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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志士)들은 색마(色魔) 또는 사기꾼이었다.

한부울 2008. 8. 3. 01:11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志士)들은 색마(色魔) 또는 사기꾼이었다.

大東民族史 2008-08-01 13:04:15


일본이 세계 문화의 중심 국가라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과대망상(誇大妄想), 그리고 이 허장성세와 과대망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날조(歷史捏造)의 정신 병력을 캔다


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란 종래의 봉건제도인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와 근대 자본주의로의 길로 들어서게 한 정치·사회적 대변혁을 말한다.


메이지유신의 기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M. Perry) 제독이 당시의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존황양이(尊皇壤夷)를 주장하는 토막파(討幕派)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체제를 유지하려는 좌막파(佐幕派)간의 싸움을 거쳐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12세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시작으로 680년간 지속되어 온 ‘무장집권시대(武將執權時代)’가 막을 내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868년 일본 제122대 황제인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가 신정부의 정치방침인 ‘5개조 선언문’을 발표하고 수도를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로 옮기고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 사회·문화적으로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목숨을 바쳐 메이지유신의 대업을 이루게 한 젊은 인재들을 ‘유신의 지사’라고 하며 오늘날까지도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유신의 지사’로 인기가 높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모두가 후손들로부터 빛나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정말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아닌 자신들의 조국인 일본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유신의 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지 않고 일찍 죽어 주어서, 시쳇말로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 오늘날 일본이 세계 정상급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제들, 즉 정치인들의 뇌물수수와 부정한 행동, 낙하산 인사, 동향인 봐주기, 학벌 위주의 교육문제에 따른 입시지옥, 과외 열풍, 정(政)·재(財)·관(官)의 담합행위 등 모든 부조리의 근원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있는 것이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다이쇼시대[大正時代]는 말할 것도 없고, 쇼와시대[昭和時代]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상의 인물을 권력자의 의지가 작용한 이데올로기만으로 판단하여, 그 인물의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영웅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물론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을 잡은 자, 승자(勝者)는 당대에 아니면 나중에라도 후손들에 의해 영웅으로 덧칠되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초슈[長州]의 어느 지사가 지었다는 시(詩)조차도 어리석은 어용학자들이 얄팍한 황국사관으로 격찬하며 영웅으로 떠받들고, 무고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제부터 ‘유신의 지사’ 중에서 유명한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⑵ 공금횡령(公金橫領)의 왕자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다카스기 신사쿠는 1839년 쵸슈번 하기시에서 대대로 번주(藩主)인 모리가(毛利家)의 가신으로 가록(家綠) 5백 50석 정도린 제법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쥬쿠 및 번교(藩校)인 명륜관(明倫館)을 다녔지만 학문에는 뜻이 없었고, 검도(劒道)에 흥미를 느껴 19세 때 야규신카게류[柳生新影流]의 멘쿄가이덴[免許皆傳]을 얻었다.


1857년 11월 오사다 쇼인[吉田松陰]이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개설했다. 요시다 쇼인은 언행일치를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의 신봉자였다. 그는 1859년 10월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大獄] 사건으로 3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그의 가르침은 다카스기 신사쿠를 비롯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초슈의 많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신사쿠는 집안이 워낙 보수적이라서 당시 위험한 사상을 교육시키는 쇼인의 쇼카손쥬쿠 출입을 금지시켜 몰래 다녔다고 한다.


그는 1862년 막부의 상해무역사절단에 쵸슈번 대표로 동행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에서 막부의 증기선 치도세마루[千歲丸]의 출항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안 쵸슈번의 공금을 사용하여 매일 유곽(遊廓)을 출입하여 술과 여자를 찾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대하던 게이샤[藝者]를 거액의 공금을 써서 낙적(落籍)시키고 실컷 성욕(性慾)을 즐긴 후에는 다시 팔아 넘겨 버렸다.


