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물질적 번영을 위한 도구일 뿐인가?
[프레시안] 2008년 01월 28일(월) 오후 11:31
[최무영의 과학이야기] 과학이란 무엇인가 <상>
연재를 시작하며
현대사회에서 자연과학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전체 우주를 대상으로 연구하면서 "신비로운" 자연 현상의 이해를 추구하는 정신문화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른바 "과학기술"의 바탕으로서 에너지, 컴퓨터와 통신 등 전자기술, 병의 진단 및 치료, 유전공학 등 물질문명을 낳았습니다. 물론 이에 따른 부정적 측면으로서 핵무기를 비롯한 군수 산업, 환경오염, 가치의식의 혼란 등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느 면을 생각하든지 현대인에게 과학의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깊어지고 전문화된 학문은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수련을 받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학문이란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특히 자연과학은 열려있는 학문으로서 합리적 이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검토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 활동의 주체는 현실 사회 속의 인간이므로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가 속한 학문 사회에서 공통으로 신뢰받는 사고와 탐구의 전형, 곧 규범의 존재와 영향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으며, 또한 전체 사회의 관념 체계, 곧 시대정신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아온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과학을 활용한 기술의 산업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과학과 사회의 연관성은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기술의 산업화가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준다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긍정적 측면 자체에도 심각한 의문이 있다는 사실은 보다 본원적이고 전체적인 과학적 고찰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핵에너지 문제나 새만금 사업, 그리고 최근에 대운하 계획 등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의 사회구조나 문화수준에서 과학의 물질적 활용에 치중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성을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과 그 물질적 활용, 곧 기술의 의미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어 쓰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볼 수 없는 "과학기술"이라는 용어가 과학과 기술을 동일시하는 의미로 널리 쓰이지요. 이는 과학을 단순히 도구적으로 인식해서 풍부한 정신문화를 포기하게 될 뿐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극도의 실용주의가 만연해서 과학의 존재 이유가 실용성이라고 왜곡되어 있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기본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과 현대사회의 발전에는 과학적 사고, 곧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함께 자유로운 상상력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 예술, 사회와 삶 등에 대한 폭 넓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대학에서 뿐 아니라 고등학교 과정에서부터 이른바 문과, 이과를 구분하는 교육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난 여러 해에 걸쳐서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연재물을 구성하였으며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자연과학의 의미와 성격을 소개하려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산업화, 이들과 사회와의 밀접한 상호작용에 의해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파멸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은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 과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과학의 올바른 활용을 위해서 과학은 사회 전체의 공유물이 되어야 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학 지식이 아니라 편협한 실증주의를 넘어서서 진정한 합리주의로서의 과학적 사고를 뜻하는 것이며 최근 우리 사회를 볼 때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필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문화와 연결 짓는 인문학과 달리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라면 흔히 문명을 연상합니다. 실제로 자연과학은 기술의 바탕이 되어서 전자기술이나 유전공학 등 물질문명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자연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정신문화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고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phenomenon)'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자연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대상은 극대의 세계에서 극소의 세계, 곧 우주 전체로부터 기본입자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크기에 따라 전형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살펴봅시다.
▲ 손을 확대한 모습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익숙한 현상들의 크기가 대체로 1미터 정도지요. 예컨대 사람의 키도 1m 정도이니 이 크기에서 나타나는 현상부터 시작하기로 하지요. 그러면 그림 1에서 1제곱미터의 넓이를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낮잠을 자고 있네요(1). 여기서 가로, 세로 각 변은 100m, 곧 1m입니다. 이것을 10배로 확대해보면 가로, 세로가 각각 10-1, 곧 10cm가 됩니다. 그 10cm×10cm = 100cm²의 넓이를 들여다보니 손이 보이네요(2). 사람을 비롯하여 비교적 큰 편인 젖먹이동물(포유류)에게는 10cm란 손처럼 일부의 크기이지만, 크기가 10cm 쯤 되는 생물들이 더 많습니다. 이것을 다시 10배 확대해보면 손등의 일부가 보이겠지요(3).
