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볜, 조선족은 줄고 한족들로 북적
[중앙일보] 2008년 07월 21일(월) 오전 03:04
17일 오전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도시 옌지(延吉)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룽징(龍井)시 교외로 나가니 가곡 ‘선구자’의 무대인 해란강을 따라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옌볜에서도 비옥하기로 유명한 이 일대에는 벼농사가 한창이었다. 룽징 둥성융(東盛湧)진은 중국 정부에 의해 ‘무공해 쌀 생산 표준화 시범 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쌀농사가 불가능한 척박한 땅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 188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이 땅을 개간하고 쌀농사 기술을 개발하면서 지금은 중국에서도 맛좋기로 유명한 쌀을 생산한다.
조선족들은 조상 대대로 이 땅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겨왔지만 요즘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한족에게 땅을 팔거나 아예 방치하고 한국·일본·미국 등 해외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상당수는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칭다오(靑島) 등 중국의 대도시로 빠져나가 조선족 공동화 현상이 심각하다. 둥성융의 들판에서 만난 한족 농민은 “땅을 버리고 가는 조선족까지 있는 반면 조선족으로부터 농사 기술을 배워 쌀을 재배하는 한족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룽징의 농촌에서 만난 조선족 박모(70)씨는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나가 버려 한족이 농사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밝혔다. 심지어 젊은 조선족 여성이 농촌을 떠나면서 북한에서 탈출해 온 여성들이 농촌에 팔려간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곳은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옌볜자치주 조선족 공동체의 현실을 상징한다. 조선족은 이미 전체 인구에서 소수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족이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이 빠르게 한족으로 넘어가고 있다. 조선족은 1952년 성(省)급 자치구에서 출범해 불과 3년 만에 자치주로 강등됐던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자치주 자격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약 170여만 명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옌볜자치주와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헤이룽장(黑龍江) 등 이른바 만주 땅에 집중 거주했다. 그러나 이제 옌볜자치주에 호적을 둔 조선족은 호적상 8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36%에 그친다. 52년의 62%에서 크게 낮아진 것이다. 그나마 실상을 보면 외지 거주자가 많아 실제 거주자는 훨씬 적을 것이라고 현지 조선족은 전했다. 옌볜의 조선족 학자들은 “한민족이 1880년대 이후 만주로 1차 대이동을 한 뒤 최근에 2차 대이동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족의 쇠퇴와 한족의 진출은 옌지 시내에서 금방 확인됐다. 1998년 처음 옌지에 갔을 때 대부분의 택시기사는 조선족이었지만 요즘엔 열 명 중 8명이 한족이다. 옌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둥팡(東方) 불고기식당 관계자는 “종업원 40명 가운데 90%는 외지에서 온 한족”이라고 말했다.
14일 오후 옌지 시내의 대표적인 상가인 궈푸(國富) 상업 보행자 거리. 이곳 점포들은 간판에 한글을 먼저 표기하고 한자를 아래에 표기해 조선족 자치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조선족보다는 한족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고 있다고 상인들이 전했다. 농촌 현실은 더욱 심각했다. 룽징·허룽(和龍)·안투(安圖)·투먼(圖們) 등지의 농촌에선 조선족보다 한족이 더 많은 부락이 늘고 있다. 조선족이 옌볜을 떠나는 데 대해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외지에서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강하기 때문이란 긍정적 분석도 있다. 그러나 현지의 산업 기반이 부실해 우수 인력 유출을 막지 못하는 정책 부재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옌지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유지인 이모(53)씨는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일군 만주 땅이 한족에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안이 없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뒤늦게 자치주 정부는 지난해부터 경제개발구를 설치해 한국 등 외자기업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옌지와 룽징, 투먼을 통합해 두만강 하류 지역의 대표적인 변경 경제 중심지로 거듭난다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얼마나 실효성있게 추진돼 조선족의 엑소더스를 막을 수 있을지는 낙관하기 어려워 보였다.
옌지·룽징=장세정 특파원 중앙일보
'겨레동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빅토르 초이 (Viktor Tsoi) (0) | 2008.08.19 |
---|---|
남북한-몽골 3자연방통일국가로! (0) | 2008.07.28 |
독도는 한국땅 정대세에 日 네티즌 흥분, 너희 나라로 가! (0) | 2008.07.17 |
음독 베트남 새댁 돕자‥온정 줄이어 (0) | 2008.05.21 |
결혼이민자 11만6,000여명…다문화 사회 '임박 (0) | 200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