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무령왕 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한부울 2007. 9. 6. 17:20

반도사관! 

일제 때라고 하면 보통 1910년 이후 1945년까지의 기간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일제 영향력아래 핍박받았던 기간은 그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그러한 긴 시간 동안 일제에 의하여 역사가 감쪽같이 뒤바뀌거나 고쳐져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되고 말았다.

지금도 수많은 사실이 잘못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고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확실한 증거가 없고 진실이 규명될 수가 없는 한계에 있어 아무것도 제자리로 가져가 되 돌릴 수가 없다.

간악한 일본역사학자와 천치 같은 반도사관학자들이 함께 역모하여 반도사관이란 엉터리 역사를 창출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갖은 수법을 동원한 것이 많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령왕릉의 실체이고 불국사, 석굴암에 대한 의문점이다.

영원히 한국인에게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산지식을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수법을 동원하였을 것이라는데 추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자원 그리고 설비 지원부분에서 서방세력과 동일한 파워를 가진 일제가 기획하고 완성시키려고 마음먹었다면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과 수단이 동원되었고 실행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반도에 있지도 않은 무령왕릉을 한반도에 집어넣고 반도사관을 완성시켰다고 보는 것은 서역으로부터 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한 주체가 일제밖에 없었다는 사실이고 끊임없이 우리의 역사를 강탈하고 파괴하려고 한 사실에 비추어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연의 순리가 거꾸로 갈 수는 없는 것이 진리이다.

또한 물의 흐름이 역류할 수는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이와 다를 수가 없다.

하지만 한반도에 무령왕릉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로 순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사학자들은 간교하다.

기와조각 몇 개 토기자료 몇 개 출토되었다고 난리법석을 떨어 낙랑문화 즉 낙랑국이 반도에 있었다고 강론하다가 슬그머니 접어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은 진실을 말 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일제가 튼튼하게 구축한 환경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되고 있어 언간해선 밝혀질 수도 없겠지만 그들이 할 짓은 분명하게 반도사관이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근거를 제시하며 불필요한 것을 도출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최종적으로도 밝혀 질 수 있는 곤란한 상황만 벌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일은 거의 없다.

추후 운이 나빠 결국 밝혀지더라도 그들 주특기로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면 되는 것이고 더욱이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한국에 있는 사학자들 대부분이 반도사관에 젖어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극히 적어 크게 불안한 일도 아닐 것이다.

어리석은 우리만 답답하고 안타까우며 자학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눈뜬 당달봉사와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일제가 조작하고 뒤바꾸어놓고 뜯어 고쳐놓아 알 수도 없거니와 대륙을 어부지리로 차지한 지나족들 조차도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할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

어찌하겠는가?

이 기사에서 보면 우리나라 배알도 없는 사학자들이 잘난 왜구사학자에 칭찬이 늘어졌다.

갑자기 무슨 신의 계시나 받았던 것처럼 파천황이라고 하며 추켜세우고 있는 꼴이란...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한일합방이후 100년이 가까워 오고 해방되고 난지 60년이 지났지만 일제에 의한 반도사관의 망령은 아직도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왜구 사학자들은 백제가 한반도 서쪽에 차지하고 있어야 한반도에 한민족 주체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지나 본부설을 연결할 수가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이 없었던 역사자체를 전부 조작하여 만든 일본서기도 존재성 자체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물불을 가릴 턱이 없다.

서쪽은 한반도 서쪽이 아니라 대륙서쪽 돈황 부근에서 일어난 역사임을 우리는 언제쯤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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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연합뉴스] 2007년 09월 06일(목) 오전 06:00

 


日학자 "墓地구입 돈꾸러미 끼운 곳"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여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돼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다.
그것은 왕릉 안에서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묘지(墓誌.방형 판석)가 각각 1장, 그리고 죽은 무령왕이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여러 신(神)에게서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인 매지권(買地卷)이 왕비 묘지의 뒷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무덤방(玄室)으로 통하는 무덤길에서 동서쪽으로 나란히 놓인 채 발견된 두 묘지에는 모두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나아가 무령왕 묘지 뒷면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칭만 제외한 '십이간지(十二干支) 방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투르판 지역 고문서를 주로 연구하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 이후 30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의 미스터리인 묘지의 구멍과 십이간지 방위표에 얽힌 비밀을 마침내 풀어냈다.
시라스 교수는 미술사학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의 정년퇴임 논총에 투고한 논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ㆍ왕비 합장묘의 묘권(墓券.매지권)ㆍ묘지석(墓誌石)에 관한 한 제언'에서 묘지(석)의 구멍은 무령왕이 지하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시라스 교수는 무령왕 묘지 뒷면에 새긴 '십이간지 방위표'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하는 亥ㆍ壬ㆍ子ㆍ癸ㆍ丑, 동쪽에 해당하는 寅ㆍ甲ㆍ卯ㆍ乙ㆍ辰, 그리고 남쪽을 지칭하는 巳ㆍ丙ㆍ午ㆍ丁ㆍ未를 표시하고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들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을 뺀 것은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무령왕릉 출토된 그의 묘지와 매지권에 의하면 523년 62세로 사망한 무령왕은 525년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으며, 토왕(土王)과 토백(土伯)을 비롯한 각종 지하세계 신들에게 '돈 1만문'(錢一萬文)을 주고 신지(神地), 즉 서쪽 땅을 매입했다.
시라스 교수에 의하면,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유독 서쪽 방위만 표시하지 않은 것은 매지권에서 밝힌 대로 무령왕이 바로 서쪽 땅을 사서 매입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령왕 묘지는 무덤길 오른쪽(동쪽), 그 왕비 묘지는 왼쪽(서쪽)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고대 동전 90여 개가 꾸러미 상태로 발견됐다. 왕과 왕비 묘지는 무덤방 바깥이 아니라 무덤방 안쪽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놓아두었다.
시라스 교수는 이런 배치는 525년에 무령왕이 먼저 매장되고 나서, 나중에 죽은 그 왕비를 529년에 합장(合葬)할 때 일어난 현상이라면서 "따라서 당연히 무령왕이 처음 묻혔을 때는 그 왕비 묘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령왕만 묻었을 때는 '십이간지 방위표'를 뒷면에 새긴 무령왕 묘지 판석과 매지권을 새긴 다른 판석(나중에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새김)은 1971년 발견 상태와 같이 왼쪽-오른쪽에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포개 놓았었다"면서 "묘지나 매지권 등의 각종 문서 내용이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묘지가 위, 매지권이 아래에 놓였음이 분명하며, 두 판석 중앙에 난 구멍은 무령왕릉 발견 당시에 발견된 오수전 꾸러미를 꿴 끈을 끼운 공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참조)
이런 주장을 접한 고고학자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아무도 풀 수 없던 난제를 시라스 교수가 단칼에 풀었다"고 평가했으며, 돈황학 전공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은 "시라스 교수가 기존 한ㆍ일 고대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투르판지역 고문헌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쌓은 학자이기에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