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프리메이슨의 역사

한부울 2008. 7. 6. 02:03
 

프리메이슨의 역사


1717 년의 프리메이슨의 설립을 이해하려면 그 언저리 유럽의 상황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17 세기 말부터 18 세기에 걸쳐 있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읽기 좋게 나열해 보자.


1689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 탄생

1694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 탄생

1704 년: 영국 계몽/경험주의 사상가 존 로크 사망

1711 년: 영국 철학자 데이빗 흄 탄생

1712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 탄생

1712 년: 초기 형태의 대기압 증기기관 발명

1715 년: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 세의 사망

1717 년: 프리메이슨 런던 그랜드 랏지 설립

1723 년: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탄생

1724 년: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탄생

1743 년: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탄생

1749 년: 프랑스 천문학자/수학자 라플라스 탄생

1756 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 탄생

1767 년: 하아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발명(산업혁명의 시작)

1776 년: 미국 독립 선언

1789 년: 프랑스 대혁명  


이상의 연표에서 알 수 있는 이즈음의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루이 14 세로 대변되는 유럽의 절대왕정이 약화되며 계몽주의가 퍼져 나감.

2. 기독교 철학을 대신하는 관념론, 경험론 등 근대 철학 대두됨.

3. 증기기관과 산업혁명의 시작 - 자본주의의 기틀이 마련됨.

4. 음악 및 문화의 전성시기

5. 화학, 수학 등 근대 과학이 발전함

6. 미국의 성립과 프랑스 대혁명 등 정치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나타남


프리메이슨'이란 '자유 석공 조합'이란 말로 중세시대 때 석조 건물을 짓는 건축 설계사 조직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 엘리트들을 흡수해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전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음모집단으로 성장합니다. 영화 X-file과 컨스피러시에 나오는 미국 정부를 뒤에서 조정할 수 있는 검은 집단이 바로 이들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인 '푸코의 진자'도 프리메이슨의 원류인 탬플 기사단(Knignts Templar)에 대해 다룹니다.


프리메이슨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과 언론사와 관계가 있으며, 미국의 CIA도 이들 관할 하에 있습니다. 전 세계에 프리메이슨 지부가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는 이미 많은 회원이 있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 신비주의 사상과 기하학, 수 신비학 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전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종교를 통합해 세계정부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의 원류


석공이란 뜻의 메이슨(mason)의 역사는 3000년 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솔로몬은 대 성전을 축조하는데 고도의 기술자가 필요하자 두로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두로왕국은 노아의 저주 받은 아들 함의 자손으로 이집트의 신비주의와 종교를 계승했고, 상업을 번창시켜 그리스와 로마에 영향을 준 곳으로 '페니키아' 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두로의 후람왕은 솔로몬에게 히람 아비프라는 메이슨을 보내는데 그가 성전 건축의 책임자가 됩니다. 수만명의 석공들이 일을 했지만 히람 아비프는 성전 건축이 끝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축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궁금증을 느낀 일부 메이슨들이 히람을 위협해 비밀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그는 죽기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히람이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지킨 비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현대의 건축 설계자들도 놀랄 만큼 정교한 석공 건축술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때 사용된 기하학이 전해 내려온 것이며, 기하학에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착각할 정도의 신비가 숨겨져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수학자를 겸하고 있었고,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는 말을 했고 삼각형의 공식(c2=a2+b2)을 내 놓은 것을 보면 기하학에 우주의 중대한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UFO가 밀밭에 그리는 미스테리 써클도 각가지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페니키아에 있던 메이슨들이 그리스와 로마로 가서 아테네 신전이나 콜로세움 같은 엄청난 건축물들을 남겼고 로마제국이 확장되면서 유럽으로 가 봉건영주들의 성을 쌓거나 교회를 짓게 됩니다. 점차 이들 메이슨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조직을 갖게 되었고, 자유롭게 장소를 이동하며 일한다는 의미에서 프리메이슨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급 기술자로 대우 받았으며 그들만의 신전 안에서 종교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점차 문호를 넓혀 예술인이나 지식인들도 가입할 수 있게 되었고, 철학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본주의적인 중세시대에 이들은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2세기에 예루살렘이 회교도들에게 유린당하자 프리메이슨에 속했던 기사(knight)들이 나서서 성지회복을 외쳤고 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호응하고 교황과 왕과 영주들도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탬플 기사단(Knights Templars)이며 정복하러 간 이슬람에서 오히려 그들의 신비주의 종교를 배워 왔고, 유럽과 중동간의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이들이 유럽 전역에 손을 뻗치고 세력이 강해지자 이들을 후원하던 교황과 왕들은 경계심을 가지게 됩니다.


붉은 십자가가 탬플 기사단의 상징이며, 이 상징을 현재까지 프리메이슨 단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3세는 템플 기사단에게 진 빚을 갚기 어려워지자 탬플 기사단장인 드 몰레를 프랑스로 초청해 화형에 처하고, 전국의 탬플기사단들을 체포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탬플 기사단들은 대부분 무사히 위기를 넘겼으며 이 후로 탬플 기사단은 지하로 잠적해 비밀리에 활동합니다.


프랑스에서 박해 받던 프리메이슨 중 상당수가 영국 스코트랜드로 건너가 세력을 형성해 스코틀랜드파가 되며, 이들이 만든 체계적인 조직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게 됩니다.


영국 잉글랜드에서도 요크파가 결성되 프리메이슨의 양대 산맥이 되고, 스코틀랜드파와 다른 조직 체계를 갖게 됩니다. 요크파는 영국 왕실에까지 침투해 기사단장을 왕족이 맡게 됐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프리메이슨이 주도한 혁명에 휩싸일 때도 무사히 왕실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파는 이집트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33계급으로 나뉘지만, 요크파는 겉으로는 기독교를 내세우며 10등급으로 나뉩니다. 프리메이슨에 입단하면 4등급 부터 스코틀랜드파로 갈 것인지 요크파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에 입단할 때는 기독교인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공개적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사람은 프리메이슨이 라이온스 클럽 같은 친목 단체나 봉사단체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사상에 물들 게 되고 등급이 올라갈수록 자신이 섬기는 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뒤늦게 발을 빼고 싶어도 배신죄는 용납되지 않으므로 조직의 비밀 유지를 위해 모차르트처럼 살해될 수 있습니다. 프리메이슨들은 정치, 사회단체나 기독교에도 깊숙히 침투해 조직을 장악하고 그들의 의도대로 이끕니다. 이미 기독교는 연합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천주교와 통합작업에 들어 갔으며, 감리교와 루터교와 기독교 장로회는 근본적인 믿음을 져 버린지 오래이고,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는 프리메이슨이 만든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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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 상징인 루브르 박물관내의 유리 피라미드-666개의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지상에 새로운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 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  그리고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에 본지는 인류를 파괴해온 악마적 사상들 비밀조직의 실체를 파헤친다. <편집자주>


지난 2001년 6월 23일자 ‘르 피가로’지는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둘째로 큰 지부인 ‘GLDF’(Grande Loge De France·1728년 창설)의 미셜 바라 회장이 6월 16일 전세계 동료들에게 자신이 프리메이슨 단원임을 당당히 밝힐 것을 촉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그는 “오늘날 자유주의 세계를 이룩한 데 일조한 프리메이슨은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사회지도층들의 경우 자신이 프리메이슨 단원임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해 중앙일보는 ‘275돌 맞은 프리메이슨’이라는 제하의 기사(6월 27일자)를 통해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의 프랑스 지부(회원수 12만5,000명)가 2001년부터 꾸준히 커밍아웃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신문은 또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던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를 포함해 90년대 초 독직(瀆職)사건으로 연루됐던 롤랑 뒤마 前 프랑스 외무장관도 프리메이슨 회원이라고 밝혔다.


