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이라 생각했었다.

한부울 2006. 9. 2. 00:48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이라 생각했었다.

-고려사의 한 귀절-

해동 천자인 금상 폐하(고려 황제 폐하)는 부처님이 돕고 하늘이 도와 교화를 펴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海東天子當今帝佛補天助敷化來理世 - [고려사(高麗史)] 71권 -


                                                       고려 황제의 옷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산리에는 바위 벽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는데,  그 옆에는 2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고려 경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이다.

그 금석문에는 '황제만세원(皇帝萬歲願 : 황제께서 만세토록 - 오래오래 - 사시길 빕니다. 라는 뜻)'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고려의 경종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증거다.

                                         고려 - 태평2년명 마애 약사불좌상


불상의 오른쪽에

"태평 2년(고려 경종 2년, 977년) 7월 29일 우리 황제의 만세를 기원 하며 중수했다."

[太平二年丁丑七月卄九日古石佛在如賜工重脩爲今上皇帝萬歲願] 는 글이 있다.


태평(太平) 이라는 연호 도 쓰고 있다.

연호는 올해가 서기 몇년 하듯이 그 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직 황제만이 쓸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도 모두 연호를 썼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가 모두 스스로 황제국가라 했음 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왕'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고 있다.

'짐(朕)'은 황제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고, 황제가 '임명'한 '제후'인 왕이 쓸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 역사책『고려사』에 나오는 사실이다.


고려가 스스로 황제국이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다름 아닌 고려시대 관료체제다.

고려시대 관료체제는 다음과 같다 :


----------------------------------------------------------------------

3성(省) -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

6부(部) - 이부(吏部)·호부(戶部)·예부(禮部)·병부(兵部)·형부(刑部)·공부(工部)

----------------------------------------------------------------------


왜 이들 부서의 이름이 중요한가 하면, '성(省)'과 '부(部)'자는 천자(황제)국에서 쓰던 것으로 제후국은 함부로 쓸 수 없던 말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部)'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하여 고려의 6부(部)와 같은 역할을 맡은 부서를 '조(曹)'라고 고쳐 불렀다.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로 바꾸었다.

또 '성(省)'자는 대진국(발해)시대에도 '3성(省) 6부(部)'제 라는 이름으로 대진국의 행정체제에도 쓰였고, 조선시대에 와서 사라지게 되었다.

대진국(발해)과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 라고 했음 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 라고 하다가 (고구려의 정식 나라이름은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

나중에 나라이름을 대진으로 바꿈.

대진은 '위대한 진' 이라는 뜻이고  여기서의 진은 고조선의 진한 변한 마한 의 진한을 뜻하는 것.

따라서 발해는 고조선,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

'조서(詔書)'·'제서(制書)'·'칙서(勅書)'  고려 임금들이 명령을 내릴 때 쓰던 용어이다.

천자국의 황제만 쓸 수 있던 말 로 제후국에서는 '교서'라는 말을 써야 했다.


( 조선은 '교서'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도 태조,세종 등 [조]와 [종]을 붙였는데 이는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었던 것.

황제가 아닌 왕은 죽어서도 무슨왕 무슨왕 으로 불린다.

말하자면 조선의 임금은 살아서는 왕이었지만 죽어서는 황제 가 된 것.)  


또, 고려 인종대의 문신인 김부식은 [진삼국사표]에서 고려 인종을 '성상 폐하(聖上陛下)'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

'온 천하가 일가(一家 : 한 집안) 되니 천자(天子)의 성스러우심이라.'

- 서기 1209년(단기 3542년, 고려 고종 5년), 이규보가 지은 연등회 의식을 축하하는 시(詩)에서

================================================================================ 이규보는 고려의 연등회를 축하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즉 이 시는 연등회를 열게 지시한 고려 임금을 '천자(天子)'라고 부르고 있고,

연등회에서 고려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가 한 집안이 되니 이는 (고려) 천자의 성스러움 덕분"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만약 고려가 제후국이었고 고려 임금이 단지 '왕'이었다면 이규보가 '감히' 고려 임금을 '천자'라고 부를 수 없으며 고려의 깃발 아래 '온 천하가 일가(一家) 되니'라고 읊을 수도 없습니다.

