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사서에 나오는 산동요약

한부울 2007. 4. 1. 23:51
 

사서에 나오는 산동요약

1. 산동 지방은 조선의 서남 방향에 위치해 있었음

“조선은 계•보•산동 등과 더불어 서남방으로 다만 바다를 격해 있을 뿐인데
蓋朝鮮與薊、保、山東相距, 止是西南一海”

“소방은 삼면이 바다와 접했는데 서남의 일대는 천조의 남•북직예(南北直隷)와 산동(山東)•절강(浙江) 등지와 서로 바라보이는 터이라
而西南一帶, 與天朝南ㆍ北直隷、山東、浙江等處相望”

♨ 지금과 차이점: 산동 지방은 우리나라(국토 및 서울 기준)의 정서에 위치함.
    
2. 조선에 인접하여 절강 등지와 함께 조선과 서로 바라(相望) 볼 수 있었음

소방은 삼면이 바다와 접했는데 서남의 일대는 천조의 남•북직예(南北直隷)와 산동(山東)•절강(浙江) 등지와 서로 바라보이는 터이라 而西南一帶, 與天朝南ㆍ北直隷、山東、浙江等處相望

예전에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고 선부(宣府)•거용(居庸) 등의 관(關)을 등[背]으로 삼아 북호(北胡)를 막고 산동(山東)•조선을 왼팔로 삼아 해구(海寇)를 막았으니, 만일 조선을 구제하지 않으면 제경(帝京)이 불안하다.’ 하였고 인하여 손수 우리 나라와 산동이 바다를 끼고 서로 바라보는 형상의 그림을 그려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말하기를 ‘형세가 이러하다.  
’ 以山東ㆍ朝鮮爲左臂, 以遏海寇。 若朝鮮不救, 則帝京不安’ 云云。 因爲手書, 我國與山東隔海相望之圖, 指點示之曰: ‘形勢如此

♨ 지금과 차이점: 산동 지방과 우리나라는 수 백 킬로미터의 바다로 분리되어 있어서 전혀 상대 지역이 보이지 않음.

3. 산동 등지는 조산과 더불어 한 바다(一海)에 의해 둘러 싸여 있었던 곳이었음.

조선은 계•보•산동 등과 더불어 서남방으로 다만 바다를 격해 있을 뿐인데“蓋朝鮮與薊、保、山東相距, 止是西南一海”
  
♨ 지금과 차이점: 산동 등과 우리나라는 가운데 바다로 인해 서로 분리 되어 있을 뿐이지 함께 한 바다에 의해 막혀 있다고 할 수 없음.

4. 산동은 조선과 인접하는 명나라의 남쪽 관문 ~ (14) 등 실록 다수

예전에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고 선부(宣府)•거용(居庸) 등의 관(關)을 등[背]으로 삼아 북호(北胡)를 막고 산동(山東)•조선을 왼팔로 삼아 해구(海寇)를 막았으니,
以山東ㆍ朝鮮爲左臂, 以遏海寇

♨ 지금과 차이점: 우리나라의 서남쪽은 산동 지방이 아니라 강소 지방임

5. 18세기 조선의 서남쪽(산동 등지)은 옛 한나라땅과 인접하여 있었고 태산과 장강 같은 천연 장애물이 없어 외침을 받기 쉬운 지형~ 규원사화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 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지금과 차이점: 우리나라는 서와 남, 동쪽 삼면이 모두 큰 바다에 의해 대륙과 격리되어 있고 태산이나 장강 따위에 둘러싸인 지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의 천참 국가임.

6. 송나라 북해(북해양, 산동 지방 앞바다의 어느 지역)는 명주 ~ 흑산 해도의 중간 경유지. ~ 고려도경(4)

흑수양(黑水洋)은 북해양(卽北海洋也)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빛은 진한 먹처럼 검은 색이었다.
  
♨ 지금과 차이점: 영파에서 흑산도, 개경까지 이어지는 해도에서는 북해(발해)의 특정 지역을 거쳐 갈 필요가 전혀 없음.

7. 당나라 북해는 후쿠오카 ~ 양주 해도의 중간 경유지 ~ 순례행기(5)
 
이곳에서 제 4박이 북해北海에 표착漂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於此聞 第四舶漂着北海).

♨ 지금과 차이점: 후쿠오카에서 양주로 이어지는 해도로는 북해(발해)를 거쳐 갈수 없음

8. 동해현 부근에서 북쪽으로 항해해 가면 대주산이 있었고 이곳은 신라의 정서로 양국의 국경이 아주 가까이 위치해 있었음

“대주산大珠山은 헤아려보건대 신라新羅의 정서正西에 해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곳에 이르렀다가 다시 일본日本으로 출발한다면 그 재난과 하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의 9척의 배도 북쪽으로 항행하여 이미 멀리 와 있습니다. 적경에 가깝다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다시 대주산으로 향하는 것은 결국 적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야지 대주산으로 향해 가면 안 됩니다”

♨ 지금과 차이점: 연운항 부근 대주산은 우리나라 황해도와 수 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중국 연안에서 항해하는 배는 우리 국경에 근접할 까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음.