그런데 그다지 아름답지 않네요. 이건 아까 그 아저씨의 손이라 이렇고, 학생 여러분의 손은 매끈하게 보이겠지요. 그러면 이제 앞에서 했던 방식대로 이것을 다시 한 번 확대해 봅시다. 가로, 세로 1밀리미터 크기의 넓이를 확대해보면 이렇게 보여요(4). 이거야말로 정말 아름답지 않군요. 하지만 아무리 젊은 사람의 아름다운 손이라도 확대해 보면 이렇게 보일 것입니다. 10배 더 확대해 볼게요. 그러면 이렇게 엄청난 골짜기가 보이고, 이때 가로, 세로는 각각 10-4, 곧 100마이크로미터μm인데 이 정도면 미생물들의 크기가 되죠(5).
이것을 또 10배로 확대해보면 림프구(lymphocyte)라고 하는 세포가 보이는데(6), 이것은 병원체와 같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또 다시 확대해서 보면 1μm 크기의 세포핵이 보이고(7), 또 확대해서 0.1μm 크기를 보면 DNA의 끈이 보이고(8) 다시 확대하면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보입니다(9). 또 확대해서 이른바 1나노미터(nm) 크기를 보면 DNA 분자 결합이 보이죠(10). 다시 확대해보면 탄소 원자(atom)가 보이는데, 탄소 원자는 일반적으로 가운데에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에 전자(electron)들이 적절하게 분포하고 있습니다(11). 이러한 것은 사람이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추론하여 얻어낸 것입니다.
이제 반대로 점점 커다란 세계로 가볼까요? 사람보다 훨씬 큰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Earth)에서 시작하기로 하지요. 아래 왼쪽 사진에서 보듯이 지구는 대체로 공 모양에 가깝고 반지름이 6백만 미터, 곧 6천 킬로미터 가량 됩니다. 표면이 육지와 바다로 이루어지고 바람과 눈, 비 등 기상 현상을 보이며 우리를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를 품고 있는 하나뿐인 우리의 소중한 떠돌이별(행성: planet)입니다.
▲ (좌)아름다운 푸른 행성, 지구 (우)우리 은하 미리내
지구는 형제인 다른 떠돌이별들과 함께 해(태양: Sun)라는 (붙박이: fixed) 별(star)을 중심으로 해서 태양계(solar system)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해까지 거리는 1.5×1011m, 곧 1억 5천만 킬로미터 쯤 되며, 태양계의 크기는 60억 킬로미터 정도지요. 우주의 구조와 진화 강의에서 다루겠지만 우리 태양계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다른 별들과 함께 미리내(은하수: Milky Way)라는 은하(galaxy)에 속해 있습니다. 소용돌이 모습인 납작한 원반에 중심부가 볼록한 모양인데 그 지름은 1020m에 이르지요. 원반의 위쪽에서 본 모습이 오른쪽 사진입니다. 이러한 은하들이 엄청나게 많은 수가 모여서 전체 우주를 이루는데 현재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의 크기는 무려 1026m나 됩니다.
결국 자연과학은 기본입자라는 극소의 세계로부터 전체 우주라는 극대의 세계까지 모든 현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는 시간으로 따져보면 찰나, 곧 1000조 분의 일 초보다도 짧은 순간으로부터 영원무궁, 곧 우주의 나이에 해당하는 137억년까지의 모든 현상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이러한 대상으로서 자연을 편의상 물질(matter), 우주(universe), 생명(life)으로 나누어 볼까요. 일반적으로 모든 현상에는 그 현상을 일으키는 실체(substance)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는데 이를 자연과학에서는 물질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생각을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우주란 이러한 물질이 존재해서 다양한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무대를 말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과 우주는 분리할 수 없고 합해서 물질세계를 이룹니다. 이러한 물질세계를 다루는 물리학(physics), 화학(chemistry), 천문학(astronomy) 따위를 물리과학(physical science)이라 부르지요.