악마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종단


그동안 일반 역사가들은 프랑스혁명을 1789년 7월 14일부터 1799년 11월 9일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과 구제도를 타파하고 자유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며 기독교의 파괴를 주장했던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종단을 포함해 수많은 프리메이슨 조직들이 있었다. 혁명 당시 이들이 어떤 수법으로 사회의 분쟁을 조장하고 프랑스 국민들을 기만했는지 살펴본다.


일찍이 프랑스내 프리메이슨들은 1307년 필립 4세가 왕권신장의 한 정책으로 프랑스 내 프리메이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지도자인 자크 드 몰라이(Jacque De Molay)와 54명의 단원들을 화형 시킨 이후 줄곧 국왕을 공적으로 간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789년 파리 총종단(Grand Lodge)의 통제 하에 있던 프리메이슨 종단이 2,000여 개가 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혁명이 발발하기 전 프랑스는 국내적으로 루이 14세 후기부터 루이 15세 치세를 통해 대외정책의 실패와 궁정생활의 낭비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당시 정부는 세금의 증가와 국채발행으로 적자를 보충할 뿐 근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왕정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었다.


1774년 무능한 루이 16세가 즉위하여 엄청난 국가부채 상황을 호전시킬 사람으로 독일계 스위스인 네케르(Jacques Necker·1732~1804)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맥네어 윌슨(McNair Wison)은 그의 저서인 ‘나폴레옹의 생애’를 통해 네케르는 프리메이슨이었고 프랑스 경제를 담당한 지 4년 만에 1억7,000만 프랑의 빚을 더 얹어 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왕궁과 정계에 조직적 침투


이외에도 프랑스 궁정에 침투한 프리메이슨으로는 루이 16세의 궁정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였던 알렉산드로 카글리오스트로(본명: 주세페 발사모·유태인) 백작이 있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한 지파인 장미십자회(Rosicrucians)의 단원이었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상단에 새겨진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의 상징-전시안(全視眼·이집트 호루스신의 상징)


현재 장미십자회는 ‘AMORC(Ancient and Mystical Order Rosac Crucis)’라는 국제적인 조직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San Jose)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AMORC는 서신왕래를 통해 조직의 구성원들 사이에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프리메이슨들은 이처럼 프랑스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작업이 충분히 완료되자 2차 계획에 착수했다. 한편 일루미나티 단원들은 프랑스의 총종단을 흡수한 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일루미나티 조직의 창시자)가 즐겨 읽던 루소나 볼테르의 사상을 위주로 합리주의와 평등주의 사상을 불어 넣었다.


이외에도 일루미나티는 프랑스의 그랜드 오리엔트(Grand Orient) 종단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해 샤트레 공작, 에갈리트와 같은 프랑스내 프리메이슨들을 종단에 흡수했다.


이들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의 경우 자신의 하수인들을 시켜 양곡을 대량으로 구입한 다음 외국으로 빼돌리거나 창고에 쌓아둠으로써 프랑스에서 양곡 품귀현상을 만들고는 국왕의 실정으로 양곡이 모자란다는 소문을 일반인들에게 퍼트렸다. 당시 이 사실을 몰랐던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루이 16세에 대한 원망이 높아졌다.


한편 1787년 2월 프랑스의 귀족들은 금융 감사원장의 소집을 받았다. 귀족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부유한 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받아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귀족들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대신 귀족과 성직자와 평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프랑스 의회인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물론 삼부회의 최고 책임자는 프리메이슨이자 경제장관이었던 네케르였으며 1789년 5월 5일 베르사이유 궁에서 200년 만에 개최됐다.


삼부회의 결과 제3계급인 ‘평민’이 승리를 거두었다. 루이 16세는 국민회의를 소집해 새로운 프랑스 헌법을 마련하자고 요구해놓고, 한편으로는 국민회의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비밀리에 모으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프리메이슨들은 깡패와 군중들을 선동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으며 왕실의 친위대가 이에 가담해 바스티유를 점거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웹스터

(Nesta H. Webster·1867~1960)는 그녀의 저서인 ‘프랑스혁명’에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은 미리 계획된 것이며 목적은 감옥에 있는 무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또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는 죄수라야 사기죄인 4명, 정신이상자 2명 그리고 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가족의 청원으로 가두어둔 사람 1명까지 총 7명의 죄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감옥을 습격한 지 이틀 후 파리의 시장(市長)과 수비대장은 살해당했으며 프리메이슨이었던 라파예트가 국민위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특히 비밀단체의 사주를 받은 기병근위대들은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시민들에게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자들이 귀족들의 성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으며 이내 혼란과 폭력이 파리 전역을 뒤덮었다.


일반 역사에서는 당시의 막연하지만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공포 분위기를 ‘대공포’(Grande Peur)라 부르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일루미나티 상징


급속히 확산되는 혼란에 놀란 나머지 1789년 국가의회는 황급히 자유·평등·재산에 대한 불가침 그리고 저항할 권리 등을 선언하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선포했다. 이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들 대부분은 일루미나티의 유서 깊은 사상이다. 실제로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새겨놓은 기념비를 보면 당시 일루미나티를 중심으로 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왼편 위쪽에는 쇠사슬을 자르는 ‘자유의 여신’이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를 상징한다. 그리고 우측의 천사는 법의 하신이라 불리는데 그 천사의 오른손 끝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일루미나티의 상징인 ‘전시안’(全視眼·이집트 호루스신의 상징)이다. 한편 이들의 상징(피라미드의 전시안)은 현재 1달러 지폐 뒷면에서도 나타난다.


의회에서는 새로운 법률과 정책들이 계속 통과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영국, 아일랜드,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는 프리메이슨 계열의 혁명적 단체들이 생겨났다.


프랑스는 국내외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자코뱅당이 집권초기에 단행한 정책 중에는 교회폐쇄 및 교회 재산의 국유화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두번째로 큰 프리메이슨 지부인 `GLDF`랏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


이러한 기독교 탄압의 배경은 자코뱅당의 주요 인사들이 반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코뱅당의 전신은 일루미나티 종단이다. 1786년 미라보 후작이 자코뱅 파리대학(Jacobins College of Paris)에 일루미나티 종단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이 프랑스 혁명기간 중 자코뱅파가 됐다.


당시 자코뱅파의 주요 멤버들은 성직자이자 주교로 훗날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된 탈레랑(Talleyrand) 그리고 당통(Danton·‘9자매 종단’ 소속)등이 있었으며 1792년에는 나폴레옹도 22세의 나이에 가입했다.


‘9월 학살’로 1만 8천여 명 처형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혁명에 관여했던 테오볼드(Theobald Wolfe Tone)는 그의 자서전(1893년 R. Barry O` Brien에 의해 출판)에서 자코뱅당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경우 프리메이슨이자 일루미나티 종단의 단원으로 바이스하우프트와 루소의 제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프랑스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에는 루이 16세를 계속 왕으로 봉직시키고 영국처럼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왕국이 될 것으로 믿고 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들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바이스하우프트의 말을 따라 이들을 철저히 혁명 내내 이용했을 뿐이다.


한편 프랑스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던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해외도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바렌(Varennes)에서 붙들렸다. 이 와중에 해외 여러 나라들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었으며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과 혁명이 동시에 고조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공포정치(Reign of Terror)가 계속되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가반역죄로 1793년 1월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이후 수천 명의 귀족들이 같은 장소에서 처형됐다.


혁명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1792년에는 소위 ‘9월 학살’이라는 유명한 사건을 조작해 학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겠다는 혁명의 이름 아래 파리 감옥에서만 1만8,000여 명이 처형됐다. 특히 9월 학살 기간에만 220여 명의 사제와 교계 인사들이 혁명정부의 교회개편을 거부해 처형당했다. (브리태니커 사전)


이 시기 당통, 라파예트 후작,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공개적 활동을 했던 프리메이슨들은 대부분 권력다툼 끝에 처형당했다. 전쟁과 폭동과 쿠데타가 한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1799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종말을 선언했다.


영국의 정치학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그의 저서인 <프랑스혁명의 성찰(1790)>에서 “테러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수천 마리의 염병할(hell) 사냥개들이 인민을 물려고 나섰다”고 말해 프랑스혁명의 혼란상을 비판했다.