9. 동해현 부근에서 동북쪽으로 항해해 가면 산동이 있었고 여기는 신라의 남변에 아주 가까이 위치하여 어느 나라 땅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임.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의 남변(是新羅國南邊)”이라고 하였다. 복부에게 이를 점치게 하였더니 ‘대당국大唐國’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가서는 ‘新羅’ 라고 말했다.

♨지금과 차이점: 동해현 인근 해상에서 계속 동북쪽으로 나아가면 산동지방이 나오고 거기서 수 백 킬로 미터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남해안이 아니라 서해안이 나오게 됨.  

10. 동해현 부근에서 일본으로 가는 직항로는 동북으로 뻗어 있는 수로이며 이 끝에 산동(북해)이 위치함.
  
게다가 순풍은 연일 바뀌지 않고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제 1선도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자는 주장에 따라 닻을 올리고 출발하려 하고 있다…. 바람을 따라 東北쪽으로 향하여 직행하였다(任風指東北直行). 해안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흰 돛이 연이어 바다 위에서 움직였다. 우리 네 사람은 산의 해안에 머물렀다

♨지금과 차이점: 동해현 부근에서 일본으로 가는 직항로는 동남쪽임. 동북쪽으로 가면 우리나라 평안도에 도달하게 됨.

11.하루 항해 거리 폭의 동해를 사이에 두고 해주는 서쪽(서안)에 동해현은 동쪽(동안)에 있었음

이 현성縣城(동해현성)은 東쪽 해안에 있고 주州(海州部)는 西쪽 해안에 있습니다. (此縣是東岸 州在西岸)
        
♨지금과 차이점: 지금의 중국 해안은 동안만 있지 동안, 서안으로 나누어 지지 않음.

12. 조선의 서남 지역은 황해도와 충청도의 접경

우리나라의 흑산도로부터 동북쪽으로 향하여 가면(自我國黑山島 向東北行)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卽我忠淸黃海道界也)며 정북쪽은 평안도와 요동 등지에 이른다(正北卽平安遼東等處也).

♨지금과 차이점: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는 경기도이고 흑산도의 동북쪽은 전라도임.

13. 절강, 소주, 항주 등지에서 한산도로 오는 길목에 산동과 제주가 가까이 위치해 있었음


“그리하라. 또 수병(水兵)이 제주를 향해서 온다 하니, 내가 그 길은 알지 못한다만 어찌 큰 바다를 건너올 수가 있겠는가. 설령 나온다 해도 산동(山東)•금(金)•복(復)•해(海)•개(蓋)를 경유하여 장홍유(張鴻儒)가 나온 대로 하면 될 것이다.”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산동으로 해서 나올 수도 있지만 그곳이 매우 피폐해서 군사를 내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나오는 수병은 당연히 남직예(南直隷)•영파부(寧波府)•절강(浙江)•소주(蘇州)•항주(杭州) 등지를 경유해야 할 것인데, 제주도와의 거리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일찍이 《유구록(琉球錄)》을 보니 ‘순풍일 때는 복건(福建)에서 7일이면 이르고 순풍이 아닐 때는 10여 일 만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1월 28일 [양력 1월 8일]<임인> 맑다.
장홍유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과 차이점: 산동, 천진 등에서 한산도로 오기 위해 백 수 십 킬로 미터 남해 바다 밖에 위치한 제주도를 굳이 거쳐 갈 이유가 없음.

14. 왜노가 산동, 천진 등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산도를 경유해야 하고 한산도만 잘 막으면 명나라 산동, 천진은 왜침을 받을 우려가 거의 없음

부산의 왜노가 곧장 바다를 따라 산동(山東)•천진(天津)을 넘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전라도의 한산도(閑山島)를 힘입어서인데, 이곳은 수세(水勢)가 심히 험난하고 수군이 매우 강하여서 지난날 왜노가 여기를 범하였다가 손상이 매우 많았다. 이 섬은 위급할 때에 군병을 보태어 방어하여 산동•천진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으나, 외양(外洋)을 경유하는 경우는 해로를 알 수가 없다

統制使[註729] 元均[註730]의 군대가 궤멸하면서 끝내 閑山島를 잃고 말았다.[註731] (1) 閑山島는 朝鮮의 西海 어귀에 있는 섬으로 (4) 오른쪽으로는 南原을 가리고 있어서 全羅道의 바깥 울타리가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수비를 그르치고 보니 沿岸 海域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天津•登州•萊州에도 돛만 올리면 쳐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수군 3천명이 처음으로 旅順[註732]에 도착하였다. 閑山島가 함락되자, 經略은 (2) 西京 서쪽의 漢江과 大同江을 수비하여 倭軍이 (3)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억제함과 동시에 조운漕運하는 길을 방비하도록 檄書를 띄웠다.[

[萬曆二十五年(1597)]七月, 倭奪梁山•三浪, 遂入慶州, 侵閑山.[註728] 統制[註729]元均[註730]兵潰, 遂失閑山[校勘 161] [註731]. 閑山島在朝鮮西海口, 右障南原, 爲全羅外藩, 一失守則沿海無備, 天津•登•萊皆可揚帆而至. 而我水兵三千甫抵旅順,[註732] 閑山破, 經略檄守王京西之漢江•大同江, 扼倭西下, 兼防運道.[註733]

♨지금과 차이점: 한산도 방어선과 왜군의 산동, 천진에의 공격은 전혀 연관이 없다. 왜군의 예상 동선과 연관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수로의 폭이 좁지 않기 때문이다.

