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王政이 사라진다

한부울 2008. 5. 13. 19:12
 

王政이 사라진다

[위클리조선] 2008년 04월 29일(화) 오전 10:25


英연방국들


호주 `- 러드총리, 공화제 개헌 착수 나서 2010년 국민투표

뉴질랜드 - 국민 지지 업고 총리가 영국 왕실 노골적 무시


호주의 국가원수는 누구일까.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출신의 케빈 러드 총리가 정답일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호주의 국가원수이다. 호주는 완전한 독립국이면서도 동시에 영국 연방의 일원이며 지위는 캐나다·뉴질랜드 등과 마찬가지로 자치령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여왕임과 동시에 호주의 여왕이기도 하다.


호주는 영국과의 유대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지난 2001년 건국 100주년을 계기로 공화제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1999년 1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반대 55%, 찬성 45%로 공화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부결되는 바람에 지금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러드 총리가 “호주의 국가수반은 호주인이 맡아야 한다”면서 공화제 개헌을 또 다시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11년간 집권했던 자유당 출신의 존 하워드 전 총리가 ‘왕당파’였던 것과 달리 러드 총리는 그동안 “허울뿐인 영국 왕실과의 고리를 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해왔다. 호주에서도 더 이상 영국 왕실과의 외형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개헌 준비작업과 차기 총선 시기를 고려하면 2010년께 국민투표가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호주와 바로 이웃한 뉴질랜드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특히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는 노골적으로 영국 왕실을 무시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클라크 총리는 지난해 12월 23일 우간다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연설하는 도중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공화제를 추진하는 시민운동단체들은 클라크 총리의 이런 태도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뉴질랜드 역시 공화제로의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영연방은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53개 국가들로 이뤄진 자발적 연합체다. 회원국 중 32개국은 선거로 뽑은 국가수반을 둔 독립된 공화국이며,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 등 5개국은 각각의 군주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독립된 군주국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나머지 16개국은 형식상 입헌군주제를 유지, 영국 여왕을 국가수반으로 삼고 있다.


왕정(王政·Monarchy)이라는 말로 불리는 군주제는 인류의 오랜 역사적 산물이다. 군주제는 사전적으로 왕이 최고권력을 가진 정체(政體)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왕정체제였으나 현재는 공화제 국가(공화국)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 등의 군주제가 소멸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이탈리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헝가리의 군주제가 없어졌다. UN 가입 국가 기준 전세계 192개 국가 중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45개국이다. 이들 중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국가들이 대부분이지만, 왕이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 요소를 일부 도입한 반(半)입헌군주제를 각각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도 있다.


네팔과 부탄


네팔 - 2001년 궁정 총기참사로 몰락, 총선서 공산당 압승

부탄 - 왕추크 국왕 스스로 권력 내놓고 민주정부 구성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군주제도 서서히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장 극적으로 군주제가 사라진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네팔이다. 1990년대만 해도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던 네팔 왕실은 2001년 발생한 ‘궁정 참사’로 몰락의 길을 자초했다. 당시 디펜드라 왕세자가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총기를 난사해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 등 왕실 가족들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디펜드라의 동생 갸넨드라가 국왕에 즉위했다.


하지만 갸넨드라 국왕은 개혁 대신 축재를 일삼고 국민을 억누르는 등 공포정치를 펴오다 2006년 4월 야당과 마오주의 공산 반군(마오 반군)이 이끈 대규모 반(反)왕정시위에 굴복, 군 통수권을 정부 수반인 총리에게 내주었다. 마오 반군은 1996년부터 왕정 타도를 기치로 내걸고 네팔 정부와 사실상 내전을 벌여왔다. 이후 네팔 정부와 마오 반군은 2006년 11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내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공동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결국 네팔 왕정은 지난 4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마오 반군이 주축이 된 네팔 공산당(M)이 다수당이 됨으로써 240년간 지속된 역사를 마감했다.

 

 

네팔 왕가는 정부의 보조금 지급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왕궁 및 왕가 소유의 토지도 국유화되면서 앞으로 일개 평민으로 전락할 것으로 보인다. 갸넨드라 국왕은 자신이 소유했던 국영 항공사 로열 네팔 항공도 몰수당했으며, 자신의 얼굴이 새겨졌던 지폐도 에베레스트산으로 대체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네팔은 1인당 실질국내총생산(GDP)이 1500달러밖에 안 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지만 국왕을 비롯한 왕가는 그동안 연간 50만달러씩 세금을 받아쓰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왔다. 하인만 700명이 넘었지만 앞으로 네팔 왕가는 스스로 모든 생활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갸넨드라 국왕의 비참한 처지에 비하면 부탄의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국왕은 너무 행복하다. 히말라야산맥에 부족 연합체로 흩어져 있던 인구 78만명의 소국 부탄은 1907년 통일 왕조를 이루고 현 5대 국왕까지 절대 왕정체제를 유지해왔다. 부탄은 교통 신호등조차 없고, 인터넷과 TV는 1999년에야 보급됐을 정도로 ‘은둔 왕국’이었다. 그러던 부탄의 정치 개혁은 위로부터 시작됐다. 왕추크 국왕은 2006년 왕위를 계승하면서 선왕의 유지에 따라 “절대군주제를 버리고 입헌군주제로 바꾸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에 따라 부탄에선 지난 3월 24일 사상 첫 총선이 실시됐고, 민주 정부가 구성됐다.