그가 이 처럼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이유는 혁명 과정에서 법질서가 무너져 대부분 귀족들인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정식 재판 없이 ‘인민재판’에 의해 즉흥적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중에는 개인적으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경우가 많았다.


한편 버크는 영국의 명예혁명과 같은 단계를 거치지 않은 프랑스혁명의 급진적 조류가 영국으로 흘러들어올 경우의 혼란을 염려했다.

김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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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혁명 (공산주의)


공산주의를 만든 유대인 마르크스도 프리메이슨이었고, 공산주의 역시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중을 선동하여 왕권을 무너뜨리고 프리메이슨이 권력을 얻기 위해 만든 사상에 불과합니다. 특히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며 유물론을 주장하여 사람을 동물로 만들었고, 종교를 말살하게 합니다.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된 레닌은 폭력적 방법으로 혁명을 하기로 하고, 미국의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습니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배고픔과 굶주림을 못이겨 일어난 자연스러운 혁명이 아니라 계획된 혁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을 살펴보면 공산혁명이 일어날 당시 1907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는 고도의 산업성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민들은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고, 반정부혁명이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특정 조직에 의해 선동된 것입니다.


1814년부터 러시아가 프랑스와 전쟁을 할 때 많은 러시아의 고위급장교들이 일루미나티(광명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에도 프리메이슨 종단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또한 사회민주노동당을 세우게 됐는데 사회민주노동당의 중심인물들이 유대인계로 채워�습니다. 공산혁명의 주동자 중 레닌을 제외한 나머지 24명인 트로츠키,슈테클로프, 마르토프,치노비프 등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자신들의 세계정복을 위해서 항상 두개의 세력을 만드는 계획에 따라 자본주의 외에 공산주의라는 또 하나의 체제를 준비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프리메이슨의 조종을 받아 세워지게 됐고, 공산주의의 평등, 자유 사상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인 평등, 박애, 자유에서 따 온 것입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을 장악했던 프리메이슨은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미국의 남북전쟁 등에서 자신들의 일을 계속방해하자 러시아를 전복시킬 음모를 세웁니다. 프리메이슨들은 러·일전쟁에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러시아에 비해 전세가 불리했던 일본에게 거액을 빌려줘 일본군이 전함을 구입할 수 있게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만한 군자금이 매우 부족하였는데, 미국의 대부호이자 유태인이며 프리메이슨인 야곱시프는 퍼스트 내셔널 은행과 내셔널 시티은행을 통하여 3천만달러를 빌려주도록 하였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의 동부전선인 조선과 만주를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일본은 야곱시프를 일본을 도와준 우수한 인물로 표창을 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여파로 미국은 전제군주정치를 행하고 있던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의 국가이자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버렸으며, 자기들의 손아귀로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전략이 담긴 시온의정서를 살펴보면 세계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전제군주정치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러·일전쟁과 러시아 혁명은 이를 위해 치밀히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왕정이 굴욕적으로 패배한 러일전쟁(1904-1905) 이후 다양한 사회단체들의 시위로 1905년에 폭발하였는데 니콜라이 황제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함으로써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유대인 트로츠키는 미국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무장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그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대부분 감시를 받거나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트로츠키와 레닌 등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일행은 미국에 의해 약 1만달러의 지원금을 받고 러시아로 가게 됩니다. 트로츠키와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가는 중에 캐내다의 핼리팩스 항에 잠깐 기항하게 되는데, 캐나다 해상경찰이 선내에서 약 1만달러의 현금을 발견하고 이를 수상히 여겨 출항을 금지시킵니다.


그 내용이 워싱턴으로 전해졌고, 미 하원의 조사분과위원회에서 돈의 출처를 조사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1만달라라는 돈은 개인이 갖고 있기에는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모두 그 돈에 대해서 함구하게 되었고, 다만 당시 미하원의회 은행분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루이스 맥파든의원은 "그들(시중 은행의 은행주들, 곧 유태계 인사와 프리메이슨 인사들)은 트로츠키가 요구한 뉴욕의 엄청난 인원들의 모임 유지 비용을 모두 감당했으며, 러시아로 귀국하는 비용까지 부담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캐나다에 억류되어있던 트로츠키 일행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풀어주라고 압력을 가하자, 캐나다 정부는 미국 정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미국의 재고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는 유럽에서 독일군에 대항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짜르를 도와 러시아가 독일을 견제하게 하는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던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짜르체제를 무너뜨리라는 훈련을 받은 트로츠키 일당을 러시아로 보내니 이는 미국과 연합국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정부는 그야말로 억지를 부렸는데 윌슨 대통령과 같은 민주당 출신의 재정위원회 위원장인 크레인(Charles

Crane)이 트로츠키와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인 레닌과 유태인 트로츠키를 비롯한 14명의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 사람들은 러시아를 마르크스가 말한 원시적 공산경제체제의 국가로 만든것이 아닌 독재적이며 계급이 뚜렷히 존재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를 새로 건립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나중에 독재자 스탈린의 등장으로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의 잇권은 계속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공산 혁명 이후에 사유재산은 몰수되고, 자유는 빼앗겼으며, 종교도 금지되고, 권력은 독점돼 장기 독재가 실시되었고, 중산층이 몰락해 특권층을 제외한 모두가 빈민이 되었으니 누구를 위한 공산혁명입니까?


스탈린 같은 독재자는 자국 국민을 4000만명이나 죽였는데도 누구 하나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인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듣기에는 좋으나 이들을 도와 혁명에 성공하면 돌아오는 것은 노예 같은 삶이었습니다.


현대의 프리메이슨은 신세계질서라는 사상으로 세계정부를 실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라 사이에 국경이 없어 관세도 없고 비자도 없고 전쟁이나 분쟁도 없어 천국 같은 세상이 되리라 기대하지만, 경제주권을 국제기구에 넘기고, 군사주권과 정부권력을 세계정부에 이양하면, 곧바로 가혹한 폭정이 실시돼 사유재산이 몰수되고, 자유를 잃으며, 종교도 금지되고, 몸에 전자칩을 삽입당해 사생활을 감시당하는 공산주의보다 심한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프리메이슨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7가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개별국가의 파괴

2. 사유재산제도 폐지

3. 개개인의 상속권폐지

4. 애국주의 파괴

5. 모든 종교의 파괴

6. 결혼제도 폐지를 통한 가족제도의 폐지

7. 세계 단일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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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Civil War) 비사(秘史)


선과 악의 싸움, 링컨과 프리메이슨의 대결

제5편.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 비사(秘史)


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 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

 

미국의 남북전쟁(The Civil War)의 이면에는 미국을 분열시키려는 프리메이슨들의 음모가 숨어있었다. 사진은 전쟁기록 화가인 Mort Kunstler의 작품이다.


"링컨의 서거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커다란 재앙이다. 음흉하고 사악한 흉계로 가득 찬 외국 은행가들이 약동하는 미국의 부흥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새롭게 건설한 그들만의 문명을 조직적으로 부패시킬까 두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 세계를 장악하고자 온 기독교 세계를 전쟁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드는데 추호도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오토 폰 비스마르크, Eric Rainbolt & Alex Jones著 ‘The Obvious Untruth of the World’) 


링컨(1809~1865)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Civil War)의 포화 속에서 미국의 분열을 막은 지도자이며, ‘게티즈버그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을 제시한 정치가로서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케네디 암살사건과 마찬가지로 링컨 대통령의 죽음 역시 오늘날까지 그 음모의 논쟁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본지(本紙)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둘로 나누려 했던 남북전쟁의 실제 배후 세력과 이들에 맞서 싸운 링컨 대통령의 생애를 살펴본다.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비밀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단은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깊은 관여를 했다. 특히 미국은 이민자의 천국이었기 때문에 건국 초 상당수의 프리메이슨들이 청교도(Puritan)를 가장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1800년대 미국의 ‘反 메이슨 운동’


그러나 필그림(Pilgrim)과 퓨리턴(Puritan)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기 북동아메리카의 종교적 분위기는 일루미나티 계열의 프리메이슨에 의해 수입된 무정부주의적 사상들을 완강하게 막았다. 실제로 미국의 역사 속에서는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이 상당한 각축을 벌였던 것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1826년 무렵 미국 내 메이슨 단의 총회원수는 거의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기도 했다.(Jim Marrs 著, ‘Rule by Secrecy P.188)


특히 1827년 ‘Royal Arch Mason’단원이었던 윌리엄 모건 대위는 메이슨 단의 정체를 폭로하는 ‘30년 동안 헌신했던 한 형제가 쓴 메이슨 단의 실상’(Illustration of Masonry by one of the Fraternity Who Has Devoted Thirty Years to the Subject)을 출간함으로써 메이슨 단원이 아닌 사람들도 이 단체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됐다. 모건 대위는 이 책에서 “메이슨 단은 우리 사회의 제도와 그 활동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 해악은 날마다 그 도를 더 해가고 있다. 나는 조국을 위해 그 위험을 폭로할 의무가 있다”고 썼다.