15. 등주 등지에서 황해로 오는 길은 다른 곳에 비해 도로가 아주 편리했음.

그대로 몰래 스스로 조처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운을 의논하고 있지만 매입은 어느 관원에게 맡기고 운반은 어느 군사를 뽑아 쓰고 어느 곳에 상륙시키고 어느 곳에서 방출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논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듣건대 등주(登州)•내주(萊州)를 따라 나가면 바로 황해(黃海)에 이를 수 있고 도로도 매우 편리하다고 하나, 양선(糧船)의 유무와 다과를 알지 못하고 또 전에 의논한바 병선(兵船)도 차용의 편의 여부를 모른다. 임시하여 급한 일이 있게 되면 등주•내주도 방해(防海)를 위한 둔병처(屯兵處)가 되지만,

至于釜山之倭, 且不能順海而窺山東、天津者, 則全賴全羅之閑山島。 此中水勢甚險, 水兵甚强, 舊日倭奴犯此, 損傷頗衆。 此島臨急, 不可不加兵防守, 以救山東、天津, 若由外洋, 則道路不可知矣。

兵餉本色, 今擬取給朝鮮, 但據陪臣苦言: ‘殘破之後, 耕耘俱廢, 卽少有積貯, 止可備本地之用。’ 兵行糧從, 若不破格速處, 必然誤事。 此可一面嚴催該國預備, 一面仍暗自設處 第在我, 雖議有海運, 然召買責成何官, 押運選用何兵, 何處上岸, 何處屯放, 尙未見議。 及聞由登、萊, 可直抵黃海, 道路亦甚便, 不知糧船有無多寡, 前所議兵船, 亦不知借用便否。 臨時有急, 登、萊亦是防海屯兵之處, 然本色恐不能全靠。

♨지금과 차이점: 상대적인 차이를 말한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지금의 황해가 ‘도로가 매우 편리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의 항해하기 쉬운 바다는 아니다. 현대의 큰 동력선조차도 기상의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경우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질 수 있다.

반증反證 전혀 찾아 볼 수 없음

원문

(1) 선조 39권,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6월 29일 임자 9번째 기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조선은 계•보•산동 등과 더불어 서남방으로 다만 바다를 격해 있을 뿐인데 조선의 지형은 부산으로부터 의주에 이르게 되면 육로는 단지 요좌(遼左) 한 길이 있어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고 수로(水路)는 천진이나 산동 등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일곱 갈래가 있으니, 만일 순풍만 만난다면 가까운 곳은 하루나 이틀, 먼 곳은 사흘에서 닷새면 도달할 수 있고 그다지 어려운 곳은 없습니다.

“蓋朝鮮與薊、保、山東相距, 止是西南一海”, 若朝鮮自釜山以至義州, 陸行止有遼左一路, 以抵山海, 而水行有七路, 可達天津、山東等處。 若得順風, 近者一二日, 遠者三五日卽達, 無甚難者

(2) 선조 54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8월 20일 을축 6번째 기사
경상 전라를 중심으로 왜적을 방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주문을 보내다
신이 또 그 주본의 내용을 살펴보니 ‘만약 왜적이 조선을 점거하게 되면 왕경의 한양강과 개성의 임진강과 평양의 대동강 등 곳곳마다 바다와 통해서 직접 기보(畿輔)에 도달할 수 있다.’ 했습니다. 신이 이 말에 따라 자세히 참고해 보았습니다. 소방은 삼면이 바다와 접했는데 서남의 일대는 천조의 남•북직예(南北直隷)와 산동(山東)•절강(浙江) 등지와 서로 바라보이는 터이라, 만약 바람만 타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으니 한양강 등 세 강만 기보에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臣因此參詳, 小邦三面際海, 而西南一帶, 與天朝南ㆍ北直隷、山東、浙江等處相望, 如乘風汛, 無處不通, 非獨漢陽〔漢江〕等三江, 可達畿輔

(3) 규원사화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 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4) 고려도경
5月 29日 ~30日
하늘은 어둡고 바람은 움직임이 정해지지 않았다. 오전 8시경 바람이 잦아지고 순해지고 항해 속도는 매우 느려졌다. 오후 5시 바람 바뀌었고 6시 비 내리다 밤에 그쳤다.
다시 남풍南風이 일어 백수양白水洋으로 들어 갔다. 백수양白水洋의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왔고 이 때문에 흰빛을 띠었다(姑作白色).

황수양黃水洋은 모래지대의 끝부분(卽沙尾也)이다. 그 물은 혼탁하고 얕다. 주인舟人이 말하기를 그 모래는 서남쪽西南쪽으로부터 와서 먼바다 가운데 1,000여 리에 가로 놓여진 것(橫於洋中天餘里)으로 곧 황하黃河가 바다(海)로 들어가는 곳(卽黃河入海之處)이다. 배의 항로가 이곳에 이르면 닭과 수수로 모래에 제사를 지낸다. 이는 왕왕 모래를 만나 익사한 자들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다.

