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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국 국권 침탈을 감행함에 있어 제반 조약들의 절차상 불법성

한부울 2006. 8. 14. 23:51
 

 

일제가 한국 국권 침탈을 감행함에 있어 제반 조약들의 절차상 불법성

 

1.서언(序言)


1910년부터 36년간 계속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 통치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처음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었다. 다 알듯이 이 협정의 '기본관계조약' 제2조는 과거 양국의 관계를 규정했던 조약들에 대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양국 외무당국은 이 구절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놨다. 한국 측이 '이미 무효'의 시점을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체결된 당시 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으로 해석한 반면, 일본 측은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시기부터라고 확인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은 과거문제에 대한 분쟁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한국은 기본조약 제2조의 자구 해석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제2차 일한협약(1905년 11월 17일)'이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이며, 이에 근거한 한국 병합은 원인무효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대표 강제는 이후 오랫동안 한국 병합 무효론의 핵심 논제가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의 한국 국권 침탈 조약 원문서(原文書)들에 대한 실증적 검토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병합 불성립론(不成立論, non-existence theory)이 새로 제기되었다. 러일전쟁이 개전(開戰)되면서 일본이 국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국에 강요한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 1904년 2월 23일), 제1차 일한협약(日韓協約, 1904년 8월 22일), 제2차 일한협약(1905년 11월 17일), 제3차 일한협약(1907년 7월 24일),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 1910년 8월 22일) 등의 문서에 대한 검증을 통해{1} 형식과 절차에 큰 하자가 확인되어 한국 병합은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필자가 제기한 이 불성립론은 세카이[世界]지 1998년 7, 8월호에 그 요지가 처음 일본 측에 소개되었고, 이에 대한 일본 측으로부터의 반응도 곧 뒤 따랐다. 세카이지는 일한대화(日韓對話) 난을 만들에 이 논제에 관한 일본 측 전문학자들의 견해를 싣기 시작해 2000년 11월호까지 7차에 걸친 의견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일본 측에서 사카모토 시게키[坂本茂樹],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두 교육자가 구조약(舊條約)의 유효부당론(有效不當論)을 펴고, 사사가와 노리카쓰[笹川紀勝],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두 교육자는 한국 측으 불법무효론(不法無效論)을 지지했다.


{1}▶註;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의해 강제된 조약들의 명칭에 이렇게 차수(次數)를 붙인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과거 일본인들이 제목을 붙이지 못한 조약들의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나, 이에 대한 비판은 이미 확실하게 된 상태이므로 독자 특히 외국인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이 방식을 택한다.


각 조약으로 침탈된 국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한의정서는 시정개선 수용 승인, 군사기지 사용권을 보장하고 이에 위배되는 내용의 조약을 제3국과 체결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1차 일한협약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교 및 재정 고문을 고용하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시 도쿄의 일본 외무성과 사전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2차 일한협약은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고 그 임무 수행을 위해 한국 황제 관하(關下)에 통감을 파견하고 개항지에 이사관을 보내 통감의 지휘를 받게 하며, 제3차 일한협약은 한국 정부가 시정개선을 위해 통감의 지휘를 받고, 필요한 법령재정과 행정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게 하고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임명하되 그의 승인 없이는 다른 외국인도 고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병합조약은 한국 황제가 한국 전체에 관한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하는 것을 각각 보장하였다.』


유효부당론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도덕적으로는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사카모토와 운노는 불성립론(不成立論)을 비판하면서 이런 견해를 제시했지만, 정작 필자 주장의 중요한 근거인 '형식과 절차에서 확인되는 기만, 강제, 범법의 하자'가 가지는 국제법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조약의 형식은 국제법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이 정하는 것일 뿐이므로 형식과 절차를 문제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견해를 되풀이하였다.


필자의 불성립론은 2001년 4월 26일에 개최된 제2차 도쿄 워크숍에서 사사가와 노리카쓰가 국제법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찾는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처음으로 진지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국제법상 '합의의 하자'에 대한 기존의 학설 내지 평가를 최대한 조사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사실이 확인될 경우 법적으로 해당 협정들은 모두 취소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하면서, 5개 조약들을 통해 확인된 기만, 강제, 범법 등도 이 관점에서 앞으로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1965년 한일협정은 현재의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약이다. 그러나 이 협정의 기본조약이 명시한 양국 간의 과거에 대한 규정은 위와 같이 해석상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고, 이에 대한 학술적 검토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세카이[世界]지의 일한대화(日韓對話)는 곧 이 상황을 깨뜨리는 역할 수행으로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다. 한국 병합 불성립론(韓國倂合不成立論)을 처음 제기한 필자로서도 이후의 여러 논의들을 통해 많은 새로운 지식과 이해를 얻게 되었다. 이 장편의 논문은 그 성과 위에 불성립론의 토대를 좀더 체계화해 본 것이다.


2.한국 측의 조약에 대한 인식


◆ 국제법에 근거한 국제(國制; 헌법)의 제정.


한국이 서양의 국제법을 준수하려는 의식은 대한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7년 10월에 출범한 대한제국은 1899년 6월 23일 제국(帝國) 운영에 필요한 규칙을 제정할 목적으로 교정소(校正所)를 설치하였다. 이 부서는 같은 해 8월 17일에 국제(國制)를 마련하여 황제에게 올려 채택되었다. 이때 서양인 고문관으로 미국인 C. W. LeGendre(한국식 이름은 李善得), C. R. Greathouse, 영국인 J. McLeavy Brown(한국식 이름은 柏貞安) 등도 의정관(議定官)으로 참여하였다. 전문 9개조로 된 국제(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 되는바 자주적인 독립 주권을 갖는 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는 5백년간의 전래(傳來)를 거치고 이후로 뻗쳐 만고(萬古)에 불변할 전제정치(傳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시니 공법(公法)에 이르는 바 자립정체(自立政體)이다.


제4조 대한제국(大韓帝國) 신민(臣民)이 태황천제(太皇天帝)가 향유하는 군권(君權)을 침손할 행위를 하게 되면 그 기행(己行), 미행(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국내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시어 편제를 정하고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법률을 제정해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效放)하여 국내법률도 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 복권을 명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정법율(自定法律)으 예이다.


제7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행치이(自行治理)이다.


제8조 대한제국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출척(黜陟), 임면(任免)을 행하시고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처탈(處脫)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다.


제9조 대한제국 태황천제께서는 각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을 파견, 시찰하게 하시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다.


국제(國制)는 황제 전제정치의 제국인 것을 선언하고, 황제 절대권과 신민의 도리를 밝히고, 육해군 통솔권, 법률제정권, 행정통치권, 관리임면, 출척, 포상권, 외교권 등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 9개조 중 5개조에 걸쳐 각 권한의 근거로 공법(公法)을 명시한 점이다. 이 공법이 당시에 알려진 만국공법 곧 국제법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제에서 거론한 공법의 용어는 구체적으로 Johannes 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의 그것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나와 있다. 이 연구가 밝힌 공법회통의 해당 조관 및 일본제국 헌법과 대조해 보자.


여기서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C. Bluntschli의 공법회통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제국 헌법과 비교할 때, 국제의 제2조, 제3조, 제4조의 조항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제국 헌법에도 제1, 3, 4조에 있어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국제 5~9의 5개조 내용이 일본제국 헌법에서 5, 6, 9, 10, 11, 12, 13, 14, 16 등 9개조로 분산되어 있어 이를 직접 따르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제가 전문 9개조로 간략한 형식을 취한 것은 처음부터 공법회통의 68장에 집약되어 있는 국가의 법적 요건을 취할 의도가 컸던 것을 의미한다.


1896년 5월 9일 조선왕조의 학부(學部) 편집국은 미국 선교사 William A. P. Martin이 번역한 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을 보급판으로 간행하였다. 그 간행 서문에 의하면, 3개월 전 국왕이 일본군이 감시하는 경복군에서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임시로 옮겨 자주권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애쓰는 마당에, 위로 조정의 대신료(大臣僚)에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의 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날로 개명(開明)에로 매진하여 일군왕(一君王)의 통치를 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우해 이 책을 간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자주독립 국가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의 국제법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졌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런 의지와 의욕이 3년 뒤 국제(國制)의 제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 조약에 관한 국내법


조선왕조는 1876년부터 외국과 서양식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관한 법적 규정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 1894년에 제정된 명령반포식(命令頒布式)이 가장 앞선다. 그 제8조에 국서(國書), 조약(條約), 비준(批准) 등에는 반드시 어압(御押)으로 기명(記名)하고 어새(御璽)를 찍는다고 하였다.{13} 외국과의 외교적 행위에 대해서는 군주가 일체의 권한을 가지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원칙만 언급한 것으로 조약체결의 절차에 대해서는 밝힌 바가 없다.


{13}▶註;『장정좌안(章程佐案)』(규장각도서 17237). 규장각도서 금호시리즈 근대법령 편. 의안(議案), 엄령(儼令) 상(上). 서울대학교 도서관, (1991) 79면.