총선은 선왕의 정치 개혁의지로 실현된 것이지만, 왕추크 국왕의 민주화에 대한 신념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미국 명문 사립학교인 필립스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와 정치학을 공부한 올 28세의 왕추크 국왕은 스스로 권력을 내놓으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 정치력을 보였다. 실제로 왕당파인 부탄통일당이 하원 전체 의석(47석) 중 44석을 차지, 정권을 잡았다. 형식은 왕정을 종식하는 민주선거지만, 내용은 달라진 게 없다. 앞으로 왕추크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함께 국가원수로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국가들


모로코 - 강력한 왕권 불구 서구 의회제도 도입해 정치실험

바레인·쿠웨이트 - 모로코 모델로 행정감시 등 개혁 추진


절대군주제에 대한 변화의 바람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에도 불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가장 주목되는 국가가 모로코이다. 모로코만이 유일하게 입헌군주제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모로코의 입헌군주제는 서구식 입헌군주제와는 다르다.


사법·입법·행정 등 3권이 분리됐지만, 국왕에게 아직도 상당한 권한이 집중돼 있는 반(半)입헌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헌법상 모로코 국왕은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국가 원수이다. 국왕은 총리 임명권 및 총리의 제청에 따른 각료 임명권을 행사하고 있다. 각의를 주재하고, 법률 공포 및 의회 해산권도 있으며, 군 참모총장도 겸직하고 있다. 또 주요 공무원과 대사 임명권, 조약 비준권, 사면권 및 비상사태 선포권까지 갖고 있다. 이슬람권의 입헌 군주제에서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전통 때문이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절대왕정에 비해 모로코는 서구의 의회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국왕이 임명하는 직능·지역 대표인 상원과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하원이 존재한다. 또 자유스러운 복장과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활동, 언론·집회의 자유도 보장된다. 물론 정당도 존재한다. 현 국왕인 모하메드 6세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실시된 2002년 총선에선 26개 정당이 참여, 민주적으로 실시됐으며 여성의원이 34명이나 당선돼 모로코가 이슬람권 국가에선 최대의 여성의원 배출국가가 되기도 했다.


모하메드 6세는 2004년 신가족법을 제정, 남녀평등을 명시하고 일부다처제를 엄격히 제한했다. 모로코의 정치체제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이슬람권 일각에선 모로코의 정치체제가 정치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중동의 모든 이슬람 왕정 국가들이 모로코의 모델을 따를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불구, 바레인과 쿠웨이트가 어느 정도 모로코식의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바레인은 2001년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고 2002년 총선을 실시했다. 또 여성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걸프협력회의(GCC) 소속 6개국 중 정부 감시 기능을 지닌 의회를 두기로 한 것은 바레인이 처음이다. 행정기관을 감시할 권한은 의회에 있으나, 최종적인 결정권은 국왕이 행사한다.


쿠웨이트의 경우도 비슷하다. 카타르는 2004년 GCC 국가로는 최초로 성문헌법을 도입했다. 내용을 보면 입법권은 국정 협의기구인 45인 슈라위원회에 부여되며 위원회의 3분의 2는 국민의 직접 선출로, 나머지는 국왕이 임명한다는 것이다. 슈라위원회는 서구의 의회제도 개념은 아니며 정당 활동도 금지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국왕의 절대 권력 중 일부가 국민에게 넘어갔지만, 국왕은 슈라위원회에서 제정한 법률안 거부권과 해산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 권력은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


스페인 - 국민 지지 낮아 현 국왕 이후엔 장담 못해

노르웨이 - 잇단 왕실 스캔들에 1800만달러 유지비도 논란


반면 유럽의 경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몇몇 국가가 이를 폐지하자는 도전에 직면해있다. 스페인의 경우, 지난 1월 70세 생일을 맞은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스페인 국민들은 입헌군주제에 대해선 지지도가 높지 않다. 특히 왕위가 펠리페(39) 왕세자에게 넘어갈 경우에도 스페인 국민이 입헌군주제를 지지할지는 알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국민들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스페인보다 낮다. 노르웨이 국민은 하랄드 5세 국왕이 사용하는 일년에 1800만달러 규모의 왕가 유지비용을 세금으로 감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높은 편이다. 하콘 왕세자가 미혼모에다 마약복용 전력을 가진 평민 여성과 결혼한 것과, 심령술에 빠진 공주가 영혼 치료센터를 차렸다가 공주 직위까지 박탈당한 사건 등으로 노르웨이 국민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신뢰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입헌군주국은 영국·태국·일본을 들 수 있다. 이들 국가의 국가원수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52년 즉위·82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1946년 즉위·81세), 아키히토 국왕(1989년 즉위·75세)은 모두 국민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들 모두 고령이기 때문에 사후에도 왕위를 계승한 왕세자들이 선왕만큼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군주제도 함께 쇠퇴할 것으로 보인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