중국에서 고려로 가는 해로 중 명주明州 항로航路만이 이곳을 지나간다. 만약 등주登州의 판교版槗로부터 건너간다면 이곳을 피해 갈 수 있다. 근래 사신이 돌아올 때 이곳에 이르러 첫 번째 배가 얕은 곳에 거의 박힐 뻔했고 두 번째 배는 오후에 3개의 키를 모두 부러뜨렸으나 종묘사직의 위령 덕분에 살아서 돌아왔다. 여러 번 납추를 사용하여 수시로 깊고 얕음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흑수양(黑水洋)은 북해양(卽北海洋也)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빛은 진한 먹처럼 검은 색이었다.
갑자기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뿜어내는 것이 우뚝 솟은 만산과 같고 밤이 되면 파도 사이가 불처럼 밝게 빛난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밝은 해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배가 내려가 파도 밑에 있을 때는 전후의 수세를 바라보면 높이 하늘을 가리며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거리는 숨만이 겨우 남아있어 쓰러져 구토하고 먹은 음식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5) 입당구법순례행기
7월 3일
..물길을 아는 배를 앞세워 굴항정掘港庭으로 나아갔다. 오전 10시 무렵 백조白潮의 어귀에 도착하였는데 역류가 매우 심하였다…… 이곳에서 제 4박이 북해北海에 표착漂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於此聞 第四舶漂着北海). 정오 무렵 간신히 해릉현 백조진 관내 주둔부대의 군중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 전일 바다에서 서로 헤어진(海中相別) ‘녹사 야마시로노 우지마쓰 등 30여 명’이 마중 나와 았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슬픔과 기쁨이 엇갈려 눈물을 흘리면서 정을 나누었다. 이에 우리 모두는 이곳에 머물렀다. 그 마을에는 절이 있어 국청사國淸寺라 부른다. 대사大使 등은 표류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이곳에서 묵었다.

(8) 입당구법순례행기
4월 2일
바람은 서남쪽으로 바뀌었다. 대사는 모든 배의 관인을 불러 모아 출발 문제를 거듭 의논하면서 의견을 말하게 하였다. 제2선의 선장인 나가미네노 스쿠네가 말하기를 “대주산大珠山은 헤아려보건대 신라新羅의 정서正西에 해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곳에 이르렀다가 다시 일본日本으로 출발한다면 그 재난과 하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와 장보고는 서로 싸우고있습니다. 西風이나 西北風 또는 西南風을 만나면 반드시 적경賊境에 다다를 것입니다. (得西風及*乾坤風 定著賊境) 지난날의 사례로 미루어 생각해보건대 명주明州에서 출발하는 배는 바람에 밀려 신라의 땅에 다다랐습니다. 또 양자강에서 출발하는 배 또한 신라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의 9척의 배도 북쪽으로 항행하여 이미 멀리 와 있습니다. 적경에 가깝다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다시 대주산으로 향하는 것은 결국 적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야지 대주산으로 향해 가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5척의 배는 이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대사는 아직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많은 토론이 있었다. 오후 8시경 제1선에서 문서가 와서 판관 이하에게 알렸다. 그 문서에 이르기를 “제 2,3,5,7,9 등의 배는 선장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이곳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시오. 이것은 대사의 결정을 받들어 작성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문서의 취지에 따라 이미 각 배에 알렸다. 밤이 되자 바람은 부는데 남풍이 되었다가 북풍이 되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다.

건곤乾坤: ①하늘과 땅을 상징적(象徵的)으로 일컫는 말 ②주역(周易)의 두 가지 괘명 건괘와 곤괘. 하늘과 땅. 양(陽)과 음(陰). 서북과 서남(西南)

(9) 입당구법순례행기
4월 5일
날이 밝아서도 순풍은 바뀌지 않았다. 제 1선이 공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제 1,4,6,8 등의 배는 배의 조절, 정비를 위하여 먼저 밀주 땅에 가서 배를 수리하고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고자 하였는데 지금은 순풍이 불고 있다. 그러므로 배의 약한 곳과 떨어져나간 곳을 보강하여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려고 한다. 여러 배에 주지시키시오” 라고 하였다. 나는 전에 초주에 머물러 있을 때 신라인 통역관 김정남과 함께 의논하여 밀주密州 땅에 이르면 인가에 유숙하고 조공사선이 떠나게 되면 산중에 숨어 있다가 곧 천태天台로 향하고 아울러 장안長安에 가기로 했다. 대사도 이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여러 배는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려고 하여 대사가 밀주 땅으로 가려는 의견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순풍은 연일 바뀌지 않고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제 1선도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자는 주장에 따라 닻을 올리고 출발하려 하고 있다……  “나와 종자 이쇼, 이교 선원 데이유만 등 네 사람은 배에서 내려 해안에 머물렀다.” 대사는 금 20대량을 주었다. 헤어짐에 임하여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전 8시에 이를 즈음 9척의 배는 돛을 올려 출발하였다. 바람을 따라 東北쪽으로 향하여 직행하였다(任風指東北直行). 해안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흰 돛이 연이어 바다 위에서 움직였다. 우리 네 사람은 산의 해안에 머물렀다