그 후 5년 뒤에 제정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9조는 황제가 조약 체결국에 사신을 파견(派遣), 주무(駐務)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모든 약조(約條)를 체결하는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황제가 타국과 외교의 모든 권한을 가지는 주체란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약체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헌법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는 앞에서 살폈듯이 공법회통(公法會通)의 국가 요건을 간명하게 취하여 반영한 것이므로 이런 세부적 사항이 언급될 자리는 아니다. 조약체결과 비준절차 등은 국제의 불위법(不位法)에서 찾는 것이 옳다.


1894년 5월 청국(淸國)과 일본은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 진압을 명분으로 한반도에 동시 출병(出兵)하였다. 이때 일본 정부는 농민반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정개혁(內政改革)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파견한 군대를 동학농민군의 점령지인 전주가 아니라 서울로 향하게 하였다. 8천명 규모의 일본군은 서울에 도착하여 국왕이 사용하고 있던 경복궁(景福宮)을 강점하기까지 하면서 미리 준비해온 내정개혁안의 채택 시행을 강요하였다. 이런 폭압적 상황은 1895년 8월 왕비를 시해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왕비는 삼국간섭(三國干涉){14}이 성공하는 상황을 보고 러시아, 미국의 힘을 빌려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러시아, 미국 공사관과 접촉하였다. 일본 측은 이를 간파하고 군대와 낭인들을 동원하여 10월 8일에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국왕은 이렇게 갈수록 더 심해지는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의 도움을 빌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기를 시도하여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은 왕권회복 차원에서 그간 일본 정부가 만든 내각제(內閣制)를 폐지하고 군주가 의정부(議政府)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형태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를 새로 정하였다. 1896년 9월에 처음 행해진 이 관제는 1898년 6월, 1904년 3월 두 차례 개정을 거쳤다. 조약체결을 비롯한 중요한 외교정책에 대한 심의절차가 바로 이 의정부관제에 규정되어 있다.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강요한 조약들은 모두 1904년 2월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여기서는 3차 중 1904년 3월 개정의 것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14}▶註; 1895년 4월 23일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둥 반도를 획득했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국에 의해 반환을 요구받고 내놓은 사건.


그 제8조 4항에 따르면 국율조약(國律條約) 및 중요한 국율조건(國律條件)은 의정부 회의를 거친 후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승가(承可)를 청해야 하는 사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제정된 의정부회의규정(議政府會議規程) 제6조의 회의절차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즉 어떤 조약안이 의정부 회의에 회부되어 논의를 거쳤으면, 회의결과를 정리해 군주에게 아뢰는 문서를 작성하여 의정(議政)과 주임대신(主任大臣)이 이에 서명(署名)을 하고, 그것에 대한 황제의 의견 지시가 나오면 다음 회기(會期)에 이를 낭독하여 결과를 알렸다. 한편, 황제가 재가를 한 조약문은 어압(御押)과 어새(御璽)를 찍는 절차를 거쳐 관보(官報)를 통해 반포하는 순서가 규정되었다. 조약문에 대한 어압, 어새 날인은 곧 비준서 작성에 해당한다,


1899년 8월 개정의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15}는 제1조에 의정부가 추인(追認)하는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에 관한 사항, 각 부(部), 원(院) 청의(請議)에 의해 의정부에서 의논해 올리는 사항 등은 중추원에서 심사, 의정한다고 하였다. 조약체결에 관한 건은 곧 각 부, 원이 청의하여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쳐 올리는 사항에 속한다. 중추원은 황제 추천, 사회단체 추천의 의원들로 구성되는 심의기관으로, 의정대신 회의를 거친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다시 재심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중추원은 곧 의회 기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익에 관련되는 조약은 이로부터의 동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15}▶註;『중추원관제개정건(中樞院官制改正件)』1899년 8월 25일. 1899년 칙령 제34호. 앞의 책, 474-475면.


이상의 두 가지 사실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1899년 이후 외국과의 조약체결에 관한 국내법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의정부 회의와 중추원 심의를 이중적으로 거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군주의 승인도 중추원의 동의 없이는 실행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런 법규가 있는 한 1904년 2월부터 일본이 한국에 강요한 국권침탈 관련 조약들도 모두 이 소정(所定)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3.관련 조약들의 결격, 결함 실태


◆ 초기 조약들의 형식과 절차 준수


한국과 일본 간에는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한 이후 통상장정(通商章程), 속약(續約), 세칙(稅則) 등을 차례로 후속시켰다. 그리고 1882년과 1885년에 특별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공사관이 방화, 파손되는 피해를 입어 이의 사후처리를 위한 두 개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뿐만 아니라 그 후의 5개 조약들도 위임장 발부 및 협상 결과에 대한 비준이 모두 이루어진 사실이다. 조선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입장에서 비준서까지 발급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견해에 대해 일본 측이 양해하여 조선 국왕이 일본 황제에게 특사를 파견해 온 데 대해 이를 치사하는 국서(國書)를 발급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비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1880년대까지도 일본은 청국(淸國)에 비해 한국에 대한 연고권과 영향력이 적었다. 그러면서 서양세력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세력보다 먼저 한반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한론(征韓論)이란 이름으로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확보되는 새로운 근거는 어떤 것이든 법적으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일본 측 대표들은 협상 벽두에 조선 측 대표가 위임장을 소지(所持)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상례로 삼다시피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원칙 준수의 자세는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달라진다. 일본 정부는 이때 그 사이 배양한 군사력으로 청국과 일전(一戰)을 벌일 것을 각오하면서 조선의 보호국화(保護國化)를 목표로 세웠다. 이 목적 아래 청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일본 육군은 한반도 내륙을 통과하거나 그 안에서 작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일본은 구미 각국 정부가 이를 국제공법 위반사항으로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 조정에 군사동맹조약(軍事同盟條約)을 강요하였다. 이 맹약도 사안으로 보아 전권위원(全權委員) 위임과 비준서(批准書)의 발급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피하여 약식(略式)으로 처리하였다. 한성조약(漢城條約)까지 그토록 규칙의 준수를 강조하던 일본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침략(侵略)목적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10년 뒤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로는 더 강화되어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때마다 요건을 무시하거나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강압하는 양상을 보였다.


1900년대 일본이 한국에 대해 국권침탈을 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조약들은 절차와 형식에서 여러 가지 결함과 하자를 남겼다. 이 조약들은 모두가 무력 위협 아래 강제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함과 하자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함과 하자 가운데 국내법,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 약식(略式) 처리와 비준(批准) 결여 상태


러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강요한 5개 조약들은 최종 병합조약(倂合條約)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조약(略式條約)의 형식을 취했다.{16} 병합조약 외의 다른 4개 조약들도 합의사항이 모두 국권(國權)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했어야 했다. 1880년대까지의 일본 측의 형식준수 자세, 곧 규범주의(規範主義)에 비추어 보더라도 마땅히 그랬어야 했다.


{16}▶註; 정식, 약식 조약의 구분 문제는 세카이[世界] 일한대화(日韓對話)의 주요 논쟁점이었다. 이에 대해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사카모토 시게키[坂本茂樹] 두 교육자는 이의 엄밀한 구분에 대해 반대하고,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규범주의와 실증주의의 변천에 대한 검토를 통해 1900년대 상황에서는 규범주의에서 격식을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아라이 교수는 특히 1905년 9월에 일본의 국제법 학자들, 일반국민들이 러시아, 일본 강화조약이 배상금을 규정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으로 일본 황제에게 비준 거부를 촉구하는 시위운동을 벌였던 사실로 볼 때, 제2차 일한협약과 같이 외교권 이양을 다룬 조약은 비준조약(정식조약)이 되었어야 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1904년 2월 23일자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의 내용이 가장 가벼운 것 같지만, 이것도 주권(主權)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므로 국제관례상 전권위원(全權委員) 위임장과 비준서(批准書)가 발급되는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해야 할 대상이다. 나머지 1904년 8월 22일자 제1차 일한협약(日韓協約), 1905년 11월 17일자 제2차 일한협약, 1907년 7월 24일자 제3차 일한협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이것들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절차를 밟을 경우 성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형식이 간략한 방식을 택하여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이를 강제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8월 22일자 병합조약의 형식은 제대로 갖추었지만, 한국 측의 저항으로 비준절차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조약 추진자들은 이전의 것들이 절차와 형식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병합조약위원회(倂合條約委員會)를 구성해 정식조약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한국 측의 전권위원 위임장 문안까지 만들어 한국 정부 총리대신에게 건네주고 한국 황제가 이를 서명 날인토록 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양국 황제의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을 알리는 조칙(詔勅) 발급에서 한국 황제는 서명 날인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의 국권을 차례로 빼앗은 5개 조약 가운데 한국 황제의 비준을 거친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로 남았다. 그 가운데 한국의 국내법이 정하는 조약체결의 절차를 밟은 것도 하나도 없었다. 한국병합이 합법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 영역(英易) 과정에서의 조약의 등급 변개(變改)


일본의 한국 국권 침탈은 일본 각의(閣議)가 결정하여 일본 황제의 재가를 받고 필요한 문서를 사전에 준비하여 군사력을 동원, 이를 한국 측에 강요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준수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 때 일시 조약의 형식을 사안에 맞게 정식조약[韓國外交委託條約]으로 처리할 것을 고려한 때도 있었지만,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곧 이를 포기하고 약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런 형식과 절차상의 문제점이 그대로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의구심을 살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를 숨기려는 기만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협정을 강제로 처리한 뒤 그 결과를 영국, 미국 정부에 통고하기 위해 조약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그런 기만행위가 저질러졌다. 1904년 8월 22일자의 제1차 일한협약과 1905년 11월 17일자 제2차 일한협약이 대표적 예이다.