 

                  존 리브스(John Reeves)의 ‘로스차일드 가문-각국의 경제 통치자들’

                                  (Rothschilds-the Financial Rulers of Nations)


링컨, 노예제 반대 하면서 휘그당 입당


프리메이슨들의 주도하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 등이 발생하자 여론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뉴욕 주 상원은 1829년 프리메이슨 단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으며 미국 최초의 제3정당인 ‘反 메이슨 당’(Anti-Mason Party)이 1827년 조직되기도 했다. 1830년대 말, 반 메이슨 당은 노예제를 반대하면서 휘그당(Whig Party*링컨은 1836년에 입당)에 흡수 통합 됐다. 이 과정에서 메이슨 단이 입은 타격은 그 후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독립 이후 가장 큰 시련이었다. 정사(正史)에서는 이 전쟁이 시작된 시기가 1861년으로 보고 있으나, 실제 전쟁의 씨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1837년부터였다. 당시는 미국의 경제사정이 한창 어지러웠던 시기였다. 이에 유럽의 대부호이자 일루미나티 단원 이었던 로스차일드(Rothschild*유태인)는 어거스트 벨몬트(August Belont*유태인)란 인물을 미국으로 보내 美 정부의 공채를 사들이게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을 배후조종하거나 사건에 개입하면서, 경제뿐 아니라 정치계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 계급으로 성장해온 가문이다.(동아일보*한국경제신문 2002년 1월 19일자)


프리메이슨 연구가인 존 리브스(John Reeves)는 ‘로스차일드 가문-각국의 경제 통치자

들’(Rothschilds-the Financial Rulers of Nations)이라는 책을 통해 1857년에 유럽에는 국제 금융 연합(syndicate)이라는 (비공개) 모임이 있었으며 여기서 결정적으로 미국에 남북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둘로 나누자는 의견에 합의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로스차일드家 주축으로 남북전쟁 모의


이외에도 로스차일드家를 주축으로 한 국제금융가들이 남북전쟁을 모의하고 링컨의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야기가 1934년 캐나다에서 나왔다. 맥기어(Gerald G. McGeer)라는 캐나다의 저명한 변호사가 발표한 내용이 ‘Vancouver Daily Province’지에 실리게 된 것이다.(1934년 5월 2일자) 당시 그는 링컨을 죽일 만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오직 환전꾼들뿐이며, 링컨은 다만 그들의 세계 정복욕에 맞서 싸웠을 뿐이라는 내용을 언급했다.


당시 맥기어의 주장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타당성이 입증되어 이듬해인 1935년에 서치(Dr. R.E. Search)박사는 `Lincoln Money Martyred`를 출간해 남북전쟁의 배경과 링컨의 죽음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이 극한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중앙은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니 미국정부가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돈을 빌리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네 마음대로 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의 첫 단계로 남부의 주들을 ‘유니온’(Union, 당시 미합중국의 명칭)에서 이탈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었고, 그에 적절한 이슈로 미국의 ‘노예문제’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선전*선동의 조직체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원의 기사단’(Knights of the Golden Circle*1854년 창설)이었다.


‘금원의 기사단’, 이마에 산 뱀 얹고 선서해


‘금원의 기사단’은 외과의사이자 작가였던 조지 비클리(George WL Bickley)에 의해 조직됐으며 신입단원은 이마 위에 산 뱀을 얹은 채 소름끼치는 선서를 해야만 하는 단체였다. 이 조직의 명칭은 쿠바를 중심으로 주변 3,900km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 노예지 국가를 세우겠다는 비클리의 계획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국가가 미합중국의 남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그리고 서인도제도를 아울러 전 세계의 담배, 설탕, 쌀, 커피의 공급을 장악한다는 내용이 그의 구상에 포함되었다.


1860년에 이르러 이 기사단은 5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 단체가 되었다. 한편 샌안토니오에 본부를 차린 비클리는 “남부를 모략하는 월 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을 처형하자”고 호소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는 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노예제를 반대했던 링컨에 대해서도 “만일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면, 기사들이 달려갈 곳은 멕시코가 아니라 워싱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비클리는 “우리가 원하는 싸움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가 문제”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이를 위해 기사단은 끊임없는 선전과 선전 활동을 벌여 북부와 남부 전역을 증오와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인 윌리엄 프릴링은 “1860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들은 최후의 도박을 하기로 모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전모를 링컨은 이미 1850년대 말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시 링컨은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표면적으로는 전쟁의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 노예문제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을 둘로 나누려는 공작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단 한번도 미국의 독립 정신을 어기면서까지 정치적인 이득을 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만일 그 독립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격당해 죽겠다.”


1856년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에 입당한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S. A. 더글러스와 7회에 걸친 공개토론을 하였는데, 그의 입장은 기존의 노예주(奴隸州)에는 간섭하지 않으나 준주(準州)에 대한 더 이상의 노예제 확대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같은 해 주당대회(州黨大會)에서 노예제를 둘러싸고 분열하는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열한 집안은 설 수가 없다’는 연설을 했다.


링컨, 금원의 기사단 3만 명 투옥 조치


링컨은 이 선거에서 패배하기는 했어도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1860년 공화당은 그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북부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링컨의 당선을 남부 노예제에 대한 공격으로 본 남부 각주는 잇따라 연방으로부터 탈퇴하고, 1861년 2월 아메리카남부연합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타협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구출하는 일이지 노예제를 구하는 것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다”라며 전쟁 초반의 경솔한 노예해방론을 엄금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1862년 9월 22일에 이르러 사령관의 권한으로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점령지역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공포하였다. 이는 그의 지도력을 비판하기 시작한 북부를 결속시키는 동시에 영국이 아메리카남부연합을 승인하려는 움직임을 중지시킨 뛰어난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의 정치수완과 U. S. 그랜트*W. T. 셔먼*P. H. 셰리던 장군 등의 군사적 활약에 힘입어 1864년 링컨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865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링컨은 남북전쟁의 책임은 남북 양쪽에 있다고 말하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는” 박애와 관용의 정신을 호소했다. 특히 연방 유지를 염원하는 그의 관심은 탈퇴한 남부 여러 주의 조기연방복귀를 위해 남부의 관대한 재건책을 준비하였고, 유권자의 과반수가 충성 서약을 하는 주에 대해서만 주정부 형성과 연방재가입을 받아들인다는 공화당 급진파의 엄격한 재건책인 ‘웨이드-데이비스법안’을 거부했다.


이와 함께 링컨은 남북전쟁기간 동안 중앙정부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금원의 기사단’의 단원 3만 명을 투옥시켰다. ‘금원의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인 비클리는 1863년 인디아나 주에서 체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865년에 석방되었고, 1867년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 역사학자인 그리핀(G. Edward Griffin)은 그의 저서인 `The Creature from Jekyll Island`에서 전쟁 후 ‘금원의 기사단’의 단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갔다가 나중에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으로 알려져 있는 KKK단으로 다시 등장했다고 말하고 있다.