(10) 입당구법순례행기
4월 8일      
제 2선박(일본에서 연운항에 도착한 배)은 앞길의 작은 만에 정박하고 있었다(在前路小海). 압아押牙(수비관)가 말하기를 “이 현성縣城(동해현성)은 東쪽 해안(에 있고 주州(海州部)는 西쪽 해안에 있습니다. (此縣是東岸 州在西岸) 요시미네 판관은 병으로 배를 타지 못하였습니다. 이 작은 만의 서쪽(小海西岸) 해안에 해룡왕묘가 있습니다. 요시미네 판관은 지금 이 묘 안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돛을 올려 직행하여 배(제 2박)의 옆을 바로 지나갔다. 우리들은 그 배를 타고자 하였으나 압아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후 2시경 해룡왕묘에 도착하여 요시미네 판관, 이와다 녹사, 기 통사, 가미 참군 등과 서로 만나 머물게 된 이야기를 상세히 하고 아울러 몹시 고생했던 일들을 말하였다……동해산 숙성촌에서 동해현에 이르는 100여리는 모두 산길이다. 혹은 나귀를 타고 혹은 걸어서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9척의 배는 뇌우폭풍을 만나 바다를 건너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걱정과 한스러움이 마음에 가득 찼다……

(11) 입당구법순례행기
4월 11일
오전 6시 무렵 아와다 녹사 등이 배를 탔으므로 곧 출발하여 돛을 올려 직행直行하였다. 西南風이 불어 동해현東海縣의 西쪽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바람 때문에 떠밀려 곧바로 얕은 해변에 닿았다 (西南風吹 擬到海縣西爲風所扇).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가는데 점점 더 얕은 곳으로 가버렸다. 삿대를 내려 물길을 재어 보기 위하여 멈추었다. 하루 종일 심히 고생하다가 간신히 현에 이르렀는데 썰물이 되어 배는 개펄 위에 얹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떤 이가 올라와 말하기를 “오늘 숙성촌에서 서신이 있어 알려오기를 본국의 9척의 배 가운데 제 3선은 밀주의 대주산으로 떠밀려 갔다. 오후 4시경에 압아와 현령 등 두 사람이 숙성촌으로 와서 “본국의 화상을 찾아내어 배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단지 그 한 배 (3박)는 내주萊州(산동 내주) 경내에 닿았다가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 밀주 대주산에 이르렀다. 다른 8척의 배는 바다에서 서로 잃어 버려 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오후 10시경에 닻줄을 끌며 개펄에서 나오려고 하였지만 역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12) 입당구법순례행기
4월 17일
아침 일찍 비는 그쳤으나 운무는 짙게 끼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없다. 바다 빛은 엷은 녹색이며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배는 나아가고 있지만 그 방향을 몰라 헤맨다. 어떤이는 “西北을 향하여 가고 있다” 고 하고 어떤 이는 “正北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말하며, 어떤 이는 “앞길에 섬이 보인다” 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기를 수시간에 바다의 파도가 얕은 곳에서 이는 것 같았다. 새끼줄을 내려 이를 재어 보니 단지 8심(14.4m)일 뿐이었다. 닻을 내려 정지하려고 하였으나 육지와의 거리가 먼지 가까운지를 모르겠다. (不知去陸遠近)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보니 바다는 얕습니다. (今見海淺) 닻돌을 내려 잠시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바로 나아가든지 머물든지 결정합시다” 라고 하였다……이어 검은 물체를 보았는데 곧 이것이 섬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어렴풋하여 아직도 분명치가 않다.
오래지 않아 안개가 조금 걷히니 섬의 형체가 분명해졌으나 아직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다. 곧 작은 배를 내려 경비병 2명과 선원 5명을 보내어 ‘육지陸地’로 찾아가 그곳의 이름을 묻게 하였다. 안개는 점점 걷혀 맑아지니 ‘북방’으로 산과 섬이 잇닿아 있다. (北方山嶼相連) ‘동남에서 서남’쪽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끊어짐이 없다(自東南始 至于西南).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의 남변(是新羅國南邊)”이라고 하였다. 복부에게 이를 점치게 하였더니 ‘대당국大唐國’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가서는 ‘新羅’ 라고 말했다. 그 일에 두 답이 나왔으니 아직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의심을 품고 있을 때에 뭍으로 보냈던 선원과 경비병 등이 당나라 사람 2명을 데리고 왔다. 곧 말하기를 “등주登州 모평현牟平縣 당양唐陽 도촌陶村의 남변南邊입니다. 현으로부터 160리, 주로부터 300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東쪽으로 新羅國이 있습니다……