여기서 생명현상은 워낙 특별해서 따로 떼어냈는데 이를 다루는 생명과학(life science)에는 생물학(biology)과 의학(medicine)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도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 생명도 물질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지질학(geology), 대기과학(atmospheric science), 해양학(oceanography) 등이 포함된 지구과학(earth science)은 기본과학이 아니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을 응용한 종합과학이라 하겠습니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이러한 자연과학 중에서 물리학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수학(mathematics)은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고 사고의 틀 자체를 연구하지요. 과학에서는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러한 과학은 그것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이 공부하면 될 터인데 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우리가 왜 과학을 공부해야 할까요? 그 해답을 얻으려면 과학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합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의미는 과학적 사고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과학적 사고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말하며, 과학적 사고방식은 과학정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의 위력이라고 하면 과학적 지식이나 그것을 특별히 기술로 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즘에는 위력, 힘을 협소하게 물질문명, 더 좁게는 무기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순식간에 점령했지요. 이 때 두 나라의 실질적 차이는 어느 쪽이 군사력이 강하냐 하는 것인데 이를 결정하는 무기들은 기술의 응용에서 나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위력은 기술에 얼마나 잘 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연과학의 위력이라는 것은 그런 기술의 응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은 동양과 서양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역사적 전개 과정을 보면 동양과 서양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나요?
흔히 듣는 이야기로, "동양은 정신적이고, 서양은 물질적이다"라는 의견이 있지요. 혹시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있지 않나요? 하지만 동양에서 더 물질문명이 강하고, 서양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기술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기술이 동양과 서양 중 어디에서 더 발달했었는지 생각해봅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물질문명으로서 세계 3대 발명을 떠올릴 수 있죠. 이에 해당하는 종이, 화약, 인쇄술이나 나침반 등은 모두 중국 등 동양에서 먼저 발명된 것입니다.
중세까지는 물질문명이나 기술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중국의 물질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은 그가 중국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을 본 당시 서양인들은 그 내용이 모두 허풍이라고 했답니다. 그가 원래 좀 허풍이 심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물질문명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가를 알 수 있지요. 역사적으로 동양의 기술문명이 서양보다 앞서 있었는데 그렇다면 왜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을까요?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분명히 역전됐죠. 왜 그럴까요?
서양의 기술문명이 앞서기 시작한 것이 아마 산업혁명 때부터일 겁니다. 대규모로 과학을 적용하면서 기술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출발이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현대기술은 과학을 대규모로 응용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한 반면에 그 이전에는 기술과 과학은 완전히 독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은 기술적으로 발달해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는 미흡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과학적 사고에서 전통적인 동양과 서양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의 진정한 위력은 과학적 사고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의미로서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과학이란 자연현상, 즉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자연과학을 탐구하다 보면 인간과 우주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므로 세계관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이 '과학이 우리의 삶에 주는 새로운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결론 부분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세 번째로 과학의 현실적 의미를 들 수 있겠네요. 우리는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디포(Daniel Defoe) 소설에 나오는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처럼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현대사회에 자연과학은 아주 중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건 나쁘건 말이죠. 자연과학은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 소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문명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로서 과학지식의 이용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지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과학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을 잘못 이용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과학의 잘못된 이용은 그야말로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핵무기 같은 것은 본말이 전도된 과학문명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인류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지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자연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과학은 인류의 삶이 풍요롭고 바람직한 길로 갈지, 파멸의 길로 갈지 결정짓는 데 핵심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간에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과학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도 현대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한 것이죠. 더구나 과학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현실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그 선택권이 자연과학자들에게 있지 않고 사회와 국가의 권력자에게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통수권자가 마음만 먹으면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요.
마지막으로 과학의 의미는 문화의 중요한 근간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지요? 몇 해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이 꽤 많이 읽혔지요.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흔히 이러한 책에서 다루는 것들을 생각하고 과학을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과학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UNESCO)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서울의 종묘 따위를 생각할 수 있겠네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 또 무엇이 있지요? 수원 화성과 팔만대장경도 지정되어 있을 겁니다. 이런 문화유산의 공통점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얻어진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과학 활동의 탐구 대상입니다. 과학 활동은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이고 인간도 자연에 포함되니 당연히 인간도 과학 활동의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인간은 과학 활동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과학 활동의 주체라는 면에서 보면 과학도 다른 인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 중 종묘와 함께 종묘제례악이 있습니다. 문화재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 쉬우나 무형문화재도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창작물이지만 과학도 음악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자연과학은 사실 공학보다 인문학에 더 가까운 편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과학이 현실적으로 공학, 기술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학과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단과대학 편재에 문리과대학이 있지요. 실제로 널리 알려진 외국 대학의 경우 대부분 문리과대학(School of Humanity and Sciences; 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이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에서는 문리과대학을 1975년에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나누었지요. 우리나라 대학 중에는 심지어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을 묶어서 이공대학을 만든 곳도 꽤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학문의 본질이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인문, 사회대 학생들이 과학을 별로, 또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때 형식적으로 조금 배우고 마는데, 이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고등학교에서 문과, 이과를 나누어 교육을 시키는데, 외국의 고등학교를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이렇게 나누는 곳을 본 적이 없어요. 글쎄요, 일본은 잘 모르겠네요. 대학에서도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 시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으며, 문리과대학 편제에 의한 교육이 아쉽습니다.