링컨, 신앙심과 애국심으로 존경의 대상


한편 링컨은 1864년 재당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41일 만인 1865년 4월 14일 저녁 워싱턴 D. C.의 포드극장에서 관람 중 남부출신의 배우 부스(John Wilkes Booth)에게 저격당했다. 그리고 범인으로 체포된 8명 중 4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당초 이들의 계획은 링컨 대통령뿐만 아니라 존슨 부통령과 슈어드(William Seward)국무 장관까지도 포함된 것이었으나 이 두 사람에 대한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범인 남부출신의 배우 `부스`

 

특히 링컨을 암살한 진범인 부스는 프리메이슨의 상층 조직인 유럽의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종단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가방에서는 암호로 된 메시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암호문에는 J. P. 벤자민(Judah P. Benjamin*1811~1884*유태인)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벤자민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에 보낸 요원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했으며, 전쟁 중에는 남부 정부의 여러 요직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현재 미국 내 프리메이슨 연구가들은 링컨의 암살은 남북전쟁을 통해 미국을 둘로 나눈 후 부(富)를 독점하려 했던 프리메이슨의 계획이 링컨 대통령에 의해 실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편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링컨은 암살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이토록 오랫동안 링컨 대통령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났다”는 신실한 신앙심에 입각한 애국심과 바른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늘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일해서 정직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라고 말했으며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믿음의 지도자였다.


김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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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건국


우리는 보통 미국이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에 있던 박해 받던 기독교인들이 건너 간 것은 사실이나 그들과 함께 유럽의 프리메이슨 엘리트들도 갔습니다. 이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유럽의 프리메이슨 중에 유대계 자본의 후원으로 세워진 국가가 미국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입니다.


왼쪽 그림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로 위에 보면 '조지 워싱턴 프리메이슨'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 밑에 프리메이슨에서 전지전능한 자를 상징하는 G(God 신 또는 Geometry 기하학)가 써있습니다. 'G'는 궁극적으로 이집트 신의 삼위일체인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치마를 둘렀는데 거기에 메이슨의 상징인 컴퍼스와 직각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래쪽 그림은 워싱턴에 있는 조지 워싱턴 프리메이슨 기념관에 있는 초상화입니다.

조지 워싱턴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을 기념하여 1923년에 건설된 이 건물 안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고 프리메이슨이었던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이름도 열거되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알랙산더 해밀턴, 헨리 노크스, 에드먼드 랜들 등 미합중국의 수뇌들이 모두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특히 1793년 연방의회 의사당 기공식에 조지 워싱톤 대통령이 프리메이슨의 의식용 예복을 착용했으며, 가슴에는 프리메이슨의 표장을 달고 있었고, 주변의 주요 인사들도 모두 프리메이슨의 예복과 표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 달라짜리 지폐의 뒷면에는 피라미드와 독수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화폐를 발행하는 연방준비은행은 정부 소유가 아니고 유대계 프리메이슨이 소유한 민간기업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이집트 신앙의 상징인 피라미드를 화폐에 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는 권력층과 서민층의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옆의 독수리는 이집트의 불사조(피닉스)를 나타내며 이들의 상징 숫자인 13개의 별이 머리 위에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피닉스에 관해서는 프리메이슨(상징) 편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보스부터가 프리메이슨이었고,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피신한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신대륙에 큰 관심을 보입니다.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프리메이슨들이 17세기 이 후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전체 남성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신비주의 성향의 그들은 밤에 모여 주문을 외우고 이상한 의식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미국은 당시 영국령이었는데 영국이 세금을 인상하자 이에 반발한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버지니아의 대령이었고 프리메이슨이었던 조지 워싱턴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조지 워싱턴은 이를 수락해 혁명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유럽 프리메이슨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은 승리할 수 있었고,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수도 워싱턴 D.C.에서 D.C.는 District of Colombia로 컬럼바 여신의 이름을 딴 컬럼버스파(프리메이슨 조직)의 지역이란 뜻입니다.


미국 뉴욕(New York)도 영국 프리메이슨 요크(York)파의 새로운 근거지란 뜻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에 세금을 인상하도록 한 장본인이 영국에 있는 프리메이슨이란 점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혼란 책동, 민중 선동, 폭동의 수순으로 혁명을 진행 했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왕정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하나 세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 중 53명이 메이슨이었고, 워싱턴 이후 연속으로 17명의 대통령이 메이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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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비밀조직 `크루나루카`(검은 손)


인류를 파괴한 악마적 사상들


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후에서 조종한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편집자주>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


제1차 세계대전과 비밀조직 `크루나루카`


“대공(오스트리아 황태자)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위험이 다가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있기 일년 전, 그는 내게 프리메이슨들이 자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내게 암살이 착수된 곳으로 알려지고 있는 마을까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몇 몇 헝가리인과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의 이름을 언급했다.”(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외무대신 ‘체르닌’著, ‘In the World War’(1919)에서)


그동안 일반역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제국주의적 전쟁이었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배후에는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진 비밀조직들이 베르사이유 평화조약과 유럽 전제왕정의 몰락, 그리고 기독교 세계의 파괴라는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전쟁을 유발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들이 어떤 수법으로 분쟁을 조장해 세계대전을 유발시켰는지 살펴본다.


합스부르그 왕가와 세르비아의 대립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Balkan)반도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까지 존속)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합스부르크왕가의 영도아래 기독교 문화권에 속했던 발칸의 서북쪽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과학혁명, 르네상스, 종교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제국에 속했던 세르비아*알바니아*마케도니아 등은 서구문명의 발전사와 격리된 채 아시아적 생활양식을 깊이 받아들였다.


특히 알바니아인들의 경우 대거 회교도로 개종하기도 했으며 보스니아에서도 회교도가 생겨났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유럽적인 국가발전이 중단되고 서유럽 역사와도 분리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들어서면서 슬라브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발칸반도 내에서는 민족주의의 맹아라고 할 만한 민족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데다 민족간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슬라브 내 모든 민족간의 공존과 동등한 권리를 전제로 한 ‘발칸통일’논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터키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대(大)세르비아를 실현해 가려던 세르비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에 복속된 채 슬라브민족주의를 슬로건으로 이 두 세력간의 경쟁은 20세기 들면서부터 본격화 된다. 특히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틈을 이용해 세르비아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대(大)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려는 세력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비밀결사단체, ‘크루나루카’(黑手組)


당시 군부에서 만들어진 가장 대표적인 비밀결사단체로는 1911년 육군 대령인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c*세르비아 정보부장)와 탄코시치(Voja Tankosic*소령) 그리고 시가노비치(Milan Ciganovic)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크르나루카’(Crna Ruka*영어명-Black Hand)라는 프리메이슨 조직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목적이 폭력을 통한 대(大)세르비아의 건설이라고 주장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보스니아거주 세르비아인들을 선전*선동했다.  당시 이 조직의 1차 목표는 보스니아를 합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인암살이었다. 실제로 1911년 디미트리예비치는 크르나루카의 조직원들을 시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조셉 황제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후 그는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sic)를 고용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지사인 포티오렉(Gen. Oskar Potiorek)장군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이르러 크루나루카는 단원 수만 2500여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 된다. 특히 크루나루카의 조직원들은 대부분이 변호사, 언론인, 대학 교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30여명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크루나루카는 6번에 걸친 오스트리아 요인암살에 실패한 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게 된다. 당시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당시 크루나루카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목적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3의 반(反)독립적 국가를 만들겠다는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구상이 남슬라브민족의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루나루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지시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육군의 훈련을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하게 된다. 이윽고 디미트리예비치는 크루나루카의 열성분자인 프린시프(Gavrilo Pribcip*유태인)와 카브리노비치(Nedjelko Cabrinovic), 그라베즈(Trifko Grabez), 일릭(Danilo Illic)으로 하여금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사라예보에서 이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한 달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오스트리아 특사인 A. 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독일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프리메이슨*유대인)는 1914년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 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 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 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단란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내외의 모습


한편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 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7월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세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1914년 10월 12일 20명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 연루자들은 사라예보 군사법정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암살범 가운데 한 사람인 카브리노빅은 법정의 판사들 앞에서 태연히 “프리메이슨 조직에서 암살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James W. Von Braun著, ‘Kill The Best Gentiles’) 이에 대해 프리메이슨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황태자인 페르디난트의 강한 성격이 혁명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때로는 서로 반대 성향을 지닌 다양한 혁명가들을 하나로 묶어준 증오심이 이들로 하여금 암살이라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쟁발발 2년 전부터 황태자 암살계획 세워


실제로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암살범들의 진술내용은 Mary Edith Durham의 ‘The Serajevo Crime(1925)’과 Henri Pozzi의 ‘Black Hand Over Europe(1935)’등의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이들의 법정진술 내용이다.


