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부

화산지대에 활짝 꽃핀 보석 마을

한부울 2008. 3. 14. 12:35
 

화산지대에 활짝 꽃핀 보석 마을

[오마이뉴스] 2008년 03월 14일(금) 오전 09:26

 

▲ 청나라 때 세워져 지금도 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류씨 종가. 허순 5대 종갓집은 옛 모습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다. 모종혁 

 

"협곡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그 기운이 사방으로 짙은 연기와 무리 지은 안개 같이 무성하구나."(서하객, 徐霞客) 중국 윈난(雲南)성 바오산(保山)시 텅충(藤沖)현은 버마와 인접한 국경도시다. 텅충은 윈난성 성도인 쿤밍에서 720㎞, 자동차로 12시간 떨어져 있다. 예부터 텅충은 남부 실크로드에서 중국 쪽 땅끝마을로 유명했다.


명나라 지리학자로 유명한 서하객은 텅충에 도착하여 변경무역을 통해 상업이 융성하고 문물이 풍부한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백여 점의 보석상점은 거리에 줄이어 번창하고, 대상단이 물건을 움직이는 광경은 구름이 이동하는 듯하다."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빈 서하객에게도 이 변방도시의 번화한 풍경은 뜻밖이었다.


서하객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화산과 온천이었다. 텅충은 중국에서 화산군과 지열온천이 가장 밀집한 곳이다. 90여 곳의 분화구가 융기하여 화산의 활동 형태를 보여주고 있고, 80여 곳의 온천은 사시사철 뜨거운 물과 증기를 내뿜는다.


텅충에 화산지대가 많은 이유는 유라시아대륙판과 인도대륙판 중간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300년 전까지 텅충은 활화산의 활동이 활발하여 지각운동이 일어나고 화산이 수시로 분화했었다. 텅충현청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마잔(馬站)에 남아있는 90여 개 분화구 중 22개는 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분화구 주위는 용암과 화산재가 흘러내린 자국, 지형변화, 관목수림 등이 조화롭게 보존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텅충은 열대계절풍기후대에 속해 연평균 기온이 14.8도로, 겨울은 춥지 않고 여름에는 혹서가 없다. 산림이 무성하고 화산 분화구와 같은 자연풍광도 아름다워, 오지인데도 불구하고 연중 찾는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특이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관광객을 유혹하는 텅충의 특산물은 비취(翡翠)와 옥이다. 명·청시대부터 '옥은 텅충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텅충은 세계 비취가공산업의 메카이자 동남아 비취와 옥 원석의 집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돈이 되는 보석 무역을 관할코자 1899년 영국은 텅충에 영사관을 개설했고, 1902년 중국정부도 세관을 열었다.


오늘날 중국 최고 비취 가공지의 명예를 루이리(瑞麗)에 내주기는 했지만, 텅충은 과거의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가공기술로 버마에서 수입된 비취와 옥 원석을 진귀한 보석으로 탈바꿈시키는 텅충만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 사시사철 뜨거운 증기를 내뿜는 르하이(熱海)공원. 텅충에는 80여 곳의 온천이 있어 찾는 관광객을 즐겁게 한다. 모종혁 

 

▲ 텅충현청 내 있는 한 비취·옥 판매가게. 텅충은 한때 세계 비취가공산업의 메카로 이름을 떨쳤다. 모종혁 

 

생존 위해 남부 실크로드로 길 나섰던 허순 상인


비취와 옥을 찾아 버마로 나섰던 텅충의 역사는 대략 명나라 홍무제(주원장, 초대 황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텅충은 소수민족 와(?)족의 땅이었다. 오늘날 충칭(重慶)시 바(巴)현 출신의 병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군대가 텅충에 주둔하면서 한족의 땅으로 변모했다.


병역을 마친 병사의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병사 대부분은 텅충에 남았다. 군대가 주둔했던 지역 주변으로 여러 마을이 형성되는데, 그 중 한 마을이 허순(和順)이다. 허순은 텅충현청에서 남쪽으로 7㎞ 떨어져 있고 총면적이 20㎢에 불과한 농촌마을. 높지 않은 마터우(馬頭)산을 배경으로 경작할 토지와 마실 물이 적당해 사람 살기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다.


