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수호

독도는 일본에게 영원한 꽃놀이패다

한부울 2008. 7. 31. 23:34
 

박재목 칼럼-독도는 일본에게 영원한 꽃놀이패다

[데일리안] 2008년 07월 21일(월) 오전 08:19


정말 잘 맞았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이 어떻게 또 다시 있을 수 있는가? 쇠고기 괴담과 각종 정책 파동으로 대통령과 정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절묘하게 일본은 해설서, 미국은 독도 명칭 지우기에 공동보조를 잘 맞췄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일본의 조용하고 숨은 책동의 결실이었다. 이렇게 될 경우 누가 봐도 독도는 일본해에 포함돼 있는 일본 군도의 작은 무인도 암석으로 여겨지게 된다.


최근 비밀리에 미국지리원(NGA)과 미국지명위원회(BGN)는 독도 명칭을 ‘리앙쿠르 바위(Liancourt Rocks)’로 변경했다. 암석(Rocks)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의 어느 누구하나, 전문가 어느 누구도 이를 지적하거나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독도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미국이 주도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갑자기 6차 초안부터 태도를 돌변하여 일본 영토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도를 미국의 레이더 기지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라는 일본 정부의 로비에 넘어간 결과였다. 다행히도 영국 등의 반대로 강화조약 최종안은 독도(리앙쿠르 암석)를 한-일 양측 영토 조항에서 모두 삭제했지만, 독도의 슬픔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다.


안타깝지만, 지난해 5월부터 세계 최대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독도’를 ‘리앙쿠르 암석(Liancourt Rocks)’으로 주제어를 바꾸었다. 이는 세계적 집단지성의 관점을 바꾼다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불리함을 몰고 왔다. 여기에 기어이 미국 의회도서관까지도 독도를 일본해의 단순한 바위(rocks)로 기술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중간에 우리 교민의 지적으로 일시 보류되었다.


그러나 워싱턴 의회도서관의 ‘독도’ 검색주제어 변경은 그들 의도대로 곧 바뀔 것이 분명하다. 이를 두고 우리 언론은 “두 명의 한국계 여성이 ‘독도’를 구했다.”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은 속으로 얼마나 웃었겠는가? 재빠른 정보수집, 신속한 외교적 대처, 민간차원 대응 노력, 자료로 지리전문가 설득, 지도 작성문제는 국익과 국제분쟁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 정부와 전문가들의 연합적 노력 등은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모두가 다 지속적인 필수 사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일본과 미국은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독도 명기’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번에도 또 보수파 우익 국민들의 압력 핑계를 들었다. 이런 전략에 말려 권철현 주일대사는 이번 사태 원인을 일본의 보수 우익화, 후쿠다 총리의 지지율 급락, 연금문제와 고유가 등 국내적 사안들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국내문제 돌파구로 독도 문제를 이슈화시켰다는 언급은 틀렸다. 오래전부터 일본에게 독도 문제는 정치외교 관점이 아니라, 국시(國是) 차원에서 군사적․경제적 생존의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미 독도는 모든 일본 국민들의 변할 수 없는 관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불행하게도 절대로 한국에게 뺏길 수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집착은 집요했다. 전략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충분히 불러일으켜 독도를 국제분쟁지역으로 이슈화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그래서 이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고 그들이 먼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눈 뜨고 땅 뺏기게 생겼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공급경제정책을 “돌팔이 경제정책이기 때문에 일시적 유행으로 끝날 것이다.”라고 비판한 그레고리 맨큐(GREGORY N. MANKIW)는 경제학의 10대 원리에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선택의 대가는 그것을 얻기 위해 포기한 그 무엇이다.”고 언급했다.


바로 기회비용을 일컫는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4월 양국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자며 일본 총리에게 “과거사는 묻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일본을 용서하는 것이 국민의 뜻이다.”를 언급하며 동반 신뢰를 주문했다.