▲암살범 프린시프(Princip)의 진술내용


-프린시프 : "우리는 남부 슬라브족을 돕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동의했다"

-판사 : “그 방법들은 무엇인가?”

-프린시프 : “암살이다. 범슬라브주의를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자와 인민에게 불공정한 자를 모두 처단하는 것이다.”


▲암살범 카브리노비치(Cabrinovic)의 진술내용


-카브리노비치 : “그(카지미로비치*Radoslav Kazimirovitch)는 프리메이슨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그들 우두머리중의 한 명이다. 암살을 지시한 뒤 그는 곧 해외로 여행했다. 그는 러시아, 프랑스, 헝가리를 돌아다녔다. 내가 시가노비치(‘크루나루카’의  핵심단원*프리메이슨)에게 우리 계획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물을 때마다 그는 내게 카시미로비치가 돌아올 때를 알아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시가노비치는 내게 프리메이슨들이 이미 2년 전에 황태자에 대한 제거 결정을 내렸지만 이를 실행할 인물들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훗날 그는 나에게 총과 카트리지(탄창)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람(카지미로비치)이 지난 밤 부다페스트에서 돌아왔소. 나는 그가 우리가 떠맡은 일(암살)과 관련해 여행을 했으며 해외에 있는 어떤 단체와 협의한 것으로 알고 있소”


당시 암살범들에 대한 재판은 전쟁 중 벌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공판기록을 통해 페르디난트 황태자에 대한 프리메이슨들의 제거 결정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황태자에게 치명적인 사격을 가한 프린시프는 시가노비치와 암살수단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시가노비치 스스로 프리메이슨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곧 모 인사와 접촉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무기)을 받을 것이지만 암살이 실패할 경우 황태자를 메이슨의 랏지(Lodge*프리메이슨의 회합장소)에서 죽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프리메이슨, 세계적 사건 배후 조종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개전의 경위가 매우 복잡해 어느 한 나라의 특정행위가 대전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암살범들의 진술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조직을 확보하고 있는 프리메이슨단(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프리메이슨단(團)은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혁명, 프랑스혁명, 남북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을 배후조종하거나 사건에 개입하면서 경제뿐 아니라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집단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범 가운데 한명인 프린시프의 모습


이 조직이 역사 속에서 늘 내세우는 모토(Motto)는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형제애(brethren)를 강조하지만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사탄 숭배를 드러낸다. 실제로 프리메이슨 최고 계급인 33도까지 올라갔던 마리 P. 홀(Manly P. Hall*1990년 사망)은 그의 저서인 `The Lost Keys of Freemasonry`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단 프리메이슨의 신비한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어 참된 신은 ‘루시퍼’(Lucifer)라고 믿게 된다. 프리메이슨의 입회의식 후 탈퇴할 경우는 살해를 당하고, 프리메이슨이 아니고서는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될 수 없으며,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됨은 사탄과 영매로서 접촉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을 모의한 ‘크루나루카’ 조직의 우두머리인 디미트리예비치는 ‘아피스’(Apis)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는데 ‘아피스’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황소의 신’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


한편 이들에 의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승국은 패전국인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을 전가시켜 독일국민의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히틀러의 나치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독가스*전차*항공기 등의 신무기가 투입된 것도 이 전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 때문에 전사자의 수도 그 때까지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1차대전 중의 정확한 사상자를 통계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전쟁전과 전쟁후의 정부가 같았던 대부분의 연합국에서는 비교적 정확한 통계가 이루어졌으나 정부가 뒤바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등의 정확한 통계가 산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총 3천7백 5십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이 전쟁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각각 170만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프랑스가 136만, 오스트리아가 120만, 영국이 90만, 미국은 12만 6000여 명이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2500만 명의 사람들이 인플루엔자(스페인독감)로 사망했다.

세르비아의 비밀조직 크루나루카의 상징문양, 해골과 뼈(Skull & Bones)는 대표적인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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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비사(秘史)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개 톨레회(Thule society) 단원이었다. 사진 좌측으로부터 세보텐도르프 남작,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히믈러


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 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후 조종한 사탄숭배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편집자주>


툴레회, 독일 신비주의와 사탄숭배 사상 계승

반기독교적인 히틀러에게 대중선동술 가르쳐


“1919년 말 히틀러는 디트리히 에크하르트(Dietrich Eckart·1868~1923)를 만났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에크하르트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다. 당시 재력가였던 에크하르트는 반유태주의를 표방한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자이자 마법에 정통했던 인물로 당시 여러 비밀 단체를 포함해 툴레회(Thule society·프리메이슨)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Wulf Schwartzwaller 著, ‘The Unknown Hitler’, Berlkley Books, 1990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의 10년 동안 전세계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 만큼 혼란과 격변이 계속된 곳도 드물다. 큰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꼭 전염병이 돈다. 실제로 종전되던 해 겨울에는 심한 독감이 독일 땅을 휩쓸어 10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사망했다. 한편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구 찍어댄 마르크화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파탄에 이른 경제와 대량 실업사태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툴레회’ 프리메이슨 기반으로 조직


이처럼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량부족과 정치적 혼란에 고통을 당하는 사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리메이슨 조직을 기반으로 게르만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Volkisch movements)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이 가운데 나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프리메이슨 단체가 바로 ‘루돌프 폰 세보텐도르프’(Rudolf Glendeck von Sebottendorf·1875~1945) 남작이 1918년 8월 17일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에서 조직한 툴레회(Thule society)이다.


세보텐도르프 남작의 본명은 루돌프 글라우어(Adam Alfred Rudolf Glauer)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터키여행 중 오스트리아 출신 귀족의 양자가 되어 세보텐도르프라는 성을 갖게 됐으며 터키 시민권을 얻은 후 동서양의 신비주의를 탐닉했다. 실제로 세보텐도르프는 1910년 이스탄불에서 수피즘(Sufism·이슬람신비주의)과 프리메이슨, 연금술에 입각한 프리메이슨 종단을 세우기도 했다.


1913년 세보텐도르프는 독일로 돌아와 자신의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에 산재해 있던 여러 프리메이슨 단체 회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말경 세보텐도르프는 당시 사세가 기울어가던 뮌헨의 한 영세 신문사를 사들여  ‘민족의 파수꾼’(Volkische Beobachter)이라는 이름의 주간 잡지를 발행해 반유대주의와 신비주의에 입각한 국가주의 사상(occult-nationalist doctrines)을 전파했다. 그리고 이 잡지는 훗날 나치당의 공식 기관지가 됐다. (출처: Ellic Howe 著, ‘Urania’s Children: The Strange World of the Astrologers’, London, 1967년, pp. 86~87.)


나치, 신비주의와 사탄숭배 영향 받아


세보텐도르프가 세운 툴레회는 전통적인 독일 신비주의와 루시퍼(사탄)를 숭배하는 종교의 창시자인 마담 블라바츠키(본명: Helena P. Blavatsky)의 신지학(神知學)을 접목시킨 프리메이슨 단체로 단검(dagger)과 하켄크로이츠(나치 상징)를 종단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특히 블라바츠키의 경우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셈족주의자로 그녀가 주장했던 ‘뿌리 종족’과 ‘레무리아(Lemuria)종족’에 관한 이론은 훗날 나치가 차용해 ‘아리안족’(Aryan)의 우월성을 설파하는 근거가 됐다.