제1차 일한협약은 당초 한국 정부에 각서[memorandum]의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첫째,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財政顧問)을 초빙, 고용할 것. 둘째,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外交顧問)으로 초빙, 고용할 것. 셋째, 외국과 조약 또는 중요한 계약을 할 경우 일본 정부의 대표와 미리 상의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각서였다. 그래서 이 문서에는 약식조약이 일반적으로 갖추는 대표의 자격에 관한 전문[前文, preamble]이나 후기(後記)도 없다. 게다가 문서의 명칭조차 없었다. 오간 전문(電文)에서는 이를 각서(覺書)라고 했다. 이 각서는 한국 황제가 3개 요구사항 중 셋째의 사항을 용인하지 않아 첫째와 둘째만 미리 채택한 후 '일본 정부의 대표'란 문구에서 '대표'를 삭제한 후 3개 조항 모두를 담은 문서를 새로 작성했다. 이때 기명날인한 관직자도 앞문서의 기명 날인자인 외부대신, 탁지부대신을 '외부대신서리'로 바꾸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새로 작성된 것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Agreement'라고 붙여 영국과 미국 정부에 보냈다. 이는 명백한 문서변조 행위였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외교문서로 둔갑하게 되면 셋째 내용이 제3국들에게 한국 정부가 이미 외교권을 포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각서일 때는 합의된 내용이 양국 간의 문제로 한정되지만, 협정[Agreement]으로 둔갑하면 그 파장이 제3국에도 미치게 되는 변화가 생긴다. 이 일이 있은 수개월 후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용인하는 두 개의 비밀협약, 1905년 7월 27일자 가쓰라-데프트 밀약과 8월 12일자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일본이 이 변조문서를 악용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영국이 1904년 1월 22일 한국의 국외중립국(局外中立國) 선언을 승인한 입장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이런 특별한 사연 없이 일본과 비밀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을 승인하지 말아달라는 한국 황제의 특별한 요청에 접해 일본 정부로부터 제1차 일한협약의 통보를 받고 한국 정부가 이미 외교권을 포기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를 직시하면, '제1차 일한협약'의 문서변조 행위는 국제적 사기행각(詐欺行脚)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일한협약문에도 제목이 붙지 않았다.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빈 상태이다. 한국어문, 일본어문 양쪽이 모두 그렇다. '제2차 일한협약',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이란 명칭은 나중에 이러한 결함을 호도하기 위해 새로 지어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수일 후에 이루어진 영어 번역본에는 'Convention'이란 것이 붙었다. 이 단어는 'Treaty'와 함께 보호조약에 자주 쓰이던 것이다.{17} 그러나 이 조약은 본래 전권 위원 위임장과 비준서 발급을 생략한 약식협약, 곧 'Agreement'로 강제된 것이었다. 영어본은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다. 거기에 굳이 명칭을 넣는다면 'Agreement'로 했어야 했다. 보호조약으로서의 'Convention'이 전권위원 위임장을 발급하고 합의된 협정문에 대한 국가원수의 비준서가 발급되는 요건을 갖추는 것이 관례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18} 그러나 제2차 일한협약 영어본의 경우 명칭은 'Convention'라고 했으나 이런 필수문건은 수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외교권을 이양하면서 정식조약보다는 낮은 등급인 'Agreement'로 명칭을 붙였을 때 구미열강으로부터 사게 될 의심을 피하고자 한 기만행위였다.



{17}▶註; 예컨대 1847년 8월 5일 소시에테 군도의 여왕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은 'Convention conclue a Papeete Le 5 Adut 1847. Entre La France et La Reine Des Iles De La Societe. pour Regler Lexercice Du Protectorat'라고 하였다.


{18}▶註; 예컨대, 당시 일본 국제법학계의 저명한 저서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의『보호국론(保護國論)』(1907) 부록에 소개된 11개 보호조약 사례 가운데 3개가 'Convention'로 되어 있는데, 그 3개는(1847년 8월 5일 프랑스와 소시에테 군도 왕국, 1883년 6월 8일 프랑스와 튀니지, 1884년 7월 17일 프랑스와 캄보디아) 모두 비준을 거치는 정식조약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 관련 공문서(公文書) 위조행위


일본 측은 비단 조약문 변조행위 외에도 강제된 조약을 실행하는 과정에 관련 공문서를 위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서 위조행위는 제3차 일한협약(日韓協約)의 실행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범해졌다.


첫째,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1907년 7월 31일자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대한제국 황제의 조칙문안을 작성해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공포케 하였다. 1907년 7월 24일 이토 통감은 제3차 일한협약을 강제한 뒤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첫째로 일본인이 참가하는 재판소 및 감옥제도의 신설, 둘째로 군포(軍浦) 정리, 셋째로 한국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고문의 해고, 일본인 관리 임명과 직책의 설정 등을 요구하고 그 이행 각서를 받아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둘째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착수되었다. 이렇게 비밀리에 한국 군대 해산을 추진하던 이토 통감은 그 해산을 알리는 황제의 조칙을 자신이 일본어문으로 기초하고 이를 한국어로 번역해 공포하게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관한 한국 황제의 조칙문은 이와 같이 이토 통감이 직접 일본어로 초안을 잡은 것을 거의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토 통감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월권행위인 동시에 범죄행위였다.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는 후술하듯이 1907년 7월 22일 황제 고종(高宗) 강제퇴위 시 황제의 어새(御璽)를 탈취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칙(詔勅) 위조행위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조선통감부가 제3차 일한협약에 근거해 1907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 18일까지 한국 정부 조직개편, 재판소 구성, 재정개편 등에 관한 60개 법령 제정에서 통감부 문서와 직원들이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위조한 사실이 밝혀졌다. 제3차 일한협약 제2조는 "한국 정부의 법령의 재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으로 규정하였다. 조선통감부가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 황제의 결재용 어새[勅命之寶]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통감부가 7월 22일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킬 때 이미 실현하였다. 이 결재용 어새를 확보하고, 이어서 같은 해 11월 18일에 처음으로 신황제(新皇帝; 純宗)의 이름자 서명을 확보한 뒤, 통감부 문서와 직원들이 중앙, 지방의 관제, 재판소 구성법 등 사법제도 개정, 예산, 봉급체계, 회계법 등 국가운영의 중심에 해당하는 것들에 관한 법령 개정 등 60건에 대한 황제 서명을 위조하였다. 60건에 대한 서명은 5~6개의 서로 다른 필체로 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한 필체(22건 사용)는 통감부 문서과 과장을 지낸 마에마 교우사쿠[前問恭作)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 강제시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한국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와 날인할 정도로 이토의 측근으로서 맹활약한 인물이었다.


4.조약 강제의 실상과 문제점


◆ 무력(武力)의 지속적 개입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다. 국권탈취 관련 조약은 이 전쟁의 승세(勝勢)에 따라 단계적으로 강요되었다. 그 조약들의 격식 위반이 많았던 것은 한국 측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국제적 협조가 필요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미국과 영국을 그 협조자로 이용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 나라들도 국제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일본을 도울 나라들은 아니었다. 일본이 이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를 국제관례에 따라 밟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국 자체의 저항과 이 외양 갖추기 사이에 생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변조뿐이었다.


그러나 문서변조의 범죄행위를 행해서도 일본 정부가 획득한 것은 정식조약(正式條約)이 아니라 약식조약(略式條約)이었다. 그것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의 저항이 그만큼 컸거나 아니면 한국 병합이 당시의 국제사회 여건상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력 동원에 의한 위협, 그것은 국권침탈 관련 조약들의 여러 형태의 불법상을 낳은 근원이었다. 관련 5개 조약 강요시의 병력 동원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 6(생략)과 같다.