그러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기회비용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독도의 눈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 다시 불거진 일본의 독도 망상(妄想)에는 변할 수 없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일본은 우리가 아무리 반대하고 강경한 비난을 퍼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를 번복하거나 사죄하는 대신,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국시(國是)의 의식화 교육을 더 강화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는, 소위 ‘꽃놀이 패‘ 외교 마찰이기 때문이다. 군사경제적 이점 외에도 일본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군대 창설 등의 헌법개정 여론 몰이에도 가장 적합한 이슈가 바로 독도다. 또한 러시아와의 북방 4개 섬과 중국과의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분쟁 협상에도 적절히 써 먹을 수 있다.


둘째, 현 정부도 이번 사태를 쇠고기 파동, 언론대책, 환율방어 등 물가대책, 경제위기 고조, 북한 정권의 금강산 살인 등의 어려운 난국 타개를 호도하는 일시적 호재로 접근하면 안 된다. 그래서 겉으로만 ´강경대응´을 선언하지 말고, 전 국민의 의사와 총화를 결집시켜 국가의지를 전략적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독도 망상(妄想)에 대처하는 변할 수 없는 두 가지 인식


일본 대한제국 침탈의 전초전이자 을사늑약의 서막이었던 <한일의정서>가 1904년 2월 23일 일제의 강압으로 조인되었다. 대한제국은 14일 동안이나 이를 백성들에게 숨길 수 밖에 없었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내정간섭, 외교권 침해, 군사기지 제공과 점유 등을 명시하고 있어 고종과 조선 백성들은 모두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이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 기간인 3월 17일에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나타났다.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임권조)에게 내뱉은 그의 일성(一聲)은 “조선의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다.”였다.


그리고 통신망 장악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땅, 값이 나가는 땅, 황무지일지라도 장래 용도가 있는 땅은 일본인들이 쓸 수 있도록 미리 강탈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본의 침탈은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한 토지 강제수용으로 본격화되었다.


또한 그는 러일전쟁도 언급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전비를 빌려 쓰고 있기 때문에 단기전으로 러시아를 이겨야 한다. 그러면 조선을 수중에 넣는 것은 간단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 단기승리의 절박한 심정을 이같이 토로하고 3월 26일 떠났다.


조선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


러시아의 팽창을 두려워한 미국과 영국은 비밀리에 일본 지원을 미리 약속했다. 이를 확인한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러시아 함대 극동기지인 뤼순항을 기습 공격했고, 9일에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2월 10일에서야 대러 선전포고를 했다.


이보다 앞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협박으로 러일전쟁 승리의 필수사항이었던 <한일의정서>를 2월 23일 강제로 체결했다.


일본은 당시 최강이었던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망(亡)하려고 그랬는지 러일전쟁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이를 만회하고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포위된 극동기지인 뤼순 항을 구하기 위해 발틱함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발틱함대가 1904년 10월 15일 리예파야항(港)을 출항하여 지구반대편으로 항해하며 대장정을 하고 있을 무렵, 이미 동아시아에서의 전황은 끝이 난 상태였다.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괴멸되었고 러시아 육군은 퇴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려 3만 7000km 해상을 9개월에 걸쳐 항해한 최악의 상태와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던 일본 연합함대와의 싸움은 이미 결판이 나 있었다. 러시아는 발틱함대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38척 중 겨우 2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다. 1905년 5월 27일~28일 러시아는 일본함대와의 전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그 최종점이 독도 인근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독도의 군사전략상 중요성 간파, 포기 못해


처음에 일본도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조선 반도와 함께 삼킬 것을 획책했다. 단순히 목재채벌과 어업이익을 약간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독도의 군사적․전략적 이점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발틱함대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 영토편입 필요성을 착안했다.


일본 군부는 발틱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주목했으며, 이는 결국 러시아 함대를 최종적으로 궤멸하는 장소가 독도근해라는 점에서도 명백했다.