 

툴레회의 상징은 단검과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이다. 이 가운데 갈고리 십자가는 훗날 나치의 상징이 됐다.

 

한편 세보텐도르프는 툴레회의 비밀을 언급한 ‘Bevor Hitler kam’(Before Hitler came)을 썼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이후 그는 터키로 탈출해 1945년 5월 9일 보스포러스 앞바다에서 투신자살했다.


‘인종말살’주의자로 나치독일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나치 외교부장)를 비롯해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루돌프 헤스(부총통), 하인리히 히믈러(나치 친위대 사령관) 그리고 안톤 드렉슬러 등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개 툴레회의 단원이었다.(1918년 말 툴레회 단원 수는 1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루돌프 헤스의 경우 무신론자로 점성술이나 심령치료 같은 초자연적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히틀러의 동상과 사진을 제단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불을 켜고 의식을 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툴레회의 단원 가운데 히틀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시인이며 인종주의자이자 모르핀중독자였던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이다. 당시 툴레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에크하르트는 1919년 8월 14일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이후 그는 히틀러를 앞으로 툴레회가 주도하게 될 거대한 갈등과 대규모 학살을 일으킬 ‘제3제국’(The Third Reich)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당시 에크하르트는 대규모 갈등이 인간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겨 사람들을 편집증 또는 소심증 환자로 만들게 될 것이며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심리 조종이 가능해져서 결국에는 ‘죽음의 형제회’(Brotherhood of Death Society·툴레회의 원래 명칭)와 그 사악한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에크하르트는 히틀러에게 대중선동에 필요한 자신감, 웅변술, 화술 그리고 몸짓 등을 직접 가르쳤다.


1923년 12월 26일 에크하르트는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임종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히틀러의 지시를 따르라. 춤(dance)은 그가 추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시킨 것은 나다. 내가 그에게 비밀교리를 따르도록 했고 그의 시야를 열어 주었으며 힘의 세력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했다”(출처: Trevor Ravenscroft 著, ‘The Spear Of Destiny’, p. 91)


독일노동당, 툴레회와 나치당 결성


툴레회는 전직 철도 수리공으로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당’(GPW·1919년 1월 결성)을 조직한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1884~1942)를 시켜 히틀러를 주축으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SDAP, 일명 나치당)을 결성했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이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 늘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등 지식인들의 대부분도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를 유태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사악한 본 뜻을 감춘 악마의 종교라고 까지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이 아니었고 유태인의 세계지배로부터 인류를 구하려다가 그만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후임으로 나타난 자신이 유태인의 세계지배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여겼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 군에 자원입대하여 바이에른 보병 제16예비연대에 배치되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다. 연락병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4, 1918년에 각각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만년까지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아이러니 하게도 히틀러에게 훈장 수여를 추천했던 사람은 유태인 장교인 후고 구트만 대위였다.)


한편 전후인 1919년 당시 하사관이었던 히틀러는 독일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던 군소 정치단체들의 동향을 체크하여 보고하는 정보관계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19년 9월 12일 히틀러는 상부로부터 ‘독일노동당’이라고 불리는 어느 작은 정치단체의 집회를 참관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물론 그는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작은 사건이 자신의 일생을 극적으로 반전시켜 놓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반유태주의에 기반 둔 독일노동당


당시 툴레회가 주축이 되어 조직된 독일노동당은 반유태주의에 기반을 둔 반혁명정당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과 애국주의를 결합시킨 중간계급 위주의 정강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집회의 토론에 참여한 히틀러는 당 간부이자 툴레회의 단원이었던 드렉슬러의 주목을 끌었고 며칠 뒤 ‘귀하의 입당을 허가함. 9월 16일에 열리는 독일노동당 위원회에 출석하기 바람’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위원회에 출석하여 555라는 당원번호를 받았고 제7 당위원이 되었다.


당시 거의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독일노동당은 히틀러의 노력으로 공공연한 대중활동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잇달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하여 당세 확장에 노력했다. 그의 뛰어난 연설 솜씨도 당의 명성에 일조했다. 특히 나치의 집회는 사람들이 흥분하기 쉬운 밤 8시 이후에 주로 열렸다. 매번 집회에서 나치의 최대 무기는 정강 정책이 아니었다. 바로 에크하르트로부터 배운 히틀러의 카리스마적인 웅변술이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드렉슬러를 당의 총서기로 추대했으며 자신은 당 선전부장이 됐다. 당 조직을 개편한 독일노동당의 당세는 1920년 2월 뮌헨의 한 맥주홀에서 2,000명 이상의 청중을 모으는 대중 집회를 개최할 정도로 신장되었다. 이날 집회에서 25개조의 당강령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의 영토확장이 포함되었다. 이 강령은 툴레회의 단원이었던 에크하르트·드렉슬러·페더 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이후 나치 ‘불변의 강령’이 됐다.


히틀러는 초기 나치 집회에서 항상 유대인 배척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패전 후 독일공화국의 나약함과 내부분열 및 부패를 공격했다. 또한 독일의 강력한 국민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불합리성과 잔혹성을 강조했다. 한편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툴레회의 상징에서 차용한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툴레회 간행물, 나치당 기관지로 둔갑


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 당 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 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u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됐다. 또한 툴레회의 정기 간행물이었던 ‘민족의 파수꾼’(Volkischer Beobachter)을 나치당 기관지로 만들어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나치는 바이에른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 동맹을 폭력으로 습격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나치당을 탄압했고 히틀러는 1922년 6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수감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년 9월 26일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인 ‘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의 ‘독일투쟁동맹’은 뮌헨에 있는 한 맥주 홀에서 폭동(일명 ‘맥주홀 쿠데타’)을 일으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약속했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봉기를 진압하는 쪽으로 돌아서 이 맥주 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같은 해 11월 11일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半)자서전 겸 나치사상의 해설서인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나의 투쟁’은 툴레회 단원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 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당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나치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92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속출했다. 독일의 경제가 통화개혁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평판도 좋아졌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26년 2월 당 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 이복누이의 딸과 관계 맺어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나치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 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물론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이 시기 그는 이복누이의 딸로 자신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을 사랑하게 되었고 1931년 9월 18일 그녀가 히틀러의 치열한 지배욕과 독점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했다.


한편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정권 획득 후 반대파 모두 처형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권력을 잡자 친위대를 앞세워 1934년 6월 30일 소위 ‘피의 숙청’이라 불리는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는데 이 때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처형시켜 버렸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됐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인물들을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9년 9월 히틀러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해 인류역사상 가장 큰 재산·인명 피해낸 전쟁으로 기록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김필재 기자  미래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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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의 상징 '하켄크로이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독일의 국기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등장한다.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당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나치독일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패전과 함께 나치의 반인류적이며 반도덕적인 행위가 밝혀짐에 따라서 하켄크로이츠는 독일은 물론 서구의 모든 나라에서 금기되었다. 독일에서는 하켄크로이츠를 어떠한 형태로도 표시할 수 없으며, 서구의 모든 국가에서는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함부로 표현현하지 않는다. 실제로 PC게임에서도 하켄크로이츠를 일반 십자가로 표현하는데 이 하켄크로이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준다. 독일어로 하켄(Haken)은 영어로는 Hooks (갈고리), 크로이츠(kreuz)는 cross (십자가)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바꾸면 '갈고리 십자가'가 된다. 이 갈고리 십자가를 '게르만 십자가'라고도 한다. 이 하켄크로이츠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만(卍)과 매우 흡사하다. 방향만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와 불교의 만(卍)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가지 종류의 '卍'

 

                                    卍'에 대한 강의를 받는 나치 독일의 SS대원들

 

