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한국인(코리안)이란?

한부울 2019. 11. 2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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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코리안)이란?

 

글쓴이:한부울

 

머리말
1895년경의 역사배경
한국인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정리

 

머리말

 

한국인은 누구인가.

수많은 외세 침략에 의해 정말로 혼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인가.

한반도 역사관점에서 외세침략을 크게 보아 서한무제(西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점령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사실과 여수전쟁(麗隋戰爭), 나당(羅唐)침략에 의한 고구려, 백제멸망의 역사, 993년, 1010년, 1019년 3차에 걸친 거란족 요(大遼)나라의 고려침략, 1231부터 1257년까지 여몽전쟁(麗蒙戰爭)에 의한 몽골이 고려지배, 왜구(倭寇)들의 침략인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왜란(丁酉再亂), 만주여진족의 침략인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장기간동안 식민상태가 아니었기때문에 전체구성원들의 혼혈과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다.

그렇더라도 한반도 구성원은 단일민족이라는 현실성 팩트가 있다.

현재 한반도 구성원들을 혼혈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헛소리일뿐이다.

그럼에도 기존 기록된 역사 사실들은 단일민족이란 주장보다 다민족적 역사사실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성은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단일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가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간단한 물음에서조차 우리가 이처럼 망서려야 하는 입장은 역사가 그동안 우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사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

사실 기록이다.

물론 이것조차도 사가들에 의해 변색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잔존하고 있는 기록에서 단일민족이란 주장은 공허한 이야기만 될 뿐이다.

그러함에도 현실적으로 한반도 구성원은 단일민족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기록들은 산산히 흩어지거나 나눠어져 우리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역사 아니다.

이제 어떻게 할텐가.

나는 조선인인가? 한국인인가?

이 물음은 북한과 남한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적 판단이 아니지 않는가.

 

1895년경의 역사배경

 

아래사진은 영국(the British)의 화가, 탐험가, 작가, 인류학자였던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다.

이사람은 1895년경 풍경과 초상화를 그리면서 미국, 일본, 한국을 차례로 여행하고 세계를 다녔다고 하였는데 미국은 물론 북아메리카대륙전체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영국잉글랜드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와 열도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시대적배경이 못된다.

특히 19세기 이전까지의 서양인들의 주장에서 보면 세계를 마치 자기집 건너방을 왔다갔다하는 식의 이동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부터 모순적인 사실임을 우리는 냉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통편의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현재 편의적인 사실에 편승한 측면이 많고 자유자재로 교통이동이 손쉬웠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온천지를 자유롭게 제약을 받지 않고 기록을 완성시키고 있다는데 근대사의 크나큰 모순적인 문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랜도어가 정말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는가.

전혀 아니다.

북아메리카대륙과 동아시아를 손쉽게 연결하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싶은 역사가 매우 어긋난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함에도 이를 등한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배제함으로써 제일 중요한 가능성을 무시한다데 있다.

때문에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것에서 역사배경과 역사위치모순을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랜도어가 여행했다고 하는 미국, 일본, 한국은 같이 붙어있는 역사위치가 아니다.

하여 나란히 배열하고 있는 국명에서 억지스러움이 보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서는 지리적 거리감이 주는 불편한 진실은 쉽사리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즉 랜도어가 말하는 것은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영국, 미국, 일본, 한국이 나란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쉽게 알아차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글쓴이는 시간과 초를 나누면서 이를 밝히려 애쓰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흐름에서 볼 때 랜도어가 방문했던 1895년이라면 시기적으로 1894년부터 손문에 의해 하와이에서 중흥회가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신중국생성 태동이 시작될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홍장(李鴻章)은 고의적으로 영국(자본)과 밀통하여 청일전쟁(1894.7.25~1895.4)이 발발하게 한 사실과 동시에 동학혁명(1894.02.15.~1895.04.24)의 발발은 청일전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서양역사학적으로는 당시에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반란(1895.2.)과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1895.10.01)발생하고 그러한 역사장소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옛 지중해연안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유럽 땅이라 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Venezuela)의 국경지대임과 다시금 돌아와 동아시아역사에서 조선의 부패한 관리들 사이에 벌어진 근대화운동인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에 의해 조선에서 갑오경장(甲午更張:1894.07.27.~1896.01.01)으로 이어지며 조선에서는 공화국체제에 있을 법한 재판소(법원) 구성법 등 34건의 개혁안의결과 함께 군제(軍制)개혁과 더불어 을미개혁(乙未改革:1895-1896)이 단행되었으며 결국 갑오경장에서 친일본세력과 친러시아세력간의 다툼이 친러(親露西亞)정권인 제3차 김홍집내각(1895.7~1895.10)성립시켰고 이러한 파장과 알력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閔妃)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1895.10.08)이 발생하여 고종을 두렵게 만들었고 결국 아관파천(俄館播遷:1896.02.11~1897.02.20)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내부적으로 꺼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현실적으로 조선 각 지역에서는 민란과 반란이 연이어 발생되고 이러한 혼란을 정부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치세력들은 그들의 권익과 사익을 위해 사분오열되면서 서로 아귀다툼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에서 모든 것에서 조각조각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한 것은 조선은 이 시기까지 오직 독단적으로 군주가 일인절대권력을 가지고 통치하였다는 사실만을 알 뿐인데 재판소(법원) 구성법 등 34건의 개혁안의결과 함께 군제(軍制)개혁까지 이루었다고 하는 을미개혁이 진쟁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

