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태극(太極)과 상보성원리의 닐스보어(Niels Bohr)

한부울 2012. 1. 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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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太極)과 상보성원리의 닐스보어(Niels Bohr)

 

글쓴이:한부울

 

삼한의 태극은 과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태극을 기초한 것이 상보성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이 때를 만난 것 같다.

진실로의 권력은 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나온다고 해야 맞다.

때문에 과학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하건데 과학자는 미래의 인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은 특히 개발도상국가들에게 법을 다룰 수 있는 법조인이 거의 그 나라을 다스리는 형국이다.

선진국이라고 하여 나을 것은 없다.

법조인들이 법을 안다는 것 만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법이 현대들어 형평성을 잃고 부패와 연루되어 결코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며 피지배 대다수 국민들을 복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믿음이 떨어진지 오래이며 이제 그 신뢰성마저 무너지게 하는 것은 기득권이라는 테두리에 법이 가둬지고 그러한 메카니즘 속에 생성되는 정치인들의 타락한 도덕성과 무한의 권력욕을 양성하는데만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모두 권태를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을 다스리는 법은 본래 하늘의 뜻과 같은 것임에도 법을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경망스러운 자만으로 군림하여 인간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법을 다스리는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코 공평하거나 정의로울 수가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상 더 이상 법을 담보로 하는 그래서 군림하려고 하는 정치인들의 타락한 술수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다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람의 기억을 담는 로봇 휴머노이드(humanoid)시대라고 하여 인간 두뇌에 새겨진 기억들을 탐색하는 과학적인 진보가 눈에 띠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제 사람의 기억에 있는 모든 것들은 휴머노이드가 담당하는 것이 되어 암기하던 법을 이용하거나 판단하는 것까지 이 휴머노이드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가정이 생긴다.

때문에 이젠 법을 이용하는 어떠한 정치적인 권력도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도 이 휴머노이드(humanoid)를 이용하면 모든 법상식을 통달할 수 있게 되니 특정인이 법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잘못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공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신 로봇 유머노이드를 만든 과학자가 대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휴머노이드(humanoid)만 있으면 기억으로 된 상식은 누구든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시대, 그래서 공평하고 타당성이 훨씬더 확보되어 부당함을 막는 건전한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사항을 이야기 한 것이다.

법을 암기하고 집행하는 판사, 검사, 정치인, 관료들은 이제 그들의 생각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론내릴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甲午更張)때 혁신정책 중의 하나로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을 만들기부터 시작하여 없어진 제도이지만 현재까지 사법고시(司法試驗)가 옛 과거급제(科擧及第)처럼 변질되어 권력문안으로 직행하는 관행적인 것이 틀림이 없다.

지금은 옛날 같지 않지만 과거에는 과거급제자에게 증서를 주는 방방(放榜)의식이 궁궐 근정전 뜰에서 베풀어지며 왕이 홍패와 어사화(御賜花)를 제일급제자 장원(壯元)을 위시하여 순위대로 하사하였고 급제자의 부모를 위한 잔치를 관에서 베풀었으며 급제자들은 3일 동안 거리를 누비며 축제를 벌렸다고 하였으니 권력의 입문이 이렇게 거창한 것이었다.

사법고시가 개천에 용났다는 식으로 지배층으로 등용되는 절차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제 시대가 변해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제도 도입으로 2016년에 마지막으로 1차시험이 있고 2017년에 2차와 3차시험을 끝으로 폐지되도록하는 사법시험법이 시행될 예정이며 2020년 이후에는 사법연수원도 폐지되어 이제 변호사들만 양성하는 제도로 변하게 된다.

시대가 이처럼 확 변해버린 것이다.

이제 법을 안다는 것 만으로 직업적인 것 이상에 것은 기대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보다 더 똑똑해진 대중을 상대로 권력을 취 하려면 합리적인 사고와 냉철한 과학적인 판단에서 창조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똑똑해진 대중들을 이해 시키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가설이 분명하게 생성된다는 이치이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이제까지 권력밖에서 묵묵하게 연구만 거듭하였지만 과학이 이제 법을 대신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원하지 않아도 권력중심에 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과학자는 신과 같고 위대하며 거룩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문명을 창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날로 발전하는 산업구조에 따른 첨예한 이해대립과 충돌에 대비하여 지금부터라도 인류가 더 발전하고 스스로 공멸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발달과 함께 그에 따른 물리적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는데 힘을 쏟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대신 과학자들도 우주철학적 관념과 휴머니즘을 동시에 알아야 하고 인류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명감으로 충실해야 할 것이란 사실도 동시에 추가 된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 국기에 들어가 있는 문양 태극(太極)은 이러한 미래 환경에서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철학적인 근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삼한역사관과 일통할 것이란 가정도 있다.

그렇다면 태극을 이용하여 발견한 상보성원리가 무엇이고 그것을 발견한 서양과학자 닐스보어가 과연 누군인지밝혀보고자 한다.

 

그는 물질만 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이다.

20세기초 양자물리의 기초를 만든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 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라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바로 태극에서 이중성의 양립에 관한 완벽한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고 부르면서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이 개념은 '완전히 채우다'라는 뜻의 라틴어 콤플레툼(completum)에서 유래했다 하였고 보어리즘이라고 하는데 빈 곳에 완전히 채울 수 있는 과학자적 이론이 바로 태극(太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태극(太極)은 음양 사상과 결합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의 근원으로서 중시된 개념이다.