일본 정부는 1904년 2월 6일 개전(開戰)과 동시에 이미 편성해둔 한국 임시 파견대(韓國臨時派遣隊)를 정로군(征露軍)과 함께 출병시켰다. 임시 파견대(臨時派遣隊)는 제12사단 예하 보병 제14연대 제1대대, 제47연대 제2대대, 제24연대 제1대대, 제46연대 제2대대 등 4개 대대를 기간으로 하고, 원산에 주둔하는 보병 제37연대 제3대대와 제12사단 병참부 및 제47연대 제1대대도 이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제45연대 일부를 부산에 파견하여 일본군이 한국 전역에 배치되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일본군은 한국 임시 파견대의 서울 진주 후에도 이 부대의 전력 보강과 정로북군(征露北軍)의 증파를 구실로 서울뿐 아니라 연일 전국 도처에 들어왔다. 특히 인천, 서울간은 일본군과 그들의 군수물자로 가득하였으며, 서울의 주요 건물들은 일본 침략군의 병영(兵營)이 되다시피 하였다. 의정서(議定書)는 이런 상황 아래서 주한 일본 공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제시되었으며, 이 공포 분위기에서 한국 정부가 저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1차 일한협약 때에도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 임시 파견대는 3월 11일자로 한국 주차군(韓國駐箚軍)으로 개칭되어 상주(常駐) 병력화(兵力化)했다. 의정서의 제4조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臨機) 수용한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 때는 한국 주차군을 증원하기 위해 '경성(京城) 주둔 목적으로 제국(帝國) 군대를 수송'하였다.{19} 1907년 7월의 제3차 일한협약은 황제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 군대 해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었으므로 군사력의 뒷받침이 더 필요하였다. 따라서 1개 여단 병력이 본국에서 따로 증파되었다.{20}


한국 주차군 : 주둔하여 한국을 찌를 군


{19}▶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38권 1책 사항 11. 259 한국보호권(韓國保護權) 확립보행(確立寶行)에 관한 각의법정(閣議法定)의 건(件)(제7항) 명치(明治) 38년 19월 27일.


{20}▶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0권 1책. 사항(事項) 12. 일한협약체결일건(日韓協約締結一件), 509. 명치(明治) 40년 7월 21일 등.


한국 주차군(韓國駐箚軍)은 1907년 2월 만한주차부대파견요령(滿韓駐箚部隊派遣要領) 제정으로 병력배치에 변동이 생겼다. 이 규정에 따라 1910년 5월 현재 주력 제2사단이 여전히 용산에 본부를 두되, 한국 북부를 수비영구(守備營區)로 삼았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가 확보되고 민주 진출이 꾀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10년 5월에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보병 2개 연대의 임시 한국 파견대가 대구에 사령부를 두고 발족하였다. 1910년 5월 일본 정부 각의(閣議)가 한국 병합의 방침을 결정한 뒤, 한국 주차군 사령부는 6월 26일부터 위성(衛成) 상태에 들어가 숫자 미상의 헌병과 나남, 대구 등지의 주차군 병력을 이동시켜 7월 9일까지 2600여명의 육군 병력이 서울에 집결되었다. 그리고 경성, 용산 위성지경비규정(衛成地警備規定)과 각 부대에 관한 세부규정에 따라 창덕궁, 덕수궁을 포함하여 서울 전역에 병력이 배치되었다.8월 22일 병합조약(倂合條約)은 이런 삼엄한 경비 속에서 강행되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은 계획적이요 상시적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보호국화 또는 병합에 필요한 절차를 위해 전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기 위한 조약들은 이처럼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 조약들이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라고 해도 군사강점으로 성격이 규정지어질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하물며 그 조약들이 한국 정부의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많은 하자가 남겨진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대표 매수, 위협의 현장


종래 일본 측의 한국 대표에 대한 위협 강제의 문제는 주로 제2차 일한협약을 중심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다른 조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일한협약은 그 중요성 때문에 강도가 높았을 뿐이지 다른 경우도 대표 또는 그에 상당한 직위에 대한 위협은 상례적으로 가해졌다. 한국 주차군의 상주(常駐) 자체가 지속적인 위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련 5개 조약에 가해진 위협의 실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의정서


러시아, 일본 간의 전운(戰雲)은 1903년 후반기에 이미 감돌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때 한국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확립할 것을 원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한국과 러시아의 밀착이 일본에게 짐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1903년 10월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은 하야시 주한 공사에게 한국과 비밀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시하였다.{21}


{21}▶註; 최영희 저술『러일전쟁 전의 한일비밀조약에 대하여』백산학보 (1967년) 11장 469-476면 참조.


하야시 공사는 한국 황제가 오래 전부터 요구해 온 황후 시해 가담자로 일본에 망명한 한국인들을 소환하는 문제를 밀약(密約)의 반대급부로 제시했다. 12월 말 일본국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이들을 송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한국 정부에 비쳤고, 황제 고종은 이에 대해 반응을 보였다. 이지용(李址鏞), 민영철(閔泳喆), 이근택(李根澤) 등을 하야시 공사에게 파견했다. 하야시 공사는 밀약의 초안을 내보이는 동시에 궁중에지지 세력을 확보, 유지하는 데 돈이 필요하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비췄다. 1904년 1월 외부대신서리가 된 이지용은 하야시 공사로부터 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받고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그에게 보고하면서 밀약이 체결되도록 진력하였다.{22}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던 이용익(李容翊)은 밀약 체결을 강경하게 반대하였고, 황제도 그의 의견을 따라 일본이 한국의 국외중립선언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밀약체결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1월 21일 국외중립이 실제로 선언될 때가지 일본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의 밀약계획은 한국 측의 불응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국외중립 선언에 대해 영국과 독일이 1월 22일, 프랑스가 25일, 이탈리아가 29일에 각각 승낙 회신을 보내왔다. 러시아는 방관적 태도를 보였고,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6일에 러시아와 개전(開戰)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을 유화정책(有和政策)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해 돌 필요가 있었으며 의정서는 곧 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육군 병력의 대부분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 국내를 종횡으로 통행한 것이 구미 각국 정부로부터 국제공법 위반사항으로 몰릴 것을 우려했다. 이에 사후처방이기는 하나 조선 조정에 대해 1894년 8월 26일자로 대일본대조선양국맹약(大日本大朝鮮兩國盟約)을 강요하였다. 의정서 제4조에 '제3국의 침해로 말미암아 혹은 내란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10년 전의 맹약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지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한국에 별도로 파견된 한국 임시 파견대가 장기 주둔할 법적 근거를 얻기 위해서도 이 조항은 필요한 것이었다.


막강한 군사력의 위협 아래 의정서가 강요되면서 다음과 같은 한국 측 대표 신상에 가해진 문제점도 발견된다. 이에 서명한 한국 측 대표 학부대신 이지용은 밀약 추진 때 하야시 공사로부터 뇌물을 제공받은 자였다. 그리고 비밀협약의 추진을 반대했던 이용익(李容翊), 이학균(李學均), 현상건(玄尙建) 등은 일본군에 잡혀 군함에 강제로 실려 일본으로 압송된 상태였다. 따라서 비밀협약 추진 때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일본과의 제휴를 반대하는 세력의 핵심을 제거한 상태에서 의정서가 강요되었던 것이다.


● 제1차 일한협약(1904.8.22.)


1904년 8월 22일의 제1차 일한협약은 두 단계로 나누어 처리되었다. 하야시 공사가 본국 정부로부터 전달받은 3개 항의 안을 먼저 한국 외부대신에게 제시했고 외부대신은 황제의 명에 따라 참정(參政)과 도지대신(度支大臣)에게 이를 보였다. 한국 정부의 외교사안에 관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의 규정에 따른 처리였다.


일본 측의 요구는 한국의 외교와 재무에 일본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제1항과 제2항은 재무, 외교 양 분야에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제3항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등에 관해 '일본 정부의 대표자'와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3항은 일본 정부가 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야시 공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 외부대신은 이에 대해 한국 정부 안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많아 자신으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운 곤란한 처지에 바져 있다고 어려움을 표했다고 한다. 하야시 공사는 이 상황을 "황제 스스로 내심 이에 반대하여 엄격한 수단으로 그 속뜻을 모모 대신들에게 알려 의정부원(議政府員)들이 반대하게 만든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8월 22일 주차군 사령부의 사이토 중좌를 대동하고 궁중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여 의정부회의 수석대신, 궁내부대신 등이 임석하기를 요구한 가운데 황제의 재가를 거듭 요청하였다. 주차군 사령부의 지휘관을 대동하고 황제를 알현한 것은 최종 결정자인 황제에 대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행위였다. 일본 측의 이런 압박 속에 한국 정부는 부득이 '일본 정부의 대표자'란 구절에서 '대표자'를 배는 조건으로 동의해 주었다.


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에는 일본 측의 요구로 이루어진 황제의 일본 외교관 또는 군사령관 접견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헌에 의하면 1905년 2월 이후 주한 공사 또는 통감보다도 주차군 사령관과의 알현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난다. 1905년 2월은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련전투(大連戰鬪) 승리 이후 승기를 굳힌 바로 그 시점이다. 전쟁의 승세를 배경으로 주차군 사령부가 직접 한국의 궁궐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 제2차 일한협약(1905.11.17.)