조선의 개혁가들이 동분서주한 것처럼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도 개혁가들은 똑 같은 개혁을 서둘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895년 공화국체제에 있을 법한 재판소(법원)구성법이 제정된 이후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되고, 개항장이 증설되었으며, 18982월 독립 재판소인 한성재판소와 경기재판소가 각각 한성부와 경기도관찰부에 합설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던 한반도 역사상황인 동양근대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마치 프랑스공화국(3공화국)의 법체제아래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천연자원이 적은데도 소득수준이 독일 소득수준보다 높았고 프랑스에서는 조세 및 정부지출이 독일보다 낮았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는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1894-1906)에 휘말려 있었을 시기인데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한 방어전쟁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독일이 원하는 배상금을 요구하자, 온 나라 국민이 돈을 모아 갚으면서 겨우 독일압박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기때문에 반 독일 감정과 반유대주의가 온 유럽을 휩쓸었다고 했다.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게 만든 것이 바로 드레퓌스(L'affaire Dreyfus)사건이며 그가 간첩죄로 몰려 갖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그 사건은 프랑스를 개혁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청일전쟁같은 느낌과 독일이 요구하는 배상금을 프랑스 국민들이 돈을 모아 갚는다는 사실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그 복구비용으로 일본이 나서 차관을 스스로 제공하였고 그것은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 식민지 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하기 위한 것으로써 4차례걸쳐 제공한 1,300만환의 차관은 조선을 압박하게 하여 곤경에 빠지자 조선민중들이 나서 국채 보상 운동을 벌렸다는 것과 같은 스토리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을 지은정 그에 대한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은 왜 프랑스로 둔갑하는 것일까?

글쓴이가 본 블로그 글 "부르주아(bourgeois)와 조선의 요민(饒民)
https://han0114.tistory.com/17050842 "에서 주장했듯이 프랑스는 조선의 한성부 즉 파리와 같은 위치역사에 불과할 뿐임을 재고 한다면 수긍히 갈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다 이 모양이다.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자본은 조선에게 차관을 제공한 것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어쩌면 조선에서 막강한 자본을 가진 세력의 귀족들간에 아귀다툼은 전쟁으로 확산되었을 수도 있다.

미국과 영국은 어떤 위치의 국가 역사성과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한의 자본을 가지고 19세기초부터 조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세력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는 본 블로그 글 시리즈로 엮은 글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s://han0114.tistory.com/17050505 ",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https://han0114.tistory.com/17050506 ", "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6세 https://han0114.tistory.com/17050507 "에서 프랑스왕이 곧 조선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성이 대체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한국인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의 글, 코리아 혹은 조선[Corea or Cho-sen (1895)]에서 말한 한국인을 묘사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지금의 한반도 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상당한 충격적인 요소가 많다.

우리가 진정 한국인인지 조선인인지도 모르면서 역사를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지만 그래도 서양인의 기록으로 그러한 정도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을 결코 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때문에 신중하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번역하여 풀어보면서 글쓴이의 생각도 첨가해 보고자 한다.

 

4 장(CHAPTER IV)

 

 

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Chinese)이고, 따라서 체격과 외모가 똑같다는 사실에서 중국인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반대편에 있는 이웃 일본인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문제는 어느 쪽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중국인과 일본인이 이 나라에 계속 침입한 것에서 그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과 물론 내가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백인과 흑인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코리안(Corean)들은 몽골 태생(Mongolian origin)의 다른 민족들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통적으로 속한다 하겠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분파의 형태이다.

