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수 도 : 카불
면 적 : 647,497km2
인 구
2천 6백만 명
민족 다수민족은 인구의 52%를 차지하는 파쉬툰(Pushtun, 혹은 Pukhtun, Pathan으로도 알려져 있음)족이며 소수민족은 21%에 달하는 타지크(Tajiki)족과 이외에 하자라 몽골(Hazara Mongol)족, 우즈벡(Uzbeki)족, 아이막(Aimak)족, 투르크(Turkmen), 누리스탄(Nuristan), 퀴시바쉬(Qisilbash)족이 있다.
언 어
공식언어는 아프간 페르시아어인 다리(Dari)어와 파쉬툰(Pashto)이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불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북쪽에서는 투르크어와 우즈벡어도 널리 쓰인다.
지리적 위치
6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내륙국가이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서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 북으로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그리고 북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3배이다.
역 사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왔다.
이 지역에 이슬람교가 전해진 것은 7세기 경 아랍인들에 의해서였다. 이후에도 터키, 몽고 등의 침략에 시달려 오다가 1747년 파쉬툰족이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내고 독립왕조를 세웠다. 19세기에는 파쉬툰 왕조의 압두르 라흐만 칸 왕이 식민지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독립을 지켰다. 1964년 자히르 샤 왕이 자유선거를 포함한 민주화를 부분적으로 시도하였으나 사촌인 모하메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다.
1978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the People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은 소련의 힘을 업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 이제까지의 이슬람 전통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성전, 즉 자하드(Jehad)가 전역에서 일어났다. PDPA 정부는 급속히 쇠약해졌고 1979년에는 하피줄라 아민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정국 운영에 관한 소련의 간섭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1979년 마침내 10년에 걸친 소련의 침공을 초래하는 결과를 나았다. 이 전쟁으로 2-3백만 명에 이르는 국내 난민과 인근 국가로 피난을 간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소련에 대항하여 싸운 아프간인들(무자헤딘, Mujahideen)들은 미국을 비롯한 소위 자유진영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을 비롯한 막대한 지원을 받았으며 결국 1989년 마지막 소련 군대가 아프간에서 철수함으로써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의 승리로 끝났다. 10년에 이른 전쟁 동안 약 1-2백만 명의 아프간인과 14,500명의 소련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소련 군대는 철수하였으나 아프간의 사회주의 정부와 반근들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92년에 이르러 마침내 사회주의 정부가 붕괴되었으나 이번에는 각 무장 세력들 사이에서 통제권을 놓고 서로 각축을 벌였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자헤딘 집단들의 지도자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92년 부하누딘 라바니(Burhanuddin Rabbani)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4년 말, 극단적인 회교 근본주의를 천명하는 새로운 정치 군부 집단인 탈레반(Taliban)이 출현하였다. 탈레반은 타락한 무자헤딘 집단들을 아프간에서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였다. 1997년, 탈레반은 나라 이름을 아프가니스탄 회교공화국(the 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으로 바꾸고 탈레반의 지도자인 물라 오마르(Mullah Omar)를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평의회장으로 세웠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부하누딘 라바니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임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이며 유엔총회에서 탈레반을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정부로 인정하는 안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라바니가 아프간의 공식 유엔대표 자격을 가지고 있다. 타지크 족인 라바니는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에 있는 타지크 소수민족지역에서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여러 무장 세력들이 연합하여 형성한 반군들도 탈레반과 계속 대립하고 있다.
정 치
극단적인 회교 근본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탈레반(Taliban)이 1996년 정권을 잡은 이후 기초보건이나 교육과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다. 탈레반을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단 3개국뿐이다.
탈레반과 반군은 매년 여름이 되어 기후가 좋아지면 서로에 대한 무력공격을 개시해왔다. 2000년 여름의 전투에서는 탈레반이 큰 승리를 거두어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0% 이상을 장악하였다. 2001년 10월 미국의 폭격 이전에도 이미 이러한 내전 때문에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으며 이 숫자는 35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대다수인 2백만 명이 파키스탄에, 1백 4십만 명이 이란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경 제
아프가니스탄 자원의 대부분은 탈레반 정권이 반군에 대항하기 위한 활동에 쓰여 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민들에 대한 철저한 통제, 특히 여성들의 외부 활동에 대한 금지가 여성이 가장인 가족을 포함하여 이 나라의 가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탈레반이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과 유엔의 경제 제재를 받아왔으며 이는 무고한 일반 국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 왔다.
주요 자원은 석탄, 구리, 철, 천연가스이다. 농작물로는 보리, 목화, 과일, 옥수수, 땅콩류, 쌀, 밀이 주산물이며 목축도 널리 행한다.
사 회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철저히 금지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가려야 한다.
종 교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약 74%가 순니파, 24%는 시아파이고 약 2%는 다른 이슬람 종파에 속해있다. 이외에 아주 소수의 힌두교도, 시크교도, 파시교도(조로아스터교의 후손)가 있다.
보 건
2001년도 추정치에 따르면 출생률은 1,000명 당 41.42명이며 사망률은 1,000명당 17.72명이다. 영아사망률은 1,000명 당 147.02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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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원리주의 무장 정치단체. 1996년 9월 수도 카불을 점령, 14년 동안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무자헤딘(무장 게릴라 조직) 권력투쟁을 종식시킨 뒤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려왔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미국테러대참사를 일으킨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을 계속 비호했기 때문에 그 해 10월 7일부터 미국아프간공격을 받았다. 11월 국내 반대 세력인 <북부동맹>의 공격으로 수도 카불이 함락되고, 최고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 등 탈레반 지도부는 남부 칸다하르로 옮겨 항전했으나 12월 그곳에서도 떠나 지하로 숨었다. 본디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 정치단체로,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인종인 파슈툰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탈레반은 그들의 파슈토어로 이슬람 신학생을 뜻한다. 탈레반 정권은 순수 이슬람 국가 건설을 꾀하였고, 여자의 노동 종사, 통학 금지 등 극단적인 계율의 준수를 국민에게 강요했다. 또한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인 통치체제 <칼리프제>의 부활을 꾀하였으며, 오마르를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과 불상들을 부수는 등 유적 파괴 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아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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