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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한부울 2007. 10. 2. 12:36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연합뉴스] 2007년 10월 02일(화) 오전 11:31


평론가 김우종의 '이광수를 위한 변명'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그의 생애는 11세 어린 나이에 동학교도로서 일본 침략 세력에 맞서며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 간을 친일로 살다 간 양면의 복합적 결산서에 의해서 평가돼야 한다."육당 최남선과 함께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문인으로 꼽히는 춘원 이광수. 한국 근대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였음에도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어왔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같은 민족을 열등하다고 몰아붙이며 각종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종용했던 그를 위해 어떤 변명을 해줄 수 있을까.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씨는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기고한 소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며 "수십년 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우선 해방 정국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대해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특히 죄질이 나빴던 문인은 빠지고 이광수 등 선배 문인만 기소한 것은 잘못이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며 "힘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 논리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씨는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광수가 친일 활동을 시작한 시점으로 간주되는 '개벽'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에 대해 김씨는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며 "이것을 일제에게 식민 통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 "'민족개조론'이 발표되기 넉 달 전 베이징에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1923년에 함께 조직한 것이 수양동맹회였다"며 "민족개조론의 내용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교해보면 이 논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 변절자로 의심받았다.

김씨는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김씨는 이광수가 어린 시절 동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일본 유학생 시절 3.1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독립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수십년 간에 걸친 항일투쟁의 노력과 문학적 업적은 친일행적을 상쇄하는 바가 있다"고 거듭 변호했다.

이에 대해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1938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며 "1940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이광수의 문학적 성과와 항일투쟁의 노력이 친일 행적을 상쇄한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이광수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홍명희는 일제의 종용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며 "공과(功過)를 다 같이 다뤄야지 공 때문에 과가 지워지거나 과 때문에 공이 지워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