(13) 표해록
윤1월 초8일
이날은 흐렸다. 정오가 지나면서 西北風이 불어 배는 다시 물러나 표류하며 東南쪽을 향하여 밤새 나아갔다. 나는 권산, 김고면, 고이복 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 해야 하며 방향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살펴보니 우리나라의 흑산도로부터 동북쪽으로 향하여 가면(自我國黑山島 向東北行)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卽我忠淸黃海道界也)며 정북쪽은 평안도와 요동 등지에 이른다(正北卽平安遼東等處也). 서북쪽은 옛날 우공의 청주와 연주의 경계(西北卽古禹貢靑州兗州之境也)며 정서쪽은 서주와 양주의 지역이다(正西卽徐州揚州地域). 송나라 때 교통할 때 명주로부터 바다를 건넜으니(宋時交通高麗) 명주는 대강 이남의 땅이다(?) (自明州浮海명주로부터 바다를 건너갔다). 서남쪽은 옛 민지역으로 지금의 복건로며 서남쪽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섬라(타이), 점성(베트남 중남부), 만랄가 등에 이른다(西南卽古閩地). 정남쪽은 대소 유구국이고(正南卽大小琉球國也) 정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여인국이며 일기도다(正南而東卽女人國也一歧島也). 정동쪽은 일본국이며 대마도다(正東卽日本國也 對馬州也). 지금 풍랑으로 표류하여 5일 밤낮 동안 서쪽으로 향해 왔으니(今漂風五晝夜 西向以來) 생각건대 거의 중국의 땅에 이르게 되었으리라고 보는데(意謂㡬至中國之地) 불행히 이 서북풍을 만나 반대로 동남쪽으로 가니 만약 유구국이나 여인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천해 밖 은하수에 도달할 것이다.(不幸又遭此西北風 逆向東南 若不至琉球國女人國卽必流出天海之外) 끝이 없는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희들은 내 말을 기억하고 키를 똑바로 잡고 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흑산도로부터 5일 밤낮 동안 서쪽으로 향해 왔으니 동북쪽으로 향해 가면 충청도와..
라고 해석을 해야 맞다. 현재 상황 판단을 하고 있는데 이미 지나쳐온 흑산도로부터의 방향 잡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지금의 위치에서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도치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지금의 지도로 위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흑산도에서의 방향 잡기이든 절강 근처에서 방향 잡기이든 둘다 해석이 되지 않는다. 흑산도 혹은 절강 근해에서 동북은 전라도이지 충청도, 황해도의 경계가 아니며 경기도는 해안가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정북은 산동이나 충청, 경기 등지이지 다급한 마당에 멀리 평양, 요동까지 언급할 이유가 없다. 태국, 베트남, 유구를 언급하는 것, 거기에서 정동쪽이 일본과 대마도라는 것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전혀 구분을 못하고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최 부의 말은 맞다. 현재의 위치로 상황 파악을 했다면 배는 제주로부터 흑산도 산동을 지나 절강까지 전체적으로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흘러 온 것이 되는데 지금의 위치에서 동북은 황해, 충청의 경계가 될 수 있고 정서는 양주가 될 수 있고 서남은 명나라 주변 제국가들, 정남은 유구국, 남동은 여인국, 멀리 정동 방향은 일본과 대마도가 될 수 있으며 정북은 서해를 거쳐가면 평안도와 요동이 나온다.

(14) 선조 45권,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6일 병신 3번째기사
유성룡이 다시 척 총병과의 대화를 보고하다

‘조선은 반드시 구제해야 할 나라이다. 예전에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고 선부(宣府)•거용(居庸) 등의 관(關)을 등[背]으로 삼아 북호(北胡)를 막고 산동(山東)•조선을 왼팔로 삼아 해구(海寇)를 막았으니, 만일 조선을 구제하지 않으면 제경(帝京)이 불안하다.’ 하였고 인하여 손수 우리 나라와 산동이 바다를 끼고 서로 바라보는 형상의 그림을 그려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말하기를 ‘형세가 이러하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 그림은 매우 좋다. 전에 금릉(金陵)2219) 으로 조공할 때는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배를 띄워 며칠이면 금릉에 닿았으니 바닷길이 이처럼 가깝다.’ 하니, 총병이 말하기를 ‘내가 잘 안다.’ 하였습니다. 대개 총병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보호하는 뜻이 많았는데, 어려울 때에 다행히 이 사람을 만난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감히 아울러 아룁니다.”

‘朝鮮爲必救之國。 昔 成祖文皇帝, 定鼎燕京, 以宣府、居庸等關爲背, 以防北胡, 以山東ㆍ朝鮮爲左臂, 以遏海寇。 若朝鮮不救, 則帝京不安’ 云云。 因爲手書, 我國與山東隔海相望之圖, 指點示之曰: ‘形勢如此。’ 臣曰: ‘此圖甚好。 往時朝貢金陵, 自黃海豐川發船, 數日達金陵, 海路之近, 如此。’ 摠兵曰: ‘吾悉知之。’ 大槪摠兵爲我國調護之意居多。 艱難之際, 幸得此人, 所關非輕, 故敢爲竝達。”

