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조선황실의 비극

한부울 2006. 8. 29. 13:13
 

공화국 시대, 황실의 비극

[한겨레21 2006-08-29 08:03]

 

[한겨레] 고종의 아들딸들이 힘겹게 통과해야만했던 근현대사, 불행은 손자들에게도… 이구씨 사망으로 적통 끊어졌지만 황실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가 박소희씨가 쓴 <궁>은 “물론 이것은 가상의 이야기입니다”라는 말로 첫 페이지를 시작한다. “지금 일본과 영국의 많은 나라는 아직도 왕실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궁궐들은 주인을 잃은 채 쓸쓸하게 비어 있지요. 일제와 열강의 탄압으로 왕가의 맥이 끊어지고 말았던 겁니다.” 조선시대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이제는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대부분이 파괴됐고, 경운궁(덕수궁)은 주변에 들어선 각국 공사관들에게 터를 내주고 쪼그라들었으며, 창덕궁은 놀이터로 탈바꿈하는 치욕을 겪었고, 서울시 역사박물관 터에 자리하고 있던 경희궁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나 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궁궐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머물렀던 창덕궁뿐이다.


고종의 9남4녀 중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넷


황손들의 운명도 궁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종은 정비였던 명성황후를 포함한 8명의 부인에게서 9남4녀를 뒀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0)과 덕혜 옹주(1912~1989) 넷뿐이었다. 이른 죽음에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영보당 이씨가 낳은 고종의 맏이 완화군 이선은 13살 때 홍역을 앓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명성황후의 독살설이 전한다. 명성황후가 1871년에 낳은 원자는 대원군이 내려보낸 산삼을 먹고 배설 불능으로 숨졌다. 아이의 사망 원인이 대원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명성황후는 그렇다고 믿었다. 구한말의 우국지사 황헌은 <매천야록>에 순종에게 생식능력이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완화군을 죽인 업보라는 당대 사람들의 평가를 적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저물어가는 황실은 그들에게 평탄한 삶을 허락하지 않아다. 순종은 1898년 9월10일, 다량의 아편이 섞인 커피를 마신 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친러파 김홍륙 등이 저지른 이날 ‘독차 사건’으로 순종은 지적 장애를 일으켜 판단능력을 잃은 불구자가 됐다고 전한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1999년 청년사에서 펴낸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 멍한 표정의 순종 사진을 보고 “이 표정은 처연인지, 망연인지, 무념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의친왕 이강은 마음속에 일제에 대한 비분강개를 품고 있었지만, 이를 널리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1919년 11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지만,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잡혀 평생을 일제 밀정의 감시 속에서 살았다. 그 때문인지 수많은 여성을 통해 확인된 자손만 13남9녀를 뒀는데, 그의 자손들은 “알려지지 않은 자손도 많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1930년 6월12일 강제 은퇴당해 일본의 ‘공족’(公族) 이강공(公)에서 이강 전하로 격하됐다. 이후 그는 ‘잘생기고 호방한 비운의 왕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곧 잊혀졌다.

영친왕 이은은 1907년 12월5일 11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해 6월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해 파문을 낳았고, “황제가 책임지고 자결이라도 하라”는 매국노 송병준 등의 등쌀에 못 이겨 7월20일 순종에게 황위를 내줬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순종은 8월7일 11살 먹은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는데, 이를 기다렸다는 듯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통감은 “영민한 황태자를 일찌감치 유학 보내자”며 영친왕을 볼모 삼아 일본으로 끌고 간다. <창덕궁 이왕실기>에는 당시의 광경을 “(12월)5일, 황태자 일본으로 행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군복 차림에 하얀 장갑을 끼고 장식용 칼을 왼손에 쥔 영친왕이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초대 통감의 오른편에 바짝 붙어서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 전한다.


