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대륙 항주에 있었던 혜인원(慧因院) 일명 고려사(高麗寺)가 바로 해인사다

한부울 2008. 2. 16. 18:53

 

우리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고 이상하기 이를 때 없다.

우리민족의 역사가 아무리 무수히 많은 피침을 받았던 역사라고 하지만 마땅히 후세에 남아 있어야 할 유적이나 사적들 따위가 하나같이 전쟁화마나 방화로 전소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고 그와 같은 기록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하여도 이 모든 것은 본질적인 왜곡이고 음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다고 난데없이 문화재에 화풀이 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밠생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나 우리역사에는 이런 일이 너무 많아 탈이다.

당시 대륙전체를 다스리는 대국으로서 왜 이런 불상사가 없었겠는가 마는 있을 법한 유적과 사적이 이런식으로 없어졌다고 하는 것에서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기사 36년간 긴 세월동안 일제가 마음먹고 처음부터 역사문제를 옳지 못한 의도나 고의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조작하거나 꿰맞추고자 했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만약 반도사를 창조함에 있어 기존 유적이나 사적이 방해가 된다면 가차없이 없애버렸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있었던 유적이나 사적을 기록상으로 청소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 손쉽게 표현한 것은 바로 화재로 인한 소실이다.

한반도에 있는 사적들 모두 하나 같이 소실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없애버리고 난 후 그 자리에 무엇을 꿰맞추더라도  후세에서는 알 길이 없다.

또한 일제는 충분한 압제 기간동안 얼마나 왜곡된 유적이나 엉터리 사적들을 여기저기 약 2~3미터 정도 땅을 파고 묻어두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일본 사학자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과거 일제가 가르쳐 준 비법(?)으로 자기네 고사연대를 앞당기려다 발각되어 세계적으로 창피를 당한 일이 한번 두번이 아니다.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때 엉터리 유적과 사적을 이용 얼마나 장난 쳤는지 짐작 할 수 있어진다.

지금도 한반도 여기저기서 적잖게 유물이 발견되지만 솔직히 고구려, 백제, 신라 운운하면서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을 자랑삼아 과대포장하여 발표하거나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

왠지 저주 받을 일제 망령이 집요하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대륙사를 감안 할 때 정말 다행스럽게도 혜인사(해인사)즉 혜인원이란 사찰이 현대에 대륙 근원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어마어마한 존재가치 즉 살아있는 역사를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기에 중공정부역시도 부정할 수 없어 스스로가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하고 거대한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혜인원!이라고 하는 사찰이다.

그것을 처음 건조한 사람은 송나라 사람이라고 하나 대륙사적으로 보면 고려인이다.

건물형식이나 모양새를 한번보자.

지붕색도 지금 황금빛이 나는 대륙색을 칠하지 않는 기와 본색을 띄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 건물양식과 판이하게 다르다.

왜 다른가.

한반도에 있는 사적이나 건물들은 근세기에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과거 고려인들이 축조하거나 건축한 것은 대륙에서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건물들은 모두 독창성을 내세운 변형된 이미테이션일뿐이다.

 

그렇다 19세기 말 일제가 조선의 지배권과 모든 지위를 빼앗고 대륙역사를 강탈 한 후 일제의 조종을 받았던 사학자들을 시켜 모든 것을 뜯어고치고 말았다.

결국 대륙에서는 국민당, 중공사학자들이 그러한 일제 책동으로 인하여 무주공산이 된 대륙영토와 역사를 어부지리로 얻는다.

이제 그들은 일제 사학자들이 연구발표한 것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추인하는 것으로 모든 역사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더 이상 논쟁자체를 불식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들이 만든 역사가 정사가 될 수 없는 핸디켑이 있지만 일제사학자들이 반도사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들을 뒤받침 해주었기 때문에 대륙사 만큼은 정사라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지금도 중공과 일본이 서로 죽이니 살리니 하여도 근세 아시아 역사 전체를 송두리채 뒤바꾼 것은 그들이 공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역사에서 만큼은 알게 모르게 지금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항주는 일제가 20세기초 점령하였던 곳이다.

그곳(玉岑山慧因)에 혜인원(慧因寺)이라고 하는 고려사(高麗寺)가 있다.