상해에서 돌아온 신사쿠는 다시 에도[江戶]로 가서 요코하마[橫浜] 외국인 거류지 습격을 계획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중지하기도 하고,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구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신축중인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신사쿠는 가는 곳마다 숙소가 유곽이었다. 결코 술과 여자가 빠지지 않는다. 에도에서의 신사쿠의 숙소는 사가미야[相模屋]라고 하는 유곽이었다. 사가미야에는 지금까지도 ‘다카스기 신사쿠가 술을 마시던 방’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63년 쵸슈로 돌아온 신사쿠는 기병대(奇兵隊)를 편성하여 총감(總監)으로 취임한다. 흔히 기병대는 신분의 상하 구별이 없는 서민적이고 국민적인 군대로 알려져 있으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후임 총감인 아카네 다게토[赤根武人]가 부하들로부터 인망이 두터운 것을 시기하여, 전 대원들 앞에서 ‘조그만 섬 출신 촌놈’이라고 사납게 욕을 해대기도 하였다.


신사쿠는 암살 위협을 피해 시코쿠로 도피행을 하면서도 오우노라는 애인과 동행하였는데,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두번째 부인이 되는 우메코와 같은 유곽 출신이다. 다가스키 신사쿠는 메이지시대를 눈 앞에 둔 1867년,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⑶ 조직폭력배 뺨치는 협박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11월 시코쿠 토사번[土佐藩]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친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친은 향사(鄕士)의 권리를 사서 겨우 말단 사무라이[侍] 축에 끼게 되었다.


료마는 어렸을 때 ‘울보’니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당하자 칼을 빼어들고 휘두르는 소동을 일으켜 쥬쿠에 갈 수 없게 되어 누나가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식보다는 검도에 집중하였다.


료마는 19세 되던 해인 1853년, 처음으로 에도에 나와 치바 사다키치[千葉定吉]의 문하생이 되어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를 수련했다. 보통 ‘사카모토 료마’ 하면 그래서 ‘검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도 검투(劒鬪)를 한 횟수가 별로 없고 또 이겼다는 기록도 거의 없다. 1857년 에도에 있는 토사번의 저택에서의 검술시합에서 무명의 시마다 고마노스케[島田駒之助]를 이긴 것이 유일한 승전(勝戰) 기록이다.


교토 후시미[伏見] 데라다야[寺田屋]에서 부교쇼[奉行所] 포졸들에게 쫓길 때에도 칼을 차고 있으면서도 권총으로 쏘기만 하다 손가락을 다쳐 도망치기도 하고, 1867년 교토의 오미야[近江屋]에서 암살될 때에도, 비록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도 못하고 자신은 중상을 입고 죽고 만 것을 보면 그의 검술 실력은 사실 형편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사번의 하급 무사 다케치 즈이산[武市瑞山]이 1861년에 ‘존황양이(尊皇壤夷)’의 기치를 내걸고 결성한 단체가 토사근왕당(土佐勤王黨)이며 사카모토 료마도 여기에 가입했다. 이 토사근왕당의 즈이산이 료마를 ‘대허풍선이’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제대로 본 것이다. 다만 이러한 료마의 성격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결국 훗날 료마는 원수지간인 사츠마[薩摩]와 쵸슈의 연합을 이루어내 막부를 쓰러뜨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료마 역시 여자 문제는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가사키에서는 주로 마루야마[丸山]의 화월루(花月樓) 등의 게이샤[藝者]를 일종의 현지 처로 삼아 상대하곤 하였다.


료마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여자가 요로[御龍]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여자는 성깔이 대단해서 야쿠자의 멱살을 잡고 싸우기도 한 맹렬여성이다. 료마는 이 여자를 교토 후시미 데라다야에 맡겨놓고 왔다 갔다하며 성욕의 배출구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정식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료마가 암살되자, 이 남자 저 남자 섭렵하다 마지막으로 어느 행상인과 붙어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그밖에도 료마에게는 검도 스승 치바 사다키치의 장녀인 사나[佐那]와 토사근왕당 시절의 동료의 여동생인 히라이 가오[平井加尾] 등 방사(房事)를 즐기는 여인이 많이 있었다.