작가는 이미 어떤 모습의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 중국인이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신중국인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역사사실과 작가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특별한 것은 작가는 바로 코리안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코리안은 중국인과 다르고 일본인과 다르다고 하였으며 몽골인과 닮았지만 계통적으로 완전하게 다르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왜 제목에서 굳이 코리아 혹은 조선[Corea or Cho-sen] 즉 고려 혹은 조선이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볼 사한이다.

한반도역사에서는 고려는 조선에 병합되어 망한 국가라고 나온다.

즉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고려(高麗)는 유럽과 아랍이며 14세기말엽에 대조선(大朝鮮:indies)에 흡수병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고려와 조선을 구분하기가 곤란해던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으나 고려인(高麗人:Corean)을 중국인(Chinese)이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코리안(Corean)의 집단을 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거의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왕국의 상류층이라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매우 흔한 타입은 누런(황색)피부색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이다. 그렇지만 다시 보면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은 얼굴임을 알게 되고 만약 관찰을 더 멀리까지 가지고 간다면 일반적으로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이나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타자를 치거나 기독교(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조선(Chosen)보다 더 흥미로운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시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의 모든 인종의 표본들이 작은 반도에 도달하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느 정도 모든 이동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이론을 반증할 것이며 결코 그 반대이야기는 아니다.

 

 

 

 

 

 

 

위 글에서도 보면 코리안 거의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왕국의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백인이나 아리안에 친밀하게 접근한다는 것은 고대 아리안의 역사를 코리안에 접목하고 있다는 것에서 특별하게 볼 것이 있다.

이 아리안들이 공유한 인더스계곡문명(The Indus Valley Civilization)이 기원전 2000년경에 절정을 달했다 하였는데 이 시기는 바로 단군에 의한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코리안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는 누런(황색)피부색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을 가진 사람이고 그들은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은 얼굴이며 좀 더 나가면 일반적으로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이나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였다.

한마디로 온 세계인종을 다 망라(網羅)한 것이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조선이란 땅에 모든 인종표본을 볼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인데 지금의 동아시아 한반도가 그 이동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하여 작가는 코리안의 인종표본들이 이동한 방향의 반대이야기는 결코 아니라고 라틴어 "vice versa" 로 못을 박고 있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사실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곳이 코리안들이 존재하는 위치라고 말하고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한반도 지형사정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코리안(Corean)의 황실(royal family)을 예로 들면 황제와 황후, 특히 민씨 가문의 황후쪽의 모든 왕자들이 여느 백인(Caucasian)처럼 희고, 그들의 눈은 전혀 심하게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처럼 전혀 올라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대부 가문(귀족)의 구성원들은 유럽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물론 중산층은 몽골의 유형이고 비록 중국이나 일본인의 각각 일반적인 표본보다 다소 더 세련되고 기골이 장대하지만 그들은 북쪽의 이웃인 만주족(Manchus)만큼 그렇게 강하거나 키가 크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이 많다.우리가 보았듯이, 코코라이스(Ko-korais)와 푸유스(Fuyus)의 커다란 침략이 이것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민씨가문은 백인처럼 희고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으며 작가 새비지처럼 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코리안의 사대부가문들은 모두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글쓴이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코리안 즉 고려인들은 일부라고 할지라도 유럽계통의 사람들과 역사사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산층은 몽골유형이고 중국인이나 일본인하층민 보다 다소 더 세련되고 기골이 장대하지만 만주족만큼 키가 크지않고 강하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만주족이 계층적으로 남부사람과 북부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체격의 문제는 바로 침략을 한 주체가 코코라이스와 푸유스라 하였는데 놀랍게도 코코라이스는 고구려(高句麗)를 말하고 푸유스는 부여(扶餘)를 말해 침략을 한 주체가 고구려와 부여임을 알게 한다.