그래서 수산업자인 나카이요사부로(中井養三郞)를 시켜 일본 정부에 형식적인 독도 어업독점권을 청원하도록 사주했다. 나카이는 1904년 9월 29일자로 ´리앙쿠르섬 영토 편입 및 대하원(貸下願)´이라는 민원서류를 접수시켰다.


일본은 독도를 일개 불모의 암초(暗礁)로 치부하면서, 무주지(無主地) 암석(Rocks)으로 돌변시켰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시국이 독도 영토편입을 급무(急務)로 한다.”라는 국시(國是)를 정했다. 그래서 대한 침탈의 위장막으로 외무성과 농상무성, 그리고 군부가 협작(脅作)하여 ´무주지 선점론´을 강용하면서 독도 강제편입 논리를 개발했다.


처음에 독도의 강제 침탈 목적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러시아 발틱함대에 대비에 있었던 것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독도의 가치는 군사적․경제적 가치를 넘어 이제는 일본의 국시(國是)를 아우르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 독도를 강제 점유의 영토 야욕에 대한 다른 열강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치밀한 대비로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라는 방식을 채택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은 내각의 결정을 거쳐,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일본의 영토로 일방적으로 편입한 후, 1906년 3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사실을 울도 군수 심흥택에게 알렸다.


지난 독도 대책은 당시 상황을 적용하여 판단해야


일본은 6․25 남침을 틈타 본격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또 다시 주장했고, 이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일본의 망상(妄想)이자 제국주의 오만(傲慢)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제2차 대전 종전협상 중 독도 독립을 보장한 협상과 누락된 내용이 있다고 일본은 주장하고 있으나, 그 당시 대일평화조약에 언급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는 누가 보아도 한반도에 종속된 대표적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었다.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될 수 밖에 없다. 1952년 1월 18일에 포고된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과 1954년 8월 독도 등대를 세운 것은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한 것이다.


또한 1965년의 한일 수교회담 때 ‘제3국 조정안’ 수용과 평화선을 지운 것도 영토 논쟁의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1996년 1월 UN 신해양법을 채택 후 동해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을 1997년 7월 ‘독도 기점’ 대신 ‘울릉도 기점’으로 선언한 것도 독도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도 독도를 포기하거나 일본을 도와 준 것은 분명 아니다.


일본은 2005년 양국 `우정의 해´를 맞아 또 신뢰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사과 요구를 `국내 정치용´으로 매도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의 반발은 `일과성´이기 때문에, 지방의회가 하는 일에 중앙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며 조례제정을 사실상 조장하고 나섰다.


독도는 당연 우리 땅이라는 안락 위에 잠자면 안 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독도는 당연 우리 땅이라는 안락 위에 잠자면 결코 안 된다. 1903년의 ‘한해통어지침’과 1904년 ‘최신한국실업지침’ 등 당시 일본의 대한 진출 가이드북에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표기하고 있다고 지금도 당연히 한국 땅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


1900년 10월 25일의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울릉도 명칭과 관할 구역을 공포한 ‘관보’ 제1716호가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의 소위 독도 영토편입 결정보다 5년 전이라고 국제법 차원에서 한국의 영유권이 더 명확하고 기속력을 가지는가?


일제 약탈이 극심하던 1936년에 일본 육군성 공식 발행 지도인 ´지도구역일람도´에 독도가 조선구역으로 아주 선명하고 명확하게 나와 있다고 국제사회가 당연히 한국 땅이라고 지지해 줄까?


광복 후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부지령 제677호에 독도를 울릉도 및 제주도와 함께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켰다고 1948년 8월 15일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주장할 수 있을까? 1948년부터 미 공군이 독도를 폭격 연습구역으로 사용하다가, 1953년 2월 27일에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미 공군의 연습구역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 국제법적 해석으로 우리 땅이 될까?