이과와 문과 양쪽에 걸쳐 소양을 지녔던 스노우(Charles.P. Snow)는 ≪두 문화(The Two Cultures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The Two Cultures: A Second Look)≫에서 현재 인류에는 이렇게 이과와 문과를 나누듯 두 가지 문화가 있으며, 그 두 문화는 점점 더 이질적이 되어가고 그 사이에 담이 점점 높아져서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지요. 문과, 이과를 각각 인문학자와 물리학자로 대표하고 그 사이에 몰이해, 심지어 적대감까지도 존재함을 여러 사례를 들어서 기술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두 문화'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문화와 문명', 다시 말해서 문과는 '문화'이지만 이과는 문화가 아니라 '문명'이라고 표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과학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비과학적인데 그 원인은 고등학교 때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고위 공직자, 관료들을 보면 대부분이 문과 출신입니다. 국회의원 중에서 문과와 이과 비율을 보면 될 것 같은데,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몇 명쯤 되죠?
잘은 모르겠지만 2백 몇 십 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문과, 이과 출신 비율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나도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지난 국회 때 한 국회의원에게 들은 바로는 이과 출신이 7명뿐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지난 국회보다는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10%는 넘는지 모르겠네요. 장관 중에는 이과 출신이 몇 명일까요? 여러분이 보기에 부처별로 문과 출신이 적합한 곳도 있고, 이과 출신이 적합한 곳이 있을 것이고, 문과건 이과건 상관없는 부처도 있을 겁니다. 예컨대 외교통상부, 법무부 같은 곳은 문과가 적합하겠지요. 한편 농림부,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등은 이과가 맞을 것 같죠? 과학기술부는 물론이고요. 그리고 문과, 이과가 상관없을 법한 곳도 있습니다. 노동부나 교육부, 문화관광부 같은 곳이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문과 출신이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처보다 이과 출신이 맡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 부처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관계를 보면 그 반대입니다. 이과가 적합해 보이는 부처의 장관이 종종 문과를 전공한 분이었지요. 물론 장관직 수행에서 반드시 문과, 이과 전공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이과 출신이 외교통상부나 법무부 장관을 맡은 경우는 본 적이 없어요.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정부 행정 부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중에 이과 전공자가 너무 적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경우는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를 비롯한 핵심 권력자들이 대부분 이과 출신입니다. 그러니 중국은 권력 사회가 모두 이과 세상이지요.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책 결정 자리에 대체로 문과, 이과 전공자들이 균형 있게 배치돼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한국은 다를까요? 우리나라는 겉으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책을 보면 비과학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농담 삼아 하는 말로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이라고 우긴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거의 날마다 신문, 방송에서 보도할 정도로 많으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이는 과학적 사고의 빈곤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과 전공자가 정계에 많이 진출하면 정치가 잘 될까요? 글쎄요, 도리어 더 엉망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 때문입니다. 조금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를 나눠서 문과 학생에게는 과학을 공부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하고 이과 학생에게는 인문학, 사회과학에 대한 소양을 기르기 어렵게 하지요.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대학에서도 교양교육의 부재 내지는 부족으로 이어집니다. 교양과목은 적당히 때우는 거란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교양이라는 게 뭘까요? 여러분은 교양이 왜 필요하다고, 교양과목을 왜 배운다고 생각하나요? 누군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교양은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있으면 조금 더 좋은 것이다." 교양은 살아가는 데 전혀 필요하지 않고, 말하자면 가방에 붙어 있는 구찌(Gucci) 상표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구찌 상표는 실제로 가방의 기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붙어 있으면 보라는 듯이 자랑을 합니다. 이런 상표처럼 교양도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구찌 상표 가방은 이른바 짝퉁이 많지요. 교양도 짝퉁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교양이 이런 사치품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명품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고 사치품이 정확한 용어입니다. 명품이란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걸작을 뜻하는 것으로 자동화 시설에서 대량생산하는 상품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요.) 물론 교양이 없어도 '생물학적' 삶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이해가 없이는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양이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소양이고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미래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최무영/서울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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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영의 과학이야기] 과학이란 무엇인가 <중>