(15) 선조 54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8월 20일 을축 2번째기사
윤근수 등을 인견하고 중국에게 양식,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일을 의논하다
“그리하라. 또 수병(水兵)이 제주를 향해서 온다 하니, 내가 그 길은 알지 못한다만 어찌 큰 바다를 건너올 수가 있겠는가. 설령 나온다 해도 산동(山東)•금(金)•복(復)•해(海)•개(蓋)를 경유하여 장홍유(張鴻儒)가 나온 대로 하면 될 것이다.”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산동으로 해서 나올 수도 있지만 그곳이 매우 피폐해서 군사를 내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나오는 수병은 당연히 남직예(南直隷)•영파부(寧波府)•절강(浙江)•소주(蘇州)•항주(杭州) 등지를 경유해야 할 것인데, 제주도와의 거리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일찍이 《유구록(琉球錄)》을 보니 ‘순풍일 때는 복건(福建)에서 7일이면 이르고 순풍이 아닐 때는 10여 일 만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최입이 아뢰기를
“왜인이 민•광(閩廣)으로 가는 자는 꼭 대소 유구(大小琉球)를 지나갑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남직예가 제주와 가깝습니다.”

。” 上曰: “然。 且水兵向濟州而來云。 予未知其道路, 然豈有越大海而出來之理乎? 設若出來, 由山東、金、復、海、盖, 如張鴻儒之出來則可矣。” 岦曰: “自山東, 亦可出來, 而其處甚爲凋弊, 出軍似難云。” 根壽曰: “出來水兵, 當由南直隷、寧波府、浙江、蘇、杭, 距濟州, 雖未知其幾許, 而嘗見《琉球錄》, ‘順風則由福建, 七日而可至; 不順則十餘日可至’ 云。” 岦曰: “倭之向閩、廣者, 必過大小琉球。” 根壽曰: “南直隷近於濟州。” 上曰: “賊若據險, 則可以舟師, 擊之乎?” 根壽曰: “不但水兵, 必須有陸兵夾攻, 可以擊之。” 上曰: “然。 天朝若誠欲勦滅, 則豈有力不足之理乎?” 岦曰: “未可以一槪言(言)之。” 上曰: “聞河南近處, 土賊大起云。 然乎?” 岦曰: “土賊無處不起。 吳下有世族, 與秀吉通謀圖不軌, 朝廷深以爲慮, 幸而捕捉云矣。”

(16) 선조 54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8월 20일 을축 4번째기사
접반사 김찬이 유 총병과 함께 왜적에 대한 방비를 논의한 것을 아뢰다
신이 총병을 보고 ‘손 시랑이 어느 곳에 도착했는가?’하니, 답하기를 ‘아직 산해관을 지나지 않았다. 서둘러 위급을 고하지 않을 수 없다.’하기에, 신이 ‘윤 배신이 이 일로 오늘 떠날 것이다.’하자, 말하기를 ‘가기는 가지만 군사와 식량을 청하여 허락을 받아올지 모르겠다. 그대 나라의 수병(水兵)이 못 지키면 조선(朝鮮)뿐만 아니라 중국 지방도 가깝게는 산동과 멀리는 절강(浙江)•복건(福建)•광녕(廣寧) 등의 지역까지 통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만약 적이 가득차게 되면 중국도 지탱하기 어려울 환난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아울러 윤 배신에게 말해서 간곡하게 고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고
“臣見摠兵, 問 ‘孫侍郞到何地方?’ 答曰: ‘今未過關。 不可不汲汲告急。’ 臣曰: ‘尹陪臣, 以此今日出去矣。’ 曰: ‘去則去矣, 未知請兵、請糧, 得準出來否? 爾國水兵若失守, 則非但朝鮮,中原地方, 近而山東, 遠而浙江、福建、廣寧等處, 無不周通。 賊若遍滿, 則中國亦有難支之患。 此意, 幷言于尹陪臣, 使之懇告可也。’ 且曰: ‘前見柳閣老, 問兵糧之數, 至今不爲回話。 今後則凡分付, 無滯卽報。

(17)선조 121권, 33년( 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1월 29일 갑술 1번째 기사
이항복•이산해와 남방 방비책•마정•군공•봉화법•도적 대책•관왕묘 건립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적이 충청도로 향하면 전라도에서 알 수 있지만, 전라도의 적을 충청도에서도 알 수가 있는가?”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서해(西海)에는 해로가 하나뿐이니 알 수 있습니다.”
“적이 우리나라의 포작한(鮑作干)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해로의 형세에 대해 허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인데, 먼저 충청도를 침범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은 필시 전라도를 먼저 침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적이 중국을 침범하려면 산동(山東)의 제•노(齊魯) 지방을 이곳에서 모두 갈 수가 있다.”중국을 침범하려면 충청도에서 가는 것이 쉽습니다.”