1867년 4월, 료마와 가이엔타이[海援隊]가 오오즈번[大洲藩]으로부터 보름 동안의 사용료 5백냥을 지불하고 빌린 작은 160톤짜리 기선 이로하마루가 오사카 방면으로 항해중 세타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짙은 안개로 기슈[紀州]의 887톤짜리 메오코마루[明光丸]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료마가 기슈번이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토사와 쵸슈가 연합하여 공격을 한다는 등 협박을 하자, 보수적은 기슈번은 체면 때문에 조용히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배상에 응하였다. 배상금은 당초 8만 3천냥으로 합의했으나 이로하마루도 현등(舷燈)을 달지 않은 잘못을 참작해서 7만먕으로 결정되었다.


료마는 7만냥 중 절반 정도를 오오즈번에 갚고, 나머지 금액중 1만 5천 3백 40냥을 가이엔타이에 주었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오늘날의 ‘자해공갈단’이나 ‘보험사기단’의 수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또한 1만 5천냥은 료마와 대원들이 나눠 나가사키의 마루야마에서 질펀하게 매음(賣淫)행위를 하는데 사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료마가 같은 해 11월 교토의 오미야에서 암살되자, 아마 일전의 ‘이로하마루 사건’의 원한으로 기슈번의 자객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16명의 대원이 기슈번 숙소인 텐마야[天滿屋]로 쳐들어가 4명 사망, 4명 중경상의 참사로 이어졌다. 결국 자기들이 기슈변에 대해 공갈, 협박을 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⑷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기요가와 하치로[淸河八郞]


기요가와 하치로는 1830년 데와[出羽] 쇼나이번[庄內藩] 기요가와무라[淸川村]에서 호농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요가와 하치로는 14세 때 아버지가 준 두 냥의 돈을 갖고 항구도시 사카다[酒田]의 유곽(遊廓)을 찾아 다카요[高代]라는 창녀(娼女)와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작부터 재미가 좋았는지 하치로는 평생 온갖 여자를 섭렵하게 된다.


18세가 되자 하치로는 3년간 공부를 하고 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달랑 한 냥 삼 푼의 돈만 지닌 채 고향을 뛰쳐나왔다. 쇼나이번으로부터 에도까지 가는데는 보통 보름이 걸린다. 그런 형편인데도 이틀째에는 벌써 여자를 끼고 잔다.


에도에 도착해서는 돈을 한 냥 빌려 그 유명한 요시와라[吉原]에 가서 에도 입성 신고를 하였다. 처음 온 에도지만 호농인 부친에게 신세진 사람들이 있어 돈도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빈틈이 없는 것이다.


하치로는 생활이 곤궁해지자 친척의 소개로 쌀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한편, 도죠쥬쿠[東條塾]에서 공부도 시작했다. 마침 도죠쥬쿠 옆집이 유명한 북진일도류 치바 슈사쿠[千葉周作]의 도장이므로 입문하여 검술도 배우게 되었다.


1848년 갑자기 동생이 죽자 일단 고향으로 돌아온 하치로는 1년 반 정도 머무르게 되는데, 그 동안에도 끊임없이 창녀(娼女) 사귀기를 하더니 기어코 성병(性病)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성병 치료차 온천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질병 치료차 온 오키요[御淸]라는 여자를 낚는다.


어떻게 기요가와 하치로의 여성편력을 자세히 알 수 있냐 하면 하치로는 일기에 자신이 상대한 여자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치로만 특별히 호색한(好色漢)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 일본의 청장년 남자들의 일상적 섹스라이프(Sexlife)로서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1858년 안세이노 다이고쿠가 일어나 여론에서 양이론(壤夷論)이 우세해지자, 당시 쥬쿠를 운영하고 있던 하치로도 학생 모집에 유리한 존황양이론을 주장하였다.


하치로는 1861년 5월 요정(料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비가 벌어져, 상인 하나를 무례하다는 이유로 칼로 참살했다. 그는 동북지방을 전전하며 도망을 다니다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생활을 통해 그는 큐우슈우의 과격파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다.


당시 막부에서는 낭인(浪人)을 모집하여 교토의 불평분자들을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63년 1월의 일이다. 낭인들의 반응은 대단해서 하치로를 비롯해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 사사키 타다사부로[佐佐木只三郎] 등 234명이나 모여들었다.