(1) 황제에 대한 위협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일본 측의 위협은 제2차 일한협약 때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는 보호국화가 목표였기 때문에 황제가 위협의 첫 번째 표적으로 바로 올랐다.


일본 정부는 일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두 차례나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하여 현지 지휘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 5일 도쿄를 출발하여 9일 서울에 도착, 10일 황제 고종(高宗)을 알현하고 친서(親書)를 전달하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22} 이토 특사가 11월 117일로 정해진 예정일에 모든 일을 끝내려 한 반면, 고종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일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10일 오후 3시 대좌에서 고종은 지금 받은 친서를 펴 보더라도 상세한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를 번역해야 할 것이고 번역된 것을 숙독한 다음에 직접 대답해야 할 것이므로 시간이 걸릴 일이라고 답하였다. 이토의 재 알현이 이루어진 것은 15일이었다.


15일 오후 3시, 재 알현에서 황제 고종은 '형식보존', 즉 공사(公使) 교환의 제도를 유지하는 조건이라면 다른 내용에 대한 협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황제는 열국(列國)과의 외교통로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해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외교적으로 해결해 볼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고종은 당시 1906년 6월로 예정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정식 회원으로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초대장을 주최 측(초청자는 재1차 만국평화회의 제안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으로부터 받아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형식보존' 대안에는 이 회의 참석을 통한 상황 극복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22}▶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38권 1책 사항(事項) 10. 249 이등특파대사(伊藤特派大使) 귀국(歸國)의 건(件) 제1장 제1호 이등대사내알현시말(伊藤大使謁見始末) 명치(明治) 38년 11월 29일 참조.


11월 15일의 알현은 3시간 반 이상을 소요하였고, 두 사람의 대화는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이토 특사의 위협 발언이 연발하였다. 황제는 공사 교환의 외교형식이 없어지면 일본에 대한 한국의 관계는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나 서양 열국에 대한 아프리카 소국들과 같게 되지 않느냐고 탄식하면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이토 특사는 이 협정이 체결되어도 한국의 군주는 그대로 독립을 유지하고 존속하니 이런 예에 비견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며, 일본의 뜻은 동양의 화란(禍亂)을 근절하기 위해 외교를 위임받고자 하는 것으로 내치(內治)는 한국 정부의 자치(自治)에 맡기는 것이므로 국체 상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이에 고종은 다시 '형식보존'설로서 다소의 변통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이에 대해 이토 특사는 "오늘의 요체는 폐하의 결심 여하에 달린 것으로, 승락을 하든지 거부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더라도 만약 거부를 하면 일본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곤란에 처하게 되어 한층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황제가 다시 "일이 너무나 중대하여 짐이 혼자 이를 결정할 수 없고 정부 신료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이토 특사는 "군주전제 국가에서 정부 신료에게 자순을 구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 아니십니까?"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황제와의 대담에 진전이 없자, 황제와 정부가 서로 책임을 돌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귀국을 위해서 손해는 되어도 이로운 바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일이 늦어지는 것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바이니 오늘밤 바로 외부대신을 부르셔서 하야시 공사의 제안을 근거해서 협의를 시작하여 조인이 되도록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칙령(勅令)을 내리십시오."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외부대신에게는 교섭 타협의 길로 힘써야 한다는 전지(傳旨)가 갈 것이오."라고 하면서 칙령을 보장하는 발언은 끝내 하지 않았다. 요컨대 황제 고종은 대한제국의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와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에 따라 처리될 것이란 점을 시종 일관되게 이토 특사에게 알렸던 것이며, 이토 특사는 이 제도적 규정을 무시하고 황제가 직접 외부대신에게 지시해 처리하도록 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2) 정부 대신들에 대한 강박과 위협


이튿날 11월 16일부터는 정부 대신들에 대한 강박과 위협이 시작되었다. 이토 특사는 16일 하야시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협약안을 제출하여 외무 당국자와 협상을 개시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다른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을 숙소로 불러 협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신들은 한결같이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표했다. 대신들은 같은 날 황제가 부른 자리에서도 내일 일본 공사관에 가서도 오늘의 답으로 일관할 것을 다짐하였다.{23}


{22}▶註;『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권 46. 광무(光武) 9년 12월 16일자 의정대신 임신서리 학부대신 이완용 등 5인 상소문 참조.


17일 정오 한국 대신들은 하야시 일본 공사의 요청으로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여기서 하야시 공사가 대신들에게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자, 대신들은 절차상 아직 외부(外部)로부터 제의를 받지 못했으므로 지금 의결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신규(新規)에 따라 의견을 널리 모아야 한다고 부정적으로 응대하였다. 대신들도 전날 황제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외국과의 중요 조약에 대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나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의 규정에 따른 절차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러나 하야시 공사는 한국이 군주 전제 정치의 나라인데 대중 합의가 무슨 말이냐고 소리 질렀다. 15일에 이토 특사가 황제에게 한 것과 똑같은 언사였다. 하야시 공사는 이어 궁내대신(宮內大臣)에게 전화로 황제 알현을 직접 청했으니 대신들도 함께 궁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몰아붙였다. 대신들은 이를 거부했으나 듣지 않아 부득이 황궁 안 정부내직소(政府內直所)에 와서 기다렸다. 일본 공사가 공사관원들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대신들은 수옥헌(漱玉軒)에 가서 황제에게 각기의 의견을 진술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궁궐 안팎에 하세가와 대장이 거느리는 완전무장 차림의 일본 군사들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토 특사가 입궐하였을 때, 하세가와 사령관은 선발된 헌병 50명을 대동하였다. 군신(君臣) 간의 의견교환에서 누구 하나 조약의 체결에 찬성하는 자가 없어 일본 측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합의까지 되었다. 오후 8시가 되어 각 대신들이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토 특사는 대신들을 강제로 모이게 하여 회의를 열고 황제에게 알현을 다시 요구하였다. 황제가 몸이 불편한 것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자, 50여명의 헌병들이 둘러싼 가운데 대신들의 개별 의견을 신문조(訊問條)로 물었다.


수석대신인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과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등이 반대하였다. 이때 이 자리에 동석한 하세가와 사령관은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을 가리키면서 헌병대장에게 뭔가 명령하자 일본어를 이해하는 대신들은 그 말을 듣고 전율하였다.{23} 다음 차례에서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이 반대의견 아래 조약문을 다시 작성하여 자구를 조금 바꾸면 인준한다고 각주로 덧붙였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위협 발언 직후에 차례가 된 주무대신인 박제순이 이렇게 조건부 찬성 의견을 표했다는 것은 그 발언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의 조건부 의견이 나오자 이토 특사는 "한국이 부강(富强)할 때까지"란 단서를 전문(前文)에 넣고 제5조를 신설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장한다."는 문구를 손수 썼다. 그런 다음에 즉시 다시 의논을 계속하게 하여 나머지 세 대신도 찬성의사를 표시했다. 대신들에 대한 위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3}▶註; 임권조(林權助) 회고록『나의 칠십평생(七十平生)을 말한다.』참조.


일본 측의 위협 속에 사세가 부당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한규설은 몸을 일으켜 황제를 직접 알현코자 내전(內殿)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내전의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협실에 들어가 있는데, 통감부 서기와 헌병, 순사 등이 와서 그를 끌어내 수옥헌 앞 건물의 좁은 방에 집어넣고 일본군 병사들과 조장(組將), 사관(士官) 등이 좌우에서 붙들고 지켰다. 이런 가운데 이토 특사가 들어와 여러 수단으로 간청, 위협, 공갈, 감언, 유혹 등을 펼쳤다. 이때 이토 특사가 옆 사람들을 보고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 버려라"는 말까지 하였다.{24} 이런 가운데도 한규설은 순국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항변하였다. 이에 이토 특사는 그의 동의(同意) 날인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외부로 가서 외부대신 직인을 가져오게 하여 이 직인 날인만으로 가결된 것으로 전격 처리하였다.


{23}▶註; 西四什公堯 大佐『韓末外交秘話』참조.


제2차 일한협약문은 실제로 한국 측의 의사표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의 기명날인뿐이다. 일본 측의 강압대로 이 자리가 정부대신회의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문서에는 의정대신의 기명날인이 함께 있어야 황제에게 품신될 수 있는 조건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 이렇게 소정의 절차도 밟지 않은 문서에 일본 측 대표로 하야시 공사가 기명날인에 합의된 조약문으로 간주하여 조약의 성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양측의 서명 날인이 끝났을 때는 11월 18일 새벽 2시경이었다. 헌병대는 대신들의 신변보호를 명분으로 조약 강제 후 이토 특사나 하세가와 사령관이 퇴거한 후에도 계속 잔류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고종이 너무 분기하여 몇 번 퇴거명령을 내렸으나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24}


{24}▶註; '이등공래한(伊藤公來韓)에 부쳐'. 제6회 보고.『주한일본공사관(駐韓日本公使館) 기록』25. 378면 참조.