일제는 한반도에 해인사(海印寺)라는 것을 만들었을 것이고 중공정부는 근세기에 대륙혜인원을 고려사(高麗寺)라고 하여 제후를 우대한 것 같은 기념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항주가 강도( 江都:江華島)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마지막으로 추론 컨데 팔만대장경도 이곳에 있었다가 한반도로 이동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나 조선의 역사가 대륙역사가 아니라 분명 한반도역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하는 충분한 증표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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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고려혜인사토지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土地喜捨記) 

연대 :   1314년(충숙왕1년)

출토지   항주(杭州) 고려혜인사(高麗慧因寺) 

소재지   (중국)-미상

 

중국 항주(杭州)의 고려혜인사(高麗慧因寺)에 고려의 고관인 원관(元瓘)이 토지를 시납한 사실과 그 토지의 구체적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고려혜인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정원(淨源)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던 사찰로 이후 북송(北宋) 멸망 이전까지 고려왕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원(元)나라 때에 중국에서 활동하게 된 충선왕(忠宣王)은 고려왕실과의 인연을 고려하여 이 사찰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원관의 토지 시납은 충선왕의 이 사찰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원관은 토지와 함께 대장경 1질을 인쇄하여 이곳에 봉안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당시 이 사찰의 주지였던 혜복(慧福)이 짓고 비석에 새긴 것인데, 현재 실물은 전해지지 않고 명(明)나라 때 이비후(李飛侯)가 편찬한『옥잠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에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으로 보아 원관의 대장경 희사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를 새긴 비석의 뒷면에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행본)李飛侯,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中國佛寺誌叢刊 56책 수록) 


항주고려혜인사토지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土地喜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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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李飛侯,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中國佛寺誌叢刊 56책 수록)     

(杭州高麗慧因寺土地喜捨記)
항주고려혜인사토지희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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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國相元公置田碑


宋元豐初年晉水法師主惠因華嚴講席夙通三觀妙義圓音溥暢自五季以來頹網墮緖迨是復振學者歸仰風聞西方越八年高麗僧統義天本以王予捨位克志大法航海而來受敎塵下卽達其道嗣王法延曁歸本國號大覺國師化行兩地越十七年國母施白金於寺宮搆傑閣奉安三譯華嚴經典莊嚴廬舍那佛洎普賢文殊像設金碧璀璨瞻仰一新以故名其寺曰高麗以慧因爲大覺道場迨二百年矣輪雲相代隳弛因之今太尉瀋王益紹先志皇慶元年冬遣使咨議參軍洪淪大護軍蔣得渲親從護軍林宣中軍將金完之郞將吳仲景等黻藻完繕靡飾▨庸百費具擧且以疏徵慧福承乏玆席仍施經律金藏卷帙襲置閣上晨夕薰崇今二年春相國退翁元公走价李孝道高口才齎施來杭督印經典一藏盛以髹函置于寶輪藏中復市負郭良田歸于常住永充僧飯僧之供歲爲轉誦則法食兩施備矣惟如來以佛法付國王大臣正欲維持敎法流布後世與天地相爲長久今功德主瀋王主于上退翁元相成于下不負如來付囑初意尊君敬法誠所未有懼無以垂不朽故書其顚末於碑陰云」