고려의 임금들은 아들들을 '왕(王)'이라 불렀는데 이는 중국 왕실에서 황제의 아들을 '왕'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중국에서는 임금을 '황제皇帝'라 하고 황제의 동생이나 형, 그리고 친척들을 '왕王'이라고 불렀다. 고려도 이런 체제였다는 얘기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고려가 '봉작제'를 실시한 사실 도 살펴보자.

봉작제(封爵制)는 신하나 왕족을 작(爵)에 봉(封 : 임명)하는 제도다.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의 다섯 등급으로 나뉘는데 이는 천자국에만 있는 제도 였다.

( 서양의 귀족이나 영주들을 '공작, 백작, 남작'이라 부르는 것은 동양의 이 말을 '빌려쓰는' 것일 따름이다.)


고려에서는 왕족뿐만 아니라 일반 신하들도 작위를 받았는데, 왕족은 백작에서 출발하는 데 비해, 일반 신하들은 남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달랐다.

이 봉작제는 조선시대에는 없던 제도다.


고려태조왕건은 '천수(天授 : 하늘이 내린 권력)'라는 연호를 만들어 썼다.

시작부터 연호를 만들어 썼다는 것,

그리고 '하늘이 내린' 권력이라는 뜻인 '천수'를 연호로 만들어 썼다는 것은 고려가 자주정신을 이어받았음을 말해 준다.

(연호는 오직 황제만이 쓰는 것.)


또 고려는 황제의 생일을 나타내는 '절일', 황제의 부인을 뜻하는 태후(太后), 황제 계승자를 뜻하는 '태자(太子)'라는 명칭을 썼다.

(왕위 계승자는 태자가 아니라 세자.)


고려 사람들은 송악(개경)을 황도(皇都)·황성(皇城)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역사책인 안정복의『동사강목』에는, 고려 역사를 설명하면서 "왕건은 천자(天子)라 칭한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고려태조왕건이 건국하면서부터 스스로를 '황제'로 일컬었음 을 알려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고려의 기록이 아니라 금나라의 기록이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책을 쓰면서 예전에 금(金)나라가 고려에게 보낸 조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

대금(大金)황제가 고려국 황제(皇帝)에게 글을 보냅니다.'(大金皇帝奇書于高麗國皇帝)

-----------------------------------------------------------------------------

고려가 스스로를 일컬은 기록이 아니라 금(金)나라가 고려에 보낸 금(金) 황제의 조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했고, 이를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고려시대 송악의 궁궐에 딸려 있던 원구단(圓丘壇) :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이곳에서 고려 황제가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지냄)도 '물적 증거'의 하나다.


동아시아 질서에서는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권한은 천자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하늘의 아들'로써 우주만물을 주관하므로)

- 조선시대에 원구단을 없애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도 초기에 원구단이 한양의 남교에 있었고 임금이 직접 천제(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세조때부터 천제가 폐지 되었고 나중에 대한제국이 생기면서 다시 원구단을 만듦.


대한제국 원구단과 황궁우 

대한제국 원구단 옆 건물인 황궁우

원구단 자리엔 일제에 의해 조선호텔이 세워졌다.  


황궁우

원구단 돌북

원구단 돌북 옆 모습


[조선왕조실록에서] - [태종 16년 -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내야 한다는 경승부윤 변계량의 상서문]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낼수 있다는 사대주의 신하들의 주장으로 태종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포기하려 하자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변계량(卞季良)이 주장한 글.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천제) 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하늘에 제사지냄을) 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고, 중국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요임금 때 일이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태조 대왕(太祖大王 - 이성계)이 또한 이를( 단군(檀君)의 전통을) 따라 엄숙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절을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임금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 - 하늘에 제사지내는 글)을 짓게 하고 ...변계량이 지어서 바친 글이 뜻에 맞으니, 상을 주었다.


*참고로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것은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인데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본기]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본기]라는 것은 황제국의 역사로 만약 고려가 황제국이 아니었다면 삼국의 역사를 모두 세가(제후국의 역사)라고 썼을 것다.

그런데 고려가 삼국의 역사를 쓸 때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서술한 것은 고려가 스스로 황제국이라 생각했었다 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