그리고 우리 세계삼한역사에서 없어서 아니 될 도(道)의 개념으로서 기본 철학적 사상이고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태극(太極)은 우주의 본체(本體)라 하고 천지(天地)가 아직 열리지 않고 음양(陰陽)의 2기(二氣)가 나누어져 있지 않을 때 단 하나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우주 삼라만상의 생성과 소멸, 흥망성쇠를 표현하는 역(易)에  

易有太極,是生兩儀。兩儀生四象,四象生八卦。

태극→양의→사상→팔괘(太極→兩儀→四象→八卦)가 생성한다는 설이다.

태극을 상징으로 하는 대표적인 종교로서 도교(道教)가 있으며 도교(道教)는 신선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음양 · 오행 · 복서 · 무축 · 참위 등을 더하고 거기에 도가(道家)의 철학을 도입하고 다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삼청(三清)을 최고신으로 하는 다신교라는 특성이다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는 태극을 바탕으로 한 우주를 다스리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태극은 "corea" 란 단어와 함께 늘 따라다니는 단어이기 때문에 세계삼한역사와 뗄 수가 없다.

그래서 태극은 곧 삼한역사이다.

이 태극이 양자물리학의 기초이고 원리란 사실을 일반사람들은 생소해 할 것이다.

전문적인 세세한 과학적 이론은 물론 과학자분들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여기서 이 태극을 특이하게 사랑한 닐스 보어(Niels Bohr)에 대한 이력을 따져보고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인물인가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태극이란 상징 하나만으로도 이 사람은 어쩌면 '대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명분이 있다 하겠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가문이 태극을 정체성의 문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닐스 보어(Niels Bohr)는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크리스찬 보어(Christian Bohr)는 헌신적인 루터파의 종교인으로서 코펜하겐 대학의 생리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부유한 유태인 가족출신인 어머니 엘렌 아들러 보어(Ellen Adler Bohr)는 은행업을 하였다고 한다.

루터파의 종교는 아메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지역에서의 주로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유럽에서 ‘30년전쟁’의 전화를 피해 일부 루터교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하게 된다.

루터교인은 부패한 카톨릭을 싫어하던 독일성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을 따르는 종파로서 종교개혁파인데 신구대립에서 신교도들인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은 절대적으로 세계삼한역사에서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던 사람들로서 결코 우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없는 부류들이다.

다만 루터파 종교에서도 유일하게 이 닐스보어가 추구한 태극의 상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삼한역사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사실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이 불씨가 되어 종교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이 바로 30년 전쟁이다.

당시 독일 전역의 최고의 화두였던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의 종교자유 인정을 둘러싼 구교세력과 신교세력의 갈등에 인해 촉발된 전쟁으로서 처음에는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각 세력간의 패권다툼이 되어갔다는 사실을 여러 글에서 이미 주창한 것이지만 삼한세력과 그렇지 않는 반대세력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제1차: 보헤미아-팔츠 전쟁(1618~1620)
제1.5차: 팔츠 수복전 (1621~1623)
제2차: 덴마크 전쟁(1625~1629)
제3차: 스웨덴 전쟁(1630~1635)
제4차: 프랑스-스웨덴 전쟁(1635~1648)

 

총 4회에 걸쳐 따로 벌어진 전쟁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어 '30년전쟁'으로 한꺼번에 호칭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삼한역사와 유럽역사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럽의 웬만한 나라는 전부 휘말려 들어가버린 탓에 이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 전쟁이 마치 1차 세계대전(World War I, 1914-1918)과 함께 세계질서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이때부터 틀어진 기득권세력들이 와해되면서 최악의 비극은 프랑스 혁명(1792-1802)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삼한역사가 붕괴되는 형태를 낳고 말았다고 감히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삼한역사가 전통적으로 가진 종교가 어떤 것인지 아직 알 수가 없지만 분명 종교적인 면에서만 따진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때를 정점으로 영국(England)의 칼뱅주의 계열 개신교인 청교도(Puritan)(Protestant)-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인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종교전쟁을 피해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1620년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출발하여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여 정착한 역사를 서양사에서는 신대륙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근대사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가지 모순을 들지 않을 수가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역사와 신대륙역사가 무엇이 다른 것인지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신대륙역사가 깔고 있는 펙트를 알게 되면 아마도 유럽역사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확인할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루터파의 종교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사이의 태어난 닐스 보어(Niels Bohr)가 태극(太極)을 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벨상까지 받았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한 노벨상을 받고 난 후 그의 가문 문장(紋章)을 태극문장으로 공표하였다는 사실은 더욱더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닐스 보어(Niels Bohr)와 함께 따라 다니는 이 태극문양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더욱 오묘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태극기의 그려넣어진 태극이 먼 유럽 덴마크 노벨상의 영웅 닐스 보어(Niels Bohr)의 문장으로 사용되었고 그의 학문 연구원리라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의 과학적 업적과 덴마크 문화생활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귀족 가문의 문장(紋章)을 선정함에 있어서 방패휘장(防牌徽章)에 태극도를 그려넣고 그 위에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란 문귀를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한 충격과 놀라움을 가지게 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분명 태생적인 정체성과 연관 할 수 있다는 추정을 낳게 하는 것이다.