延祐元年三月  日住山慧福識」

一置捨到田土百頃」

 一段四十畝坐落嘉興路嘉興縣永安鄕三十八都地字圍民田置到沈提擧田」

 一段一十畝坐落嘉興路嘉興縣遷善鄕三十五都東埠鉗字圍民田置到沈一官田」


[출전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 


고려국상원공치전비


송(宋)나라 원풍(元豊 :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078~1085년까지 사용) 초년에 진수법사(晉水法師 : 의천(義天)이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학을 배운 정원(淨源)을 가리킴)께서 혜인사(惠因寺)의『화엄경(華嚴經)』강석(講席)을 주재하시었는데, 일찍이 (화엄) 삼관(三觀)의 오묘한 뜻에 통달하시고 원만한 가르침을 널리 펼치셨으므로 오대(五代)시기 이래 위축되었던 (화엄의) 가르침이 이때에 다시 떨치게 되었다. 학자들이 우러러보며 몰려들었고 사방에 명성이 드러났다. (원풍) 8년(선종 2, 1085 )에 고려의 승통(僧統) 의천(義天)은 본래 왕자였지만 그 지위를 버리고 큰 가르침에 뜻을 두어 바다를 건너 와서 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 도(道)를 깨달아 가르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후에 본국에 돌아가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불렸고 (중국과 고려) 두 곳에서 교화를 행하였다. (원풍) 17년(선종 11, 1094 )에 고려 국왕의 어머니가 백금(白金 : 은을 의미함)을 시주하여 큰 건물을 짓고 삼역(三譯)『화엄경』을 봉안하고, 노사나불과 보현보살, 문수보살의 상(像)을 장엄하며, 황금색과 푸른색을 찬란하게 칠하여 사찰이 새롭게 되었다. 이에 사찰의 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하고 혜인사를 대각국사를 위한 도량으로 삼아 2백년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낡고 무너진 채로 지냈는데 지금 태위심왕(太尉瀋王)께서 옛날의 뜻을 계승하여 황경(皇慶 : 원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1312~1313년까지 사용) 원년(충선왕 4, 1312 ) 겨울에 자의참군(咨議參軍) 홍약(洪瀹)과 대호군(大護軍) 장득선(蔣得渲), 친종호군(親從護軍) 임선(林宣), 중군장(中軍將) 김완지(金完之), 낭장(郎將) 오중경(吳仲景)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사찰을 중수하고 아름답게 꾸미도록 하고 필요한 경비를 모두 대주었다. 또한 글을 보내 혜복(慧福)을 불러 (화엄경) 강석을 계승하도록 하고 이어서 경(經)과 율(律)의 대장경을 시납하여 대장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워 존숭하도록 하였다. 지금 (황경) 2년(충선왕 5, 1313 ) 봄에는 재상인 퇴옹(退翁) 원(元)공이 하인 이효도(李孝道), 고▨재(高▨才)를 시켜 시주물을 가지고 항주(杭州)에 와서 대장경 1질을 인쇄하여 옻칠 한 함에 담아 보륜장(寶輪藏)에 두게 하였다. 또한 다시 성 바깥의 좋은 밭을 사서 (사찰의) 상주(常住)에 넣어 승려들의 밥먹을 비용으로 하여 해마다 대장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니 경전[法]과 음식[食]의 시주를 모두 갖추었다. 생각건대 여래께서 불법(佛法)을 국왕과 대신에게 부탁하신 것은 가르침을 유지하여 후세에 퍼뜨림으로서 천지와 함께 길이 오래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지금 공덕주인 심왕이 위에서 주관하고 퇴옹 원(元) 재상이 아래에서 이루었으니 여래께서 부탁하신 애초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임금을 높이고 불법을 공경함에 진실로 이전에 있지 않던 바이다. 후세에 영원토록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전말의 비석의 뒤에 쓴다.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3월 일 이 산에 머무는 혜복(慧福) 씀.

희사한 밭 100경(頃)

한 뙈기 40무(畝)는 가흥로(嘉興路) 가흥현(嘉興縣) 영안향(永安鄕) 38도(都)의 지자위(地字圍)에 있는 민전(民田)이며 심제거(沈提擧)의 밭에 닿아 있다.

한 뙈기 10무(畝)는 가흥로(嘉興路) 가흥현(嘉興縣) 천선향(遷善鄕) 35도(都) 동쪽 언덕의 겸자위(鉗字圍)에 있는 민전(民田)이며 심일관(沈一官)의 밭에 닿아 있다.

[해석자-최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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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海印寺 Haein Temple)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에 있는 사찰.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가야산(伽倻山) 서남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모신 법보사찰(法寶寺刹)로, 조계종 종합수도도량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는 곳이다. 불보사찰(佛寶寺刹)인 통도사(通度寺), 승보사찰(僧寶寺刹)인 송광사(松廣寺)와 더불어 한국 3보사찰의 하나이다.


802년(신라 애장왕 3) 순응(順應)이 창건에 착수하였고, 그가 죽자 뒤를 이어 이정(利貞)이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창건주인 순응이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 근거를 두고 이름지은 것으로, 삼라만상이 고요한 바다에 비치듯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의 정심(定心)에 만법의 실상(實相;眞理)이 명료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량으로, 이러한 창사 정신은 계속 이어져 왔다.