과학의 아름다움
다시 문화유산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유명한 문화유산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같은 책을 보고, 그 책에 나온 곳을 직접 가서 본다고 합시다. 유명한 문화유산에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앞서 종묘나 수원 화성을 언급했고, 석굴암도 있죠. 내가 좋아하는 백제 금동향로, 마애삼존불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예를 들어 상감청자 같은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학생: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무형문화재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우리나라나 서양의 고전음악, 예컨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음악이나 우리 전통음악을 들으면 어떤가요?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나요? 또는 고흐(Vincent van Gogh)나 피카소(Pablo R. Picasso)의 그림을 보면 어때요? 아무 느낌 안 들어요? 대답이 없군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체로 음악·미술 같은 분야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는 학생들 책임이라기보다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해요. 특히 중·고등학교 교육이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해서 파행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음악·미술처럼 대학입시와 관련이 없는 과목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적어도 지금 학생들보다는 더 나은 교육을 받은 것 같아요.
아무튼 문화유산에 대한 느낌에 어떤 답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현악사중주나 가야금 연주를 듣는다든지, 석가탑을 바라본다든지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지켜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이러한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관련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했듯이 과학이 문화유산의 근간이고, 특히 과학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과학이라 하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과학은 상당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과학의 아름다움이란 여러 의미로 나타나지요.
아름다움의 표상 중 하나로 대칭성(symmetry)을 들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에서 현상의 실체로서 상정한 모든 물질은 그것을 이루는 구성원(constituent),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상호작용(interaction)에 의해 정해지지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알갱이(입자: particle)를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라고 부릅니다. 이에 따라 물질은 흔히 분자(molecule)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는 다시 원자, 그리고 원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의 기본입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편리합니다. 이러한 기본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본 상호작용'이라 부르는데, 이런 것들은 대칭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마치 주기율표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주기율표 기억하죠? 그걸 외우느라 지긋지긋했는데, 수소,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등 순서를 수-헤-리-베-붕-탄-질-산-……,이런 식으로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주기율표는 원소를 성질의 대칭성에 따라 배열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질에 맞도록 배열하다 보면 비어있는 자리가 있고, "아, 여기에 들어갈 어떤 원소가 있겠구나" 해서 찾아낸 원소들도 있습니다. 주기율표에서 기술하는 원소처럼 기본적인 알갱이, 즉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 같은 것들도 대칭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들은 렙톤(lepton)과 하드론(hadron)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원래 렙톤은 가벼운 알갱이이고 하드론은 무거운 알갱이라는 뜻이지만, 렙톤이라고 반드시 가벼운 건 아니지요. 렙톤은 6가지 종류가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전자, 중성미자(neutrino)는 가벼운 입자들입니다. 하드론에 속하는 것으로는 양성자(proton), 중성자(neutron), 그리고 다양한 야릇한 입자(strange particle)들이 있습니다.
렙톤은 6가지밖에 없지만 하드론 중에 야릇한 입자들은 종류가 매우 많습니다. 몇 가지나 될까요? 그 수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자꾸자꾸 새로운 것이 발견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기본입자는 현재 200 가지가 훨씬 넘습니다. 야릇한 녀석들이 워낙 많아서 그렇지요. 그런데 "기본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종류가 많아 보이네요. 그래서 "우리가 기본입자라고 여겼던 알갱이들이 사실은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 더 기본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200 가지가 넘는 하드론들은 더 간단한 기본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쿼크(quark)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쿼크는 6가지가 있는데, 그 이름들을 재미있게 붙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죠.
