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유물을 한반도에 제멋대로 파고 묻고....
일제식민지기간 동안 일제가 한반도에서 유물출토작업시에 조선인은 접근도 할 수 없게 하였다 한다.
그러니 그들끼리 36년간 무슨짓을 못했을까?
일제는 무조건 한반도에 삼한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도 없는 왜구들이 갑자기 일본이란 간판을 걸고 나라를 새로 만들었다 해도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구가 일본이란 간판을 서양세력으로부터 얻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그 일본이 열도에 있었다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사실을 그 당시 존재하던 정사로만으는 도저히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대륙삼한의 역사를 한반도로 이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원칙이고 철칙이었다.
이것이 그들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여야 할 그들만의 당위성이라 할 것이다.
목적은 분명하였다.
한반도를 빌어 그들과 그들 자손들이 떳떳하게 살아야 했다면
그들이 희생을 요구한 우리 대한민국은 당연히 쪼그라든 역사만를 가지고 희비하며 갈등하고 비관하는 것도 모자라 자학하면서 힘든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더 이러한 불합리를 우리가 겪어야 하는가?
어리석은 사학들이여~
이제 깨어날때도 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정체성을 다시 세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일제가 남긴 그늘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이다.
재론 할 것도 없이 이런 대륙유물들을 당시 얌심없이 이식한 철천지한(徹天之恨), 철천지수(徹天之讐)일제가 있었는가 하면 덩달아 쓸개까지 빼준 어용역사학자가 즐비하고 넘쳐났다.
이들이 사학계 기득권을 가진자들이다.
심은 놈이 있으면 당연히 이런 유물들이 들어 날 것이 아닌가?
의도 된 것이든 그렇지 않고 우연히 들어 난 것이든 간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더 이상하다.
얼마나 더 나올런지...그 때 마다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야단을 칠 것인지...미래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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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땅에서 가야 유물이 나왔다고?
[중앙일보] 2011년 06월 02일(목) 오전 01:08
전남 신안군 안좌도 배널리고분에서 발굴된 투구·갑옷·칼·창·화살촉 등의 모습. 아래쪽 사진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 [동신대 문화박물관 조사단 제공]
전남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1㎞ 떨어진 신안군 안좌도가 과거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학설이 나왔다. 한·중·일 등 고대 동아시아 무역항로의 거점인데다, 바다와 내륙의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일본의 무역선이 영산강을 따라 육지로 들어오기 위해선 안좌도·압해도를 거쳐야 했다. 또 강진·영암·나주 등의 특산품은 안좌도를 거쳐 바다로 나갔다. 이런 안좌도에서 5세기 무렵에 제작된 가야 무덤과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서남해안의 섬 지역에서 갑옷 파편 등이 출토된 사례는 있지만 완벽한 형태의 투구와 갑옷 등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조사단(단장 이정호 교수)은 4월 중순부터 안좌도 ‘읍동고분(중심지)’과 ‘배널리고분(변두리)’에서 발굴작업을 했다. 이 가운데 모두 3기가 발견된 배널리 고분 한 곳에서 5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투구·갑옷·칼·창·화살촉·장식구(옥) 등 다량의 무기류가 발굴됐다. 투구는 충각부주(정수리에서 이마까지 각이 진 투구)이고 갑옷은 삼각판갑(삼각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으로, 5세기에 제작됐다. 이 고분의 양식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이며, 갑옷·무기 등의 부장품 역시 가야의 매장 풍습이다. 조사단은 이 같은 점으로 미뤄 고분의 주인공이 가야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장수로 추정했다. 나머지 2기의 고분은 묘실까지 도굴됐으나 잔존 형태로 봤을 때 백제 계통으로 추정됐다.
배널리와 함께 발굴된 읍동에서도 고분 2기가 발굴됐다. 조사단은 읍동고분이 배널리보다 40∼50년 늦으며, 백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했다. 부여 능산리 고분과 양식이 같은 백제 사비기의 횡혈식 석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재근 신안군 학예연구사는 “고대시대엔 육로보다 해양 루트 개발이 중요했다”며 “해양 세력이 내륙으로 진출하거나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기 위해선 관문 역할을 하는 섬(안좌도)을 선점해야 하는데, 이 때 군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지역 역사학계에선 백제 근초고왕이 4세기 마한을 병합하고 대가야(고령)·소가야(고성)까지 세력을 확대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안좌도를 지키기 위해 당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야군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정호 동신대 조사단장은 교수는 “배널리 고분군이 입지한 섬은 고대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작은 무인도였다”며 “안좌도 일대가 고대 해양 루트의 전략적 요충지이고 무덤은 해로(海路)를 지키던 군사집단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이번에 출토된 투구·갑옷 등은 과학적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조만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유지호 기자 중앙일보]