일행이 교토 신토쿠지[新德寺]에 모였을 때 기요가와 하치로가 앞에 나와 천황의 칙명을 받들어 양이(壤夷)에 매진하자는 ‘존화양이론(尊皇壤夷論)’을 역설하였다. 234명의 낭인 가운데 막부를 지지하는 곤도 이사미[近藤勇]·세리자와 가모[芹沢鴨] 등 13명만 교토에 남고 나머지 220여명은 에도로 돌아갔다. 이때 교토에 남은 낭인들이 만든 것이 바로 ‘신센구미[新選組]’라는 것이다.


기요가와 하치로 등은 양이 활동의 일환으로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 습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863년 4월 13일, 하치로는 같은 낭사대(郎士隊) 동료였던 타다사부로의 칼날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⑸ 뇌물수수의 명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부하 기병대원이었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교묘한 수단으로 출세를 거듭했다.


아리토모는 젊었을 때 농민이 경작하는 전답의 예상수확량을 조사하는 세무서의 말단 조사원이었다. 비룩 말단 조사원이긴 하지만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조사원이 심술을 부리면 평년작이 풍년이 되고, 흉작이 평년작으로 기록되어 엄청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원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얼굴이 반반한 딸이 있으면 하룻밤이라도 재워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젊어서부터 그런 달콤한 맛을 즐겨온 아리토모가 육군경(陸軍卿)이 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결국 일본을 군국주의(軍國主義) 파시즘 체제의 길로 이끌어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도쿄 도심 근처 메지로다이[目白臺]라는 곳에 춘산장(椿山莊)이라고 하는 넓다란 정원에 둘러싸인 연회장이 있다. 이 춘산장이 바로 메이지시대 아리토모의 사저였던 곳이다. 아리토모는 ‘전형적인 졸부의 취미’답게 9개의 별장을 소유했다. 그것도 모두 넓은 부지 위에 웅장한 건물로 지어진 별장들이다. 춘산장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야마시로야 가즈스케[山城屋和助]라는 자가 있었다. 가즈스케 역시 아리토모와 마찬가지로 다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원 출신으로 1868년에 일어난 무진전쟁(戊辰戰爭)에 참전하여 수훈(殊勳)을 세웠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육군성의 어용상인(御用商人)이 되었다.


당시 병부대보(兵部大輔)가 기병대 시절의 전우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가즈스케는 아리토모를 통해 융자받은 육군성 공금으로 생사(生絲) 투기를 하다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사법경(司法卿)인 사가현 출신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아리토모를 제거할 좋은 기회로 보고 육군성을 조사하려 하자, 야마가타는 가즈스케에게 1872년 말까지 변제하도록 종용했다.


마침 1872년 말은 태음력(太陰曆)에서 태양력(太陽曆)으로 바뀌어 음력 12월 3일이 1873년 1월 1일이 되었다. 즉 연말이 거의 한달 가까이 당겨진 것이다. 도저히 변제를 할 수 없게 된 야마시로야 가즈스케는 아리토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증거서류 일체를 불태우고 육군성 안에서 할복자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야마시로야 사건’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원래 ‘뇌물수수의 명인’이며 더불어 공금횡령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정치인들이 아리토모의 세금공제, 정치헌금 조작 등의 수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니까.


아리토모는 두 번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두번째로 수상이 된 것이 1898년이다. 이때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 황제가 26만엔, 궁내성(宮內省)에서 72만엔의 공작자금이 나왔다. 오늘날의 우리 화폐가치로 하면 5백억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 돈 중에서 아리토모가 수취하여 은행에 불입한 것은 겨우 8만 5천엔이었다. 나메지 90만엔 가까운 돈이 아리토모의 호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미타니가[三谷家]는 12대나 계속된 에도 최고의 금은을 취급하는 환전상(換錢商)이었다. 미타니는 초슈번의 환전업무를 맡고 있었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육군성의 어용상인이 되었다. 미타니는 아사쿠사에 저택을 하나 소유하고 있었는데, 아리토모는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 와서 ‘게이샤들과의 밀회’를 즐기며 별장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모든 비용을 미타니가 부담했음은 물론이다.