 

A0972K 500krone

크로네(덴마크어: dansker krone), 복수형 크로네르(kroner)는 1873년부터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통화로, 1 크로네는 100 외레(øre)에 해당된다. 페로 제도에서는 덴마크 크로네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 페로 크로나와 함께 통용된다. 덴마크 크로네-대한민국 원화 환율(현재:1 DKK = 200.8730 KRW)

 

 

상단 그림은 덴마크의 500kron 화폐인데 홀로그램에서 태극문양이 깔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바로 아래 그림은 화폐의 뒷면인데 똑 같이 태극 문장으 홀로그램(hologram)이 보이면서 이율배반적으로 대조선을 상징하는 용()을 찌르는 서양기사의 모습을 판각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가 있다.

이것은 어찌보면 태극을 사랑하던 닐스보어의 정체성과 상당한 위반되고 이율배반적 묘사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의도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위 화폐는 적어도 홀로그램이 생긴(1948년)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작 '닐스보어'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근세기 또는 최근 판각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라고 할 때 상당히 모순적인 형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실제 닐스보어의 정체성과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홀로그램(hologram):완전하다는 ‘holos’와 그림이라는 ‘gram’의 합성어. 완전한 사진이라는 뜻이지만 레이저 광선으로 2차원 평면에 3차원 입체를 묘사하는 기술을 말한다. 1948년 헝가리출신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버(1900-1979)가 홀로그램의 원리를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60년대부터 레이저의 개발로 응용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태극을 사랑했다면 분명 용(龍)을 적대시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Bohr's coat-of-arms is proudly displayed at Frederiksborg Castle among the most horored Danish citizens. 리스보어의 문장(紋章) 또는 방패휘장(防牌徽章)이 가장 명예로운 덴마크 Frederiksborg Castle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Collar of the Order of the Elephant.]

 

위는 위 설명처럼 보어의 태극 문장을 애워싸고 있는 코끼리 Collar 이다.

 

코끼리(elephant)상징
흰 코끼리는 태양을 상징한다.
코끼리는 원시불교 부처의 성수(聖獸)이다.
흰 코끼리는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꿈에 나타나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탄생을 알려주었다. 흰 코끼리는 삼보(三寶)의 하나인 법

코끼리는 아축여래(阿축如來)의 탈 것이다.
중국에서는 통치권을 뜻했다.
기독교에서는 코끼리를 뱀의 적인 예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리스에서는 지성을 나타내는 신 헤르메스, 메르쿠리우스의 부수물이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코끼리는 신앙심이 돈독한 동물로 태양과 별을 숭배하며 초승달이 뜨면 강에서 몸을 씻어 정결히하고 천국을 부른다고 했다.
로마 미술에서는 장수, 불사,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했다.
힌두교에서도 아축여래(阿축如來)와 마찬가지로 코끼리는 지혜의 신 가네샤(Ganesha)가 타는 것이라고 했다.
동쪽의 수호자인 인드라 신은 코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다.
세계는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다.

 

위 태극문장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코끼리의 Collar 역시 나타내고 있는 상징성은 서양이라기 보단  동양성이 더 진하게 나타난다고 해야 맞다.

 

Coat of arms of Frederick IV of Denmark and Norway surrounded by the collars of the Order

of the Elephant and the Order of the Dannebrog

덴마크의 힘이라는 단네브로그(Dannebrog)

Frederick IV (1671– 1730) was the king of Denmark and Norway

 

위 프레데릭 4세(Frederick IV :1671– 1730)의 문장을 보면 용(龍)을 서양기사가 찌르지 않았고 오히려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龍)을 찌르는 문장은 적어도 프레데릭 4세 이후 근세기에 전부 의도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닐스보어'는 상보성원리를 발견하게 된 태극을 자기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체성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정체성일까 매우 궁금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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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太極)과 상보성원리의 닐스보어(Niels Bohr)

 

 