성씨가 춘(寸)·리(李)·류(劉)·인(尹)·자(賈) 등인 한족 병사들은 토착민인 와족과 통혼하면서 허순에 정착했다. 예부터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던 와족과 달리 신정착민인 한족은 허순의 지리적 장점에 주목했다. 텅충은 버마와 148.7㎞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어 중계무역지로서 최상의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다.


허순 사람들은 늘어나는 주민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업에 투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긴 군생활로 단련된 화순 주민은 마방(馬幇)을 조직, 남부 실크로드 노선을 통해 버마·태국·인도 등지로 나아갔다. 허순 마방이 가장 눈독을 들인 구입 물품은 버마산 비취와 옥. 고대부터 중국인이 가장 선호한 보석이었다.


버마 각지에서 싼 값에 비취와 옥 원석을 사가지고 온 허순 마방은 이를 고향에서 가공했다. 가공된 보석은 또 다른 마방이 가깝게는 쿤밍(昆明), 멀게는 베이징·광둥(廣東) 등지로 가져가 팔았다. 오늘날 중국 내에서도 유명한 허순의 보석가공업과 상업 역사는 600여 년 전 무역 중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부 주민이 지속적인 무역 거래를 위해 해외에 남게 되면서, 허순 출신 화교의 역사도 시작됐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허순을 원적지로 한 화교 수는 1만여 명으로 늘어나 홍콩·대만을 포함, 13개 나라에 나뉘어 살고 있다. 2006년 현재 허순 주민 수가 1200여 가구, 6000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그 두 배에 가까운 허순의 후예가 해외에 거주하는 셈이다.


19세기 말 텅충이 대외 개방되면서 허순 주민의 활동은 전면적이고 다양해졌다. 고향에 남은 주민은 비취·옥에다 서양 물품, 쌀, 목재, 담배 등을 중계무역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외국과 외지에 나간 주민은 상인으로서뿐 아니라 노동자,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이국타향에 적응했다.


소수이긴 했지만 정계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버마를 점령한 영국 식민지 정권의 행정관료 중 일부가 중국인이었는데, 그 중 절반은 허순 출신이었다. 자본을 축적해 경제적 안정을 찾은 주민과 허순 출신 화교는 자녀 교육에 힘을 기울여 중국 문화계와 사상계의 지도급 인사도 속속 등장했다.

 

▲ 버마에서 활약한 '비취대왕' 춘준푸의 허순 고향집 내부. 지금도 춘의 먼 친척이 살고 있다. 모종혁 

 

▲ 허순도서관에서 잡지와 신문을 읽고 있는 노인들. 허순도서관은 중국 최대 향촌도서관으로 유명하다. 모종혁 

 

이국타향에서 성공한 허순 화교, 조국·고향 발전에도 이바지


허순 근·현대사에서 춘준푸(寸尊福)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855년 태어난 춘은 13세 때 마방을 따라 버마로 넘어갔다. 춘은 만달레이의 한 허순 출신 옥 판매상점에서 일하면서 상술을 배워나갔다.


버마 생활이 익숙해지자 춘은 고향 사람들과 함께 '푸셩룽'(福盛隆)을 열어 사업에 투신했다. 춘은 비취를 보는 안목이 누구보다 뛰어나서 진귀한 원석을 싼 값에 찾아내 가공하여 중국에 고가로 팔아넘겼다. 자기 사업을 시작한지 10년도 안 되어 백만장자가 된 춘은 버마 거주 화교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춘의 성공 가도는 거침없어 영국 식민지정권 하의 버마 입법회 의원에 등용되기도 했다.


버마에서 입지를 굳힌 춘준푸는 조국으로 눈을 돌렸다. 쑨원(孫文)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의 버마지부 상임이사를 맡은 춘은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했다. 동맹회의 유력한 재정 후원자였던 춘을 쑨원은 '화교의 영수, 민족의 자랑'이라 칭송했다.


춘은 고향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8년 윈난 서부지역 최초의 여자학교인 밍더(明德)학당을 설립하고, 고희 때는 허순도서관을 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인재만이 중국과 허순을 살릴 수 있음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최대 향토도서관으로 유명한 허순도서관은 허순의 자랑이자 허순인의 높은 문화의식을 보여주는 결정체다. 허순도서관은 1928년 개관하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촌도서관이기도 한데, 외국에 거주한 허순 출신 화교들의 지원과 기부가 쏟아지면서 193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개관했다.