스와스티카(swastika, 卍, 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꺾인 선을 가진 등변(等邊) 십자가. 보통 시계방향으로 꺾여 있다. 스와스티카는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부와 행운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스와스티카의 어원은 범어 스바스티카(svastika)로서, '행운으로 인도하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스와스티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화폐의 도안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에도 등장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마야 문명을 비롯해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을 중심으로 스와스티카가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문화 지역에서는 스와스티카가 그리스어 알파벳 가운데 하나인 감마의 대문자 'Γ' 4개를 조합해서 만든 십자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인도의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에서는 여전히 스와스티카가 길조의 상징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자이나교에서 쓰이는 스와스티카는 그들의 7번째 성인(Trthakara)의 상징이다. 특히 그 숭배자들에게는 스와스티카를 이루는 4개의 꺾인 선이 각각 자신이 환생할 4개의 장소를 일깨워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세계, 지옥, 현세, 영적 세계 등으로 나뉜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에서는 스와스티카를 회개장부의 겉장, 문지방, 문, 헌금상자 등에 붙인다. 시계방향의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스와스티카와 시계반대방향인 왼쪽으로 회전하는 스와스티카 는 각각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스와스티카는 태양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즉 북반구에서 볼 때 태양은 동쪽으로부터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회전하는데, 이와 같은 태양의 1일 주기를 본떠 스와스티카의 회전방향을 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왼쪽으로 회전하는 스와스티카는 밤, 무서운 칼리(kl) 여신, 주술적인 관습 등을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스와스티카가 혜성의 모양에서 나왔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천체관측이 가능한 문명에서 혜성의 의미로 스와스티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불교에서 스와스티카가 사용되는 이유는 불교의 발생지가 인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 유사한 스와스티카가 사용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모두 인도를 그 근원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漢)나라의 혜성을 나타낸 책 속에서 발견된 스와스티카(왼쪽끝)

 

왜 나치는 이 문장을 자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용했을까? 그것은 나치가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알리는데 '아리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을 아리안족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현대에도 아리안(Ariane)이라는 말은 유럽우주기구(ESA)가 만든 인공위성를 발사하기 위한 로케트의 명칭으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무궁화위성'을 쏘아 올린 것도 아리안이고, 업무를 수행한 단체의 명칭이 '아리안 스페이스'이다.아리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유럽의 선사시대에 인도의 아리안족이 유럽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아리안족은 선사시대에 인도를 침략하여 인도를 지배했던 민족이었다. 아리안족은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유럽에도 진출하였다. 선사시대의 언어에서 유럽에서 쓰인 언어는 대부분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에 속해 있었다. 어떤 이론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특정집단과 이 언어들을 결부지어, 이 집단이 유럽을 침략하거나 유럽으로 이주한 결과 그들의 언어도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기원은 흔히 흑해 및 카스피 해의 북쪽지역으로 설정된다. 인도유럽어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다른 이론은 신석기시대 초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최초의 농부들과 인도유럽어를 결부짓고 있지만 농업의 확산이 모든 곳에서 인구이동으로 이루어졌거나 똑같은 과정을 거친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사정으로 볼때 유럽의 선사시대에는 인도의 문명이 유럽으로 어느 정도 이동을 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게르만족이 인도의 스와스티카를 신성한 표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스와스티카가 유럽에 전파된 후 기독교가 공인됨에 따라서 십자가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스와스티카의 모델이 된 것으로 보이는 은하계(나선은하)

 

                                                   한국전통문양(조선-구름)

 

                                                         조선시대의 등(燈)


십자가(十字架, Cross)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준 구원의 은총을 상기시킨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이다. 의식을 집행할 때 십자가 상징을 긋는 것은 상황에 따라 신앙고백·기도·봉헌·축복 등을 뜻한다. 여러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달려 죽은 십자가는 '크룩스 이미사'라고 하지만, '크룩스 코미사'였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 4가지 십자가 모양에서 행렬·제단·문장(紋章) 등에 쓰이는 십자가, 교회·묘지 등에서 무늬를 넣고 색을 칠해 쓰는 십자가 등 많은 변형과 장식이 발전했다. 십자가 상(像)들은 그리스도교 시대보다 훨씬 전에 종교나 그외의 상징들로 사용되었지만, 이 십자가 상들이 단지 신분이나 소유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는지, 아니면 신앙이나 숭배의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그 이전에 쓰이던 2가지 십자가 형상들이 널리 유행했다. 콥트 그리스도교도들은 생명을 상징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ankh[지붕을 얹은 '타우' 십자가로 '크룩스 안사타'로 불렸음])를 받아들여 신앙 기념물에 널리 썼다. ' 크룩스 감마타'(crux gammata)라고도 하는 만(卍 swastika)자형 십자가는 그리스 문자 감마의 대문자 4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무덤에 십자가의 은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 이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십자가를 그리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조롱을 받거나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개종(改宗)한 뒤에 죽음의 형벌이었던 십자가형을 없애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키로(chi-rho) 도안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물로 권장했다. 이 상징물은 350년경부터 그리스도교 예술에 소재가 되었으며 묘비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십자가의 종류


십자가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십자가 가운데 하켄크로이츠도 포함이 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십자가는 라틴 십자가라고 불리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어지고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십자가가 이것으로 서방 교회에서 많이 쓰고 있다. 전형적 십자가라고 하면 그리스십자가가 그것이다. 가로와 세로가 같고 동방 정교회에서는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 또 교회의 건축도 평면도로 보면 이런 모양으로 되어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러시아 십자가도 많이 쓰고 있다. 라틴 십자가를 거꾸로 한 것이 베드로 십자가이다. 베드로는 이런 모양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교황의 행진 때 사용되는 교황형 십자가가 있다. 예루살렘에서만 볼 수 있는 예루살렘십자가도 있다. 그리고 다수의 십자가들이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십자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트로이에서 발견된 토기에 그려져 있는 스와스티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시기에 훈족과 반달족의 이탈리아 침입을 막아 이후 유럽교회의 지도권을 확립하는데 이바지한 교황(440-461) 레오(Leo) 1세의 유물인 황금반지. 이 속에 스와스티카가 그려져 있다. 당시에도 스와스티카가 종교적인 의미(십자가)로서 사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창.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창의 날위에 스와스티카가 각인되어 있다.

 

덴마크에서 발견된 유적에 그려져 있는 스와스티카. 이 바위는 묘비로 생각된다. 고대 게르만족이 스와스티카를 신앙적인 요소로 사용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하켄크로이츠는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오랜 역사를 지난 문장으로 나치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세계최초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도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치의 정당성은 게르만족이 문명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현대 게르만족이나 유럽민족이 세계4대 문명과는 큰 관계가 없다. 나치독일의 공식국기는 기본적으로 십자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유럽의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가 널리 퍼진 탓도 있지만 유독 독일의 경우 십자가를 많이 사용했다. 1920년 나치스당(黨)이 결성되자 히틀러는 이 운동의 심벌로 붉은 바탕(운동의 사회적 이념) 한가운데에 둥근 흰색(국가주의)을 두고, 그 둥근 바탕에 卍(아리안의 승리를 위하여 싸울 사명)를 검은색으로 그려 넣은 심벌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나치스의 상징으로 깃발이나 완장 등에 사용되었다. 이후 하나의 국기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유럽에 흔히 볼 수 있는 가문문장 처럼 하켄크로이츠도 뮌헨지역의 어느 가문의 문장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뮌헨에서 활동한 점을 보면 서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켄크로이츠는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뜻깊은 문장의 의미와 기독교의 십자가의 의미를 포함한 문장이다.

 

                                                    나치독일의 하켄크로이츠

 

                                      십자가를 기본 바탕으로 한 나치독일의 국기

 

현재 독일은 하켄크로이츠는 사용하지는 않지만 십자가는 현재도 국가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대에서 사용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리스십자가를 사용했지만, 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훈장으로 사용된 철십자훈장에 하켄크로이츠만을 제거하고 사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전투기

 

                                                     현대 독일군의 전투기

 

                                       나찌 문장 모양의 미국 해군본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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