신라 말기 승통(僧統)인 희랑(希朗)이 불법을 크게 일으켰으며, 고려 건국 후에는 국찰(國刹)로 지정되었다. 또 의천(義天)이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부터 8년간에 걸쳐 사찰규모를 확장하였는데, 이는 창건 당시의 규모보다 더 웅장한 것으로, 임진왜란의 화를 면하고 보존되어 오다가 숙종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선 말기에 중건한 것으로 50여 동(棟)에 이르며, 말사로는 가야산 내 암자 15개를 비롯해 모두 100여 개 사찰이 있다.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국보 제52호 해인사장경판전(장경각;藏經閣)은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과 해인사고려각판(국보 제206호·국보 제734호)을 모신 2개 판전으로, 경판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아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 가운데 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것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 해인사로 옮겨온 것이다.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해인사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해인사목조희랑대사상(보물 제999호), 해인사길상탑(보물 제1242호), 해인사홍제암(보물 제1300호), 해인사사명대사부도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 해인사대적광전(경남유형문화재 제256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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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고려사 복건사업

名称: 高丽寺设计图 

简介:杭州自古以来就有“东南佛国”之称。据史料记载,北宋时杭州有三百六十寺,其中之一就是号称教宗首刹的“华严第一道场”慧因教院。此院建自吴越国钱武肃王,时名慧因禅院。北宋时,因高丽国王子、佑世僧统义天前来求法取经并捐资扩建寺宇、献华严经秘籍以藏而更名为教院,俗称“高丽寺”。南宋及元代,高丽寺作为御前功德院而累受封赐,香火兴旺。元末明初,毁于战火。明嘉靖、万历时兴复,天启时修寺志一部。 清乾隆第二次南巡时,改额法云寺。太平军两占杭城时,复毁于战火。至光绪初已荡然无存。高丽寺复建选址在玉岑山、筲箕湾西北面,五老峰东南面,界于浙江省总工会疗养院与六通宾馆之间的空地。方案根据“古高丽寺图”记载,沿中轴线主要布置照壁、天王殿、放生池、大雄殿、轮藏殿、华严经阁等建筑;中轴线右侧布置钟楼、禅堂、中韩佛教文化交流陈列室等建筑;中轴线左侧布置香积橱、斋堂、涤池等建筑。高丽寺主入口位于八盘岭路上,藏导结合。整组建筑沿地形布置,顺地势逐步抬升,依山势而建,建筑隐藏于山地树林中,若隐若现。据记载,高丽寺在宋朝时达到全盛时期。因此设计的建筑风格以仿宋式建筑形式为主,中轴线上建筑黄墙黑瓦,为重檐屋顶,突出寺庙建筑庄严的气氛;轴线两侧建筑为悬山屋顶,体现园林建筑的特点。环境布置上,充分利用现有地形和植被。地面铺装,除主要道路、活动场地采用青石板铺装外,其它地面以自然砂石地面为主。建成后的高丽寺是一处中韩文化交流、旅游休闲综合性的旅游景点。 

更新日期: 2005年05月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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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日,记者在位于三台山路西面,正在重新修建的高丽寺看到,寺内天王殿、大雄宝殿等均已结顶。 


据介绍,今年休博会期间,高丽寺部分建筑将逐步开放,明年10月1日正式建成开放。慧因高丽寺作为中韩友好的象征,受到历代朝廷和杭州地方官以及高丽檀越(施主)的捐赠和保护。历代古籍直至1954年的杭州地图均记载有慧因高丽寺。 


高丽寺又名慧因寺或慧因高丽寺,1101年,宋徽宗登基,高丽遣使祝贺,并捐赠黄金2000两,建慧因禅寺华严经阁,后慧因寺被称为“高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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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台山路至六通宾馆的路段,几年来一直没有路灯,影响附近宾客及居民的夜间出行,群众反映较多,随着高丽寺的开放,这一带成为湖西重要的旅游景点,在这一路段上安置路灯更显得非常重要。西湖区人大代表俞东英对该路段进行了实地察看和相关情况的了解后,积极为该路段的路灯设置奔走,并在人大会议上提交了“建议在该路段安装路灯”的提案。在市路灯管理所和相关部门的高度重视下,这一路段的路灯安置得到了落实,在上个月亮起了路灯,给居民提供安全和谐的生活环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