중국의 저명한 철학가 후스(胡適)가 직접 쓴 현판을 거쳐 들어간 허순도서관 내에는 8만여 권의 장서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구통전서>, <속경장>, <만유문고>, <한위총서> 등 수천여 권의 희귀 전서는 허순 출신 화교가 직접 구해다 기부한 책이다.


춘윈광(寸雲廣) 허순도서관장은 "문화대혁명 시기 적지 않은 장서가 불태워지고 약탈당했지만 지금도 중국에서 손꼽히는 도서관으로 운영·관리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춘 관장은 "허순은 윈난에서도 오지마을이지만 성 내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다"면서 "허순의 높은 교육열에는 마을의 전통에다 도서관의 존재가 크게 공헌했다"고 말했다.


허순에는 향(鄕) 단위로는 드물게 1915년에 중·고등학교가 설립됐다. 2005년 현재 허순 출신 대학 재학생만 300여 명, 외국에 나간 유학생은 20여 명이나 된다. 허순 주민은 누구나 도서관 이용이 무료이고, 수시로 문화강좌가 열려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 춘씨 종가집 앞에 세워진 석패방. 춘씨는 허순 최대의 성씨 집단이다. 모종혁 

 

▲ 볏짚과 대나무를 이용해 의자를 만드는 한 일가족. 적지 않은 허순 주민은 옛 생활양식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모종혁 


도서관에 윈난-버마항전박물관까지... 문화 향기가 짙은 향촌


지난 2005년 7월 개관한 윈난-버마항전박물관은 허순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윈난-버마항전기념관은 중국 최초로 민간이 투자·설립한 중일전쟁 관련 박물관으로, 5000여 점의 유물을 수집·전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난-버마전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미·영·중국 연합군이 치열한 항전을 벌인 전쟁터였다. 윈난-버마전선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도 참전하여 우리에게 낯선 전장이 아니다. 연합군은 윈난-버마전선에서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인도와 중국 내륙을 지키고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윈난-버마항전박물관을 설립한 두안셩쿠이(段生?)는 허순 출신으로 20여 년 동안 윈난-버마전과 관련된 유물만을 수집했다. 전시물 중에는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과 연합군의 장비 일체와 중국군에게 전쟁 물자를 대주고 공중폭격을 담당한 미 공군 비호대의 희귀 유물, '종군위안부'의 생활용품 등도 있다.


리주안(여) 윈난-버마항전박물관 가이드는 "1942년 5월 일본군은 텅충을 점령했지만 중국군과 중국 인민은 2년 4개월의 항전 끝에 고향을 되찾았다"면서 "3346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으면서 텅충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아 윈난성 전체를 지킬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리는 "평일에는 200~300명, 주말에는 500명 이상의 참관객이 박물관을 찾고 있다"면서 "박물관은 윈난성에서도 손꼽히는 애국교육장"이라고 말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류징웨이(32)는 "지난 3, 4년 전부터 언론매체를 통해 허순이 자주 소개되면서 방문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류는 "건설 중인 다리(大理)-루이리 철도와 다리-바오산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더욱 많은 관광객이 허순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춘씨 종가에서 만난 한 중년인은 "젊은이들이 자꾸 마을을 버리고 텅충현청으로 나가려고 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을이 관광지처럼 변하고 외지인이 계속 이사해 와서 공동체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면서 "해외에 나가있는 친척도 허순인만의 마을이 변질될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춘윈광 허순도서관장은 "외국에 거주하는 허순 출신 화교는 금세기 들어서도 해마다 한 차례 이상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를 기르는 제사에 참가한다"면서 "춘·리·류 등 5대 종가는 허순 화교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살아가는 주민은 많고 경작할 토지는 한정되어 주민의 8~9할이 해외로 떠돌아야 했던 허순. 2006년 중국정부로부터 중국 10대 문화향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 서남부 땅끝마을 허순이 변화의 바람 속에서 자신만의 공동체를 지켜갈지 주목된다.

 

▲ 중국 최초로 민간에서 설립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윈난-버마항전박물관. 5000여 점의 희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모종혁 


모종혁(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