“自馬島乘船, 辰時遇順風, 則午ㆍ未可泊釜山, 風雖不順, 未ㆍ申間則可到釜山。 正東風, 爲順風矣。” 上曰: “彼短於舟楫之言, 予亦前聞。 舟楫爲其所長, 豈有不如我國之理? 無乃不可信之言乎?” 恒福曰: “此言臣熟聞之, 爲可信矣。 彼若向全羅, 則雖順風, 一帆不能達, 中間經宿於洋中。” 上曰: “鯨島何在?” 恒福曰: “在順天前不遠。” 上曰: “賊向忠淸, 則全羅知之, 全羅之賊, 忠淸亦知之乎?” 山海曰: “西海惟一路, 可知矣。” 上曰: “賊多擄我國鮑作干等, 海路形勢, 虛實已知之。 先犯忠淸, 則又奈何?” 恒福曰賊必先犯全羅。” 上曰: “不然。 賊欲犯中國, 則山東、齊ㆍ魯地方, 皆可去。” 山海曰: “若欲犯上國, 則自忠淸道去, 易矣。” 恒福曰: “昌城府使吳定邦能言。 金州衛水路、海浪島及忠淸道水路, 歷歷知之。” 上曰: “海浪島乎?” 恒福曰: “乃中原版籍中人也。”

(18)11월 28일 [양력 1월 8일]<임인> 맑다.
추수할 때 까지 만이라 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하나, 파총  장홍유(장홍유)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 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萬曆 25년(1597)]7월에 倭가 梁山과 三浪을 탈취한 후 慶州에 들어가고 閑山島[註728]를 침공하니, 統制使[註729] 元均[註730]의 군대가 궤멸하면서 끝내 閑山島를 잃고 말았다.[註731] (1) 閑山島는 朝鮮의 西海 어귀에 있는 섬으로 (4) 오른쪽으로는 南原을 가리고 있어서 全羅道의 바깥 울타리가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수비를 그르치고 보니 沿岸 海域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天津•登州•萊州에도 돛만 올리면 쳐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수군 3천명이 처음으로 旅順[註732]에 도착하였다. 閑山島가 함락되자, 經略은 (2) 西京 서쪽의 漢江과 大同江을 수비하여 倭軍이 (3)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억제함과 동시에 조운漕運하는 길을 방비하도록 檄書를 띄웠다.

[萬曆二十五年(1597)]七月, 倭奪梁山•三浪, 遂入慶州, 侵閑山.[註728] 統制[註729]元均[註730]兵潰, 遂失閑山[校勘 161] [註731]. 閑山島在朝鮮西海口, 右障南原, 爲全羅外藩, 一失守則沿海無備, 天津•登•萊皆可揚帆而至. 而我水兵三千甫抵旅順,[註732] 閑山破, 經略檄守王京西之漢江•大同江, 扼倭西下, 兼防運道.[註733]

(20)(1) 선조 87권,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21일 신사 8번째 기사
조선의 형세와 방어•군량 등에 관한 병부의 자문
부산의 왜노가 곧장 바다를 따라 산동(山東)•천진(天津)을 넘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전라도의 한산도(閑山島)를 힘입어서인데, 이곳은 수세(水勢)가 심히 험난하고 수군이 매우 강하여서 지난날 왜노가 여기를 범하였다가 손상이 매우 많았다. 이 섬은 위급할 때에 군병을 보태어 방어하여 산동•천진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으나, 외양(外洋)을 경유하는 경우는 해로를 알 수가 없다

군량의 본색(本色)은 지금 조선에서 취하여 지급할까 하고 있으나, 배신이 애써 말하기를 「잔파한 뒤로 경작이 모두 폐지되어 조금은 저축이 있기는 해도 본지의 용도에 대비할 수 있을 뿐이다.」고 하니, 군사가 떠나고 군량이 뒤따르는 것을 파격적으로 속히 조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본국에서 예비하도록 엄히 독촉하고 한편으로는 그대로 몰래 스스로 조처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운을 의논하고 있지만 매입은 어느 관원에게 맡기고 운반은 어느 군사를 뽑아 쓰고 어느 곳에 상륙시키고 어느 곳에서 방출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논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듣건대 등주(登州)•내주(萊州)를 따라 나가면 바로 황해(黃海)에 이를 수 있고 도로도 매우 편리하다고 하나, 양선(糧船)의 유무와 다과를 알지 못하고 또 전에 의논한바 병선(兵船)도 차용의 편의 여부를 모른다. 임시하여 급한 일이 있게 되면 등주•내주도 방해(防海)를 위한 둔병처(屯兵處)가 되지만,

。至于釜山之倭, 且不能順海而窺山東、天津者, 則全賴全羅之閑山島。 此中水勢甚險, 水兵甚强, 舊日倭奴犯此, 損傷頗衆。 此島臨急, 不可不加兵防守, 以救山東、天津, 若由外洋, 則道路不可知矣。

。兵餉本色, 今擬取給朝鮮, 但據陪臣苦言: ‘殘破之後, 耕耘俱廢, 卽少有積貯, 止可備本地之用。’ 兵行糧從, 若不破格速處, 必然誤事。 此可一面嚴催該國預備, 一面仍暗自設處 第在我, 雖議有海運, 然召買責成何官, 押運選用何兵, 何處上岸, 何處屯放, 尙未見議。 及聞由登、萊, 可直抵黃海, 道路亦甚便, 不知糧船有無多寡, 前所議兵船, 亦不知借用便否。 臨時有急, 登、萊亦是防海屯兵之處, 然本色恐不能全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