일본의 국제법적, 학문적 논리에 매도당하지 말아야


그들은 이미 러일전쟁 중인 1904년에 독도의 군사전략상 중요성을 간파하고 ‘시마네현 고시’라는 방식을 통해 독도편입 전략을 세웠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6․25 남침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국제회의인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또 다시 미국과의 공모 하에 독도 편입을 시도했다.


이 회의는 모든 안건을 미국 초안을 놓고 심의했지만, 연합국의 반대로 독도 강탈은 무산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우리의 IMF를 빌미로 차관 등의 조건을 달면서, 1998년 1월에 기존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무협정 상태를 만들고 한국 어선을 나포해 갔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한 것은 당연하다고?


이런 일련의 야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보고서도 아직도 일본의 저의를 간파하지 못하는가?


독도를 러시아의 북방 4개섬과 같은 차원에서 교육시키겠다는 야욕을 보면서도, 아직도 이는 일본의 꾸준한 보수화 경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독도 명기´ 결정으로 앞으로 일본은 후회할 것이라는 아둔한 분석과 무지를 내 놓고 싶은가?


일본은 그들의 국시(國是)와 국익(國益) 앞에서는 국민․정부․언론․정당․이익단체, 그리고 남녀노소 전부가 보수를 넘어 국수(國粹)로 돌변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독도 문제를 총리 지지율, 북핵문제, ‘외교와 교육은 별개’라는 그들의 기만전술에 말려 실효성 없는 헛발질을 계속하고 싶은가? 정말 이렇게 무지와 아둔함을 보이면 앞으로 독도를 두 눈 뜨고 멍청하게 뺏길 수 있다.


일본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는 국시(國是) 이념서


아직도 우리는 일본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가 무엇인지도 일반국민들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독도 문제에 대해 무던히도 바보였고, 아둔했고, 그들에게 허점을 보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동안 일본의 ´독도 명기´는 충분히 예견되었다. 일본은 이미 2006년에 문부과학성 검정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명기하고 지금도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일본은 유엔, 국제수로기구(IHO) 등 관련 국제기구 등을 통해 ‘동해’를 ´일본해´로 바꾸는데 전 국민이 총력을 다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동해’ 이름 지키는데 무엇했던가?


이제 동해는 한국만 부르는 이름일 뿐, ‘일본해´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명칭이 되고 말았다. 중국 지도에도 동해는 일본해로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지난 2002년 IHO 총회에서 일본해 표기를 삭제한 채 부쳐진 동해 명칭병기 표결 찬반투표에 강력 반발했다. 그래서 동해 명칭병기 채택이 유리해지자 일본은 압력을 가해 표결을 중단시켰다. 그 당시 일본은 동해 명칭이 병기될 경우 독도 영유권 주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영토 외교는 신뢰와 희망이 아니라 계산과 전쟁


이처럼 외교란 가장 현란한 미사여구로 겉을 위장하고, 가장 악랄한 손익계산으로 안을 보호하는 두뇌전쟁이다. 그래서 외교에서 가장 저지르기 쉬운 아둔한 짓거리는 미래지향, 신뢰구축, 항구평화, 동반발전이라는 상대국의 미사여구를 믿는 것이다.


역사를 한번 살펴보라. 모든 국가나 민족의 궤멸 뒤에는 반드시 상대국의 기만전술에 속아 방심하다가 쓰러진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조금 덜 먹고,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도 못 먹거나 다 뺏기는 것이 실패한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지금은 지난 정권과 일본을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난 반성은 좋다. 미래지향적 외교를 하기 위한 진지한 자기성찰도 좋다. 건국 60년 독도 실정과 현 정부의 원칙도 철학도 비전도 없는 허망한 ‘실용외교’라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총화의 단합된 의지를 먼저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하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영토 문제는 더 소중하다고?


일본은 매년 ‘다케시마 영유권’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은 치사하게 독도 문제와 재일교포 선거권을 연계하면서, 일본 본토와 독도를 잇는 해저 대륙붕을 유엔에서 인정받자고 외치며, 일본의 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는 단순한 주장이나 찔러 보는 차원이 아니다. 바로 국시(國是)와 생존의 문제로 결연한 의지를 갖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전략으로 덤빈다.


