전공인 토지박물관 김성갑 학예연구사는 "이로 볼 때 태조 호적은 원래부터 8장이 아니라 철장(鐵裝) 또는 철권(鐵卷)으로 일컫는 제본 형태였으며, 수십 장에 이르는 호적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면서 "그러던 것이 임란이라는 난리통에 훼손되고 많은 곳이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와 같은 8장 분량으로 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성계 호적은 이렇게 남은 8장을 배접지에 붙여 '합성'해 현재에 이른 것이다. 나아가 이 고사록을 통해 현재의 국보 호적이 배접하는 과정에서 순서가 뒤바뀐 사실도 드러났다. 즉, 태종 이방원이 쓴 호구사목(戶口事目. 호적조사나 호적기재 업무 때 참고해야 할 지침)이 현재는 8폭 장적 중 2번째 폭에 포함돼 있지만 원래는 5번째 폭을 차지했음을 고사록은 알려준다.


김 연구사는 "이렇게 순서가 뒤바뀐 경위와 이유는 좀 더 세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면서도 "현재의 이성계 호적 배열이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므로, 이번 고사록 기록을 토대로 재배열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서 검토 결과, 구입품인 까닭에 출처가 분명치 않은 이 고사록을 필사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준원전 9급 관리들인 전참봉으로 드러났다. 이 중 이성계 호적을 필사한 이는 1698년 효릉 참봉으로 있다가 1699년 5월에 준원전 전참봉에 임명된 채우주(蔡宇柱)로 기록돼 있다.


고사록이 완성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755년 전참봉에 임명된 한석지까지 필사자 명단에 보이고, 문서 말미에 부친 전령 최경조의 발문에 "신축년(1841년)에 준원전에 부임하여 고사록을 매일 읽었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55-1841년 무렵에 현재의 필사본 형태가 완성됐음이 확실하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나아가 고사록은 준원전이란 전각의 운영실태를 알려주는 희귀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구체적으로 김 연구사는 "전각에 사용한 제기(祭器)나 휘장 이야기라든가 태조가 태어난 영흥부의 위상, 준원전 주변 둔전(屯田)의 경계 분쟁 및 민전(民田)과의 교환 사건, 준원전을 돌보는 전졸(殿卒)들의 생활보장을 위한 면역 사항, 비상시에 어진을 옮길 수 있는 선박의 구비 사항 등의 기록이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