이것은 동아시아역사가 말하는 사실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코리안(Corean)은 잘생긴 남자로 얼굴은 달걀모양의 타원형이고, 일반적으로 얼굴 전체를 볼 때는 길지만, 옆얼굴 윤곽은 약간 오목한 편이며, 코는 눈 사이의 미간(眉間)이 다소 평평하며, 넓은 콧구멍을 가지고 있다. 턱은 대체로 작고 좁으며 들어간 반면, 입술은 대개 코리안(Corean)얼굴의 취약한 부분으로 일반적으로 두껍고, 윗 입술이 위로 올라가 이를 드러내는 반면, 아랫입술은 측은하게 아래쪽으로 늘어져 기질적으로 힘이 부족하거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좋은 이빨을 가지고 있고 멋진 흰색이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에게는 축복이다.

 

코리안들의 전반적으로는 잘생긴 남자로 얼굴은 달걀모양의 타원형이고, 일반적으로 얼굴 전체를 볼 때는 길지만, 옆얼굴 윤곽은 약간 오목한 편이며, 코는 눈 사이의 미간(眉間)이 다소 평평하며, 넓은 콧구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이하고 기묘하게 보이는 특유한 아몬드형태의 새까맣고 신비스러운 동양 눈은 아마도 그들의 얼굴을 보완하며 그 속에는 온화함과 자부심과 부드러움이 묘사되어 있다. 다소의 경우는 기민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에서 예외이며, 하층계급에서는 검은 눈(black ones)이 거의 주요한 특성이고 광대뼈가 두드러진다.

털은 뺨과 턱, 입술 위 아래는 거의 없지만 머리에는 꽤 풍성하다.

코레아에는 머리 모양에 대한 매우 신기한 관습이 있고, 그 관습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wear your hair"는 보통 일반적으로 머리모양을 말해 조선인의 머리 모양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상투를 튼다든지, 댕기머리, 특히 왕족과 귀족들의 머리모양의 관습을 생각할 수가 있다.

 

랜도어의 글에서 모든 것이 충격이고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한반도역사에서 침략을 받았다던 우리 역사의 한 축이었던 부여와 고구려가 코리아를 침략했다는 사실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Fuyu Kyrgyz language, the easternmost Turkic language

Koguryoic languages, also called Fuyu, a group of languages of Korea and Manchuria mentioned in ancient Chinese sources Buyeo kingdom, also called Fuyu

고구려어, 고대 중국 원천 부여 왕국에서 언급된 한국과 만주의 언어군인 푸유(Fuyu)라고도 불린다.

영어자료에는 푸유 키르키즈어(Fuyu Kyrgyz language)는 부여(扶餘)키르키즈어라고 해석하고 최동단(最東端) 투르크어라고 하고 있다.

위치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지금의 동아시아대륙 동단(東端)인 만주와 한반도에 투르크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구려어는 고대중국원천(古代中國源泉) 부여왕국(扶餘王國)에서 사용된 지금의 한국과 만주의 언어군으로 부여(Fuyu)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정리

 

박찬승(민족, 민족주의2010)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광수(李光洙)의 조선민족론(朝鮮民族論,1933)이전까지는 조선인이 단일민족이라고 표현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신채호(申采浩)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과 박은식(朴殷植)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1911)등에서 조선인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은 일제에 의한 기획적인 것이라고 할 때 1933년 이전까지 단일민족이 아닌 다민족 상황이 조선을 지배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사실도 여러방면에서 증명되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코리안은 여러인종들을 포괄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아래 사진그림은 1865년 독일유기물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Baron Justus von Liebig:1803-1873)가 우루과이 프레이 벤토스(Fray Bentos)에 설립한 리빅 육류 회사(Liebig's Extract of Meat Company)의 광고인데 최소한 1899년 OXO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까지의 광고임을 알 수 있다.

 

 

 

위 그림들을 보면 전부 코리안들의 낯선 일상의 사진들이다.

특히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은 기원전 6세기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스틸트워크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stilt walker를 뜻하는 κωλοβαθριστής(kolobathristēs), κῶλον(kolobathron), "stilt", ".(kolon), "limb"와 βάθρον(bathron), "base, strist"의 죽마다리 합성어였다.

벨기에에서는 1411년부터 벨기에 남부의 주 나무르(Namur)의 죽마걷기사람들이 죽마 위에서 전투하는 것을 연습했다하고 습지나 침수 지역의 주민들은 때때로 습지에서 불어난 강물을 벗어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죽마를 사용했다 한다. 프랑스 남부 랜즈 지역의 목동들은 그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죽마위에 서서 양떼를 관찰하곤 했다한다.