다음으로, 주어진 알갱이에 대해 그 반대 알갱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질량 등의 성질은 음(-)전기를 띤 전자와 똑같은데 양(+)전기를 띠고 있는 알갱이가 있으며 이를 양전자(positron)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음전기를 지닌 반대양성자(anti-proton) 또는 음양성자는 양전기를 지닌 양성자와 다른 모든 성질이 똑같지요. 그런 것들을 반대입자(anti-particle)라고 부르는데, 입자와 반대입자 사이에는 놀라운 대칭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입자들은 서로 작용하는데, 그들 사이의 기본상호작용(fundamental interaction)은 모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상호작용 또는 힘은 결국 이 네 가지 중에 하나지요.
첫째가 중력(gravitation)이고, 둘째로는 전기력과 자기력을 합하여 전자기힘(eletromagnetic force)입니다. 그 다음은 약한 힘 또는 약상호작용(weak interaction)인데, 이것은 우리 일상생활과는 관계가 없고 원자핵 속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핵력(nuclear force)이라고도 부르는 강상호작용(strong interaction)이 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매우 강합니다. 핵폭탄이 왜 그렇게 파괴력이 엄청난가 하면 바로 이 '강상호작용'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알갱이들끼리 이러한 상호작용을 어떻게 할까요? 상호작용을 매개해 주는 알갱이들이 또 있는데, 그들을 게이지입자(gauge particle)라고 부릅니다. 전자기힘을 전달해 주는 알갱이가 바로 빛알(photon)이지요. 중력을 전달해 주는 알갱이는 중력알(graviton)이라고 부릅니다. 지구와 태양이 서로 중력알을 계속해서 주고받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중력이 작용한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블유(W)와 지(Z)라는 알갱이들이 약한 힘을 전달해주는 게이지입자이며, 강한 힘은 붙임알(gluon)이라고 하는 게이지입자들이 전달합니다.
▲ 기본입자와 상호작용의 표준모형
이 모든 것들이 지닌 대칭을 정리한 이른바 표준모형(Standard Model)을 그림 4에 나타내었습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강의하겠지만 렙톤과 쿼크, 게이지입자들과 함께 중력, 전자기힘, 약한 힘, 강한 힘의 네 가지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하드론인 중성자와 양성자는 각각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지요. 쿼크가 세 개씩 모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원자핵이 되고, 원자핵 주위에 렙톤인 전자가 분포해서 전체가 하나의 원자가 되는 겁니다. 원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분자를 이루는 거죠. 그리고 수많은 원자, 분자가 모여서 비로소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을 이룹니다. 이러한 물질의 구성이 멋진 대칭성을 보이고 있어서, 우리가 상감청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듯이, 물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 "아! 아름답다"라고 하지요.
물리법칙(law of physics)이란 보편지식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인데, 물질의 구성뿐 아니라
물리 법칙에도 대칭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자리옮김(translation) 대칭', '방향(orientation) 대칭', '시간진행(time translation) 대칭' 같은 것들이 있지요. 뉴턴(Issac Newton)의 운동 법칙 잘 알지죠?
보통 F=ma 라고 쓰지요. 질량 m 인 물체에 힘 F 가 주어지면 그 물체는 가속도 a 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 가속도는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내용입니다. 힘이 두 배, 세 배가 되면 가속도도 두 배, 세 배가 되고 질량이 두 배가 되면 가속도는 반으로 준다는 거지요.
이러한 운동의 법칙이 여기에서 성립한다면 공간을 이동하여 다른 곳에 가도 성립하겠죠? 한국에서 성립하면 러시아에서도 성립하고, 북극성에 가도 성립할 것입니다. 물론 안드로메다은하(Andromeda galaxy)에서도 성립하지요. 이것이 바로 '자리옮김 대칭'으로,
장소를 옮겨도 물리 법칙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향 대칭'은 힘을 어느 방향으로 주면 그 방향으로 가속도가 생기는데, 다른 방향으로 주면 마찬가지로 힘의 방향으로 가속도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시간진행 대칭'은 운동의 법칙이 오늘 성립하면 내일도 성립한다는 겁니다. 100년 후에도 성립할 테고, 10,000년 전에도 성립했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전하켤레 변환(charge conjug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전기와 음전기를 서로 바꾼다는 말인데, 입자와 반대입자 사이의 대칭을 뜻하는 겁니다. 홀짝성(parity)은 '오른손-왼손 대칭'을 말하는 거지요. 모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라는 이야기 읽어보았죠? 지은이는 캐롤(Lewis Carroll)인데, 본명은 돗슨(Charles L. Dodgson)이며 사실 수학을 공부했던 분입니다. 이 동화의 후편이 있는데 혹시 아는지요? ≪거울 속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 Glass)≫라는 작품인데, 거울 속 나라에서 겪는 모험을 그렸지요. 거울 속 나라는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어 있는데, 그 사이의 대칭을 기술하는 것이 홀짝성입니다.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지요.