닐스 보어(Niels Bohr, 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덴마크의 물리학자로서, 훗날 이 업적으로 192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보어는 코펜하겐의 그의 연구소에서 많은 물리학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일하였다. 또한,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 하기도 하였다. 보어는 1912년에 마르그레테 뇌르룬트(Margrethe Nørlund)와 결혼을 한 후 몇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오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세계에서 중요한 물리학자가 되었고 그 또한 197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보어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초기 삶에서 보면 보어는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찬 보어(Christian Bohr)는 헌신적인 루터파의 종교인이었는데 코펜하겐 대학의 생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어머니 엘렌 아들러 보어(Ellen Adler Bohr)는 은행업을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의회의 구성원인 부유한 유태인 가족출신이었다. 그의 형 해럴드 보어(Harald Bohr)는 수학자이자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풋볼 선수였다. 닐스 보어는 풋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크리스챤센(Christian Christiansen)밑에서 학부생활을 보냈으며,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였으며 그 곳에서 1911년(37세)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는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에 박사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보어는 이 당시에 금속 내 전자 이론을 확립함에 있어서 맥스웰과 로렌쯔에 의해 대표되는 고전전자기학으로는 설명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어는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삼위일체의 대학인 켐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조지프 존 톰슨(J. J .Thomson) 밑에서 실험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톰슨은 전자의 발견자이다.) 그렇지만 보어는 영어에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그런 보어에게 톰슨은 관심이 없어서 결국 톰슨과 같이 공부하고 싶어 하던 소망을 버려야 했다. 그 후, 그는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밑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영국에 있는 맨체스터 대학(Manchester University)으로 갔다. 보어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그 당시에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자 모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때 그 정보는 그 당시의 물리법칙과는 연결될 수 없는 배타적인 것이었다. 보어는 이 원자구조를 연구하면서 빛의 양자적인 성질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1913년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왔을 때, 한 친구는 수소의 스펙트럼 계열에 관한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의 공식이 보어가 연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여기에 도움을 받아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보어는 1913년 원자 구조 모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에서 원자 핵 주위의 궤도를 움직이는 전자 이론을 소개하였고, 또한 외부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화학적 특성까지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높은 에너지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 궤도로 전자가 전이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때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광자가 방출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양자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이론의 발표는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Albert Einstein) 이 이론을 지지하였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적 개념을 섞은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이론의 성과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수도승의 격언을 따라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다른 물리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윌리암 슈테른(William Stern) 과 라우에(Max Theodor Felix von Laue) 는 만약에 보어의 이론이 옳다면 본인이 물리학을 그만 두겠다 고도 했다. 그 후 보어와 그의 동료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몇 개의 이론을 검증하였으나, 실질적인 발전은 1925년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가 발표한 배타원리(Pauli의 排他原理)가 나온 이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닐스 보어는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두 명은 일찍 죽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자식들은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켰다. 그 중 아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1975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1926년에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Carlsberg) 재단의 도움으로 그는 1921년 이론물리학의 협회를 만들고, 그곳의 대표가 되었다. 1922년에 보어는 원자 구조와 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의 발견으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게 된다. 보어의 협회는 1920~30년대까지 이론물리학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후원해 주었고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연구를 하였다.

 

복사에너지(radiant energy):고온의 물체는 표면에서 주로 방사선을 발산한다. 열 방사선은 공간을 뛰어 넘어 저온의 물질에 도달하여 흡수되어 열에너지로 변환된다. 이와 같이 열방사선의 형으로 수송되는 에너지를 열방사 에너지(thermal radiant energy)라고 한다.

 

닐스 보어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라이든(Leiden)에 있는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의 집에서 양자 이론에 몰두하였다. 또한 보어는 상보성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은 빛이 실험 틀에 따라 파동 또는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외면적인 상호 배타적인 특성으로서 보어가 생각한 상보성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보어는 이 상보성의 원리를 위하여 철학적인 응용도 찾아낸다.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적인 고전 물리학을 확률에 근거한 새로운 양자역학보다 훨씬 더 선호하였는데 이 결정론적인 고전 물리학에 아인슈타인과 막스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 1858-1947)가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이 원리의 진실에 대하여 틈틈이 논쟁을 하였는데, 격렬한 논쟁이 아닌 선의의 그리고 순순히 학문적인 논쟁을 펼쳤다. 1926부터 1927년까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는 보어의 코펜하겐 대학 강의의 조수로서 일을 하였다. 그는 1927년 코펜하겐에서 불확정성의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양자역학의 수학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나온 원리였다. 하이젠 베르크는 나중에 독일 원자 폭탄 프로젝트의 대표가 되었다.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 때, 보어는 하이젠 베르크에 의해서 코펜하겐으로 초대되었다. 보어는 1943년에 독일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 바로 직전에 스웨덴으로 탈출하였으며 그 후, 런던으로 도피하였다.

 

 

 

상호보완성(相互補完性, complementarity) 혹은 상보성(相補性)은 닐스 보어를 주축으로 하는 코펜하겐 해석의 기본 원리로서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어떤 입자의 정보를 서로 다른 측정을 할 때 입자적 성질을 띨 수도 혹은 파동적 성질을 띨 수도 있는 파동-입자 이중성과 같은 효과들과 관련이 있다. 닐스 보어가 코펜하겐의 연구소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 역학의 수학적 측면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상호보완성의 원리를 부가적으로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상호보완성은 전통적인 좁은 의미에서 양자 역학적인 하나의 대상이 예를 들면 빛과 같이 경우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대 동시에 입자이며 파동일수는 없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성이라고 부른다. 대상이 가진 입자성을 더욱 명확(manifest)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대상의 파동성은 더욱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상호보완성의 개념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이것이 어떤 물리적 실재의 특정한 성질들을 측정할 수 있거나 알 수 있는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물리적 세계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성질을 얼마나 한계지을 수 있는지를 정량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모든 성질들은 상호보완적(complementarity)으로 쌍을 이룬 켤레(conjugate)로서만 존재한다고 닐스 보어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적 현실은 켤레를 이루는 물리량들을 상호보완적 속성이 결정하는 한계내에서 명확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정의되고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전자(electron)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때 위치와 운동량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물리량이다. 만약 이 전자의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하려고 하면, 상호보완성의 관계에 있는 전자의 운동량에 대한 정보는 그만큼 반대 급부로 불명확해진다. 이것은 전자의 위치를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정확도(precision)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전자의 위치 자체를 명확히 할 수 있게 되면 그에 반하여 전자의 운동량은 정의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이는 상호보완성의 원리에서 봤을 때,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상의 물리적 성질의 측정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정의 궁극적인 한계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정량적으로 구할 수 있다. 상호보완성과 불확실성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양자 이론은 물리적 세계의 성질과 운동들이 본질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미결정론을 제기하면서 향후 철학적 논쟁을 이끈다.