반면에 내부적으로 한국을 배려하거나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 고유영토인 독도를 무력으로 확보하고 있는 한국 때문에 영해권, 어업권에서 대단한 손해를 입고 있다고 생트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편입시도는 국시(國是)와 국민의식화 문제


이런 제반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전략적으로 대처하고 단호한 국민총화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눈 뜨고 우리 땅을 뺏길 수 있다. 그래서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이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은 네덜란드 헤이그였다.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일본과 가장 친한 서방국가였다. 난학(蘭學)은 일본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런 친일 본고장에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모든 국가가 일본에 매수되어 있는 판국에 누가 우리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등방문은 애초부터 고종의 밀사 전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일부러 방조하다가 고종 폐위에 적극 활용했다.


제2 헤이그 밀사 실패 전철 밟지 않도록


따라서 이번 일본 정부의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북방영토와 마찬가지다.”라고 명기한 사건을 통하여 이를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에는 몇 가지 새로운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첫째, 이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는 일본의 국시(國是)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웃한 일본은 과거 동양의 해양세력 본산이라는 자부심과 자원빈국의 폐쇄적 열등감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에 ‘원료선의 안전망 확충’을 제1의 국시(國是)로 신봉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자원민족주의와 에너지국가주의가 심화되는 중대한 시기에 독도는 북태평양과 동해를 경영하는데 가장 중요한 해상요충지이자, 대중국과 대러시아 ‘원료선의 안전망 확충’ 차원에서 배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해설서 명기는 이러한 국시(國是)로 국민을 의식화시켜 국내여론이 성숙했을 때, 무력으로라도 독도를 빼앗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둘째, 지구상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에 동조하는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국가전략상 독도가 중국과 러시아와 영토를 맞대고 있는 한반도 보다는 일본의 소유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중국은 대만과 양안관계가 성숙되면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댜오위다오(釣魚島ㆍ일본명 센카쿠열도) 반환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이때 일본은 독도 카드를 들고 새로운 노림수를 모색할 것이다.


러시아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쿠릴열도(북방 4개 섬) 반환 교섭에서도 일본은 독도 문제와 연계하여 적정선에서 타결할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한국보다는 일본과의 통상 문제를 더 긴요하게 고려할 것이다.


일본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국이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전략을 독도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과 국제사회를 이용하여 중국과 러시아와 조용히 협상을 하고, 독도를 혼자 차지라는 방향으로 국시(國是)를 정해 국민을 의식화시키고 있다.


셋째, 일본의 전략에 말려 일부 국제법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에 끌고 나가면 절대 안 된다. 또한 일부 일본 학자들의 ‘독도는 한국 섬’이라는 주장에도 절대로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상태로 한국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할 만한 가능성은 아주 적다. 또한 땅 주인이 먼저 소유권 소송을 내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의 어떠한 분쟁 야기와 소송에도 응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지금 전 세계 정부와 국제기구, 민간단체를 상대로 암암리에 무궁무진한 ´실속´을 챙기고 있다.


독도 문제에 있어 한일 신시대는 결국 말 뿐


그들은 독도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영토 문제는 더 소중하다고…. 독도 문제에 있어 한일 신시대는 결국 말 뿐이다. 일본은 끝없는 독도 야욕을 부리고, 한국은 독도 명기 강행에 분노로 뒤덮였다.


이 와중에 일본 총리는 “독도는 일본 땅이다.”고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는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역사왜곡을 강변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독도 대책은 전국가적․전민족적 차원에서 새롭게 총력을 펼쳐 나갈 필요가 있다.