결론적으로 제2차 일한협약은 황제와 의결권을 갖고 있는 대신들에 대한 위협과 강박 속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군 헌병대가 궁중이나 회의장가지 침입하여 대신들이 생명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노골적인 위협행위를 가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무대신인 박제순의 조건부 승낙이 하세가와 사령관의 위협 발언에 직접 영향 받아 나오게 된 것을 증명해 주는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의 증언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협행위는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는 것이란 점만으로도 중대시할 만한 것이지만, 대한제국 국법상 중요 조약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의정대신들과 승인권을 가진 황제에게 모두 위협이 가해졌다는 사실은 더 크게 부각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행위가 중요 조약에 대한 국내법이 정하는 절차를 무시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도 무효 내지 불성립 사유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정부관제의 조약체결 절차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이 협약은 일본 공사가 한국 외부대신에게 새로운 조약체결을 제안하는 첫 단계밖에 진행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의정대신들에 대한 개별 의견진술이 무력(武力) 위협 아래 강요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황제 고종이 1906년 6월 22일자로 9개 수교국 원수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되기도 하였다.


'첫째, 우리 정부대신(政府大臣)이 조인(調印)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습니다. 셋째, 정부회의(政府會議) 운운하나 국법(國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이며, 일본인들이 대신들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즉 이른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만국)공법(公法)을 위반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 제3차 일한협약(1907.7.24.)


(1) 제2차 일한협약 무효화 운동


제2차 일한협약을 강제당한 한국 황제는 즉각 무효화 운동에 나섰다. 1905년 11월 6일,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통해 미국 정부에 이 조약이 무효란 것을 알리고, 같은 달 22~30일 사이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알렌(Horace N. Allen) 한국 주재 미국 공사에게 밀지(密旨)와 어새(御璽)가 날인된 백지 위임장을 전달하고, 12월 11일에는 파리에 주재중인 민영찬(閔泳瓚) 프랑스 주재 공사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토록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이런 노력은 루스벨트 대통령 행정부가 이미 가쓰라-데프트 협약을 통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할 리 없었다. 그 협약은 비밀에 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그 관계를 알 수가 없었다. 한국 황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제1조에 따라 미국 정부는 이를 조정(調整, good offices)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906년 1월 29일 제2차 일한협약에 따라 통감부(統監府) 설치가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 황제 고종은 영국 '트리뷴'지 기자인 스토리(Douglas Story)를 통해 서양 열국들이 5년간 공동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뜻을 표했다. 당시로서는 다국(多國)에 의한 시근적(時根的) 보호국화(保護國化)가 일본에 의한 배타적(徘他的) 보호국화(保護國化)를 피하는 최선의 길로 판단했던 것이다. 1906년 6월 22일자로 수호통상조약 체결 9개국 원수에게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된 것이므로 공사를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헐버트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정을 받는 특별임무를 부여하는 것을 밝히는 친서를 보냈다. 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 6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본 측이 러시아 황제에 의한 초청과 조기 개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한 해 뒤로 연기되어 특별위원(special envoy) 헐버트는 임무를 수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고종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1907년 4월 20일 다시 6월에 개최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등 3인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제3차 일한협약은 이 사실이 표면화된 것을 계기로 고종의 국제적 무효화 운동에 대한 응징으로 강요되었으며, 응징은 황제의 강제퇴위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2) 황제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


일본 정부는 1907년 7월 12일자의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을 제2차 일한협약에 대한 위반행위로 간주하여 황제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본국 정부의 지시 아래 7월 16일에 한국 정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주청(奏請)케 하였다. 이후 4일간 황제 옹호세력과 내각, 통감부 간에 사투가 벌어졌다. 황제는 일본 측이 요구하는 토위를 거부하고 황태자에게 정사(政事)를 대리(代理)시키는 것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19일 통감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을 시켜 황제에게 진정한 양위의 뜻을 표하라고 강요하는 한편, 그날 밤에 태묘(太廟)에 칙사를 보내고, 20일 아침 7시에 환관들이 신황제(新皇帝), 구황제(舊皇帝)를 대역하는 양위식[權停禮)를 거행하였다.


부당한 상황이 이렇게 급히 전개되자,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가 내각 측을 규탄하고 나서는 반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22일 새벽 1시경, 궁내부대신과 내대신(內大臣) 이도재(李道宰), 그리고 일단의 시위대(侍衛隊) 장교가 체포됨으로써 상황은 다시 통감부 내각 측이 유리하게 바뀌었다. 궁내부 측과 시위대 장교들은 21~22일 사이에 내각 측의 중심인물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통감부 측이 이를 미리 탐지하여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병력이 기습적으로 궁궐로 들어와 이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7월 22일을 신, 구황제 교체일로 잡고 7월 24일 제3차 일한협약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통감부는 8월 2일 새 황제의 연호를 정하기까지 하였지만, 황태자가 태묘(太廟)에 가서 선대왕(先代王)들의 위패 앞에서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밝힌 것은 11월 18일이었다. 11월 15일 '구황제(고종)'가 태묘에 가서 이 강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선대왕들의 영전에 고하고 황태자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제3차 일한협약의 추진에서 황제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한국 국권 탈취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의 강박, 위협이었다. 제3차 일한협약이 강제된 1907년 7월 22일 한국 황제 측은 양위가 아니라 대리(代理)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황제의 제위가 신황제에게로 넘어갔다고 볼 수 없으며, 신황제도 이를 수락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위(皇位)가 이렇게 불확실한 시점에서 조약을 위한 전권위원에 대한 황제의 위임이나 조약문에 대한 비준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혼돈 속에 일본군이 궁궐로 직접 들어가 반대세력(황제옹호세력)을 체포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내대신(內大臣) 체포와 동시에 황제의 어새들을 강제 탈취한 것도 결정적인 강박, 위협의 행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31일 더 이상 저항세력이 준동치 못하게 하기 위해 군대 해산을 명령하는 한국 황제의 조칙문(詔勅文)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 이에 근거해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런 모든 강박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7월 22일자로 1개 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3) 한국 병합 조약(1910.8.22.)


① 치밀한 사전준비 - '병합준비위원회(倂合準備委員會)'


일본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한국병합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대책 수립에서 이미 거론되기 시작했다. 대책안 11개 검토사항 중 첫 번째가 한국 황제가 일본 황제에게 양위(讓位)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수가 '지금은 불가하다.'라는 의견이었다. 단, 준비 중인 제3차 일한협약에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 않을 때는 병합을 결심할 수 있다는 것이 마지막 안으로 올라 있었다.{25} 이 유보조건도 제3차 일한협약을 추진하면서 황제 고종을 강제퇴위시킴으로써 병합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25}▶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0권 1책 사항(事項) 12. 455-456. 일한협약체결(日韓協約締結)의 건(件) '한제(韓帝)의 말사파견에 관련한 모의(廟議) 결정의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 통보의 건(件)' 명치(明治) 40년 7월 12일 참조.


그러나 고종 강제퇴위, 군대 해산 이후 한국 민중은 곳곳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일으켜 치열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이토 통감은 자치육성정책(自治育成政策)을 펴 한국인들을 회유하면서, 1919년 1월에는 황제 순종(純宗)을 전국 순행(巡幸)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로써도 의병항쟁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토 통감은 6월 자신의 회유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표를 냈다. 바로 이어 일본 각의는 7월 6일에 '한국병합(韓國倂合)에 관한 건(件)'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책확정(對韓政策確定)의 건(件)'을 통과시켰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하며, 그 시기가 올 때가지 병합 방침에 근거하여 보호의 실권을 쥐고 힘써 실력을 부식한다는 방침을 정했다.{26}


{26}▶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2권 1책 사항 7. 144. 대한정책확정(對韓政策確定)의 건(件) 명치(明治) 42년 3월 30일 수상에게 제출. 7월 6일 각의결정.


1910년 5월에 일본 황제는 육군대신(陸軍大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한국 총감(總監)으로 겸임 발령하였다. 한국병합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조치였다. 이에 6월 3일에는 병합 후의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施政方針)을 결정하였다. 병합 후에 한국에 내헌법(內憲法)을 시행하고 일본 황제에 직속하는 총독(總督)을 두어 조선에서의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위원회로 병합준비위원회(倂合準備委員會)를 곧 설치하였다.


병합준비위원회의 주요 검토사항은 한국 황실의 대우 한국 원효대신(元孝大臣)의 처우,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침, 병합 실행에 필요한 경비, 병합 후의 국호(國號), 한국인의 법적 지위, 한국에서의 각국의 조약상의 권리, 수출입품에 대한 과세, 한국의 채권, 채무의 계승문제, 병합시에 공포될 제칙령안(諸勅令案) 등 총 21항에 달했다. 위원회의 결정은 7월 7일에 완료되어 8일 각의에서 병합실행방법세목(倂合實行方法細目)으로 승인을 받았다. 이날 각의(閣議)에서는 "병합의 조약체결의 형식에 의하지 않는 경우의 조치도 공포"했다고 한다. 즉 병합조약 조인이 불가능할 때는 일본 측이 일방적 선언을 행하는 것으로 병합을 강행하는 방안도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웃한 나라를 병합하기 위해 준비를 치밀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용도는 상대와의 합의(合意)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사안들은 현지에서 일방적 요구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② 일본 측의 일방적인 진행.


