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남긴 또 다른 슬픔, ´민간인 학살´
[사회] 미군, 전쟁 피해 이동하던 피난민에게 폭탄 떨어트려
이보람 기자
1950년 6월 25일은 한 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눈 비통한 날이다. 그 후로 57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곳곳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죽은 시신이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피난민 행렬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미AP통신의 보도이후 한반도 전체에서는 민간인 학살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언과 현장들이 나왔다.
▲노근리 학살 현장(벽에 총탄자국 표시)
대표적인 것은 노근리 학살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자행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1950년 6·25전쟁 초기 미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중 500여명의 충청북도 영동군 주곡리·임계리 주민을 피란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민간인이 미군 측에 의해 살상된 사건이다. 미군은 피란시켜 주겠다며 주민을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쪽으로 이동시킨 뒤 총격을 퍼부어 100∼200여명을 죽였다.
▲지난 2006년 장맛비로 불어난 물이 흐르는 노근리 쌍굴다리 밑에서 열린 위령제
생존자들에 따르면 미군은 전투기 기총소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철로 아래 굴다리 안으로 숨자, 기관총을 걸어놓고 29일까지 굴다리를 빠져나오는 주민들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근리 사건 현장에 깊숙히 남아있는 총탄의 흔적들
△원=탄흔, 세모=탄두
미군에 의한 학살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51년 1월 20일, 미군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괴개굴에 대해 폭격했다. 이날 폭격으로 상2리 주민뿐 아니라 타지에서 피난 온 사람까지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미군은 육로를 이용해 피난을 하려던 사람들을 못가게 했다. 이에 300여명의 피난민은 이불 등 생필품을 준비한채,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미군은 비행기 4대로 동굴에 집중사격을 했다. 미군은 소이탄까지 쏘아 연기가 굴 안에 가득차게 했고, 대부분이 질식해 숨졌다.
미군에 의한 학살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 40분 경, 이리시 상공에 B29(미군 전폭기) 2대가 출현하여 수차례 순회했다. 이때 미군기(B29 전폭기) 2대가 이리역(현재 익산역) 기관차사무소, 송학동 민가, 평화동 호남선철길과 변전소(현 터미널 뒤) 사이에 수백발의 폭격을 가했다.
당시 이리시민들은 전쟁이 터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피난가는 사람 하나 없이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폭격으로 인하여 이리역구내에서만 84명이 사망(이리역 근무자 54명이상이 몰살)하였고, 송학동 가옥 50채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주택 폭격시 사망한 사람과 변전소 부근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300이명 넘는다.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반도…. 가장 가슴 깊은 곳 슬픔은 이유도 모른 채 굴 속, 다리 밑, 역 앞에서 폭격을 당한 민간인들이다. 그리고 그 민간인들의 죽음은 57년이 지난 이 대한민국 땅에서 계속 나오고 있으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죽음 또한 많다.
왜 미군은 피난 가던 시민들을 폭격했을까? 아직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희생된 피해자라는 것이다.
6.25전쟁 57주년인 오늘만이라도, 이들을 위해 묵념을 하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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