첫째, 이제 더 이상 지난 정권들의 모든 독도 관련 정책들을 비난하거나 비판만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사학자 등 관련 전문가들도 독도 연구에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고집만 하지 말고, 국가 장래적인 관점으로 이를 끌고 나가야 한다. 따라서 모든 전문가, 관련기관, 기업들까지도 유기적인 전략체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든 지난 정책들을 그 당시의 ‘상황 이론’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그 상황을 타개하는 방향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앞으로 일본은 파상적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리 그 전략을 간파하는 ‘민-관-산-언-교포’의 총합적 연계대응 시스템을 빨리 구축해야 한다.


둘째, 실효적 지배는 자국영토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는 안일한 권리 위에 잠들지 말아야 한다.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역사적․지리적 증빙자료를 챙기고, 이를 우리 땅이라는 적극적인 홍보를 국제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 손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지 않게 된다.


셋째, 일본의 과거 식민지 시대 만행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갈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는 과제 일제 식민지 침탈의 연장선에서 봐야 하며, 독도 만행도 그런 식민지 제국주의 비도덕․비인간적 약탈이라는 점을 최우선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넷째, 학문적․사료적으로는 현 상황에서 일본에게 불리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에게 이길 수 있는 치명적인 역사지리학적인 대응논리와 국제법학적인 법률논리를 새롭게 개발해야 한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관련 전문가를 시급히 양성하고, 관련 국제기구 고위직에도 전략적으로 진출해야 한다.


다섯째, 일본 국익(國益)에서는 좌익도 우익도 없다. 따라서 일본의 아킬레스건은 과거사라는 망상에 빠져 일본 내 양심세력을 자극한다는 아둔함을 보이면 절대 안 된다.


그들은 당연히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식민지 침탈이나 위안부 문제까지도 영토 확장과 침탈로 보지 않고 대동아 공영이라는 망상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 공조체계 구축은 제2의 헤이그 밀사 실패를 재현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여섯째, "독도는 우리땅이다."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을 세계만방에 체험적으로 알려야 한다. 종합적 관점에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지구상에 독도 문제를 도와 줄 국가나 개인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항상 인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독도를 세계에 알리는 문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관점으로, 우리 민족보전 차원에서 억척스럽게 밀고 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독도를 종합 해상관광지로 개발,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정부 차원에서 유치하여 그들을 원군(援軍)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섬에 동굴을 파고 그 안에 세계적인 해상 호텔과 내부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대한민국의 섬으로 인식시켜 나가야 한다.


이러한 독도 유인관광섬을 만드는 전략은 이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일본에게 독도 책동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우유부단한 정책은 빨리 접어야 한다. 인기영합적인 단기적 외교성과를 추구하는 방안으로는 한일 우호관계 증진을 도모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들도 이러한 대일 외교를 더 이상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여러 대책들도 결국은 모두가 군사력, 경제력, 국민단결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외교는 신뢰와 타협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계산과 실리에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일본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이유 명심해야


일본 정부도 독도는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 여기에 일본이 집착하는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끈질기게 독도에 매달리는 이유는 국제법적 해석으로 자신들의 땅이 될 수 있다고 맹신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안타깝지만 실제로 일본의 홍보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호응하는 외국정부나 단체가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지구온난화 기후변화협약 시대에 신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획기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독도 인근에 무한정 매장되어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의 신재생에너지 자원개발 문제도 도사리고 있다. 메탄하이드레이트는 기존 천연가스의 매장량보다 수십 배 많으며 그 자체가 앞으로 석유를 대체할 제3세대의 자원이다.


우리가 이 고체가스층의 존재를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또한 독도 인근의 동해바다는 오오츠크해 한류와 남태평양 난류가 겹치는 황금어장이다. 해상 안정망 확보의 전략적 요충지 이외에도 이 같은 경제적 이점과 영토적 확장이 널려 있는데 어떻게 독도를 일본이 양보할 수 있겠는가?


결국 독도 문제는 한국 국민 대 일본 국민의 끝없는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기려면 국민의 단합된 투쟁 의지를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먼저 선제(先制)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데일리안 박재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