 

상호보완성 혹은 파동 입자 이중성은 양자 역학이 가진 독특한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론적, 실험적인 연구들은 수차례 노벨물리학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100여 년 동안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을 포함한 저명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토론되었던 내용이다.

 

음양어 태극도이처럼 양자물리의 영역은 일견 상당히 혼란스럽게 보인다. 간섭과 회절을 일으키는 빛은 에너지를 광양자의 다발로 공급한다. 공간을 직선으로 움직이면서 충돌을 하는 전자 또한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이에 준하는 질서는 존재한다. 빛과 전자의 거동은 똑같은 방법으로 혼돈을 준다. 왜냐하면 빛이나 전자 모두 다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양자물리의 기초를 만든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이중성의 양립에 관한 완벽한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상호보완성이라고 불렀다. 그의 개념에 의하면 양자현상은 상보적인 성질을 가진다. 즉, 입자 또는 파동으로 나타나는 이중성도 실험의 종류에 따라 하나의 성질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각각의 에너지나 운동량의 변화를 조사하기 위한 실험에서는 입자의 성질이 나타나고 공간의 에너지 분포를 조사하기 위한 실험에서는 파동의 성질이 나타난다. 파동의 성질을 나타내는 빛과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빛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어서 빛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반대되는 성분이 모든 것을 나타내는 성분이 된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옛날 동양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세계를 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음양 사상으로 태극도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무늬에서 한쪽은 음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양이라 부른다. 음이 있으면 항상 양이 존재한다. 단지 음과 양이 합쳐야 전체가 된다. 낮음이 있으면 높음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존재한다. 탄생이 있으면 사망이 있다. 또한 사람은 음(감정, 본능, 여성성, 우뇌)과 양(유추, 남성성, 좌뇌)의 합으로 되어있다. 보어는 음양의 그림을 상보성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받아 들여서, 1947년 물리학에 대한 공헌으로 작위를 받았을 때, 음양의 모양을 가문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선택하였다.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또는 위의 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는 플랑크상수의 유한한 고정 비율보다 더 작은 값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보어는 미국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에 의해서 미국 뉴 멕시코에 있는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실험실에서 맨하탄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그것은 일급기밀이었다. 또한 리차드 파인만은 그 당시에 보안적인 이유로 인하여 니콜라스 베이커(Nicholas Baker)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서 그는 고문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는 핵무기 경쟁을 우려하였는데 그때 당시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 그들은 핵폭탄을 만드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미국으로 간 이유이다.” 보어는 원자의 비밀을 세계적인 과학자들 및 단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 1904-1967)가 보어와 만난 후, 오펜하이머는 보어에게 핵무기의 결과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맨하탄 프로젝트를 러시아와 공유하도록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을 설득 시킬 것을 제안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어에게 영국의 승인을 따오도록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러시아인에게 개방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보어는 핵에너지의 평화적인 사용을 옹호하기 위하여 코펜하겐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2년 코펜하겐에서 그 명을 다하였고. 코펜하겐의 뇌레브로(Nørrebro)에 있는 아시스텐스 묘지(안데르센의 묘, Assistens Kirkegård)에 묻히게 되었다.

 

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과 그 한계

 

보어는 톰슨의 원자 모형을 부정하였지만 그의 연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보어는 화학원소의 주기적인 특성 및 성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원자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톰슨의 주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구를 하던 중 1913년 초에 코펜하겐에서 그의 동료로부터 우연히 발머 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원자 속에 존재하는 전자들은 단순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써 결국 양자화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만의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의 특이성은 기초적인 지식은 고전전자기학에 그 근간을 두지만 양자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는 보어의 보수적인 측면과 또한 혁명적이고 진취적인 측면을 둘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토마스 쿤은 발상의 전환을 한 코페르니쿠스와 보어가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것을 토대로 한 말일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그는 최초의 원자 모델에 대한 많은 과학자들의 이의제기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초기 원자 모델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스펙트럼의 진동수뿐만 아니라 그 강도 및 세기에 대한 것까지 논의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을 하게 이른다. 대응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결국, 미시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롭게 탄생한 양자이론은 그 극한의 위치에서는 기존의 고전역학 및 전자기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양자적인 현상을 쉽게 이해시킬 수는 있었지만, 이 대응원리는 고전 역학을 항상 토대로 하여야 했고, 그 적용범위 또한 제한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리적인 법칙이나 이론으로 수용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이 있었다.

 

물리학에서의 이론적 업적

 

1.보어의 원자 모형 : 전자가 핵주위의 분리된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2.원자의 껍질 모형 : 가장 바깥쪽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에 의해서 화학적 성질이 결정되는 것

3.대응 원리 : 오래된 양자 이론의 기본적인 도구

4.원자핵의 물방울 모형

5.중성자 분열과 관련되는 우라늄 방사성 동위원소를 확인함

6.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함

7.상보성 원리 : 몇몇의 모순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현상이 개별적으로 분석될 수 있음

 

보어가 죽은 지 3년 뒤인 1965년에,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 연구소는 닐스 보어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어 모델 50년제는 보어가 묘사된 우표와 함께 1963년 11월 21일에 덴마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우표에는 수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에너지 레벨의 차이를 위한 공식이 표시되어 있다.