한국 현지에서의 '병합(倂合)' 실행 과정은 1910년 11월 7일자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올린 '조선총감보고한국병합시말(朝鮮總監報告韓國倂合始末)'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밝히는 현지 상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통감 데라우치는 8월 16일 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초청해 "두 나라가 합혀 하나로 하여 정치기관을 통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병합의 일은 고금(古今)의 역사에 비추어 보건데 그 예가 적지 아니하며 혹은 위압으로써 이를 단행하거나 선언서를 공포하여 협약을 사용하지 않기도 하지만, 일. 한은 지금가지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또 금후 양 국민의 친목을 도모함에서 이 같은 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심히 좋지 않기 때문에 (중략) 그 형식은 합리적 조약으로서 상호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인식하는 것에 의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병합조약만은 '합의적 조약'의 형식을 구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 대요(大要)를 열거하면서 이에 동의하는 각서(覺書)를 요구하였다. 각서는 조약이 '합의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한국 황제가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양여(讓與)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황제, 태황제, 황태자, 기타 황족의 강녕과 한민족 상하의 복리(福利)에 관계되는 조항들을 둔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요컨대 일본 측이 말한 합의란 일본이 준비한 모든 방침에 대한 한국 황제 측의 동의로서,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 엄연한 강요였다.


이어 데라우치 총독은 조약체결의 순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방적 지시를 통지하였다. 즉 총리대신은 먼저 각의를 거친 다음에 한국 황제에게 위와 같은 취지를 아뢰고 조약체결을 위한 전권위원의 임명을 황제에게 주청하여야 하는데, 총리대신이 전권위원이 될 것을 요구하라고 하였다.


데라우치 통감은 어전회의(御前會議) 당일 22일 오전 10시를 기해 궁내부대신 민병배(閔丙裵)와 시종원경 윤두영(尹德榮)을 관저로 불러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이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되도록 하는 데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 뜻을 미리 황제에게 아뢰는 임무를 부여하면서 준비한 '전권위임(全權委任)에 관한 칙서안(勅書案)'을 건네주었다. 칙서안은 당일에 한국 황제에게 제시되었고, 황제는 두세 시간을 끌던 끝에 이름자 서명을 해주고 국새(國璽)를 날인하였다.


한국 황제에게는 저항할 만한 아무런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군대가 해산당하고 경찰권(警察權)도 일본군 헌병대가 대행하고, 모든 권력이 통감부로 넘어가 있는 상태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두세 시간 시간을 끌여보는 것 분이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서울 일원은 든 한 달 전부터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민중의 저항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③ 일방적 진행 속에 남겨진 순종(純宗)의 거부의사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은 정식조약의 요건 중 하나인 전권위원위임칙서(全權委員委任勅書)는 갖추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요건인 비준절차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조약이 정식조약으로 요건을 갖추고자 했다면, 조약문에 우선 비준(批准)에 관한 조항을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조항 대신에 조항의 효력에 대해 제8조에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거친 것이니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이라고 규정하였다. 사전승인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시말(始末)'은 한국 황제의 승인 과정에 대해 "황제는 오후 2시에 내전(內殿)에 나시어 먼저 통치권 양여의 요지를 선시(宣示)한 다음, 조액체결의 전권위임장에 친히 서명하고 국새를 찍어 이를 내각총리대신에게 내렸다."고 하였는데, 이에서 통치권 양여의 요지를 선시한 것이 곧 사전재가의 과정에 해당한다.


운노 후쿠주[海野福壽]는 이 사실에 근거해 사전 승인설을 정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사전승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약에는 비준조항이 없으며 외교행위로서의 비준서 교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7} 그러나 이런 형태의 사전승인의 예는 국제조약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 이례성에 대해서는 운노 교수도 인정하였다.


{27}▶註;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저술『한국병합불성립론(韓國倂合不成立論)의 재검토와 한국 학계의 인식』'세카이[世界]' 1999년 10월호 참조.


일본 측 주장대로라면 사전승인을 해준 주체는 한국 황제 순종(純宗)이다. 그런데 그가 '병합조약'이 강제되었다는 것을 직접 밝힌 사실이 최근 확인되었다. 순종은 1926년 4월 26일 붕어(崩御)하기 직전에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궁내대신(宮內大臣) 조정구(趙鼎九)에게 구술로써 자신은 병합을 인준해 준 적이 없다는 내용의 유조(遺詔)를 남겼고, 그것은 2개월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 교민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8일자에 보도되었다. 황제 순종은 유조를 남기는 목적을 "병합 인준(認准)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日本)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짐의 한 바가 아니라"고 절실한 심경으로 밝혔다. 일본 측이 자신을 비원(秘苑) 깊숙한 곳에 유폐시켜 놓고 바깥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지금까지 알릴 수가 없었던 점도 함께 밝혔다.


통감부는 1910년 9월 8일자로 '한국병합' 관련 공식 문서집으로 조서조약내법령(詔書條約乃法令)이란 책자를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병합(倂合)을 알리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조서(詔書)', '한국 황제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조칙(詔勅)', '병합을 알리는 한국 황제의 칙유(勅諭)' 등 관련 중요 문건 6종이 실렸다. 그런데 양국 황제들의 이름으로 내려진 조서들은 모두 황제들이 이름자 서명을 하고 날인한 것으로, 이 책자는 해당 부분을 '어명(御名)', '어새(御璽)'라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병합을 알리는 한국 황제의 조칙'은 어새만 표시되고 어명은 없다. 동일한 문서의 원본으로 한국 황제의 '조칙(詔勅)'집에 철해져 있는 것이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홍보용으로 따로 만들어 보급한 것도 마찬가지로 어명은 빠져 있다.


문제의 이 조칙이 만들어진 경로는 다음과 같다. 8월 22일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황제로부터 '전권위원 위임 칙서(勅書)'를 받아들고 통감 관저로 갔다. 거기서 데라우치 통감과 함께 준비된 조약문에 기명날인하였다. 이때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도 다른 한 장의 각서(覺書)를 제시하고 이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병합조약 및 양국 황제 폐하의 조직은 모두 쌍방이 합의하여 동시에 공포하며, 이 조약 및 조칙은 언제라도 공포할 수 있도록 바로 필요한 수속을 해둔다.'라는 내용이 적힌 각서였다. 여기서 말한 조칙이 바로 위 "병합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으로, 데라우치 통감은 이것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이 자리에서 이완용에게 보여주고 각서에 서명토록 했던 것이다. 병합조약은 사전승인 형태를 취했지만, 양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절차는 생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각서가 따로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국 황제들의 조칙 중 한국 황제의 것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빠져 있는 것은 한국 황제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28} 만약 그렇다면 이는 중대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서명권자인 황제 순종이 죽기 직전에 유조(遺詔)로 밝힌 사실, 즉 병합조약은 일본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이라고 밝힌 것과 꼭 일치한다. 이 사실은 황제가 '병합'의 최종 절차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한 물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각서에 근거한 병합을 알리는 조칙에 사용된 어새[勅命之寶]는 '전권위원 위임 칙서'에 사용된 국새[大韓國璽]와는 다른 일반행정 결재용으로, 1907년 7월 고종 강제퇴위 사건 이후로 통감부가 관장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황제의 공포 칙유에 찍힌 어새는 병합조약 강요 당시 황제의 관할 밖에 있던 것으로 그 날인은 황제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28}▶註; 이태진(李泰鎭) 저술『공포칙유(公布勅諭)가 날조된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205-209면 참조.