그렇게본다면 코리아에서 죽마타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는데 이 죽마고우가 죽마를 같이 타던 옛친구라는 말이니 이것도 서양관습인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으로써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 나중에 하나하나 다시금 풀어볼 예정이다.

 

 

 

위 그림은 대중일간지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의 1894년 8월 13일자 "LES EVENEMENTS DE COREE, AGITATION A SEOUL" 이란 설명의 삽화사진이다.

즉 코리아의 정치적 상황(사건)이라 하여 "서울 동요(動搖)"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서울 내 온갖 민족, 종족, 사람들이 모여 어떤 상황을 끼리끼리 모여 수근거리고 무엇인가에 대해 심히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일부는 군인들에게 환호를 하고 응원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서울에는 수많은 종족, 민족들이 모여 어우러져 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때 사건은 바로 1894년 8월 1일부터 발발한 청일전쟁 때문이다.

1894년 3월부터 동학혁명이 발생되어 진행되고 일본이 동학혁명에 정식으로 개입하여 청나라와 충돌이 야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청나라는 조선군인이거나 고려군인으로써 즉 코리아라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8"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7 "에서 충분히 알아본 사실이다.

이 신문은 프랑스 파리인 무아즈 폴리도르 미요(Moise Polydore Millaud:1813-1871)에 의해 창간된 보수적인 파리(Paris)일간신문으로 1863년부터 1944년까지 발행되었다고 알려지고 1895년 발행부수가 200만부나 되어 세계 최대 신문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광수(李光洙)의 조선민족론(朝鮮民族論,1933)이 발표되었던 1933년이라면 바로 미국의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와 나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히틀러(Nazi Germany,1933-1945)가 세상에 등장하던 해이다.

이것은 세계역사학적으로도 상당한 의문을 제시하는 상황들이다.

조선체제내에 수많은 당이 존재하고 각 민족과 종파들에 의해 나눠지고 분열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취임한 루스벨트는 독재정권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장기집권을 하면서 미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서 국무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거의 독단적으로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조선의 마지막 역사가 이상하게 종지부를 찍은 것에서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더더욱 궁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라고 하는 2차세계대전을 상대로 한 주역자 두 세력들이 1933년 동일한 년도에 생성되고 동일한 년도에 퇴임 또는 사망하였는가 하는 도플갱어(doppelganger)적인 의심이 묻어있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똑같은 상황은 연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이때는 신중국의 내전이라고 하는 마지막 국공내전 5차전(1933.10~ 1934.10)이 벌어질 때며 조선에서는 비록 일제치하라 할지라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는 듯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조선일보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철자법으로 발행 개시하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

위 랜도어의 글에서보면 조선 또는 코리아에서의 구성원들을 보면 상위계층 즉 우리가 사대부라고 한는 귀족들은 유럽인과 생김새가 동일하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서두에서 한반도역사가 주장하는 외세침입에서 그렇듯이 많은 변형이 있어야 함에도 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Chinese)이라고 하지만 중국인과 일본인과 거의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몽골 태생(Mongolian origin)이라고 하지만 계통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분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코리안들의 상류층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말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다.
코리안의 일반적인 형태는 누런(황색)피부색, 즉 황인종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이라 하였는데 한반도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다시 보면 이러한 코리안들이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았고 또는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과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혼입에 코리안들은 상류층부터 하층계급까지 마치 세계인종표본을 보는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다민족사회라는 것을 입증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코리안(Corean)의 황실(royal family)을 예로 들면 황제와 황후, 특히 명성황후(민씨가문)의 황후쪽의 모든 왕자들이 여느 백인(Caucasian)처럼 희고, 그들의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 영국인인 그들처럼 모습을 하고 있다 말하고 일부 사대부 가문(귀족)들의 구성원들은 유럽인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는데 비로 코리안들을 침략한 외세가 어떤 민족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타민족일 것일 분명한 것인데 놀랍게도 침략세력이 고구려와 부여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긴가.
어떻게 동이족인 고구려와 부여가 한반도를 침입할 수 있는가.

이 같은 사실은 실로 천지개벽할 이야기가 아닌가.

무엇이 우리역사인가.

참혹하고 처참한 전쟁을 유발시켜 인류가 남긴 고귀한 유물을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만들며 세계질서를 한꺼번에 흐트러버린 히틀러와 루스벨트와 그 추종세력들은 현재 이토록 혼돈의 역사가 되게 한 책임이 진정없는 것인지 묻고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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