 

1..보륨(Bohrium, 화학 기본 요소, 원자 번호 107번) 은 닐스 보어의 이름을 딴 것이다.

2.하프늄(Hafnium)은 또 다른 화학 원소인데, 닐스 보어에 의하여 예측된 원소로써, 코펜하겐의 라틴 이름을 따서 하프늄이라고 명명 되었다.

3.소행성 3948 보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4.보어가 태어난 지 백년을 축하하는 연회가 1985년 10월 3일 덴마크에서 열렸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보어와 그의 아내가 그려져 있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5.1997년에 덴마크 국립 은행에서 닐스 보어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 초상화가 5000만원의 가격에서 흥정되기 시작하였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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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

[소광섭:서울대 교수·물리학]

 

1. 머리말

 

상보성 원리는 보어가 1927년에 양자역학의 해석을 위한 틀로 도입한 개념인 바, 원자현상의 입자-파동 이중성 및 위치-속도 측정의 불확정성 등을 이해하는 인식론적 바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원리는 물리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현상과 사회현상 등에까지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혜이며 조직의 원리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신체의 제어에는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이 상호대립 적으로 작용하지만,

또한 둘이 다 있어야만 완전해지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다른 예로 거의 모든 동물들은 눈과 귀를 상보적인 정보창구로 갖추고 있다.

눈과 귀는 상보적이긴 하지만 상호 대립적인 측면은 없으므로 적절한 예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묘하게도 빛에 의존하는 눈은 사물을 주로 입자적 형태로 파악하고 (이유는 빛의 파장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귀가 의존하는 소리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해준다.

그래서 눈과 귀는 물리학의 입자와 파동을 이용하는 적절한 예로 볼 수 있다.

 

보어는 그의 상보성 원리를 빛을 이용한 치료사들의 모임에서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물리학 밖으로의 이 원리를 확대한 첫 대상으로 생명현상을 고려했었다.

그 후, 중국의 음양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태극도를 집안 문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 글은 이 순서를 따라 먼저 상보성 원리를 보어의 전기에서 간추리고 요약하여 설명했고,

이어 생명현상에의 적용을, 끝으로 음양사상과의 관련성을 논의하였다.

 

2. 상보성 원리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의 행렬방정식을 발견한 후 이것으로 원자세계의 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실험적으로 예측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원자 현상들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막연하고 때로는 절망스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몇 달씩 집중적인 논의를 계속했지만 뚜렷한 결과를얻지 못한 채 지친 나머지 논의를 잠시 중단하고, 1921년초 보어는 부인과 함께 노르웨이로 스키를 갔다.

2주간의 스키여행 후 원자세계의 역설적 수수께끼들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코펜하겐에 돌아온 보어는 이른바 '상보성'(Complementarity) 이란 개념을 도입하였다.

돌아오자마자 하이젠베르크를 찾은 보어는 거의 두 달 동안 끊임없이 토의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각종실험 상황에 일일이 적용하여 이 아이디어의 적합성을 검토해보아야만 했다. 날카로운 비판력으로 특히 유명한 파울리(Pauli)와도 연락을 해가면서 상보성 가설의 문제점이 있는지를 빈틈없이 따져나갔다.

 

그 해 봄이 되어 '상보성 원리'의 이론이 완성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디락 (Dirac)은 "물리학자의 세계관에 대한 굉장한, 어쩌면 사상 최대의 변화를 몰고 왔다." 라고 말했으며,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인류의 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 이라고 표현했다.

'상보성 원리'는 쉽게 말하자면 원자 세계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두 종류의 상반되는 명제가 동시에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관점이 상호 보완적으로 합쳐서 사용할 때에 원자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호 모순이면 둘 중의 하나만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논리인데 이것이 미시 세계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우리의 지식 활동의 기본 문법인 논리가 무너지는 듯한 감을 주는 것이다.

상보성 원리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고전물리의 개념틀에서 보면 입자와 파동은 상호 배타적이어서 하나의 현상에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자 현상은 역설적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전자는 입자로 행동한다. 전자는 공간상의 한 점을 차지하며, 이 점에 에너지-질량이 모여있다.

 

텔레비전의 스크린상에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전자가 부딪칠 때 형광을 내는 것이다.

스크린을 확대해 보면 전자 하나하나가 부딪치어 점광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전자가 입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자들간의 충동실험을 해보면, 당구공들의 충돌처럼 에너지와 운동량이 바뀌는 것을 보아도 역시 입자임을 알게 된다.

한편 드브로이 파동이나 쉬뢰딩거 방정식이 보여주듯이 전자는 파동임을 의심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다. 파동의 가장 극명한 실험은 간섭 현상인 바, 두 개의 파동이 만날 때 나타나는 물결무늬의 모양들이 전자의 실험에서도 뚜렷이 관찰되는 것이다.

 

보어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개념이 서로 상반되지만 이 둘을 다 써야만 원자세계의 이상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입자성과 파동성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란 것이다.

 

보어의 말을 빌리면 "처음 보기에 입자와 파동 현상들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일지라도, 원자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일상적 언어로 애매모호함이 없이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둘 다를 상보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상반되는 양측 면을 함께 잡아야만 미시세계의 경험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으면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험을 설계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예측은 고전물리에서와는 달리 확률적으로만 할 수 있도록 특성이 달라지긴 했지만. 상보성 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원리는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 이다.