일본이 미웠던 의친왕, 사기 당한 영친왕


영친왕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긴 것은 이토와 사진을 찍은 해로부터 56년이 지난 1963년 11월23일이었다. 그는 1945년 해방을 맞은 조국에 바로 돌아오지 못했고, 18년을 더 일본에서 떠돌다 병든 몸으로 침대에 실려 고국을 찾았다. 고국에 돌아올 때 그는 식물인간의 모습이었다. 1947년 일본 왕족 ‘이왕’에서 자연인 이은으로 돌아가면서 한국 국적을 회복했지만, 1957년 5월18일 아들 이구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국적을 일본으로 바꿨다. 영친왕을 경계한 이승만 대통령이 여권을 안 내준 탓이기도 하지만, 평생 시류에 휩쓸려 살아온 심약한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은 영친왕의 도쿄 아카사카 사저를 대한민국 정부 재산으로 빼앗으려 했지만, 영친왕은 사기꾼의 농간에 속아 시가의 절반도 못 되는 돈을 받고 세이부 그룹 회장으로 있던 고 쓰쓰미 고지로에게 팔았다.

덕혜 옹주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는 고종이 환갑 때 낳은 금지옥엽 고명딸이었다. 덕혜 옹주는 1925년 3월27일 서울을 떠나 일본 여자학습원에 입학했다. 그는 학습원 동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이때부터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렸다. 1931년 5월8일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했다. 1951년 전후에 일본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실이 <조선일보>와 <매일신보> 기자 출신으로 영친왕의 환국을 이끌게 되는 김을한씨에 의해 발견됐다. 소 백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정혜는 행방불명됐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는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그런 사람이 있었냐”고 말했다. 그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고, 1989년 4월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뒀다.

불행은 고종의 손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일본인 모모야마 겐이치로 귀화해 한국과 인연을 끊었다. 그는 “나는 천황을 존경한다”고 말했고, 마음으로부터 일본인이 되고자 했다. 1970년치 5월5일치 <조선일보>를 보면,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그가 출국 직전 이복 동생들을 모아놓고 “왕족이라고 나타내지도 말고, 이용도 당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1991년 숨졌다.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는 조선 왕실 사람들 가운데 드물게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운현궁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해 ‘공’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았다. 일본 황족이나 화족과 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 박찬주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일본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어했다고 한다. 1945년 6월 일본 육군 중좌(중령)로 진급해 일본 본토 전출을 명 받았고,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 숨졌다. 의친왕의 3남 이홍길은 후손이 없이 1951년 숨졌다. 4남 이창길은 2남2녀를 남겼다. 5남 이수길은 장면 총리 시절 구황실재산관리 사무총국장을 지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와 붙어 있는 칠궁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는 매국노 이지용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고, 그 덕에 자손들이 벌이는 땅 찾기 소송이 ‘친일파 땅 찾기 소송’으로 명명돼 이따금 신문 지면에 실리고 있다.


당신은 황실 복원에 찬성하십니까


6남 이명길은 장면 정부 때 국회의사당 도서실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1984년에 숨졌다. 7남 이형길은 194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2년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했다. 8남 이경길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996년 2월17일 수원시 장안구 평화양로원에서 숨졌다. 9남 이충길은 미국에 생존해 있다. 그의 아들 이상협(45)씨가 지난해 이구 황세손의 양자로 추대됐다. 10남 전**는 살아생전 이강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아들 전혜원씨가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1남 이영길은 이석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딸 이홍(32)씨가 연예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황손들은 대부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들의 불행이 조상의 업보 탓인지 그들의 잘못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SBS 라디오 뉴스엔조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맡겨 조사한 결과 “황실 복원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54.4%에 달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황손들은 “쓸데없는 말하지 말라”는 의견부터 “상징적인 복원은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갈라서 있다. 2005년 7월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죽음으로 고종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황실의 적통은 끊어졌지만, 황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대한제국 황실이 종말을 고한 것은 언제인가. 국권 침탈이 이뤄진 1910년 8월29일인지, 일본 왕족 이은이 평민 신분으로 강등된 1947년 10월14일인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돼 이왕가의 왕세자 이구가 일본 국적을 잃은 1952년 4월28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황실은 해방 이후 60년 동안 아등바등 산업화를 이루고, 아시안게임·올림픽·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독도와 고구려와 축구 대표팀의 붉은 유니폼에 광분하는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상처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