일본 정부와 총독부(1910년 9월 29일 발족)는 '병합' 사실을 널리 홍보할 때, 사전승인의 중요한 근거인 '전권위원 위임 칙서'보다도 "병합을 알리는 조칙"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이 점도 후자가 사실상 비준서(批准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직접 뒷받침한다. 비준이란 상대국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에게 조약체결의 사실을 알리는 목적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므로, 후자가 기능적으로 이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일본 정부가 '합의적 조약'으로서 요건을 모두 갖추고자 했던 병합조약조차도 한국 황제의 '합의'가 표시된 비준(批准)의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5.결언(結言)


19세기 중반 한국의 조선왕조는 기독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서양 열강의 국교수립 요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863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부를 수립한 일본의 새로운 국교수립 요청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873년 청년 군왕 고종이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정부의 대외정책의 방향이 개방(開放) 쪽으로 바뀌었다. 문호를 개방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 군왕의 판단이었다. 이런 방향 전환 속에 1876년 일본과의 수호조규(修好條規)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일본을 통한 서양문물에 관한 정보수집이 서둘러졌다. 그리고 1882년 4월 서양 열강국 중 미국을 상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국제질서에 독립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왕조 정부의 이러한 판단과 실천은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인 반발을 샀다. 조선 안에도 개국, 개화에 찬성하지 않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1882년 6월 배외주의자 흥선대원군의 주도 아래 개화정책으로 푸대접을 받게 된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중국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의 의도에 대해 불만을 가진 중국 청나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청나라는 천자(天子)가 책봉한 군주에 대한 반란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왕조를 속국화(屬國化)하려고 하였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이런 실력행사를 정면에서 거부하기 어려웠다. 서양 열강국과의 새로운 국교를 계속 추진하여 중국의 압박을 약화시켜 나가는 것이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요컨대, 1880년대 조선왕조의 서양 열강국과의 잇단 국교수립은 왕조의 운명을 건 것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국제법(國際法)과 국제질서(國際秩序)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그만큼 진지하였다. 조선왕조 조정이 외국과 체결한 조약들을 몇년 단위로 약장합편(約章合編)과 같은 이름으로 계속 편찬, 간행한 것은 그런 진지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활자로 인쇄된 이 책자는 개항지(開港地)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업무수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일반인의 새로운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 목적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책자를 통해 일반백성들이 다른 나라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다른 나라도 이로 인해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곧 양국의 영원한 우호관계를 가져오며, 우리의 모든 동맹국가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신의를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자 천하 각국의 행복이 된다는 것이 책자를 내는 이유였다.


새로운 서양식 국제조약, 국제질서에 대한 동아시아 삼국의 태도는 서로 달랐다. 중국은 국제법에 의한 새 국제질서가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질서를 빼앗아 가는 박탈감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 일본 지도층 사이에는 메이지유신 초기부터 서양세력에 먹히지 않으려면 한반도를 그들에 앞서 장악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퍼져 있었다. 이 팽창주의의 실현 앞에 서양 국제법은 본질적으로 국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력, 특히 군사력부터 키워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였다. 한편, 한국은 중국 중심의 구질서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따라서 국제법은 처음부터 이를 실현하는 평화적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비교를 볼 때 동양 삼국 중 국제법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클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대한제국이 1899년에 헌법 강령으로 제정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개조 가운데 무려 5개조가 그 근거를 국제적 통용의 국법(國法)에서 구한 것은 다른 두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새로운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은 그 나름의 방향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중국 청나라의 방해로, 1984년 이후로는 일본의 침략으로 그 실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꾼 후 미국, 러시아 등 열강의 도움으로 일본의 압박을 배제하면서 비로소 내, 외정 양면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외국과의 조약체결과 승인에 대한 제도적, 법적 근거도 이때 비로소 확보되었다. '대한국국제' 제9조에서 황제가 외교관 파견, 선전(宣戰), 강화(講和), 그리고 조약(條約)을 체결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명시한 다음,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에 그 하위법(下位法)의 규정들을 부여하였다. 이에 의하면 외국과의 조약체결은 반드시 의정부 회의를 거친 다음 황제의 재가를 요청하는 순서를 밟는 동시에 민의의 대표기구인중추원의 심사 의정(議定)을 묻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은 외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주무대신(외부대신)이 상대국으로부터 요청을 받으면 이를 의정부 회의에 회부하여 가결이 되면 의정대신과 주무대신이 직인을 날인한 상주문(上奏文)을 작성하여 군주에게 재가를 올리는 한편, 중추원에서도 안건을 보내 심의를 받는 이중 확인제도를 갖추었다. 이 규정이 있는 한 어떤 나라와의 조약체결도 소정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효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일본은 1876년 수호조약 체결 이후 1894년의 청일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한국과의 조약체결에서 국제법이 정하는 형식과 절차 또는 국제관례를 준수하는 규범주의(規範主義)의 입장을 지켰다. 조선 조정 측이 절차나 형식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는 협상의 진행을 중단하거나 거부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디까지나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이익을 법적으로 확실하게 보장해 두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의 침략주의적 조선관(朝鮮觀)을 실현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새로이 얻어지는 법적 근거를 하나씩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 양성한 군사력이 청나라보다 우세해진 시점에서 돌변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중반부터 국력을 기울여 양성한 군사력으로 1894년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일본은 조약의 요건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의 자유로운 군사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서둘러 한국 정부에 강요한 대일본대조선양국동맹(大日本大朝鮮兩國同盟)이 바로 그 효시였다.


일본은 10년 뒤인 1904년 2월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1904년 2월 일한의정서, 1904년 8월 제1차 일한협약,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 1907년 7월 제3차 일한협약 등의 조약을 차례로 강제하고 최종적으로 1905년 8월 병합조약을 실현시켰다. 이 조약들을 통해 군사상 필요한 지점의 사용권, 재정, 외교 분야에서 일본 정부 추천 고문의 고용 및 외교적 행위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사전 상의, 외교권 이양과 그 수행 관서로서의 통감부 설치, 통감의 한국 내정 감독권 등을 강제하고, 국권 이양 등을 차례로 실현시켰던 것이다. 대개 서양 열 강국들이 약소국을 상대로 체결한 조약에 의하면 의정서에서 제3차 일한협약까지의 사항들은 '보호조약'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조약에서 처리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는 달리 일본은 4단계로 분리 처리한 다음 마지막에 '병합'을 강제하였다. 이런 경위는 한국이 타국의 보호국이 되기에는 국가적 기반이 강고하였던 것을 거꾸로 입증한다. 그리고 다단계 분리 처리에도 불구하고, 국제관례나 국제법이 규정하는 것을 그대로 준수해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실제로 이루어진 형식과 절차에는 많은 하자와 결함이 남겨졌다.


관련 5개 조약 가운데 비준 형식을 취한 정식조약은 '병합조약' 하나였다. 나머지 4개 조약도 타국의 예에 다르면 보호조약이 취급하는 사항들에 해당하는 것이지 때문에 마땅히 정식조약의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야 했다. 그런데도 4개 조약은 각서(覺書) 또는 약식조약의 형식으로 강요되었다. 이렇게 등급이 낮은 형식으로는 국제사회에 의심을 살 것이 우려되어 영역본(英譯本) 작성에서 등급을 높이는 문서위조 행위가 저질러졌다. 내 정권 탈취에서도 황제의 서명 위조행위가 대량으로 자행되었다. 제3차 일한협약의 내정 감독권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법령을 제정할 때 통감부 직원들이 최종 결재권자인 한국 황제의 서명을 60건이나 위조하였다. 내 외정 양면에서 이런 위법행위가 되풀이된 것은 국권탈취가 결코 순리적으로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일하게 정식 비준조약의 형식을 취한 '병합조약' 조차도 비준서에 해당하는 한국 황제의 공포조칙에는 일본 천황 것과는 달리 한국 황제의 서명이 빠져 있었다.


한국 국권탈취를 위한 5개 조약은 무력(武力)의 지속적 개입이란 점에서도 법적 효력에 근원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별도로 편성된 한국 임시 파견대(韓國臨時派遣隊)는 순전히 한국 국권탈취란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곧 한국주차군으로 개칭한 이 특별부대는 서울 외곽(용산)에 주둔하여 필요한 조약이 강제될 때마다 서울의 요소와 궁궐을 포위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였다. 강요하는 조약의 비중에 다라 본국으로부터 증원부대를 지원받았으며, '병합조약' 때는 한반도 남북지역에 배치된 병력까지 서울로 집결시켜 계엄령체제를 수행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국과의 조약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9조와 그 하위법인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 등이 규정하는 절차와 형식에 따라 이루어져야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위 5개 조약 가운데 이 규정들을 존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외교권 이양의 문제를 다룬 제2차 일한협약, 내정감독권을 규정한 제3차 일한협약은 의정부 회의와 그 이후 절차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한국 황제와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이 대한 무력(武力)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런 회의절차는 거의 무시되었으며, 제3차 일한협약을 이틀 앞두고 자행된 한국 황제의 강제퇴위는 대표 위협 강제의 극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된 한국 국권탈취 관련 조약들에 나타나는 위와 같은 실상은 한국병합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서양 국제법사에서 조약의 효력문제와 관련해 절차와 형식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것들을 어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형식과 절차를 갖춘 가운데 상대국 대표를 위협하여 강제로 성사시키려 하는 경우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조약 강제처럼 두 측면 모두에 걸쳐 많은 위반사실을 남기고 있는 것은 국제조약사에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표에 대한 위협 강제는 곧 조약의 무효 사유로 간주될 것이지만, 그 이전에 절차와 형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조약의 성립요건 미비로 불성립(不成立)으로 판단해야 한다. 종래에는 '제2차 일한협약'의 대표 위협을 근거로 한국 병합 무효론(無效論)이 제기되어 왔지만, 관련 5개 조약 전체에 대한 총괄적 검토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불성립론(non-existence theory)이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절차와 형식 요건이 미비한 것이 태반인 가운데 무력(武力) 위협이 항시적으로 개입하여 한국이 정한 소정의 법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코 법적으로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출처; 서울대학교 출판부 編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해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