 

전자나 광자 같은 알갱이들은 위치와 속도(또는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상태를 알 수 있고, 방정식에 따라 그 후의 상태를 계속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고전물리학적 자연지식체계의 기저를 이루고 있었다.

원자현상에서, 예를 들어 수소 원자에서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계속 추적하여 궤도를 그려낸다는 것은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실을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는 실제적 실험을 분석해봄으로써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수치로서 표현할 수 있었다)이것이 불확정성 원리이며 양자역학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불확정 원리가 수학적인 진술인데 반하여, 상보성 원리는 철학적이고 포괄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확정성 원리를 이해하는 인식론적 틀을 제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알갱이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행위와 속력을 측정하는 행위가 서로 방해되는 때문에 동시에 엄밀히 측정할 수 없지만, 이 알갱이에 관한 지식은 두 요소의 정보가 함께 있어야 완전하게 되므로 이들은 상보적 관계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치에 관한 지식과 속도에 관한 정보가 서로 보완적이란 뜻이다.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입자와 파동, 위치와 속도 등 상반적인 개념과 량들을 종합하여 원자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자연에 관한 우리의 지식체계의 혁신을 가능케 했다.

상보성은 자연법칙에서 요구되는 필수불가결의 논리적 도구가 된다고 그는 보았다.

보어가 그의 상보성 원리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27년 9월 이태리의 코모호수 (Lake Como)에서 볼타(Volta)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물리학회의에서 였다.

그의 발표 논문제목은 "양자가설과 원자이론의 최근 발달상황" (The Quantum Postulate and the Recent Development of Atomic Theory) 이었는데 물리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논문이었다.

 

슈뢰딩거(Schrodinger)와 폰라우에(Von Laue)는 보어의 해석이 설득력도 없고, 결정적 결론에 이르지도 못했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회의에는 없었으나 곧이어 개최된 (1927년 10월)제 5차 솔베이 물리학회'(the Fifth Physical Conference of the Solvay Institute)에서 양자물리의 인식론적 측면에 대해서 보어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아인슈타인, 쉬뢰딩거 등은 보어의 상보성원리나 불확정성 원리가 제시하는 확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과학의 가장 중요한 바탕인 확실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었던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통계적 특성은 물리계에 대한 불완전한 기술(記述)에 기인함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보성 원리를 부정할만한 가상 실험상황들을 제시했고, 보어는 그때마다 날카로운 분석으로 확률해석의 타당성을 입증해보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실재성과 물리계의 완전한 파악에 대한 그의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양자역학 해석에서 확실성과 확률성의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3. 상보성 원리와 생물학적 비유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물리학적 진술보다는 철학적 진술에 더 가깝기 때문에 양자물리의 계속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물리학 밖의 과학철학 등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 왔지 않나 싶다.

 

1932년 8월에 코펜하겐에서 열린 "빛치료법에 관한 국제학회" (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Light Therapy)의 개막연설에 초대된 보어는 '빛과생명' (Light and Life)란 제목으로 상보성 원리의 의학에의 적용을 시도했다.

생명이 없는 물질만을 다루는 물리학자가 생명에 관해서 논한다는 것이 상당히 위험스런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물질과 생명을 완전히 분리해서 보는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할 때가 됐다고 느꼈던 보어는'빛치료사'들의 모임에서 연설할 용기를 내었다.

 

여기서 그는 일반인들에게 상보성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빛은 일종의 파동 현상이다. 그런데 어떤 물리실험에서는 빛이 입자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물리학 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물리학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광량자 하나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조사하려는 광량자의 운동에 관찰행위가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빛 현상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얻으려는 생각은 포기할 수밖에 없으며, 오직 확률적 정보를 얻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보이던 개념의 근본적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까지 상호 배타적으로 보였던 현상들의 합리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 더 광범하고 강력한 새로운 관점이 얻어진다.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생명현상의 연구에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했다.

상보성 원리의 인식론적 의의를 관찰행위가 대상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정보획득의 한계에 있다고 본 그는 생명체의 관찰에서도 유사한 한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과정을 철저히 분석해내려고 하다 보면 조직을 절단하고 죽은 샘플로 만들 수밖에 없게 되며, 이것은 결국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무생명의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지 생명체를 연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려면 생명체의 계를 살아있도록 유지해야 되고 그러려면 물리화학적 구조와 과정에 관한 정보획득을 위한 관찰은 제한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원자의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본 구조를 완벽히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유사하게 생명현상 고유의 물리화학적 과정에서도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 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보어는 이 비유가 심리학적 관찰의 경우 더 잘 들어 맞는다고 했다.

원자물리에서 관찰대상(원자)은 관찰도구 (빛)의 작용에 의해서 근본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관찰되기 전의 원자 자체를 알 수도 없고 따라서 논할 수도 없다. 심리분석에서도 질문이나 조사행위 자체가 그 사람의 정신이나 생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관찰이전의 심리 상태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상보성 원리가 제시하는 관찰의 한계에 대한 인식론적 의의는 생물이나 심리문제에 까지도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 국제 빛치료사 회의에서 청중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울 정도였으며, 전혀 이해를 못한 가운데 예의상 박수를 쳐준 정도였었다.