시간되짚기(time reversal)라는 것은 시간을 되짚어 가는 것, 즉 거꾸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미래를 바꾸는 거지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대칭이 있다고 하면 안 믿어지죠? 우리 경험으로는 분명히 대칭이 없지요. 우리는 계속 늙기만 하지 다시 젊어지지는 못합니다. 또한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를 기억(예측)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물론 서울 미아리 고개 근처에 있는 무슨 동양철학관, 곧 점치는 집에 가면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제대로 기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아무튼 보통 사람들은 미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미래와 과거가 다르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공을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지요. 그런데 이를 캠코더로 찍어서 거꾸로 돌려 재생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실제와 반대로 날아가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당구 잘 치는 학생 있나요? 당구공이 굴러가는 것을 캠코더로 찍어서 거꾸로 재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물론 큐로 공을 치는 순간을 빼면 말이죠. 이러한 현상은 시간되짚기 대칭 때문입니다. 위치를 시간에 대해 한 번 미분한 것이 속도이고, 두 번 미분하면 가속도가 되지요. 시간되짚기를 하면 시간에 (-)부호가 생기므로 시간에 대해 한 번 미분하면 (―)부호가 붙어서 속도의 방향이 반대로 되지요. 그러나 한 번 더 미분하면 (―)부호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가속도는 그대로이고, 결국 운동의 법칙은 시간되짚기에 대해 대칭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분명히 다르지요. 이러한 시간비대칭(time asymmetry)은 아주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엔트로피(entropy)라든가 열역학 둘째 법칙(second law of thermodynamics) 같은 것과 관련이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이 자연을 해석하는 것인데, 특히 물리학에서는 자연을 해석할 때 대칭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해석의 체계에서 '아름다움'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에너지 보존'이라는 표현 많이 들어봤죠?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보존conservation'은 '대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은 사실 '시간진행 대칭'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비슷하게 '운동량 보존'은 '자리옮김 대칭'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제 문화유산과 자연과학을 비교해 봅시다. 아래 보인 바흐(Johann S. Bach)의 ≪푸가(Die Kunst der Fuge)≫ 악보에는 재미있는 대칭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리옮김 대칭' 또는 '시간진행 대칭'이 있지요. 시간되짚기 대칭을 지닌 음악도 있습니다. 장난스러운 시도인데 누가 작곡했을까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을 주는 음악가 하면 생각나는 사람인데 짐작하겠지만 바흐나 베토벤은 아닐 터이고, 바로 모차르트(Wolfgang A. Mozart)입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차르트는 상당히 혁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 바흐, ≪푸가≫, BWV 1080
미술에서는 어떨까요? 다음에 보인 것은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라는 미술가의 그림입니다. 어때요?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이 그림에서 대칭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래 도표에 그림에 담겨진 대칭을 분석해 놓았지요. 많은 아름다운 그림에는 흔히 대칭이 숨어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에는 도자기가 있네요. 아마 그리스 시대의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의 마라톤 선수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자리옮김 대칭'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대칭이 살짝 깨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발을 들고 있는 각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대칭이 깨져 있는 것은 운동량 보존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운동량이 보존되지 않으면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 곧 가속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설명을 듣고 보면 마라톤 선수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러니까 도자기를 만든 예술가는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었나 봅니다.
▲ 프란체스카의 그림(위)과 대칭을 분석한 그림(아래). 그리스 시대 도자기에 그려진 두 마라톤 선수의 그림.
최무영/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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