어느날 미타니가 보관하고 있던 육군 공금중 현금이 부족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아리토모는 역시 ‘야마시로야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미타니를 도와주기는커녕 변상하기를 명령하였다. 재미는 재미대로 실컷 보고 정작 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는 나 몰라라 오리발 내미는 재주는 오늘날의 부패 정치인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급해진 미타니는 부족한 금액의 담보로 도쿄 시내에 보유하고 있던 50개의 소유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정부 측에서는 육군성과 대장성(大藏省)이 이 문제를 검토했다. 보통 사람들의 머리로 생각하면 부족금액에 대한 대체물건의 가격이 높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은데, 정치인들의 계산방법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우선 미타니가 내놓은 토지를 미쓰이구미[三井組]가 수취하고, 미타니의 부족금액을 미쓰이구미가 갚는다. 그리고 미쓰이구미가 새로이 육군성(陸軍省)의 어용상인이 되고, 60만엔을 10년 거치 무이자 융자로 받았다.


당시의 대장경(大藏卿)은 쵸슈 출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다. 가오루는 미쓰이 재벌의 최고 고문을 역임한 ‘미쓰이 맨’이다. 결국 같은 쵸슈 출신인 아리토모와 가오루의 합작으로 미타니는 몰락하고 미쓰이는 재벌의 길을 튼튼하게 다진 것이다. 아리토모는 단지 ‘힘이 다한 미타니’라는 말로부터 ‘싱싱한 미쓰이’라는 말로 갈아탄 것뿐이었다.


⑹ 평생의 친구를 배반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涌]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츠마[薩摩] 출신으로 정한론(征韓論)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같은 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다.


일본에서는 흔히 도시미치하면 도막(到幕)을 실현한 혁명운동가이며 메이지 신정부의 핵심 정치인으로, 구체제의 파괴와 신체제의 건설이라는 일견 모순되는 대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로 높게 평가한다. 특히 국내 학계에서는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의 이미지가 커서 다른 인물들에 비해 호의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로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였을까? 아니다. 오쿠보가 다카모리 등의 정한론을 반대한 것은 명목상으로는 ‘내치우선(內治優先)’이었지만 사실은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견제심리 때문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1년 11월 11일부터 서양 제국(諸國)과의 불평등조약 개정과 선진국 시찰 목적으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단장으로 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48명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1년 반의 해외시찰을 하고 1873년 5월에 귀국하였다.


도시미치가 귀국해 보니, 조선왕조가 메이지 신정부의 국교 교섭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이 무례한(?) 행동을 징벌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의 정한론이 대두되고, 다카모리를 문죄사(問罪使)로 파견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오쿠보 도시미치는 정한론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라이벌 관계인 다카모리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고 자신의 입지는 좁아질 것을 우려해 반대를 한 것뿐이다. 그가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듬해 바로 알 수 있다. 1874년, 대만 현지인이 일본 어부를 살해한 사건에서 발단된 대만출병(臺灣出兵)을 적극 지지하고, 도시미치 스스로 전권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50만냥의 막대한 배상금까지 받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정한론의 폐지로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불만을 품고 병력을 모을 때, 사츠마에 직접 내려가서 위로하며 손을 잡고 설득했더라면 서남전쟁(西南戰爭)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도시미치 자신도 1878년 5월 도쿄의 기오이자카[紀尾伊坂]에서 자객의 손에 암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미치는 오히려 다카모리의 친동생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설득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어 평생의 친구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치는데 앞장서게 하였던 것이다.


⑺ 메이지유신의 원인


이제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주도권은 언제나 권력자의 손에 쥐어져 왔다. 피지배층인 일반 민중이 교육 등을 통해 권력자의 모순을 일치단결된 힘으로 변혁시키려는 운동을 ‘혁명(革命)’이라고 하며, 이러한 혁명이 있는 시대를 근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도 중세 말기의 전제왕권을 무너뜨리고 근대적 국가로 탈피하기 위한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같은 성격의 혁명일까? 그렇지 않다. 메이지유신은 근대적 국가로 탈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혁명도 아니고, 일반 민중의 힘이 하나가 되어 밑으로부터 올라온 혁명도 아니다. 극히 개인적인, 또는 지역적인 이익 추구를 위한 파벌 투쟁의 산물일 뿐이다.