그러나. 이 강연이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날의 강연장에는 코펜하겐 연구소원이었던 델부르크(Max Delbruck)란 독일의 젊은 물리학도도 참석했는데 그는 이 강연에 깊은 인상을 받아 강연 원문을 얻어 자세히 공부를 했다.

 

그는 생물학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끔 되었다.

이 강연후 30년쯤 지났을 때 델부르크가 꼴로뉴의 '유전학 연구소'(the Institute of Genetics in Cologne)를 창설하면서 개소식 연사로 보어를 초청하여 '빛과 생명-재고찰' (Light and Life-Revisited)의 강연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4. 음양과 상보성 원리

 

보어는 그의 과학적 업적과 덴마크 문화생활에 미친 공로를 인정 받아 귀족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귀족 가문의 문장을 선정함에 있어서 방패에 태극도를 그려넣고 그 위에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란 문귀를 새겨 넣었다.

이것으로 그가 상보성원리를 자신의 삶과 학문을 대표하는 철학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가 동양사상 특히 주역과 음양에 크게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하였고 이때 음양사상에 감명을 받았으며 이것이 그가 동양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상보성의 개념은 음양사상의 물리학적 적용이라 할 수 있고 뒤집어 말하면 음양사상은 상보성 원리를 일반화하여 모든 자연현상, 나아가 모든 인간 문화생활에서의 본질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어 보이는 두 요소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는 전래의 음양사상이 현대물리학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은 놀랄만한 점이라 하겠다. 양자역학의 인식론적 해석 원리가 곧 상보성이라 할 수 있겠다. 입자-파동, 위치-운동량 등 현상인식을 위한 개념의 짝이 상호 대립적이면서 서로 보완적으로 둘 다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음양사상에는 입자-파동, 위치-운동량 같은 물리적 개념이 적용되기에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그보다는 동과 정, 열과 한, 남과 여, 팽창과 수축, 밝음과 어둠 등 논리적으로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의 역동적 조화에 더 관심이 모아졌다고 보겠다. 따라서 사물의 인식과 지식에 관한 한계보다는 사물존재의 특성을 파악하는 원리로서 음양사상의 특성이 있다는 점에서 상보성 원리와 음양사상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상보성 원리를 물리계의 관찰에 수량적 표현을 한 것이 불확정성 원리이고, 이 후자에 바탕하여 구성한 수학적 방정식 체계를 양자 역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자역학을 생명현상에 응용하면 유전 인자들의 복제 기작이나 돌연변이의 확률 등도 계산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나란하게 음양사상도 구체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데로 써보면 음양사상의 기호적 구체화가 주역이 되고, 이 주역의 인체에 적용이 한의학이라 할 수 있을까?

 

즉, 다음과 같은 비교가 성립할 수 있을까?

 

수식화

상보성 원리 ---→ 양자역학 ---→ 분자생물학

 

기호화

음양 사상 ----→ 주역 --→ 한의학

 

음과 양을 이진법적 기호내지는 숫자로 파악하면 주역은 단순히 2의6승=64 개의 기호의 복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천 년을 두고 주역을 연구하고 그에 빠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옴은 무슨 연유일까?

이에는 무엇인가 깊은 진리가 숨어있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이를 알아내려는 것은 마치 상보성 원리와 파동함수 기호를 받은 원시인이 그로부터 양자역학을 명상으로 얻어내려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한편 그 사람이 상보성 원리와 분자생물학적 법칙을 받았다면 어쩌면 양자역학을 찾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음양사상과 한의학의 지식으로부터 주역의 숨은 진리를 밝혀낼 수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경우는 주역을 열심히 공부하면 한의학까지도 문리가 트인다고 하는데, 그 반대로 한의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면 주역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제안해 보는 것이다.

 

상보성 원리나 음양사상은 자연과학이나 의학에 한한 것이 아니라 넓게 경제, 문화, 사상 등에 까지도 그 함의가 논의될 수 있다.

 

한 예로 이명현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상호 배타적인 관계 속에서만 이해되어 온 부분과 전체의 근대적 범주도 이제 설 곳이 없어졌다. 그것은 전체의 구조를 내재한 부분(개체)과 전체의 구조를 인식하는 개체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의 근대적 형이상학적 개념은 현실적 적합성이 없다.

자유는 개체의 활성화의 원리로, 평등은 전체의 균형의 원리로 탈바꿈 되어야 한다.

욕망의 대상을 무제한하게 획득함으로써 삶의 기쁨을 추구하던 소비 지상주의의 삶의 철학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자연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의 보금자리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연이 숨 쉴 때 인간이 웃을 수 있다.

독존과 유아의 문법은 청산되어야 한다.

삶의 질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근대적 경성 국가 (硬性國家)가 사라져가는 국경 없는 세계경제 시대에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문법이 요청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 정복과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맞물림의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음양은 맞물림의 전형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 모순과 부정의 사유로부터 벗어나 맞물림의 관계를 통한 더불어 있음의 새로운 차원의 사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소광섭: 서울대 교수·물리학)]

 

(참고 문헌)

1. Niels Bohr : The Man, His Science, and the World They Changed by Ruth Moore, The MIT Press, 1985

2.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 카프라 지음, 이성범·김용정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89

3. 송희성 : 양자역학, 교학연구사, 1984

4. 근대성과 한국문화의 정체성, 기조 발제 (이명현), 철학연구회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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