메이지 유신의 원인(遠因)을 찾으려면 4백여년 전의 세키가하라전투[關ケ原戰鬪]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모순이 표면화하게 되었다. 1600년 천하의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東軍)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서군(西軍)이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에서 싸움을 벌였다. 처음에는 미츠나리의 서군이 우세했으나 미츠나리의 휘하에 있던 다이묘[大名]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의 배신으로 도쿠가와의 동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주모자급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사형당했고, 나머지 서군의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 또는 축소당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군의 모리가는 종래의 1백만석에서 36만석으로 깎이고, 영지도 히로시마를 잃고 야마구치현의 하기로 옮겨졌다. 바로 초슈번인 것이다. 쵸슈번으로서는 260여년의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원한을 간직해온 것이다.


토사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토사번의 영주인 쵸소가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영지에서 쫓겨나고, 24만석의 다이묘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內一豊]로 교체되어 버렸다. 가즈토요는 모리치카의 유신들의 반항이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하여 쇼야 등 현지 관리를 등용하였으나 야마우치가의 후다이 가신과는 엄연한 차별을 두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공부를 잘 해도 출세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결국 막부 말기에 권위가 약화되고 규제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탈번(脫藩)을 하는 무리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나 다케치 즈이산 등이 존황양이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토사근왕당을 만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츠마번의 경우도 번주(藩主)인 시마즈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했으나 용서를 받고, 77만석의 도자마[外樣] 다이묘로서 존재하였다.


막부 말기의 번주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는 당초 공무합체파(公武合體派)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에 의해 도막(到幕)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또한 사츠마번은 막부의 명에 의한 대규모 하천공사 등으로 5백만냥이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츠마번은 막부에 대한 원한과 빚을 탕감해 버리기 위해서도 막부를 쓰러뜨리는데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가(公家)는 가마쿠라 막부 이래 ‘무장집권시대(武將執權時代)’가 계속된 7백년 가까이 권력과는 무관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19세기 무렵의 공가의 생활은 천황의 측근인 섭관가(攝關家) 정도가 1~2천석, 말단 공가는 10~20석밖에 안된다. 그것으로 생활이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음악, 서도, 시 등을 가르치는 부업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가슴속엔 무가정치(武家政治) 이전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찬란했던 귀족문화의 향수가 가득해, 언젠가는 무인들의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이 얼마나 가득했을까?


어쨌든 이처럼 처음에는 거창하게 ‘존황양이(尊皇壤夷)’의 기치를 내걸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사츠마, 쵸슈, 토사 출신 하급무사들의 광기(狂氣)가 결과적으로 막부를 쓰러뜨린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진기리[異人斬] 등 오늘날 이라크의 과격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짓과 유사한 야만적인 잔혹행위를 하던 자들이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바꾸어 ‘양이’는 커녕 ‘서양에서 온 외국인은 대환영’ 분위기로 싹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메이지유신의 원훈들은 실크햇에 모닝 코트, 서양식 구두를 신고 첩(妾)을 옆에 끼고 이두마차(二頭馬車)를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냈다.


이는 결국 도쿠가와 막부가 행한 개국·개항이 옳았음을 의미한다. 개국론자, 개항론자이기 때문에 역적이니 매국노 취급을 받으면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야말로 실질적인 피해자인 셈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사츠마, 쵸수, 토사의 세 번진(藩鎭)을 중심핵으로 한 번벌정부(藩閥政府)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진이 요직을 나누어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쵸슈번의 활약은 눈부시다. 1885년부터 1894년까지 100년 동안 쵸슈 출신 내각총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츠라 타로[桂太郞],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등 7명이나 되며 집권기간도 33년이나 된다. 그야말로 새로운 문벌의 탄생이며 또 다른 봉건제도의 부활인 것이다.


[우리역사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